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태생은 인상이 좋고 후덕하여 사람들에게 호감을 받으며 운세 또한 평탄하여 대체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 첫말은 좋구나. 인상이 좋고 후덕하다라..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서 많이 듣는말?) 하지만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배신하여 한때 곤경에 처하게 되는 흉운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매사에 처음 시작은 길하고 잘 되어 가는 듯하지만 도중에 일이 꼬여버려 좌절되는 수가 많으니 이 점을 유의하여 계획을 확고하게 수립하고 결과를 수시로 점검하여 실패를 막아야 후반 운세까지 길합니다. 고향을 떠나거나 부모로부터 떨어져 타관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다보면 수시로 귀인이 나타나 도움을 주는 격이므로 타지나 해외에서의 활동이 자신의 운세를 밝게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오 해외생활!) 또한 사회 생활을 하는 도중 겪게 되는 일시적인 풍파와 장애는 이런 의외의 협조자를 만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유형의 닭띠는 자신의 뛰어난 추리력으로 타인을 사로잡는 날카로운 눈과 식견을 가진 현실적이며 정확하고 부지런한 형의 사람입니다. (내가 쫌 똑똑한가? ㅋ) 탐구적이고 낙천적이며 이상주위적인 사람으로 일에 임하는 자세가 열정적입니다. 쇠성분은 고집이 세고 완고하게 만들기 때문에 중요한 지위와 명성에 대한 욕구가 강합니다. 스스로 고안한 관념에 대해서 까다롭고 남의 견해에 쉽사리 동의하지 못합니다. 웅변술에 재능이 있어 그의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그것을 이용합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아무리 실제적이고 이성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아가 직접적으로 도전받았을 땐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만약 타인과의 관계가 순조롭지 못하고 타협을 위한 진정한 노력을 할 수 없다면 이들의 재능은 쉽게 낭비되고 이들의 천재성을 써줄 사람은 없게 됩니다.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것도 해가 될 수 있으며 과잉 살상하려는 그의 욕구에 자갈을 물려야 합니다. 금의 닭띠는 외적인 허장 성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을 잘 억제합니다. 이들은 생활에서 질서를 주장하고 환경면에서는 위생의 조건, 심지어는 메마른 정결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욕심많은 닭띠는 물질적 재부에 끌리는 동시에 사회적 개혁에 대해서도 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봉사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결을 널리 알리고자 하며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혹은 여러 사람들의 진보를 위한 개혁을 선동하는 데서 충족감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 사주의 남성은 주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사람을 모으고, 그 가운데에서 의사 소통을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안정된 태도와 밝은 얼굴이 상대의 기분을 호의적으로 만드는 힘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조직 가운데서 자신을 위해 직위 등에 연연해 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때로는 사람들 눈에 교활한 행동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항상 진보하려는 정신이 강해 이익 없는 타협은 절대 하지 않는다든가, 상대방에게 유연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해 때로는 반발을 사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의 경우에는 화술이 비교적 좋아 대화로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어 교우 관계는 부드럽습니다. 귀염성이 있으므로 상사에게도 호감을 받겠지만,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좋고 싫음의 태도를 분명히 나타내면 사회 생활은 힘들어집니다. 말을 함부로 하여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한창 일할 때에는 말하는 방법도 신중하게 하고, 타고난 사교성을 더욱 갈고 닦아 앞날에 도움이 되는 인간 관계를 만들어 나갑니다. 이 사주의 남성은 합리적인 사고 방식이 우수하여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는 잊지 않고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말년에는 풍부한 경험과 여유로 취미를 즐겨 이해 득실과는 상관 없는 친구를 깊이 사귀어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자기 자랑을 드러내려고 하는 욕구가 강하게 나타나지 않도록 상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행상으로 정유는 일귀에 해당하는 격으로서 어떠한 절망의 함정에서도 주위로부터 구제를 받습니다. 즉 천우신조의 혜택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옷, 천우신조의 혜택! 흠. 주위에서 항상 너는 운이 좋아 라고 하던데;; )역상으로 정유는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이기 때문에 남의 덕을 보기전에 자신이 먼저 베풀어야 선천적 복록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평소에는 매우 차갑고 냉정한듯해도 감정이 순수하기 때문에 분위기에따라 남의 말에 감응되기 쉽고 순간적으로 냉정을 잃고 인간적 판단이 흐려져서 연루의 해를 입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혼자만 약은 편이지 실지 그 내면에는 귀가 엷은 사람이 많으니 유의를 하십시오. 그리고 일생동안 재물의 궁핍은 없으나 필요이상의 지출로 남몰래 고민하는 수도 있으니 즉, 이 사주는 운명상으로 봉사운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죽도록 벌어놓은 돈을 남이 쓰는 운세가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 기를 타고난 사람은 너무 결벽할 정도로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미적 추구심이 왕성하여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심성이 내면 깊숙이 깔려 있기 때문에 건축, 의상 또는 미용,예쁘장한 세공물제작, 고미술품 따위를 매우 선호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반면 권태와 변덕이 작용하여 한 친구를 진지하게 오래 사귈수 없는 단점이 있습니다. 간혹 이성으로 인한 삼각관계에 얽혀 번민하는 때도 있으며 색정으로인한 구설고 고생이 따르기도 합니다. 정유의 상은 중년이 지날 무렵 명성운과 횡재운이 있어서 한때 세인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항시 주관만 똑바로 세우고 외고집만 버린다면 사회적으로 유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부모형제운은 고독한 편에 속합니다. 직업은 금웅, 관광, 무역, 사회봉사, 패션디자인, 광산업 등의 직업이 적합하고 성형의사나 치과의사도 적격입니다.
성격은 감성이 풍부하고 순진하며 명랑한 성품에 지혜롭습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나며 대인 관계가 원만하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가졌으며 양심적이나 다소 인내력이 부족하고 발끈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다 좋은데.. 인내력이 부족!) 전체적으로 정의롭고 평온한 성품으로 개성이 뚜렷합니다. 그 기질 또한 섬세하고 예술적 기교가 능란하여 미적 세계에의 감성이 매우 풍부하고 용모 또한 수려합니다. (ㅋㅋ 용모 또한 수려!) 반면 그 마음은 순진하다 하리만큼 천진스러운 점이 있으나 남들은 그렇게 인정해 주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너무 정확하고 자상한것도 이 태생에서 있어선 단점일수 있습니다. 매사에 소극적이면서도 행동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일을 벌이며 그 결과 끝마무리를 짓지못해 실패하는 경우가 있으며 무슨 일이든 끝에가서는 후회를 하면서도 다시 이것저것 일을 잘 벌이는 편입니다.
애정운은 남성은 바람끼가 있으나 가정은 철저히 지키는 타입이며, 여성은 애정에 수동적이라 리더십이 뛰어난 남자를 만나야 하며 늦게 결혼해야 길하고, 일찍 결혼하면 초혼에 실패하고 재혼을 해 행복을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은 심장 쇠약, 혈액 순환 장애, 소모성 질환에 유의해야 하며, 대체적으로 건강한 체지로 큰 병을 앓는 경우는 없습니다. 수명은 33, 41, 49, 54, 67세때를 주의하면 남녀 모두 75세 이상 장수를 누릴 명입니다. 남의 덕을 보기 이전에 내가 먼저 자선과 덕망을 베풀면 복이 저절로 들어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묘시생 사주는 본래 부모나 형제와 떨어져서 객지 생활을 하게 될 운세이므로 육신이 고독한 일면이 있습니다. (흠.. 역시 외교관과 결혼하는 사주? ;;; )대체로 학업운이 불리하여 학문에 오랫동안 정진할 수 없게 되므로 학자로 대성하기는 힘들겠지만(역시... 외교관과의 결혼 때문?), 장사나 소규모 사업을 일으켜 큰 재물을 모으며 이름을 떨칠 수 있습니다. 또한 한 곳에 진득하니 오래 붙어 있지 못하는 성격이므로 직장을 자주 옮기거나 주거를 수시로 변동하며 이동과 변화를 반복합니다. (이것도 외교관과의 결혼?;;; )묘시생의 경우 남녀가 애정운에 차이를 보입니다. 남자의 경우 여자 문제로 인하여 속을 태우며 우환에 휩싸이겠으나, 여자의 경우 본인의 내면적 성격이 얌전하고, 예의도 바른 편이라 이성으로 인한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자식운도 상당히 좋아서 말년에는 자식덕을 보게 되는 데, 자식중에서 관록을 얻어 입신출세하거나, 큰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키므로써 후사를 밝게 합니다. (허어.. 자식을 많이 나야 겠군!) 따라서 말년운은 부귀영화가 가득합니다. (말년에 부귀영화... 흠;;) 다만 16세, 27세, 71세에는 불길한 우환과 신액이 따르므로 모든 면에서 인내와 주의를 갖고 임해야 합니다. 이 시기에는 사업 확장이나 직장 변동, 주거 변동을 삼가야 좋을 것입니다. 묘시 초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모친이 먼저 사망하게 되고, 묘시 말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부친이 먼저 사망하는 슬픔을 겪게 됩니다.

 

여튼 좋은 말 위주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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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6 0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2-26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흐음.. 그럼 자녀계획을 변경하시는 것은? ㅎㅎ

2007-02-26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즘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 자의 시선을 읽고 있다.

105 식민주의는 타자의 계통적인 부정이며 타자에 대해 인류의 그 어떤 속성도 거부하려는 광폭한 결의이기에 피지배 민족을 절박한 지경까지 몰아넣어 그들이 자기 자신에게 '진정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만든다. (Les damnes de la terre, Francois Masper edituer S.A.R.L., 1961)
105-106 계시와도 같은 말이었다. 파농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Martinique에서 태어나 프랑스 본국에서 정신의학을 배운 후 알제리 해방투쟁에 몸을 던졌다. 그 한 사람 디아스포라의 강렬한 말이 동아시아의 디아스포라인 나의 눈을 뜨게 했던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사로잡혀 있는 것은 '식민주의'의 '계통적인 부정' 때문이다. 그것은 나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즉 식민주의에 의해 디아스포라가 된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세계적인 견지에서 볼 때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며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비록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디아스포라로서 살고 있는 형제 자매들의 모습이 아직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물론 나는 그가 말하는 '디아스포라'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또한, 디아스포라다.

"디아스포라들은 이주한 땅에서도 언제나 '이방인'이며 소수자다. 다수자는 대부분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온 토지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견고한 관념에 안주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 안에 있는 한 다수자들에게는 소수자의 진정한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그 진정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14)라고 한다.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온 토지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공동체.

토지? 남북분단. 언어는 변화를 많이 겪었고 소위 '지식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섞지 않으면 대화를 못 나누는 지경이기는 하지만 일단 패스. 문제는 문화.

조상 대대로 전해내려오는 문화? 그런 것이 있을까?

내 이야기를 해 보자면, 나는 국문학, 그것도 현대문학 박사과정 휴학 중이다. 초2~중2까지 간간히 한국에 오기는 했지만, 여튼 사춘기를 외국에서 보냈다.

내가 국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어떤 컴플렉스에서 기인한다. 외국에 있을 때의 친구들이 아이비리그를 갈 때, 나는 고작 '서울대'를 가야 했고, 미국에서 공부한(제대로 한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 미국인들과 '동등한' 경쟁과 대우하에) 교수들 밑에서 3류 수업을 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국문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우리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말 해 줄 수 있는가? 국문학을 선택하고 보니, '국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의 징후를 극명히 들어내주는 사유방식이며 학적 체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민족-국가'로 이어지는 것 또한, 근대적인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다음과 같은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근대'라는 보편의 이름하에, 네모난 아파트, 서구식 정치제도, 사고방식에서 살고 있는 우리. 우리는 누구인가. 이를 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전문학을 전공으로 하지 않고, 망설임 끝에 현대문학을 전공으로 하게 된 것은, '현장감' '바로 지금-여기'라는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여기에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우리는 무엇인가.

내 애인은 지금 체코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 서울대 인문대학 수석 입학하고 얼마전에 외무고시에 합격해서 조금 있으면 외교관으로 한국을 '대표'할 그녀는, 체코에서 그저그런, 놀러온 시끄럽고 천박한 미국인들을 보면 알 수 없는 열등감을 느낀다고 했다.

왜? 단순하다. 그들이 '미국인'이기 때문에. 그들이 '서구인'이기 때문에.

100년전 쯤, 춘원 이광수가 고백한 것과 똑같이. 서구인들을 보면 열등감을 느낀다. 특히 한국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춘원이 영어실력을 뽐내며, 조선인들에게 자신이 얻어들은, 일본을 통해 겨우 구입한 미국 원서를 읽으며 지식을 가르치고 그들의 무능에 한탄하고, '계몽'만이 살길이라고 부르짖으며 자신만한 엘리트가 조선에 몇명 안된다고 할 때에도, 그는 서구인의 '얼굴'만 보면 주늑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리 잘나봤자, 아무리 영어를 잘 하고, 원서를 많이 읽고, 박사학위가 있어 봤자, '서구인'은 아닌 것.

애인은 영문학이 매력적인 점은, 그 '연속성' continuity에 있다고 했다. 초서에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서로 참조하고 증폭하며 '이어져내려오는'

나는 그 발판은 제국주의고, 식민지의 착취와 인권유린과 학살이라고 답했다. 더 흥분했을 때는, 서구는 스스로 폭발해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들이 히틀러고, 무솔리니고, 카이사르고, 플라톤이고, 니체고, 맑스고 전부다! 그들이 '인류'다. 그들이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들은 환경오염, 제노사이드, 핵폭탄이다. 그들이 아프리카의 원인이고, 그들이 중남 아시아의 원인이고, 그들이 북극 빙하가 녹는 원인이고, 아마존의 밀림이 사라져가는 원인이고, 수 많은 동식물 종들이 사라져가는 원인이다. 그들이 인류다. 죽어라.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약한자요, 피억압자인가? '우리'는 고구려의 말달리던 선구자인가? 우리는 '소중화'이고, 이주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놀려먹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치고, 이라크에서 단지 '재건'을 돕기 위해 파견을 하고, 경제규모 11위이고, 달러약세와 엔화 약세 때문에 관광을 하러다니고, 동남아에는 '묻지마 관광'을 하는 우리는 무엇일까.

한국문학사의 단절. 그것은 우리의 단절이다. 계통적으로 이제, '우리'라고 하는 신화를 부정하고 애써 코스모폴리탄으로 살 수 있다.

국민이나 민족으로 호명되지 않으며, 호명되는 기제를 애써 부정하며, 항상 소수자의 입장으로, 디아스포라의 처지에서, 주체로 호명될 수 있을까.

분명 나는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라니, 언제적 이야기인가. '민족'이라는 얼마나 오래된 그리고 악의적인 농담인가.

그러나 애인의 체코 유학 이야기를 들으며, 서경식의 책을 읽으며, 나는 계속 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고, 그 '나'는 '한국-민족'이라는 집단의 일원으로 호명되는 것일까.

왜 나는 '국문학'이라는 근대학문 -끝끝내 지속되고 있는-을 탐구하는 하나의 학도로, 사회주의 사상에 친연성을 갖는 한 '시민'으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20대 청년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끝나지' 않을까.

나와 대치되는, 나를 계속 호명하는 것들. 끝나지 않은 '우리 안의 식민주의'.

어떻게 우리는, 아니 나는, 자율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집단적 주체로서 변혁의 에너지에 일원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집단적 주체는 어떻게 비폭력적일 수 있을까. 어떻게 타자를 타자화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디아스포라를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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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2-2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기인님 알고보니 겨우(?) 서울대생이시네요 ㅋㅋ 저도 민족주의에 대해서 아주 회의적이지만 민족주의라는게 근대국가 성립에 태생적인 한계(특히 한국에서)이니 그것을 지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국민으로서만이 아니라 세계시민으로도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저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근대국가라는 타이틀을 쓸 수 있는가라는 문제자체가 회의적입니다. 우리가 서구문명의 본질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죠? 민주주의라는 것은? 공화국의 개념은? 군사정부가 끝나고 국민의 선거로 대통령도 뽑으니 이제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이제부터 생계(경제)에만 전념하자! 이렇게 외치는 건 놀랍게도 미디어와 우리의 민주주의적 대표자(정치인)들이 아닙니까? 아테네의 야심가들이 민주주의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서 가장 먼저했던 일이 광장(아고라)을 페르시아식 바자(시장)로 만들어 사람들의 눈이 오로지 물건들에게만 쏠리게하고 생계에 전념하도록 유도했던 것이 자꾸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도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고 서양문명도 알지 못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다 개똥같은 소리입니다 한국에서는.(근대도 오지 않았는데 무슨) 필요한 건 서구문명의 내재화입니다. 여친분의 이유모를 열등감과 우리안의 식민주의는 그런 것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아직 우린 그들의 문명을 알지 못합니다.저는 어쩔 수 없는 헤겔리안일까요? ㅎㅎ 저는 '서구'라는 지역적 명칭에 방점을 두지 않습니다.오히려 후자인 문명에 두죠.확실히 인류 보편의 문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흡수하고 내재화하는 쪽이 그 문명의 주인입니다. 마치 그리스와 로마인들한테 바바리안 소리를 듣던 저 미개한 야만인(게르만족)들이 지금에 와서 로마와 그리스를 자신들의 문명이라고 주장하듯이.

기인 2007-02-22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제 뿌리 깊은 컴플렉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서경식의 다음과 같은 구절과도 닿아 있습니다.
백인 사회에서 성장한 많은 코리언 입양아들은 양부모나 지역 사회의 오리엔탈리즘과 인종차별에 시달린다. 자신들의 노란 얼굴은 "부모로부터도 나라로부터도 버림받은 존재임을 나타내는 낙인"이라고 말한 입양아가 있었다. 미희 역시 자신의 출신을 알아내 존엄을 회복하고 싶다는 갈망을 지닌 채 열여섯 살때 양부모의 집를 나왔다. 자립해 생활하면서 예술을 배웠고 처음으로 제작한 단편영화에는 코리언 입양아가 베트남풍의 밀짚모자를 들고 등장한다. 그것은 농담이나 패러디가 아니다. 작가 자신이 당시에는 조선 문화와 베트남 문화의 차이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서구 문명의 내재화, 또는 '문명'이라는 보편의 이름의 내재화로 인해 그 주인이 되면 분명 열등감과 식민주의는 없어질 것 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내재화한다면, 그 내재화라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그 문화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렇다면 이제 '타자'들은 그 주인이 아닌 것이 되어 우리 또한 일종의 제국적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아직도 일본인들조차도 미국인이나 서구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있듯이. 게르만들이 짱을 먹은 후에야, 로마와 그리스를 전유할 수 있었듯이.
그러한 내재화은 단지 '서구문명'만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 경제력, 정치력등이 서구 최강대국과 동등하거나 더 뛰어나야 될 것 같습니다.
중국은, 스스로 별반 콤플렉스가 없는 것 같아요. 대국의 힘이려나..
여튼 빨리 이 수렁에서 벗어나서 (이것은 역시 과거의 기억과 서경식의 책 때문인데) 민족-국민으로 호명되는 것을 멈추고 다시 평정을 찾아야 겠습니다. ㅋ
영어 원서를 짜증날 속도로 읽고 있는 요즘 제 모습과도 겹치면서 콤플렉스들이 드러나면서 은근 흥분되네요. 흑 소년 시절 인종차별의 아픈 기억;;

비로그인 2007-02-25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통 가해를 당한 사람은 가해의 '전가'로 나가기 쉬운법인데 기인님의 성향을 보면 아마도 초자아를 형성하신듯 합니다 ^^ 글쎄요. 중국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근대의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로 서양컴플렉스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껍니다. 진독수, 노신, 펑유란 같은 사람의 글을 읽어보면 잘 느껴지지요. 그리고 제가 말한 서구문명의 내재화는 사실 제국주의적 헤게모니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지금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체제, 즉 '민주'와 '공화국' 어떤 것이고 어떻게 기능하였으며 그것들을 만들어낸 '원조'에 대한 탐구라고나 할까요? 직접민주제의 원조인 아테네는 국력으로 비교해보면 페르시아에게 상대도 안되지요. 그리고 저 유명한 플라톤이 강대국 이집트를 몹시 흠모했다는 것도한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정언명령의 사나이,인간시계라는 칸트는 몹시 양심적인 사람이였을테지만 국왕의 명령에 너무나 간단히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의 '시민' 소크라테스는 경비도 없는 허름한 감옥에서 어떠한 탈출시도도 하지 않고 간단히 독배를 들었죠. 그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한나 아렌트는 공적인 삶(vita activa)의 유무의 차이라고 지적하고 있지만. 현대 유럽은 바로 아테네의 vita activa를 현체재에 확립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였다고 이해하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양교육을 시키고 고전 인문학을 가르치며 사람들에게 민주주의의 본질을 인식시키려 노력한 것이죠. 당연히 무료로.. 공화국의 재산은 시민들 자신의 것이니까 (아테네에서는 훌륭한 교육에 장이였던 연극을 보러 오는 가난한 시민에게 돈을 주었다고 하죠?) 그러나 한국은 제가 앞에 댓글에서 지적했듯이 민주주의의 시스템만 도입하면 다 된것처럼 또한 정부가 나서서 국민들에게 그렇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유럽에서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대학교육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당당하고 중요한 교육'시장'이지요) 이런 내.재.화가 되있다면 자부심이라는 것, 세계를 주도하는 대국이 아니어도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을까요? 이집트,페르시아 같은 위대한 나라의 '신민'보다 일개 촌구석 도시국가 '시민'이 훨씬 자부심 있으리라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떠올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것입니다.

기인 2007-02-2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답변 고맙습니다. 그런 내재화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페이퍼로 정리해주시면 좋겠는데요 ^^;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그러한 내재화가 어떻게 될 것인가의 문제(실질적인 재원이나 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입니다. 또 그것이 오랜 기간 후에나 가능한 것이라면, 그 동안 '우리'라는 정체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남한 지식인들 또한 어쩔 수 없이 디아스포라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끊임없이 세계시민의 일원으로, '인류'로 호명되어야 하겠지만, 하루하루 공부를 하고 살고, 특히 '외국'인들과 (이론으로든 실제로든) 마주치게 될 때 가끔씩 '타자'로서 느껴지기도 합니다. 별반 이런 인식이 희미해지다가 (세계시민의 일원으로 자각하다가) 서경식 선생의 글을 읽으니 다시금 이 문제에 대해서 울컥하게 되네요 ^^;
현대 중국에서 부러운 점은, (많은 이들이 경계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서구에 꿀릴 것 없는 인식과 대국주의죠. 배워도 동등하게 배운다고나 할까, 서구를 은근히 깔본다고 할까. 제가 만나본 사람들이나 다녀본 이미지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

기인 2007-02-22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또 한가지, 실제 서구 국가도 그런 민주주의를 내재화한, '서구 문명'을 내재화한 국가-국민이 있는가 의문스럽습니다. 저는 '민주주의'는 결국 이데아라고 생각하고 있는데요. 이를 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인류 보편적 가치'라는 것은 있을 수 있고, 있다고 믿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보편으로서의 '서구 문명'과 이의 내재화는 조금 자세히 설명되지 않으면, 오해하기 쉬운 개념인 것 같습니다.

비로그인 2007-02-22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정체성의 문제는 사실 어려운 문제고 저의 좁은 식견으로는 기인님에게 만족할만한 답변을 드릴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럼 님이 문제 제기해주신 '내재화'한 유럽 국가가 과연 있는가의 문제와 재원문제가 있고 신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상태에서 어떻게 가능할까에 대해서 제 생각을 써보지요.

물론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와 같은 직접민주정치체제를 구현하고 있는 국가는 아마 지구상에서 없겠지요.님이 구현불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 체제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체제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국가는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들면 프랑스같은 나라라고 할 수 있죠. 제가 깜짝 놀란 것은 얼마전 콩드르세를 읽으면서 입니다. 이 사람은 프랑스 혁명정부에도 참여하기도 한 사람인데 이때부터(약 200년전) 교육의 사회적 의무를 주장합니다(즉 무료로 해야한다는 것이죠)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은 인간의 평등을 전제하지 않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그러한 평등은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교육이 주어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때부터 꽤뚫어본 것이죠. 또한 훌륭한 교육이란 국가체제를 추종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합리적으로 비판,반성할 수 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교육론은 말할 것도 없이 현재 프랑스의 교육이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콩도르세는 이런 것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그것은 서양의 기축문명인 그리스와 로마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자라나는 시민들에게 가르치지요. 저는 헌법에 민주주의체제가 명시되어 있거나 포룸같이 거창한 공공장소가 있어야 민주주의국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본주의적인 민주주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국민이 있는(그리고 그들이 가는 곳이) 민주국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점에서 우리나라는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과연 민주주의 국가입니까? 우리의 교육은 분명 조금더 '벌기' 위한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두번째 답은 이 문제와 이어집니다. 근대국가의 특징은 역시 의회제도와 자본주의 국가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나라의 현체제는 민주주의 보다 자본주의에 방점이 찍혀있다고 보면 되겠죠. 기인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체제속에 사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재원을 따지는 것이죠. 만약 민주주의 국가라면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인 공교육에 감히(?) 재원논의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그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상식이요, 전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자크 아탈리는 미테랑 정부시절 관료로도 재직한바 있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보고서(정확한 보고서의 명칭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이해해주시길)만 읽어봐도 민주국가를 위한 기본 전제로서 교육의 사회적 의무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인들도 시장 논리가 하버드와 같은 세계최고의 대학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사회적 평등이고 민주주의라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들을 가진 미국은 세계에서 정평이 나있는 불평등 국가 아닙니까? 왠만한 갑부의 자제가 아닌이상 대학 졸업과 동시에 빚쟁이가 되서 나오고 그 나마 돈도 없는 서민들은 대학가려고 이라크에서 거의 용병과 다름없도록 쓰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민주주의국가는 누구를 위한 것이죠? 자본주의 국가의 왕은 '주주'이지만.

기인 2007-02-22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사실 테츠님의 위 명제들에는 오래전부터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저는 현재의 프랑스라해도, 결국에는 부르주아 독재에 다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안 좋지만, 서구라 해도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게 제 생각이죠. 그나마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에 대해서는 우리보다는 더 좋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면 문제는 서구문명의 내재화의 추상적 문제가 아니라, 제 생각에는 사회체제나 혁명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서구 문명 내재화'라고 말씀하시니까, 자본주의 내적 개혁을 뜻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민주주의'라는 이데아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사회민주주의(민주 사회주의?) 건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이를 지지하는 국회 내 정당도 있으니,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나, '서구 문명의 내재화'라고 말씀하시면, 이제 이는 교육의 문제로 들어가고(물론 교육의 문제는 정말 중요하지만) 그것은 현 체제 하에서 길고도 긴 세월이 걸려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의문은 그 이전(?) 또는 좀 다른 '정체성' 문제였습니다. 사회변혁에 대한 제 생각은 확고하다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7-02-23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대화들을 나누고 계시네요.. 기인님의 글도 참 진정성이 느껴지는 좋은 글이었습니다..(은근히 여친자랑도 하시면서 ㅋㅋ) 그런데 테츠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에서 기원하는 보편성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지금의 서구의 '문명'을 만들었다는 지적에 동의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이 '제국주의'와는 무관하다는 의견에는 약간의 반대의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네요.

yoonta 2007-02-23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구의 소위 '문명'은 테츠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적 liberalism과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태동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긍정적으로 모든 민족이 '내면화'해야만 할 어떤 보편적 가치인가하는 것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왜냐하면 그리스이후부터 유럽지역에서 내면화한 그러한 그리스적 가치들로 인해 그들은 결국 그들의 타자 즉 아시아나 기타 문명들과 같은 타자들을 열등한 문화나 가치들로 바라보는 우월감으로 이어졌던게 사실이고

yoonta 2007-02-2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한 나르시시즘적인(자기의식적) 우월의식이 서구의 ‘제국주의’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러한 서구문명을 보다 발본적으로 재검토해보아야 할 필요성이 요구된다고 봅니다. 단순히 “우리는 아직 근대화 혹은 민주주의가 정착 혹은 내면화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소위 서구에서의 포스트논쟁들을 바라보면서 비록 우리에게 아직 도래하지도 않는 근대이후를 이야기하는 ‘포스트’담론이라고 하더라도

yoonta 2007-02-23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로부터 분명 배워야 할 점이 있고 또한 우리가 지향해야 될 미래가 단순히 지금의 서구가 아니라고 한다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저는 기인님이 이번에 주제로 삼으신 ‘디아스포라’와 같은 ‘포스트’콜러니얼리즘 논의도 중요하게 참조되어야할 사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위 포스트식민주의는 서구적 근대의 타자를 배제하는 서구의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되돌아보게하는 효과가 있기때문이죠. 저도 아직은 이 분야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긴 하지만요..^^;;

yoonta 2007-02-2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궁 긴 댓글이 안올라가서 이렇게 분절해서 올릴수밖에 없네요..양해를 구합니다. 기인님, 테츠님 ^ ^;;

기인 2007-02-24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공산주의는 지금까지의 생산과 유통의 모든 관계를 기초부터 전복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활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52쪽)

"Communism differs from all previous movements in that it overturns the basis of all earlier relations of production and intercourse, and for the first time consciously treats all natural premises as the creatures of men... its organisation is, therefore essentially economic."(17쪽)

부분역이긴 하나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를 나도 갖고 있는 듯한데 여하튼 지금은 없다(영역본도 박스에나 들어가 있겠다). 해서 그냥 보면, 나는 아무래도 표시한 문장이 껄끄럽다. 물론 movements'를 '활동'이라고 옮긴 것도 특이한 감각이라고 생각되지만, 'treat A as B'(A를 B로 간주하다)라는 구문이 어떻게 해서 'B를 A로 삼는다'가 되는지 이해불능이다. 독어본에 어떻게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상식적 감각은 "공산주의는 처음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모든 자연적 자산을 인간의 생산물로 간주한다." 정도로 읽는다('premise'는 물론 '전제'란 뜻이지만 복수형일 경우 '토지'란 뜻도 갖는다).

하긴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도 좋은 말이긴 하니까 그냥 넘어가도 대차는 없겠다. 'esssntially'도 여기선 '본질적으로'란 뜻 같지만 '필수적으로'라고 옮긴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 에잇,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다. 몇 줄 내려가서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의 활동은 경제적 관계로 결정된다고 믿었다."에서도 '인간의 활동'이 'human life'의 번역이라는 게 좀 놀랍긴 하지만 뭐 의역이라는 게 있으니까.

겸사겸사 공부도 해야 하니까 정리성 멘트: :"요컨대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산층 부르주아와 노동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돈을 둘러싼 경쟁, 혹은 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부를 창출하는 근원인 공장과 자원 등의 생산수단을 둘러썬 경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53쪽)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in.co.kr/blog/mypaper/1059092
 로쟈님 페이퍼 중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영역본

C.J. Arthur Ed., Karl Marx and Frederick Engles, The German Ideology Part One,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revised edition 1970)의  86면

그리고 김세균 감수, 최인호 번역, <독일 이데올로기>, 최인호 외 번역,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박종철출판사, 1991, 250면

"Communism differs from all previous movements in that it overturns the basis of all earlier relations of production and intercourse, and for the first time consciously treats all natural premises as the creatures of hitherto existing men, strips them of their natural charater and subjugates them to the power of the united individuals.  Its organisation is, therefore, essentially economic, the material production of the conditions of this unity; it turns existing conditions into conditions of unity. "

"공산주의는, 그것이 지금까지의 모든 생산 관계들 및 교류 관계들을 변혁하며, 모든 자연 성장적 전제들을 지금까지의 인간들의 창조물로서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간주하여 그 전제들에게서 자연 성장성이라는 옷을 벗기며, 그 전제들을 연합된 개인들의 힘에 복속시킨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운동들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의 조직 Einrichtung은 본질적으로 경제적이며, 이러한 연합의 조건들의 물질적 창출이다; 공산주의의 조직 Einrichtung은 기존의 조건들을 연합의 조건들로 만든다."

최인호 선생의 번역문과 로쟈님의 번역은 일치.

결국 영어를 그대로 읽는 사람과 한국어로 바꾸어 읽으면 그 '의미'의 강조점이나 흐름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아래는 대충 영어로 읽는 사람들의 방식; (완전 직역으로 해보려다가 힘들어서 포기; )

공산주의는 구분된다(다르다) 기존 모든 운동들과. [어떻게] 변혁시킨다는 점에서. [무엇을] 모든 생산과 교류 관계들의 기반을. 그리고 이로써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무엇을] 모든 자연적 전제들을 지금까지의 존재하는 인간들의 창조물로. [이로서 모든 자연적 존재들에게서] 자연적 특성을 벗기며[그 신비화된 것을 탈신비화하며?] 이를 연합된 개인의 힘에 복속시킨다는 점에서. [이러한 공산주의의] 조직은, 따라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다. [이 조직은 이 조직의] 연합 조건의 경제적 생산이다. [이 조직은] 존재하는 조건을 연합의 조건으로 만든다.

한국어의 구조로 변화시키면 강조하는 부분들이나 문맥이 당연히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번역을 해야 한다는 것. 정말 힘든 문제다. 그래도 로쟈님의 지적처럼,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는 대목은 의역이 꽤나 들어간 부분이다. 맑스가 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역사에 대한 탈신비화의 맥락.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나가는 것. (헉; 여기 글자만 왜 이렇게 큰 것인지;;;; )

이를 맑스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원문과 대조해보면 번역자가 어떤 의도로 저렇게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만.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한 번역도 아니고, 이것이 영어 원서에 번역되어 있는 것을 재번역 한 것이기 때문에 곤란하다.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는 말을 저 문맥에서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로 이어지면 정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인간의 창조성을 기본 전제로 삼는 것과, 공산주의 조직이 경제에 바탕한 조직이다는 어떻게 연결될까?

사실 이 문장을 읽으면, 토대의 과학성과 상부구조의 자율성의 문제가 떠오르고, 그렇다면 인간의 '창조성'이라는 것이 상부구조의 자율성의 문제인가? 라고 반문되면서 의문이 증폭될 수 있다. 보통 '창조성'이라고 하면 자율성과 같이 가게 이해되기 때문.

그래도 이렇게 원서와 대조하면서 읽어나가고, 번역자가 수정해서 2판을 찍을 수 있다면 좋겠다.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는 번역서를 읽다가 눈물을 삼키며, 역시 '너무 어려워 OTL'하면서 공부를 접게되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일 것인가.

나도 '공식적인' 번역을 한 번 해본 적이 있는데, 내가 번역할 부분에서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부분이 있으면 꼭 참고했다. 그것이 얼마나 수고를 더는지! 특히 내가 번역한 것은 사이드가 "미메시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은 "미메시스" 출간 몇주년 기념 서문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미메시스'에 대한 인용이 수다했기 때문. 이렇게 아티클 하나도 번역하고나면 힘들어 죽겠고, 후회와 부끄러움 때문에 몸둘바를 모르겠는데, 하물며 책 한권이야! 그래도 번역 또한 학문이라고 생각하며 엄정한 번역을 위해 노력하고, 최대한 수정판을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래는 내 최초이자 마지막인 번역문이 실린 잡지. 생각할수록 번역 힘들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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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에대한 기본을닦고싶은분들 (평점:)
부산미남♡ 2007-02-03 00:28

이교재를 시작한지 25일째가 되던날 이교재를 마무리하게되었습니다 ㅋ

처음이교재를 사게된계기는 수.만.휘 여러분들의 추천으로 사게되었지요

저는 현대시를 워낙 잘하지 못하던터라 교재를 알아보던중에 이교재가

좋다는소식을듣고 구입하게되었어요 처음에는 서점가서 구성을본후에

인터넷서점에서 사면 싸다는소리를듣고 알라딘에서 구매하게되었구요 ㅎ

처음에는 현대시 유형을알아보는 그런파트가있어요 ㅎ

앞부분만 공부하더라도 대충 현대시에 대한 감이 오실거에요 ㅎ

뒷부분에는 실전문제가 있는대요 그것을푸시면서 실전에 적응하시는훈련을하신다면

현대시 부분에서 좋은성적기대하실수있으실것 같아요 ㅋㅋ 


  Thanks to추천하기퍼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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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파트에 자신이없다면 이교재로 처음부터 다시시작! (평점:, 추천:5)
planners 2007-01-09 14:31

언어실력이 괜찮은 학생들에게 언어영역에서 교재를 추천하라면 오감도와 즐겨찾기를 추천하곤 하죠... 저또한 수험기간중 언어 ㅚ수라고 불리기도 했었는데 서슴없이 즐겨찾기를 추천합니다. 저자인 구자송 선생님 때문이지요.

4년전부턴가 즐겨찾기라는 너무나 촌스러운 표지의 문제지가 나왔을때 그 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 이유는 수능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문제들, 그리고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쓰여진 해설때문이었죠. 특히 고득점학생군에서 엄청난 선호도를 보이고 있지요.

시 같은 경우는 문제가 작가의 주관에 치우치는 경우 정말 시간낭비도 심하고 결국 배운것도 하나도 없게 되는 경우도 많은 데 이교재는 다른 교재들에 비해서 그런 점이 상당히 적은 편입니다. 그리고 해설또한 잘 되어 있어서 시분야의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훈련용으로 아주 좋습니다.

 

 

 

ㅋㅋㅋ 서평 2개 있는데 모두 좋다. 훗. 으쓱.

ㅋ 그렇지만 뭐; 내가 한 것은 없다. 내가 문제 낸 것은 다 빠꾸맞고 거의 울면서 -_-; 고쳐서 마지막

에서야 통과되는 등. 그리고 나는 개정부터 들어간 거라서 내가 쓴 부분을 다 합해봤자 10페이지

조금 넘을 듯.

그래도 기분은 좋은데 뭐. ㅋㅋ

이 책 많이 팔려서, 인세를 받으면 좋겠다 ㅜㅠ  

(ㅋ '현대시'로 검색한 책 중에 판매량 1위다^^ 뭐 알라딘 포인트는 그래봤자 2000대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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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반기억과 양립할 수 있나
[문학칼럼] 『요코 이야기』 번역마저 부실한 청소년도서

방민호_문학평론가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라는 일본계 미국 여성이 저술한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요코 이야기』(So far from bamboo grove)가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 중학교 교재로까지 사용되고 있다가 지난 해 9월 보스톤 지역의 한국계 학부모들이 반대운동에 나서면서 파문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그 파문이 이제 한국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논의하기에 앞서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책이 번역으로서 충실치 못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몇 개의 지명들이 나온다. 이 가운데 ‘라신’이라고 한 것은 내용상 일제시대 군항이었던 나진을, 탄천이라고 한 것은 주인공 가족들의 남하 스토리를 감안해 볼 때 단천을 가리키는 것 같다.
 
번역자는 요코가 한국 지명을 일본식 한자어 발음으로 기억하여 영어로 표기한 것을 원래 한국식 지명과 발음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한국어로 음만 따다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번역서에 서울이라고 나온 것이 원래 책에는 게이죠(京城)라고 되어 있었을는지도 알 수 없다.

번역 자체가 충실치 못하고 원래 지명이 제대로 등장하지도 못하니 이것을 청소년들을 위한 책으로 번역했다면 일단 결격 사유가 크다. 어떤 책을 청소년용으로 문체와 내용을 첨삭, 교열하는 것은 물론 가능한 일이지만 이때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더구나 『요코 이야기』처럼 역사의식과 관련성이 깊은 책이라면 훨씬 더 엄격한 주의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왓킨스 여인은 미국에서 이 책을 처음 출판할 때 북한 지역에서 자기들을 도와주었던 어떤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소설로 분류시켜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원래 이 책의 내용은 실화인데, 어떤 북한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의의 의도에서 소설이라는 장르 명칭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문제적이다. 처음에 소설로 분류되기는 했지만 이 이야기의 내용은 자기의 경험을 그대로 쓴 것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통상 소설은 허구성이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사실성이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된다. 일본에는 사소설(私小說)이라는 소설 장르가 있다. 이것은 소설이지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고백한다는 모순적 원리에 의해 주도되는 장르다. 사실이되 소설이라는 모순을 수많은 사람들이 합리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기실 이 사소설이라는 것도 부가와 삭제 같은 기술적 처리를 통해 허구적인 이야기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다.

사소설이라 해도 사실 그 자체를 그대로 기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야기란 본래 사실이나 진실을 그대로 그릴 수 없는 법이다. 자서전이나 회고록은 사실이나 진실에 가까울 것을 규범으로 삼고 있지만 그렇다 해도 이 규범을 다 지킨다는 보장을 없다. 하물며 소설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의 이야기가 본래 실화였다고 주장한다. 그럼으로써 허구적인 이야기라고 해도 허점이 많을 이 책을 지극히 문제투성이 책으로 만든다.

이 책의 기본적인 줄거리는 함경북도 나남에서 살다가 해방되기 약 한 달 전에 미군기의 폭격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남하를 결정하여 원산, 서울, 부산을 거쳐 후쿠오카로 건너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이미 많은 허점과 허위성이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위도상 나남에 아열대성 식물인 대나무가 과연 자생할 수 있느냐, 해방 전 한반도 지역에 미국의 공습이 있었느냐, 그녀의 가족을 추적했다는 북한 인민군이 해방 전에 창설되어 있기냐 했느냐 하는 등등이 그것이다. 또 그녀의 부친이 만주 731부대 출신으로 생체 실험 등에 종사했다가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했던 어떤 기록에 남아 있는 자가 아니냐 하는 의혹까지 제출되어 있는 상태다.

『문학수첩』2005년 여름호에는 만주의 녹도촌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8월 9일, 10일경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고 공습을 감행하는 바람에 서둘러 기차를 타고 두만강 국경을 거쳐 원산으로, 그리고 여기서 다시 평양을 거쳐서 서울로 남하한 회고담이 수록되어 있다. 전 국립국어원장인 송민 선생은 만주에 이주한 부친을 따라서 만주 북쪽 국경 가까운 곳에서 살다가 소련기의 폭격을 받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갓난아기 동생이 죽은 비극을 겪으면서 남하했었다.  

왓킨스 여인의 책을 검토해 보면 그녀의 가족이 해방되기 약 한 달 전에 나남에서 원산을 거쳐 서울까지 남하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들에 비추어 근거가 없다. 이 이야기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사실성이나 진실성이 있으려면 이 여인의 가족은 나남에서가 아니라 만주 어느 곳에서 탈출한 것이 되었어야 한다. 그것도 8월 9일이나 10일경을 전후한 어느 시점에 남하를 시작한 것이 되었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소련기의 폭격을 받고 한만 국경을 건너거나 남하하는 과정에 전쟁 종결과 함께 일본인 색출에 나선 소련군의 검색에 시달렸어야 한다.

그러나 왓킨스 여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가족은 일본이 패전하기 한 달 전에 나남에서 남하하면서 미군기의 공습을 받고 일본인 색출에 시달리고 “반일공산군”이니 인민군이니 하는 세력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다 어불성설이다.

이 여인의 가족이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 사실이라면 추측컨대 이 가족의 출발지는 나남이 아니라 만주다. 그렇다면 왜 이 여인은 그 출발지를 나남으로 묘사해야 했던 것일까. 출발지가 만주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할 어떤 중요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이 저술이 지닌 기본적인 의도에 대해서 더 깊이 분석해 볼 필요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이 책은 하나의 허구 덩어리인 셈이다. 무엇을 위해서 이 여인은 이런 이야기를 지어낸 것일까.

이 책에서 이 여인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한 세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책의 전반부에 주로 등장하는 것으로 “반일 공산군”이라는 정체모를 집단과 인민군 같은 북한 사회주의 세력들이다. 다른 하나는 이 책의 후반부에 주로 등장한다. 이 여인의 가족이 서울과 부산에 잠시 피난민처럼 거주하고 있을 때 한국의 부랑자들이 일본인들을 못살게 하고 일본 여성들을 성폭행하기를 그야말로 밥 먹듯이 했다는 것이다.

『요코 이야기』의 영문판 표지

여기서 『요코 이야기』가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것이 1986년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때는 냉전체제가 아직 종식되기 전이어서 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칭하면서 스매싱을 가하고 있을 때다. 소련을 비롯한 구 사회주의 국가와 집단을 악의 화신으로 묘사하는 헐리우드 스타일의 영화가 범람하고, 사회주의 국가 및 세력과 자본주의 국가 및 세력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양분하는 반공 스토리가 하나의 장르적 규칙으로 통용되던 때다. 『요코 이야기』는 이런 이분법적 상상력에 ‘충실하다’.

또한 1986년경의 한국은 아직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배하던 5공화국 체제 아래에 있었다. 오늘날에는 일본에서도 한국과 북한을 확연하게 구분하는 시각이 정립되어 가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은 북한보다 낫기는 하지만 야만적인 군사통치 아래서 인권이 가볍게 유린되고 기본적인 생존권도 확보되지 못한 나라라는 부정적 인식이 일본에서는 주류적이었다. 지금도 한국을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각은 결코 전향적이지만은 않다.

2007년 오늘의 시점만으로는 『요코 이야기』의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1933년생으로 조선을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으면서 만주국까지 경영하던 일본의 관리의 딸이었던 이 여성은 자기 책의 후반부에서 전쟁이 끝나가고 또 끝나니까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때리고 빼앗고 성폭력도 서슴치 않았다고 쓴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국과 한국인들은 해방이 되고도 미군정 하에서 구 일본 경찰의 통치 질서를 타파하지 못했던 해방기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별로 사실에 부합하지 못한다. 이 책의 후반부 이야기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어둡고 가난하고 야만적이라는 이미지의 멍울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에 대한 지극히 일본인적인 인식과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항간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이 여인의 본래 의도는 전쟁의 폐해를 고발하고 평화의 가치를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므로 선한 것이 아니냐는 인식은 순진하다 못해 지극히 반-기억적이다. 그녀가 말하는 평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전쟁 말기에 자기 가족이 미국의 폭격을 받고 반일 공산군 같은 사회주의 세력의 추적을 받고 무지몽매한 한국인들의 폭력에 시달렸다는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자신들을 태평양전쟁의 피해자로 인식하기를 즐기고, 그런 인식틀로 후세대를 교육하고자 애쓰는 일본 우익 세력의 악습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들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피해가 상징하듯이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이고 그들 자신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선택하게 된, 본질상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그들 자신을 인식한다. 이런 ‘자학사관’, ‘자학적’ 평화사상은 일본 바깥에 언제나 그들의 생명과 자산을 위협하는 세력을 창조해내는 상상력을 구비하고 있다.

오늘날 이 악역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북한이다. 무라카미 류는 그런 악습을 그대로 수용하여 북한의 특공대가 어느 날 일본의 큐슈 지역을 점령해 버린다는 『요코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이렇게 말도 안 되고 재미도 없는 책이 일본소설 붐을 타고 버젓이 번역되어 한국의 출판시장에 선을 보인다. 요코 가와카미 왓킨스라는 일본계 미국 여성의 『요코 이야기』도 이런 풍토를 배경으로 한국에 버젓이 상륙했던 것이다. 상륙하는 것은 어찌되었던 좋다. 그러나 그러려면 번역이 정확해야 한다. 청소년들 읽으라고 윤색을 가하거나 문장을 바꿔서 이 책의 기본적 성격을 호도하는 일은 옳지 않다. 

이러한 출판 현상들은 한국인들, 한국의 문학인들, 한국의 독자들에게 기억의 가치, 사실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어떤 사람들은 한갓 이야기에 불과한 책을 가지고 그렇게 떠들썩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한국인들 특유의 민족주의적 심성과 편향을 또 한 번 드러낸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요코 이야기』같은 반-기억적, 반-사실적인 이야기가, 아무런 지성적인 검토도 받지 않고, 이것이 사실은 실화였노라는 작가의 주장과 함께, 번역도 충실하지 못한 것을 청소년 교육용이라는 명목으로, 출판시장에 버젓이 내놓을 수 있는 풍토를 반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종종 역사적 사실이야 어째도 좋고 또 역사적 사실 따위를 따져서 무엇하겠느냐는 무지막지한 견해를 펴는 사람들이 많다. 환금주의가 위력을 발휘하다 보니 무슨 책이든 돈을 벌게 해주면 좋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야 사실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어떤 생각을 담고 있든 상관 없지 않느냐는 태도가 만연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태를 용인하는 사람들도 많다. 『요코 이야기』는 그러한 풍토에 부응하여 그런 형태로 출판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나 개인사적 사실 같은 사실과 진실의 차원이 중요하고 이것을 묻는 일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곧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안위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허구와 사실을 적당히 결합시켜 놓은 팩션들, 역사소설들, 번역 환타지물이  번성하는 시대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더 맑고 투명한 판단력이 필요한 시대인 것이다.

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1&title_down_code=002&area_code_num=113&article_num=7229

 

음. 누군가는 이미 했을 것이라고 했던 작업을 역시나, 방민호 선생님이 해주셨다. 물론 일문판등과의 꼼꼼한 비교는 아니었지만 일단 전체적 논지가 안정적이고 내 생각과도 부합한다. (문제는 나는 아직 요코이야기도 안 읽어보았다는 것. 논쟁만 살펴보고 있으니, 내 주장을 필 수도 없다.) 어쨌든 식민지시기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런 '요코이야기'는 내 전공과의 관련성 때문에 어쨌든 '할 일이 생겼구나' 으싸! 하는 반가운(?)일이다.

방민호 선생님께서는 원체 사소설, 자전적 소설 쪽에 관심이 많으시고, 일어 책도 읽으시니. 이 분야에 글을 쓰기에 정말 적합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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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7-01-27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에 약간 오타가 난 것 같네요. 무라카미 류가 쓴게 '반도에서 나가라'였던 것 같은데 요코이야기라고 써졌네요^^;

기인 2007-01-27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 저도 그게 오타인지, 아님 그것도 또 하나의 '요코 이야기'라는 건지; ㅎㅎ

바라 2007-01-27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자일 수도 있겠네요. 무라카미 류 책을 못 읽어봐서 같이 묶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따옴표가 아니라 겹낫쇠로 되어있어서 그 생각은 미처 못해봤네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1-2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그날이 오면>에 마지막 한 권 남은 이 책을 방민호 교수님이 사가셨다는데, 바로 이런 글을 쓰셨군요. 잘 보았습니다아= ^^

기인 2007-02-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렇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