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로 쓰다가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로 옮깁니다. '백수생활백서'에 대한 제 서평은 http://www.aladin.co.kr/blog/mypaper/941892 에 있습니다.
우선은 매너님의 원본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꾸벅. 재미나게 서평 읽고 질문 몇 가지만 씁니다. 호호호;;;
1. 김미현 교수의 평과 김화영 교수의 평이 과연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의견이었던가요. 전 둘 다 긍정적 평가로 읽었습니다만.
후기 자본주의의 도도한 위협에 압도되어 멸종되어 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소설의 독자가 지금 어디로 피난 와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는 듯한 주제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화자는 불필요하게 톤을 높이는 일 없이 나직하고 담담한 어조로 숨 쉬듯이 말한다. 가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엿보이는 깊은 수렁, 그것이 허무인지 무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꾹꾹 눌러서 억제한 어떤 절규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그 깊은 수렁 위를 무심한 표정으로 건너간다. ... 오직 독자의 영역에서 한 바자국도 밖으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이 길고 가느다란 삶은 마침내 가장 겸손한 독자를 오늘의 폭력적인 삶에 가늘고 길게 저항하는 치밀한 소설가로 탈바꿈시킨다. - 김화영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그 자체로 불후의 도서관인 소설, 그 옆에 영화관이 있는 소설, 그 속에서 자족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있기에 이 소설은 21세기적 유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나비가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불가능한 이상을 실현 가능한 일상으로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소설은 환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는 주인공을 이제 우리 한국 소설에서도 갖게 되었다. - 김미현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교수)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것은 전체 맥락에 대한 오독이거나, 일부분에 국한시킨 표현으로 한정되는게 옳다고 봅니다. 오독을 수정하시거나, 어느 부분에 국한되어 '극과 극이 갈리는' 것인지 정확히 표현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2.주인공이 한다는 '치열한 반성'이 어느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경제적 기반에 기생한다는 자각마저 없이 자신의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고민이 고작 사춘기 소녀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게 그 '허무와 권태'가 아닐련지요?
3. 제가 지적한 부분 이외에도 '자기 자신을 긍정하려는 주인공'이라는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묘사가 나옵니다. 연애에 개시니컬하던 주인공이 괜찮은 남자에게 처음 거리를 두다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이 변화의 과정이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백수생활백서의 끝이 어느 남성과의 사랑 - 그것도 남자가 다른 여자에 받은 상처를 치유한다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장치 - 으로 맻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뭐 자신의 삶의 패턴을 바꾼다는 얘기는 없지만 끝으로 갈수록 사랑에 대한 떨림섞인 어조로 그 기대감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스스로 자족하는 주인공상과는 거리가 있는 걸로 생각됩니다.
4. 정말 생각해 볼 건, 이 책이 오늘의 작가상은 물론 '내 맘대로 살테다!'하면서 적잖은 사람들을 낚은 현상입니다. 사회/경제적 고민이 송두리채 도려져내고 만만치 않은 책 구절 몇 개, 문장 몇 개 주어삼기면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떠받들어지고 숭상되어지는, 프리터 & 오타쿠 사회화 물결에 적잖은 사람이 동감하고, 심지어는 문학상까지 타냈다는 점에 있다고 봅니다. 문학계(?)가 시대흐름, 타이밍에 쫓아가려는 안간힘을 안쓰러울 정도로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여튼간 50년후 이 종이뭉치가 다뤄질 코너는 문학계간지나 고전 코너가 아니라, 50년전 시대상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의 한 꼭지가 될거라는데 한 표 던집니다.
5. 입대 며칠 안 남기고 날씨 쌀쌀해졌네요. 가시는 날까지 건강 조심하시길. =)
매너님께.
사실 이 서평은 매너님의 백수생활백서에 대한 서평을 읽고 나서 쓴 것입니다. 읽기 시작하면서는 매너님과 비슷한 판단을 이 책에 대해서 했는데, 왠지 남들이 '아니요'라고 하면 다시 삐딱하게 읽고 싶은 반골기질과, 요즘은 문학이란 무엇일까, 특히 소설은 왜 쓰는 것일까 라는 생각과 예전 제 판단들에 대해서 (현실의 재현/운동의 전위/이데올로기 투쟁) 회의하고 있는 중이라서 이 책과 함께 제 회의를 좀 더 밀어붙이려다가 중간에서 멈춘 어정쩡한 글입니다. 결국 철학책이나,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책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이유,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무엇일까라는 문제가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진로와도 연관되겠지만요. ^^; 어쨌든 읽어주시고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사하네요 ^^
1. 극과 극으로 심사위원들이 평가했다는 것은, 긍정적/부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족하는 주인공'과 '억제한 어떤 절규'라는 두 평가가 심히 반대에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고 사랑하는 주인공'이라는 평가와 김화영 선생의 평가는 정말 다른 것 같습니다.
2. 아버지에 경제적으로 기생하고 있다는 부분. 문제적인 부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책 중에서 주인공이 계속 자신은 경제적으로 자립에 가깝고 돈을 별로 안 쓰기 때문에 알바로 가능하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는 사실 말 뿐이지요. 실제로 독립해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이 여인네의 철없음(?)에 조금 어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주목했던 부분은 그러한 '사춘기 때의 고민'을 일시적인 고민이 아니라 지속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왜 나는 남들과 같은 삶을 선택해야 할까? 왜 사는 것일까" 등 어찌 보면 유치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리면서 남들과는 다른 '백수'라는 삶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주인공에 대한 설정이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기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여러가지 복잡하게 생각하게 해줍니다. 결국 어떤 것이 선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기생이 사춘기적 고민들을 연장시킨 것인지, 아니면 사춘기적 고민들의 연장이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기생으로 말미암았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설정 자체 또한 이 소설의 '심연' 또는 독자들이 해석에 개입할 수 있는 틈을 넓혀주는 것 같습니다. 매너님도 지적하신 것처럼 ‘사회적/경제적 고민이 송두리째 도려내어’있는 것, ‘사회, 경제’를 괄호 속에 묶어 놓은 것 또한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작가는 왜 ‘사회, 경제’를 괄호 속에 묶은 것일까요. 왜 주인공으로 하여금 ‘사회, 경제’에서 등을 돌리게 설정한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이 생산적이고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지 않은지 또한 그가 말하는 것보다 그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까요. (뭔가 탐정흉내 -_-;; )
아버지에게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바를 하면서 '백수'생활을 하는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사회'를 상당부분 괄호치고, '아버지'에 기생해서 사는 주인공이라는 설정. 이 주인공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어떤 집단으로 (매너님도 그러한 '집단'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생각한다면 이 또한 의미심장하지 않을까요? 4번과 관련하여 나중에 더 말씀드릴 테지만, 이를 현상에 대한 재현으로 본다면, 독자로 하여금 이에 대해 의문하고 반성케 하는 것 또한 소설의 기능일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의 기본 설정인 '아버지에 대해 경제적으로 기생하면서 이를 스스로는 별반 반성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알바로 자신의 하고 싶은 독서로 인생을 채워나가는 여성' 자체가 작가의 의식수준의 미비를 보여주거나 작품 수준의 질적 저하로 나타난다기 보다는, 작품을 읽으며 해석할 여러 여지를 주는 것 같습니다.
3. 스스로 자족하는 주인공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자족하려는 주인공이지만 어떤 심연에 두려워하고 있고 이를 언뜻언뜻 내비치는 주인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연애에 대해서 쿨하게 생각하는 주인공이라는 것에도 동의하지만, 결국 결말에 남성과의 사랑으로 맺어진다는 해석은 제 해석과 좀 다릅니다. 저는 결말에도 그 남성과 이성간의 연애를 하는 것이라고 읽지 않았는데요 ^^;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 더 말해보겠습니다.)
4. 4번이 역시 핵심인 것 같습니다. 이는 문학이, 소설이 왜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매너님 말씀처럼, 일본에서는 이미 사회 문제화된지 오래이고, 남한에서도 서서히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프리터&오타쿠 사회화 물결. 사회학이나 철학에서 할 수 있는 일/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에서 그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 말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예술,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론화되기 이전의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아닐까요. 더 진부한 말을 해보자면, '가상을 통해 어떠한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소설이 해야 할 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프리터 & 오타쿠 사회화 물결'에 대해, 그 '프리터'를 1인칭 화자로 설정하면서 소설을 쓴 이 "백수생활백서"는 그런 점에서 작가 나름의 하나의 문학적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존재에 대해서요.
제목자체도 풍자적으로, 또는 소설의 주인공을 비웃는 (그닥 날카롭지는 않게) 듯한 '백수생활백서'라는 것. 외부의 시선으로는 '백수'에 불과한 우리의 주인공. 그러나 그녀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고, 그녀라는 독립체를 형성시킨 조건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비자각적 기생)이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독자들이 이러한 설정과 이러한 설정이 빚어내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러한 주인공을 ‘경험’해보는 것, 이로써 독자로 하여금 오타쿠/프리터에 대한 한 문학적 질문을 하고 대답을 내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세계의 문학> 121호에 작가 박주영에 대한 인터뷰가 실렸지만,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작가 또한 소설을 완성한 이후에는 하나의 독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닥 신경쓰지는 않고 있습니다. 소설의 결말부분을 인용해봅니다.
나한테는 이미 익숙해진 읽기와 이해의 방식이 있다. 책을 읽듯 사람을 읽는다. 그는 한 번 읽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책이다. 처음 읽으면 이야기가 보이고, 두 번 읽으면 인물이 살아나고, 세 번 읽으면 배경이 그려지고, 네 번 읽으면 움직임이 읽히고, 다섯 번 읽으면 낱말 하나하나가 다르게 다가와서 세월을 두고두고 읽어야만 하는 책. 나는 그를 다시 읽게 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나에게 다른 건 몰라도 시간은 있다.
서른 살이 되었지만 내 인생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내가 아는 건 시간이 함부로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나는 세상의 속도를 무시한 나 자신만의 속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책과 마주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속도이다. 같은 페이지의 책도 저마다 다른 속도로 읽을 수 밖에 없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그리고 원한다면 언제나 다시, 또 새롭게.
누군가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듯 나는 책을 믿는다. (327)
매너님은 '그'와 '나'가 이제 연애를 시작할 것이라고 읽으셨지만, 저는 책 '오타쿠/프리터'인 '나'가 책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을 읽어볼 결심을 하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물론 그래도 '나'는 '책'을 믿을 뿐이고 '책'처럼 '그'를 읽겠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일종의 매개가 되겠지요.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다시 읽히는 책. 마지막에 박주영이 적어놓은 글귀가, 이 책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시간이 나면 저는 다시 책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이 주인공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작가는 왜 이러한 설정을 했을까. 작가는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읽는 것일까. 에서 시작해서, 세상이라는 것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상의 방법과, 이것이 반영하는 세상 현상, 그리고 이를 통해 판단되는 것들. 등. (문득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ㅎㅎ)
어쨌든, 문학의 역할 중 하나는, 이렇게 읽고 다른 해석을 가진 두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일 듯 합니다. 그것이 바로 TEXT라는 것이겠죠. :)
5. 우왕부왕 말이 길었습니다. 훈련소 가기 3일전. 안 그래도 고열과 감기에 신음하고 있는 기인이었습니다. 흑흑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