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과 통합 추진… “인문학 사망선고” 반발::)

인문학 위기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가운데 광운대가 국어국문 학과를 사실상 폐지하는 개편안을 마련해 논란이 일고 있다.

15일 광운대가 내놓은 ‘동북아대학 신설 계획안’에 따르면, 광운대는 인문대학 소속의 국문과·영문과·중국학과·일본학과와 경영대학 국제통상학과 등 5개 학과를 통합해 2008학년도에 동북아대학을 신설할 계획이다. 하지만 동북아대학의 6개 전공 분야 는 영어 필수, 중국어와 일본어 중 택일, 통상·문화·국제관계 중 택일하도록 돼 있다. 국문학은 필수나 선택 학문에서 제외된 것이다.

국문과 교수들은 “학교측에선 새로운 강좌를 신설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국문학과의 정체성은 없어지는 것”이라며 “인문학의 기초인 국문과를 폐지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성토 했다. 이들은 또 “담당 교수는 물론 학생들에게조차 알리지 않 은 채 밀실 논의가 이뤄졌다”며 “인문학 위기 얘기가 나올 때 부터 국문과 혁신안을 수차례 내놓기도 했지만 돌아온 건 ‘사망 선고’뿐”이라며 분개했다.

하지만 학교측은 개편안에 대해 ‘전공의 벽을 허물고 국문학과 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권태한 대외협력처장은 “국문학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틀 속에서 다른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라며 “한국문화의 근본인 문학 과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등 우리 문화의 세계화에 국문학과가 이바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당연 나름 '의의'는 있는데, 이것이 국문과 교수/학생을 제외하고 자기네들 맘대로 규정한 것이라는 점이 말이 안된다.)

권 처장은 또 “2025년엔 국내 대학 입학 인구가 크게 줄어 광운대 같은 규모의 4년제 대학 100개는 없어질 것”이라며 “IT 대 학이라는 명성뿐 아니라 동북아지역 최고 전문가 대학으로 성장 하기 위해 이번 추진안을 내놓았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광운대는 15일 오후 전체 학생 공청회를 열고, 단과대별로 세부 안을 마련 내년초까지 최종안을 확정할 방침이다.

윤석만기자 sam@munhwa.com

광운대 국어국문학과는 국문학과 교수진이 6분 (국어학 2/고전 2/현대 2)로 비교적 국어국문학의 비중이 큰 학교다. 특히 조영복 교수라는 현대시 분야에서는 왕성한 활동과 독특한 연구로 (내가 ^^) 주목하고 있는 선생님이 계셔서 더욱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앞으로 국어국문학은 '수요자'의 필요에 따라서 많이 변화될 수 밖에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 와중에 교수진이나 학생들의 의견 참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또 '밥그릇'싸움이라고 폄하되면서 학교 당국자들은 국문학 당사자들을 논의에서 사실상 배제시키고 일을 진행시킬 것 같아서 걱정이다. 나도 이제 슬슬 '사파'의 길을 걷기로 하고 있지만, 국어국문학의 상당 부분은 변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다른 어문학을 전공하는 친구들이나, 철학을 전공하는 선배의 말을 들어보면 '그래도' 국어국문학은 편한 입장이라고 한다. 시장논리에 따라서 점점 없어지는 과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중남미, 아프리카 전문가들이 없고, 한국외대나 부산외대에 중남미/아프리카 '언어'를 전공한 분들이 전문가로 '취급'되는 실정이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없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홈이 너무 깊게 파인 공간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학생/예비 학자들의 문제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어떤식으로 광운대가 변해갈지 지켜볼 일이다. 최근 국문과가 많이들 변하고 있다고 하는데, 다른 국문과들도 변하겠고 가장 '마지막'에 국립대 국어국문학과도 변할 것이다. 그러면 그 와중에 학생들, 학자들, 교수들도 변하겠지. 그 변화의 과정 중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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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12-17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하네.

기인 2006-12-1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변하기는 해야 될테지만, 너무 급작스럽고
정말 '대화가 필요해'입니다. ㅋ 대화로 잘 될지도 의문이지만...
지켜봐야죠. 어떻게 변해갈지.
 

 

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2. Dreaming the Body Politic


 

서: 개관

   이 책의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도시라는 공간적 구조의 변모에 따른 산업 구조, 노동 방식, 거주민들의 (근본적/구조적)변모일 터이고, 이러한 변화는 ‘근대성’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이를 잘 드러내는 도시가 ‘파리’이고 (사실 최근 서울의 변모도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우리식 근대’의 상징 불도저/현대건설과 이명박/박정희) 당대의 도시와 그 속의 인물들의 내면풍경을 잘 드러내 주는 발자크, 플로베르의 작품들, 당대 시사만화격인 도미에의 삽화들1), 실제 파리의 변모를 보여주는 사진들을 통해서 이 책은 통합적으로 ‘파리’를 재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부는 책 전체의 서론격으로 1848-1870년에 이러난 파리의 ‘근대적’ 변모의 전시기, 즉 proto-modern을 다룬다. 시기적으로 1830-1848로 1830혁명2) 이후의 7월 왕정으로 부르주아 세력이 집권한 시기에 이루어진 사상적(특히 도시에 대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서론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근대’가 ‘단절’이라는 것은 신화라고 단정하며 ‘근대성’이 파리라는 도시에서 확고하게 드러나기 이전에 있었던 움직임에 소위 ‘근대의 맹아’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보이는 장이 바로 이 1장이다.

   사실 이러한 맹아/기원 논쟁은 어떤 의도로 역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판단될 문제로, 어떠한 역사적 시기도 그 이전 시기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그 이후에 있는 일이 발생한다는 상식적이고 논리적인 점을 부각시킨다면 ‘혁명’이나 ‘단절’과도 같은 개념은 비학문적인 과장에 그치게 된다. ‘역사학자’의 임무 중 하나가 결국 필연적 원인-결과를 잡아내는 것이라면 이러한 접근태도는 논리적으로 당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하비는 1장에서는 발자크의 묘사를 통해서 당대 도시 거주민들의 내면풍경을 드러내며, 도미에의 비판적 시각(하비의 입맛에 맞는)으로 구성된 당대 파리의 시사적 문제들을 재구성하는 것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당대 파리와 파리인들을 보여주고 있다.

   (1970-80년대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론’은 이와는 조금 다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조선의 ‘근대’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외부’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기에 30년대 태생 한반도의 학자들은 한반도 자체를 ‘독립변수’화 시키기 위해 ‘자생론’을 내세운다. 물론 동아시아, 나아가 당대 국제정세에서 ‘일정이상’ 벗어나있는 독립변수로서의 한반도라는 것이 지금도 물론이지만 그 때도 말이 안 되는 설정임은 분명하다. 결국 이는 하나의 가정으로 ‘독립변수’라고 가정한 다음에 설명할 수 있나 한번 보자라는 식으로 될 수밖에 없다.)

   2장 ‘신체정치’에서는 당시 파리/프랑스/유럽에서 도시-근대성이라는 주제에 관련된 지적흐름을 좇으며 이를 통해 앞으로 본격적으로 서술될 2부에서 파리를 ‘근대적 구조’를 가진 구성체로 만든 ‘오스망’ (이명박?)이라는 관료의 사상/정책/행동이 ‘획시기적’인 것이 아니라 당대의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본: 2. Dreaming The Body Politic

a. Body Politic

Body Politic이라는 것은 옮긴이의 말에 따르자면 “자연적 신체의 은유를 사용하며, 도시 개조 논리에 활용되는 유기체적 순환이라는 개념과도 관련된다. 신체가 조화를 이루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신체정치란 구성원들의 행복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집단적 기획을 통해 공통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상은 많은 사회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각자의 유토피아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529-530)

 

  1840년대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개혁가들은 도시를 미래의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할 어떤 것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정치적ㆍ사회적ㆍ물질적 유기체 형태-하나의 신체정치-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 (98)

  사실 이 자체가 ‘기계적 세계관’=‘근대성’(대표적으로 합리론의 데카르트-경험론의 베이컨 등)과는 유리가 있다. 그래서 나중에 서술되지만 1848년 이후 오스망 시대는 proto-오스망과는 다르게 이러한 시각을 잃어버린다. 어쨌든 body politic같은 개념이 나오면 우리는 거의 즉시 ‘푸코’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와는 별반 상관없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푸코 이야기가 중간에 한 번 나오기는 하지만 상관없는 문맥이다.

b. 2장의 질문

2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졌다. (앞서는 전체적 책의 입장에서의 2장의 역할/이 부분은 2장 자체적인 목적)

특히 진보진영의 사람들은 1848년 이전에는 이 도시와 사회를 어떤 것으로 보았고 상상했는가? 그들은 장래에서 어떤 가능성을 예견했는가? 제국이 맞서서 분투해야 하는 이 모든 것들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가?(93)


c. 오스망-이전과 오스망

서론에서 누차 언급한 것처럼 오스망-이전(proto-오스망)과 오스망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최근에 부각되는 장면 내각-박정희의 새마을운동/근대화의 연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위정자/정치인들은 자신들의 ‘단절/혁명성/새로움’을 부각시키려고, 차이를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수구/보수마저도. 박정희나 사후 박정희 추종자들이 그의 ‘혁명적 업적’으로서의 근대화를 강조하는 것이나 오스망-보나파라트가 자신들의 혁명적 업적으로서의 근대화를 강조하는 것이 겹친다. 그 이유와 목적 또한.

 

콩시데랑, 페리몽, 메이나디에, 심지어 랑케탱까지도 설령 생시몽주의와 푸리에의 이상 덕분에 그들의 사상이 활기를 얻었다 할지라도, 유토피아적 이상보다는 실용적인 계획을 세웠다. 오스망이 실제로 행한 일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우리는 이런 온갖 사상들이 그 배경에서 들끊고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그는 무無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며, 이러한 개척자적 사상(그가 달리의 <르뷔>를 읽은 것은 확실하다)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그가 가진 문제는 이러한 발상들이 여러 측면에서 보나파르트주의를 증오하는 정치적 전제와 유토피아적 꿈에서 생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오스망이 철저한 단절을 전파했다는 신화는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일의 대부분이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이미 배아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서, 서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1848년 이후 근대성이 새롭고도 특별한 단계에 들어섰으며 오스망이 이 새로운 형태의 근대성이 다듬어지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단느 사실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129)


d 1848년 이전-이후

1848년의 붕괴 이후 온갖 종류의 결과가 나타났다. 만약 사회공화국의 개념이 탄압받는다면 하나의 신체정치로서 공화국과 도시 사이의 강력한 연합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감정을 가진 존재이자 하나의 신체정치라는 지위가 부정된다면 도시는 도대체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겠는가? 그 결과는 표상의 위기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1848년의 혁명은 도시를 표현하는 급격히 상이한 방식들을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인자였다. 이것은 오스망과 그의 선배들인 베르제르와 랑뷔토와의 차이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그 차이는 도시가 발자크와 플로베르의 작품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통해서도 추적될 수 있다.(131)

표상의 위기와 혁명의 관련성. <프랑스 혁명의 문화적 기원> 등. 68혁명 이후 강조되는 ‘표상/이데올로기’ 결국 진정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물질적 제반 조건/관계를 변화시키며 이에 따라(인과라기보다는 알튀세식으로 ‘최종심급’으로서) 표상의 변모도 ‘함께’ 일어나는 것. 그런데 정말 이 하비라는 학자는 이러한 부분에서는 아우어바흐의 전통을 잇는 것 같은 세밀한 관찰을 보여준다.


옳건 그르건 간에 발자크와 당대의 다른 많은 사람들(그 도시의 적절한 재건설을 추구했던 유토피아 사상가나 도시 이론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소유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며, 그것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사회 질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개조할 수는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1848년이 지난 뒤, 그 도시를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들만의 특별한 이익과 목적에 맞추어 개조하면서 대중에게는 상실감과 허탈감만 남겨준 것은 오스망과 개발업자, 투기꾼, 자금주, 시장의 힘이었다. 적어도 플로베르는 이러한 여건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감정을 가진 존재” 혹은 “신체정치”는 커녕 하나의 전체로서의 도시에 대한 단일한 정의도 없다. 플로베르는 그 도시를 하나의 무대장치로 환원시켰다. 아무리 아름답게 건설되고 고상하게 꾸며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속에서, 또 그 위에서 진행되는 인간 행동의 배경 구실을 할 뿐이다. 도시는 죽은 대상이 되었다(오스망의 계획에서 대체로 그렇듯이). 오스망이 업무를 완수한 뒤인 1869년에 출판된 󰡔감정교육󰡕은 그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 없는 사물에 대한 정교한(그리고 아주 뛰어난) 묘사가 풍부하다. 그 도시는 우리의 감각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파악되지만 “감정을 가진 존재”나 “신체정치”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잃어버린다. (...) 1848년에 확실히 잃어버린 것은 도미에의 판화에서 상징되었듯이, 젖먹이는 국가로서의 신체정치라는 발상이었다. (133~134)

 

결국 ‘아름다웠던’ 시절에의 꿈 속에서는 ‘소외’가 일어나지 않았던 셈. 생산수단과 생산주체의 분리와 노동과정에서의 소외가 도시와 대중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온전히 자본주의-근대-기계적 세계관이 ‘파리’에 정착되는 시점으로서의 1848년으로 볼 수 있을까?



ps. 당시 파리의 ‘조합주의’운동과 식민지 조선의 조합주의 운동


114 생시몽주의자들에게 근본적인 이념은 산업인들의 생산조합이었지만 이것은 두 가지 구별되는 차원으로 운영되었다. 신체정치 내부에서의 차별화된 이익(특히 기능이나 노동의 분업에서 발생하는)은 그러한 이익을 표출하는 생산조합으로서 조직될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자와 예술가는 그들만의 심의회 조직을 갖게된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조합들은 공동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산업인들 간의 계급적 연대와 자원의 공동출자와 생산성과 재능에 따른 지급에 의존하는 "일반 생산조합"에 소속되어야 했다.

115 노동자 자신들이 결성한 독립적 생산조합이라는 발상은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 생각은 혁명 뒤에 억압을 받았다가 1830년의 혁명기에 강력하게 다시 등장했고, 생시몽주의 내의 반대론자인 뷔쉐Buchez에게서 즉각적인 지지를 받았다. 뷔쉐는 보편적 생산조합의 원칙이 제시하는 하향식 관점에 반대하며 노동자들을 임금 체제에서 해방시키고 경쟁의 불공정한 겨로가에 대해 그들을 보호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생산자들의 상향식 생산조합을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공장 소유주와 고용주들은 귀족이나 지주와 마찬가지로 기생적 존재들이었다.

116~117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의 생산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는 발상은 여러 종류의 직업에서 바탕이 되었고 점점 더 큰 인기를 모았다. 그것은 공화주의자와 노동자들이 주로 읽는 간행물에서 다루어지는 논의의 중심 의제가 되었다. 주된 차이는 노동 규율과 기술 혁신을 보장하기 위해 생산조합들 간의 경쟁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쪽과 업계 전체에 대한 궁극적으로 독점적 통제권을 갖고자 하는 쪽 사이에 있었다. 이 운동은 1849년에 작성된 생산조합연합l'union des Associations을 위한 정관(대체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잔 드로앵Jeanne Deroin의 노력으로 작성된)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정관이 막 발효되려는 찰나에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운동은 탄압되었다. 그 당시 파리에는 최대 120개의 직업에서 일하는 5만 명의 구성원을 거느린, 거의 300개의 사회주의 생산조합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반 이상이 1851년의 쿠데타까지 살아남았다가 그 이후에 탄압되었다.

 

1920년 1930년 조선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조합주의' 운동이 광범위 전개되었던 흔적과 마주치게 된다. 이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되어진 것은, 당대 공산주의/사회주의 필자들이 이에 별반 관심이 없었다는 것.

자생적 움직임이었을까. 19세기 초중반 파리의 상황과는 어떠한 연관이 있었을까. 거진 와해되었던 조선의 아나키 세력들. 또는 공산주의 세력들의 분파들과의 연관성. 내지는 '자발성'에 대한 질문들.

자료를 더 보고, 생시몽, 푸리에, 푸르동을 공부하면서 생각해볼 문제다. 외국의 역사/이론서를 보면 조선의 상황과 비슷한 점만이 눈에 띄는데, 결국 이 비슷한 점에서 시작해서 차이점 또한 밝혀내야 한다는 주문/혹은 강압

 

1) 유용한 방법으로 한국에서는 김승옥의 시사만화를 토대로 4.19혁명 이후 남한 사회의 총체적 모습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천정환 외(2005)에 의해 이루어진 바 있다. 시사만화라는 것은 그 ‘시사성’과 전방위성 때문에 당대 사회를 특정 시각을 통해 구성/재구성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2)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유주의자 및 혁명주의자들이 보수적 군주와 정부에 맞서 일으킨 봉기(1830~32)를 통틀어 일컫는 말. 혁명의 움직임은 1830년 7월 26일, 프랑스에서 샤를 10세가 3가지 법령을 공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즉 하원을 해산하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했으며 선거법을 개정해 유권자의 3/4이 선거권을 상실했다. 파업과 항의가 일어났고 뒤이어 무장충돌이 벌어졌다. 왕정군은 이 반란을 억누를 수 없었고 7월 27~29일의 3일간에 걸친 싸움이 끝나자 샤를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급진파들은 공화정을 세우고자 했고 귀족주의자들은 샤를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중산층은 1792년에 프랑스 공화정을 위해 싸운 경력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에게 왕관을 넘겨주자는 자신들의 결정을 관철시켰다. 루이는 '프랑스 국민의 왕'이 되겠다고 승낙했다. 이 '7월혁명'이 끝난 뒤 상원은 세습제 기구에서 선출제 기구로 바뀌었고 특별재판소는 폐지되었으며 국왕과 교회와의 동맹관계도 끝이 났다. 그리고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 대신에 삼색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용기를 얻은 전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전면적인 해방전쟁을 바랐으나 대부분의 상황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루이 필리프는 전쟁을 바라지 않았으며 기대와는 반대로, 러시아 차르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킨 폴란드인들을 지원하지도 않았다. 결국 폴란드 봉기는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으로 합병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여러 왕국에서 일어난 봉기도 실패했다. 그러나 벨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1831년 독립국가로 승인받았다.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전쟁을 치렀으며, 마침내 1832년에 유럽 강대국들로부터 독립주권국가로 승인받았다. (empas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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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cnunc 2006-12-1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아주 잘 읽고 도움 받고 갑니다. 관악구민을 위해
고생 많이 한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아참, 각주 1의 책은 06년이 아니라 0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기인 2006-12-1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ㅎㅎ 근데 누구신지 잘 모르겠어요~ ^^;;
천정환 선생님이신 것도 같고 아뒤가 어디서 많이 본 건데;;

기인 2006-12-1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 감사드립니다. 수정했습니다 ^^
 

 

답글로 쓰다가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로 옮깁니다. '백수생활백서'에 대한 제 서평은 http://www.aladin.co.kr/blog/mypaper/941892 에 있습니다.

 


우선은 매너님의 원본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꾸벅. 재미나게 서평 읽고 질문 몇 가지만 씁니다. 호호호;;;


1. 김미현 교수의 평과 김화영 교수의 평이 과연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의견이었던가요. 전 둘 다 긍정적 평가로 읽었습니다만.



후기 자본주의의 도도한 위협에 압도되어 멸종되어 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소설의 독자가 지금 어디로 피난 와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는 듯한 주제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화자는 불필요하게 톤을 높이는 일 없이 나직하고 담담한 어조로 숨 쉬듯이 말한다. 가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엿보이는 깊은 수렁, 그것이 허무인지 무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꾹꾹 눌러서 억제한 어떤 절규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그 깊은 수렁 위를 무심한 표정으로 건너간다. ... 오직 독자의 영역에서 한 바자국도 밖으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이 길고 가느다란 삶은 마침내 가장 겸손한 독자를 오늘의 폭력적인 삶에 가늘고 길게 저항하는 치밀한 소설가로 탈바꿈시킨다. - 김화영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그 자체로 불후의 도서관인 소설, 그 옆에 영화관이 있는 소설, 그 속에서 자족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있기에 이 소설은 21세기적 유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나비가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불가능한 이상을 실현 가능한 일상으로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소설은 환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는 주인공을 이제 우리 한국 소설에서도 갖게 되었다. - 김미현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교수)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것은 전체 맥락에 대한 오독이거나, 일부분에 국한시킨 표현으로 한정되는게 옳다고 봅니다. 오독을 수정하시거나, 어느 부분에 국한되어 '극과 극이 갈리는' 것인지 정확히 표현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2.주인공이 한다는 '치열한 반성'이 어느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경제적 기반에 기생한다는 자각마저 없이 자신의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고민이 고작 사춘기 소녀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게 그 '허무와 권태'가 아닐련지요?


3. 제가 지적한 부분 이외에도 '자기 자신을 긍정하려는 주인공'이라는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묘사가 나옵니다. 연애에 개시니컬하던 주인공이 괜찮은 남자에게 처음 거리를 두다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이 변화의 과정이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백수생활백서의 끝이 어느 남성과의 사랑 - 그것도 남자가 다른 여자에 받은 상처를 치유한다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장치 - 으로 맻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뭐 자신의 삶의 패턴을 바꾼다는 얘기는 없지만 끝으로 갈수록 사랑에 대한 떨림섞인 어조로 그 기대감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스스로 자족하는 주인공상과는 거리가 있는 걸로 생각됩니다.


4. 정말 생각해 볼 건, 이 책이 오늘의 작가상은 물론 '내 맘대로 살테다!'하면서 적잖은 사람들을 낚은 현상입니다. 사회/경제적 고민이 송두리채 도려져내고 만만치 않은 책 구절 몇 개, 문장 몇 개 주어삼기면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떠받들어지고 숭상되어지는, 프리터 & 오타쿠 사회화 물결에 적잖은 사람이 동감하고, 심지어는 문학상까지 타냈다는 점에 있다고 봅니다. 문학계(?)가 시대흐름, 타이밍에 쫓아가려는 안간힘을 안쓰러울 정도로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여튼간 50년후 이 종이뭉치가 다뤄질 코너는 문학계간지나 고전 코너가 아니라, 50년전 시대상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의 한 꼭지가 될거라는데 한 표 던집니다.


5. 입대 며칠 안 남기고 날씨 쌀쌀해졌네요. 가시는 날까지 건강 조심하시길. =)




매너님께.


사실 이 서평은 매너님의 백수생활백서에 대한 서평을 읽고 나서 쓴 것입니다. 읽기 시작하면서는 매너님과 비슷한 판단을 이 책에 대해서 했는데, 왠지 남들이 '아니요'라고 하면 다시 삐딱하게 읽고 싶은 반골기질과, 요즘은 문학이란 무엇일까, 특히 소설은 왜 쓰는 것일까 라는 생각과 예전 제 판단들에 대해서 (현실의 재현/운동의 전위/이데올로기 투쟁) 회의하고 있는 중이라서 이 책과 함께 제 회의를 좀 더 밀어붙이려다가 중간에서 멈춘 어정쩡한 글입니다. 결국 철학책이나,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책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이유,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무엇일까라는 문제가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진로와도 연관되겠지만요. ^^; 어쨌든 읽어주시고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사하네요 ^^



1. 극과 극으로 심사위원들이 평가했다는 것은, 긍정적/부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족하는 주인공'과 '억제한 어떤 절규'라는 두 평가가 심히 반대에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고 사랑하는 주인공'이라는 평가와 김화영 선생의 평가는 정말 다른 것 같습니다.


2. 아버지에 경제적으로 기생하고 있다는 부분. 문제적인 부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책 중에서 주인공이 계속 자신은 경제적으로 자립에 가깝고 돈을 별로 안 쓰기 때문에 알바로 가능하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는 사실 말 뿐이지요. 실제로 독립해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이 여인네의 철없음(?)에 조금 어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주목했던 부분은 그러한 '사춘기 때의 고민'을 일시적인 고민이 아니라 지속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왜 나는 남들과 같은 삶을 선택해야 할까? 왜 사는 것일까" 등 어찌 보면 유치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리면서 남들과는 다른 '백수'라는 삶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주인공에 대한 설정이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기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여러가지 복잡하게 생각하게 해줍니다. 결국 어떤 것이 선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기생이 사춘기적 고민들을 연장시킨 것인지, 아니면 사춘기적 고민들의 연장이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기생으로 말미암았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설정 자체 또한 이 소설의 '심연' 또는 독자들이 해석에 개입할 수 있는 틈을 넓혀주는 것 같습니다. 매너님도 지적하신 것처럼 ‘사회적/경제적 고민이 송두리째 도려내어’있는 것, ‘사회, 경제’를 괄호 속에 묶어 놓은 것 또한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작가는 왜 ‘사회, 경제’를 괄호 속에 묶은 것일까요. 왜 주인공으로 하여금 ‘사회, 경제’에서 등을 돌리게 설정한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이 생산적이고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지 않은지 또한 그가 말하는 것보다 그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까요. (뭔가 탐정흉내 -_-;; )


아버지에게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바를 하면서 '백수'생활을 하는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사회'를 상당부분 괄호치고, '아버지'에 기생해서 사는 주인공이라는 설정. 이 주인공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어떤 집단으로 (매너님도 그러한 '집단'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생각한다면 이 또한 의미심장하지 않을까요? 4번과 관련하여 나중에 더 말씀드릴 테지만, 이를 현상에 대한 재현으로 본다면, 독자로 하여금 이에 대해 의문하고 반성케 하는 것 또한 소설의 기능일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의 기본 설정인 '아버지에 대해 경제적으로 기생하면서 이를 스스로는 별반 반성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알바로 자신의 하고 싶은 독서로 인생을 채워나가는 여성' 자체가 작가의 의식수준의 미비를 보여주거나 작품 수준의 질적 저하로 나타난다기 보다는, 작품을 읽으며 해석할 여러 여지를 주는 것 같습니다.


3. 스스로 자족하는 주인공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자족하려는 주인공이지만 어떤 심연에 두려워하고 있고 이를 언뜻언뜻 내비치는 주인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연애에 대해서 쿨하게 생각하는 주인공이라는 것에도 동의하지만, 결국 결말에 남성과의 사랑으로 맺어진다는 해석은 제 해석과 좀 다릅니다. 저는 결말에도 그 남성과 이성간의 연애를 하는 것이라고 읽지 않았는데요 ^^;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 더 말해보겠습니다.)


4. 4번이 역시 핵심인 것 같습니다. 이는 문학이, 소설이 왜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매너님 말씀처럼, 일본에서는 이미 사회 문제화된지 오래이고, 남한에서도 서서히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프리터&오타쿠 사회화 물결. 사회학이나 철학에서 할 수 있는 일/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에서 그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 말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예술,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론화되기 이전의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아닐까요. 더 진부한 말을 해보자면, '가상을 통해 어떠한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소설이 해야 할 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프리터 & 오타쿠 사회화 물결'에 대해, 그 '프리터'를 1인칭 화자로 설정하면서 소설을 쓴 이 "백수생활백서"는 그런 점에서 작가 나름의 하나의 문학적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존재에 대해서요.


제목자체도 풍자적으로, 또는 소설의 주인공을 비웃는 (그닥 날카롭지는 않게) 듯한 '백수생활백서'라는 것. 외부의 시선으로는 '백수'에 불과한 우리의 주인공. 그러나 그녀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고, 그녀라는 독립체를 형성시킨 조건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비자각적 기생)이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독자들이 이러한 설정과 이러한 설정이 빚어내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러한 주인공을 ‘경험’해보는 것, 이로써 독자로 하여금 오타쿠/프리터에 대한 한 문학적 질문을 하고 대답을 내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세계의 문학> 121호에 작가 박주영에 대한 인터뷰가 실렸지만,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작가 또한 소설을 완성한 이후에는 하나의 독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닥 신경쓰지는 않고 있습니다. 소설의 결말부분을 인용해봅니다.


나한테는 이미 익숙해진 읽기와 이해의 방식이 있다. 책을 읽듯 사람을 읽는다. 그는 한 번 읽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책이다. 처음 읽으면 이야기가 보이고, 두 번 읽으면 인물이 살아나고, 세 번 읽으면 배경이 그려지고, 네 번 읽으면 움직임이 읽히고, 다섯 번 읽으면 낱말 하나하나가 다르게 다가와서 세월을 두고두고 읽어야만 하는 책. 나는 그를 다시 읽게 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나에게 다른 건 몰라도 시간은 있다.


서른 살이 되었지만 내 인생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내가 아는 건 시간이 함부로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나는 세상의 속도를 무시한 나 자신만의 속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책과 마주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속도이다. 같은 페이지의 책도 저마다 다른 속도로 읽을 수 밖에 없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그리고 원한다면 언제나 다시, 또 새롭게.


누군가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듯 나는 책을 믿는다. (327)


매너님은 '그'와 '나'가 이제 연애를 시작할 것이라고 읽으셨지만, 저는 책 '오타쿠/프리터'인 '나'가 책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을 읽어볼 결심을 하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물론 그래도 '나'는 '책'을 믿을 뿐이고 '책'처럼 '그'를 읽겠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일종의 매개가 되겠지요.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다시 읽히는 책. 마지막에 박주영이 적어놓은 글귀가, 이 책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시간이 나면 저는 다시 책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이 주인공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작가는 왜 이러한 설정을 했을까. 작가는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읽는 것일까. 에서 시작해서, 세상이라는 것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상의 방법과, 이것이 반영하는 세상 현상, 그리고 이를 통해 판단되는 것들. 등. (문득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ㅎㅎ)


어쨌든, 문학의 역할 중 하나는, 이렇게 읽고 다른 해석을 가진 두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일 듯 합니다. 그것이 바로 TEXT라는 것이겠죠. :)


5. 우왕부왕 말이 길었습니다. 훈련소 가기 3일전. 안 그래도 고열과 감기에 신음하고 있는 기인이었습니다. 흑흑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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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된장녀 키우기' 게임까지 등장?
디시뉴스 2006-08-05 12:59

  '된장녀'
'고추장남'가 인터넷 핫이슈로 떠올랐다. 이는 마치 영화 속 뉴요커라도
된 듯 세련된 것처럼 행동하는 여성을 한 네티즌이 '된장녀'로 지칭하면서
시작됐다. 사치스러운 '된장녀'와 상반되게 궁핍하게 사는 남성들을
'고추장남'이라고 한다고 한다.
  한동안 각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는 '된장녀'에 관한 논쟁이 이어졌다. '된장녀'라는
단어 자체가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이라고 지적하는 네티즌도 나왔으며
일부 여성에 해당하는 내용을 전체 여학생으로 확대했다는 비난도 나왔다.
반면 타인을 배려하지 않으며 허영심에서 시작되는 일부 여성의 태도는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이러한 가운데 '된장녀키우기 게임'이 등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게임은 간단한
형태의 플래시 게임으로 상황에 맞게 클릭만 하면 된다.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박주영키우기 게임'과 같은 형태다. '된장녀키우기 게임'은
상황을 제시하고 어떤 행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된장녀가 되는지가
결정된다.
  처음 '된장녀'논란을 만든 네티즌이 작성한 '된장녀의 하루'에 된장녀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아침 7시30분 휴대폰 알람 소리에 기상, 첫 수업이 10시인데도
불구하고 욕실로 향한다. 전지현 같은 멋진 머릿결을 위해
싸구려 샴푸는 거부한다… 화장한다고 아침식사를 못한
된장녀는 학교 앞 던킨도너츠로 향한다. 다이어트를 위해
설탕이 가미되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설탕과 잼이
범벅된 도넛을 먹는다.… 점심도 마찬가지. 된장녀들은
소중하므로 구내식당, 학생회관 따위에서 밥 먹는 일은
없다. 된장녀 셋이 달라붙으면 그 누구도 이겨낼 자 없다.
복학생 일주일 밥값이 된장녀 한 끼 식사에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다…. 

  '된장녀키우기 게임'은 이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 것. 그림뿐 아니라 중간 중간 사진을
이용했다. 된장녀를 키울 수 있도록 상황을 제시하고 조언을 하는 역할은
고이즈미가 한다.

  문제의 게임은 '된장녀의 하루'에 나온 것과 반대되는 상황을 선택할 경우,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게 만들어놨다. 예를 들어 아침에 '공부한다'를 선택할
경우 '아침부터 공부가 될 리가 없습니다. 학습도가 0% 증가했습니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결국 된장녀를 만들고 마는 이 게임은 빠르게 여러 커뮤니티 게시판에 게재되고 있다. 논란이
많은 만큼 게임에도 관심을 보이는 네티즌도 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난도 많아 당분간 '된장녀'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지선 dfjs@dcinside.com

*결국 분노의 원인은 '대한민국 상류층을 꿈꾸는 여성'에게로 돌려지는데. 이른바 '고추장남'이

배를 곯아가며 열심히 공부해서 취직한다면, '된장녀'는 팽팽히 놀면서 외모만을 관리하며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상류층에 접근하려 한다는 것일까?

사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비싼 것들을 먹는다는 것 자체에 비판의 초점이 맞추어진 듯

하다. 그러니 결국 '너희 수준대로 놀아라'가 하고 싶은 말일까?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은

단지 공격일 뿐일까.

친한 선배가 몇일전 반운동권 정서에 대해서 말하면서, 관악에서 일어났던 보건노조이야기와

하중근 열사의 죽음에 대한 성명서를 패러디하며 운동권에 대한 공격을 선동하는 글에 대해서

분개했다.

이러한 공격성의 표출을 단일한 원인으로 환원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도 일종의 '게임'처럼

즐기게 된 문화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자신의 공격성을 드러내고, 이를 인터넷 공간에서

'논쟁'(?) 비방 패러디 등 온갖 수단을 통해서 '적'에게 승리하는 것. 인간에 대한 예의나,

'진짜 의도' 따위는 골 아픈 이야기고, 결국은 공격심의 해소, 승리감. 그것이야말로 게임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반운동권 정서나 '된장녀' 같은 논란은 어느정도 반격을 하는 '소수집단'에 대한 다수의 공격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을까?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적이 일정정도 반격을 한다는 것이고 이 도전을

너머서는 것에 그 즐거움이 있는 것.

어쨌든 이런 일들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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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대체 저게 무슨 말인가, 하다가 다음뉴스를 보니까 '된장녀'란 스타벅스를 애호하고 과시적 소비에 물들고 지적수준이 떨어지는 여대생을 지칭하는 말이고, 반면에 '고추장남'이란 복학생에 가난하여 후줄그레하고 취업준비에 바쁜 남대생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허.. 참. 어쨌든 두 '성' 간의 다툼이 치열한 모냥. 남정네들이 그동안 쌓인 것이 많은 모냥인지, '된장녀'들의 허위의식에 대해서 공격을 하고 있다. 그냥저냥 사회생물학적으로 비판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오늘 1930년대 잡지를 읽다가 이런 '된장녀/고추장남'과 비슷한 내용이 그 당시에도 이미 미국에서 이야기 되어서 옮겨온다.

<삼천리> 1933. 9. 01.

百萬弗과 완전한 戀愛의 어느 쪽을 取하겟는가? (*이때 백만불은 화폐가치가 다르니 아마 지금에서는 로또 1등과 환상적인 연애의 어느 족을 택하겠는가? 가 되겠다. 물론 여기서 '환상적'인을 강조한다면 애인이 재벌이겠지만;;  대충 의미는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자기가 경험했던 최고의 연애의 순간과 로또 1등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 )


米國 윌리암 大學敎授 提出

대학교수 윌리암, 마-스톤 박사는 아메리까 대학생에게 우에 쓴 것과 가튼 질문을 發하엿더니.
1. 남학생들은 전부(實로 한 사람도 빼지 안코) 「金」이라 대답을 썻고.
2. 여학생은 100명중 92명까지는 「완전한 연애라고 썻스며 남어지 8명도 「金」이라고 쓰기는 하엿스나 한 사람 빼지 안코 「그 만큼 한 돈이 잇스면 연애는 확실히 지배할 수 잇스니까」하는 의미의 添書가 잇섯다.

여성이 본 남성의 결점. 남성이 본 여성의 결점
이에 대하야 남학생은 여학생을 경멸하고 반대를 여학생은 남학생을 경멸하고 잇는 사실이 드러낫다.
그리고 남학생은 자기네들 남성의 美點이라고 생각하는 特長 26點을 들고 결점 又는 惡習癖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8개를 승인하엿슴니다.
그런데 상대방의 여학생에 대하여는 결점 29를 헤이엇고 美點은 열두 가지만 승인하엿슴니다.

여학생들은 엇더하엿는가. 여학생들은 남학생에게서 결점 스물 한 가지를 차저내엇고 美點은 열 한 가지를 승인하엿고 그리고 자기들 여학생 자신에 대하여 美點 열넷을 들고 약점 18을 승인하고 잇슴니다.

그중 중요한 것을 들건대―
남학생이 인정한 여학생의 美點

1. 참잉네스(사랑스러운 점)
2. 싹싹하고 부드러운 점.
3. 온정이 잇는 것.
4. 沒利我的.
5. 神祕的.
6. 蠱惑的.

여학생이 본 남학생의 美點

1. 모험적인 것.
2. 일에 부즈런한 것.
3. 瑣事에 놀나지 안는 것.
4. 육체력이 勝한 것.
5. 테모그라직 한 것.
6. 誠意하고 耐久力이 강한 것 등등.

남학생이 지적한 여학생의 결점

1. 拜金主義
2. 정서적이고 확정성이 결핍한 것.
3. 거짓말쟁이
4. 미듬성이 적은 것.
5. 어린애 갓다.
6. 관용성이 업는 것 등등.

여학생이 인정한 남학생의 결점

1. 이기적인 것.
2. 웃줄한다.
3. 氣가 변키 쉽다.
4. 잔인하다.
5. 건방지다.
6. 단순하다.
7. 쉽사리 속혀 너머가는 것 등.

 

그 때나 저제나 남자들은 여자들이 '돈'을 중시한다고 비판한다. 고전적 드라마 패턴인 듯. 돈, 권력있는 남성에 매력을 느끼는 여성이나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하는 남성이나 다를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꽤나 분개하는 듯.

'진정한 사랑'이 아니야. 라는 논리인가. 그렇다면 '외모'를 중시하는 것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야. 라는 논리로 나오면 어쩔껀가. '내면'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결국 그 '사람'만을 보자?

그 '사람'이라는 것 또한 여러가지 관계망인 것. 그 중의 계급적 출신성분 또한 그 사람됨을 형성하는 큰 요소. 어쨌든 돈 많은 남자 좋아하는 여자들을 보면 배아픈 것은 인정될 수 있지만, 그것은 잘생긴 남자 좋아하는 여자들을 봐도 배아픈 것.

어쨌든 배는 아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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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08-04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하필 된장이랑 스타벅스가 연결되는 거죠? 참 신기한 작명이네요.

물만두 2006-08-04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기서 알았네요.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08-04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젠장에서 덴장에서 된장으로 변했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렇고 이것 참 알흠다운 문장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ㅎ
예전엔 米국이라 했군요.

기인 2006-08-0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된장녀'의 어원(?) 혹은 작명의도, 과정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네요. ㅎㅎ 이제 다 주장되면 그런 의미가 덧칠 되는 것이겠지요. 사후적으로요. :)

연랑님/ 네 지금도 일본과 중국은 쌀 米자를 씁니다. 그런데 예전 잡지들보면 간혹가다 아름다울 美자를 쓰기도 해요. 하지만 쌀 米자가 더 많습니다. 완전히 정해지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언제부터 한국만 아름다울 美자를 쓰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네요. 한국전쟁 이후부터일 것 같기는 합니다 ^^; 참고로 요즘 꼬리 尾자를 쓰는 분들도 계십니다. ^^;

다우님/ 네. ㅎㅎ 일부 여성들이 '돈을 밝히는 것'이 일부 여성들이 '돈만 밝히는 것'으로 되었다가 많은 여성들이 '돈만 밝힌다'로 되어가는 과정... ㅎㅎ
ㅋ 그래도 '표면 논리'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야/돈만 밝히는 것은 나쁜 사람이야 라는 것이겠죠. 논쟁과정에서 일종의 도덕적 우위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각하게 만들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 같습니다. ^^;
화를 내는 까닭은 '많은 여성들이 돈만 밝힌다'라는 전제 하에, 자신이 돈(자본/부르디외 식으로 경제적 자본 외에도 다른 자본도 포함될 듯)이 없기 때문일 것이고요.
그러고보면, 댓글 단 남성들의 계급을 분석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네요. ^^;

LAYLA 2006-08-0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널드 트럼프의 아름다운 부인에게
"당신이 저 남자와 결혼한 건 결국 돈 때문 아니냐? (돈을 보고 결혼한거 아니냐?)"
라고 했더니 그녀가
"내가 이렇게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사람이 나와 결혼했을거 같느냐"
라고 대답했다고 들었는데 아아아 얼마나 웃기던지요 ^^ 그 여자가 새롭게 보였어요.

기인 2006-08-0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대화 TV에서 봤습니다. ㅋ 러닝머신 뛰면서요 ^^;
제가 기억하는 뉘앙스는 조금 다릅니다.
로널드 트럼프 (60대인듯)의 아름다운 부인 (20대후반/30대초반으로 보임)
"로널드가 지금처럼 부자가 아니더라도 그를 사랑했겠느냐?"
그녀 왈
"내가 지금처럼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나를 사랑했을것 같은가?"
ㅎㅎ

뭐. 사실 쫌 씁쓸하기는 하지만. '자본'이라는 게 단지 외적인 것만은 아닌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사고방식, 행동패턴, 취향. 즉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를 결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 사람'이 누구냐 또한 어떤 '계급'출신이냐에 많이 결정되는 것 같아요. (물론 이것만으로는 아니겠지만)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 (귀여운 여인 등)나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도 간혹 보이는 계급간의 사랑(재벌과 평범녀)은 사실 잘 믿어지지 않지요. 결국 잘 되기도 힘들 것 같구..
물론 여기서 '자본'은 경제적 부 뿐만 아니라, 문화적, 제도적 자본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요. ^^;

Mephistopheles 2006-08-05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찌되었던 스타벅스 커피값은 좀 비싼감이 있습니다...^^
(싸다고 사다 마시진 않겠지만요..^^)

기인 2006-08-05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ㅎㅎ 그런데 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

2007-01-04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