요즘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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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는 타자의 계통적인 부정이며 타자에 대해 인류의 그 어떤 속성도 거부하려는 광폭한 결의이기에 피지배 민족을 절박한 지경까지 몰아넣어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진정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만든다. (Les damnes de la terre, Francois Masper edituer S.A.R.L., 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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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와도 같은 말이었다. 파농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Martinique에서 태어나 프랑스 본국에서 정신의학을 배운 후 알제리 해방투쟁에 몸을 던졌다. 그 한 사람 디아스포라의 강렬한 말이 동아시아의 디아스포라인 나의 눈을 뜨게 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사로잡혀 있는 것은 '식민주의'의 '계통적인 부정' 때문이다. 그것은 나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즉 식민주의에 의해 디아스포라가 된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세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며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디아스포라로서 살고 있는 형제 자매들의 모습이 아직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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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그가 말하는 '디아스포라'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또한, 디아스포라다.
"디아스포라들은 이주한 땅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이며 소수자다. 다수자는 대부분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온 토지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견고한 관념에 안주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 안에 있는 한 다수자들에게는 소수자의 진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그 진정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14)라고 한다.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온 토지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
토지? 남북분단. 언어는 변화를 많이 겪었고 소위 '지식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섞지 않으면 대화를 못 나누는 지경이기는 하지만 일단 패스. 문제는 문화.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문화? 그런 것이 있을까?
내 이야기를 해 보자면, 나는 국문학, 그것도 현대문학 박사과정 휴학 중이다. 초2~중2까지 간간히 한국에 오기는 했지만, 여튼 사춘기를 외국에서 보냈다.
내가 국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어떤 컴플렉스에서 기인한다. 외국에 있을 때의 친구들이 아이비리그를 갈 때, 나는 고작 '서울대'를 가야 했고, 미국에서 공부한(제대로 한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 미국인들과 '동등한' 경쟁과 대우하에) 교수들 밑에서 3류 수업을 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국문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우리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말 해 줄 수 있는가? 국문학을 선택하고 보니, '국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의 징후를 극명히 들어내주는 사유방식이며 학적 체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민족-국가'로 이어지는 것 또한, 근대적인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근대'라는 보편의 이름하에, 네모난 아파트, 서구식 정치제도, 사고방식에서 살고 있는 우리. 우리는 누구인가. 이를 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전문학을 전공으로 하지 않고, 망설임 끝에 현대문학을 전공으로 하게 된 것은, '현장감' '바로 지금-여기'라는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여기에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우리는 무엇인가.
내 애인은 지금 체코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 서울대 인문대학 수석 입학하고 얼마전에 외무고시에 합격해서 조금 있으면 외교관으로 한국을 '대표'할 그녀는, 체코에서 그저그런, 놀러온 시끄럽고 천박한 미국인들을 보면 알 수 없는 열등감을 느낀다고 했다.
왜? 단순하다. 그들이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들이 '서구인'이기 때문에.
100년전 쯤, 춘원 이광수가 고백한 것과 똑같이. 서구인들을 보면 열등감을 느낀다. 특히 한국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춘원이 영어실력을 뽐내며, 조선인들에게 자신이 얻어들은, 일본을 통해 겨우 구입한 미국 원서를 읽으며 지식을 가르치고 그들의 무능에 한탄하고, '계몽'만이 살길이라고 부르짖으며 자신만한 엘리트가 조선에 몇명 안된다고 할 때에도, 그는 서구인의 '얼굴'만 보면 주늑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리 잘나봤자, 아무리 영어를 잘 하고, 원서를 많이 읽고, 박사학위가 있어 봤자, '서구인'은 아닌 것.
애인은 영문학이 매력적인 점은, 그 '연속성' continuity에 있다고 했다. 초서에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서로 참조하고 증폭하며 '이어져내려오는'
나는 그 발판은 제국주의고, 식민지의 착취와 인권유린과 학살이라고 답했다. 더 흥분했을 때는, 서구는 스스로 폭발해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히틀러고, 무솔리니고, 카이사르고, 플라톤이고, 니체고, 맑스고 전부다! 그들이 '인류'다. 그들이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들은 환경오염, 제노사이드, 핵폭탄이다. 그들이 아프리카의 원인이고, 그들이 중남 아시아의 원인이고, 그들이 북극 빙하가 녹는 원인이고, 아마존의 밀림이 사라져가는 원인이고, 수 많은 동식물 종들이 사라져가는 원인이다. 그들이 인류다. 죽어라.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약한자요, 피억압자인가? '우리'는 고구려의 말달리던 선구자인가? 우리는 '소중화'이고, 이주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놀려먹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치고, 이라크에서 단지 '재건'을 돕기 위해 파견을 하고, 경제규모 11위이고, 달러약세와 엔화 약세 때문에 관광을 하러다니고, 동남아에는 '묻지마 관광'을 하는 우리는 무엇일까.
한국문학사의 단절. 그것은 우리의 단절이다. 계통적으로 이제, '우리'라고 하는 신화를 부정하고 애써 코스모폴리탄으로 살 수 있다.
국민이나 민족으로 호명되지 않으며, 호명되는 기제를 애써 부정하며, 항상 소수자의 입장으로, 디아스포라의 처지에서, 주체로 호명될 수 있을까.
분명 나는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라니, 언제적 이야기인가. '민족'이라는 얼마나 오래된 그리고 악의적인 농담인가.
그러나 애인의 체코 유학 이야기를 들으며, 서경식의 책을 읽으며, 나는 계속 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고, 그 '나'는 '한국-민족'이라는 집단의 일원으로 호명되는 것일까.
왜 나는 '국문학'이라는 근대학문 -끝끝내 지속되고 있는-을 탐구하는 하나의 학도로, 사회주의 사상에 친연성을 갖는 한 '시민'으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20대 청년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끝나지' 않을까.
나와 대치되는, 나를 계속 호명하는 것들. 끝나지 않은 '우리 안의 식민주의'.
어떻게 우리는, 아니 나는, 자율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집단적 주체로서 변혁의 에너지에 일원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집단적 주체는 어떻게 비폭력적일 수 있을까. 어떻게 타자를 타자화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디아스포라를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