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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개발협력이란 무엇인가?

1. 세계화와 빈곤문제

   
 

 2002년 OECD 개발센터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세계화가 개도국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컨센서스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즉, 세계화가 개도국의 빈곤을 심화시킨 사례가 있으나 빈곤을 해결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빈곤에 끼친 영향은 매우 복잡하고 국가별로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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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개역판 까치글방 86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외 옮김 / 까치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마키아벨리, 강정인 역, 『군주론』, 까치, 2003

1.왜 군주론?
플라톤의 [국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동일한 위치를 점할 수 있을 만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중요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군주론은 사실상 오늘날 서점에 범람하는 처세술 관련 책들과 크게 다른가?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문의 호응을 다시 얻기 위해서 로렌초 데 메디치를 대상으로 썼다는 점과 군주가 존재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만이 표면적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왜 중요한가라는 첫번째 이유로 something new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선구자가 된다는 것은 항상 중요성을 갖게 마련이다. 이는 저술 동기 혹은 목적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결국 이 새로움은 그가 처한 개인적 어려움과 시대적 공간적 맥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윤리적 공상과 엄연한 현실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경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보다는 잃기 십상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은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의 몰락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필요하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 107쪽
이러한 단순한 이유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는 아래에서 다루기로 한다.

2.인간관
사상가들의 사상이 가지는 차이의 배경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상이한 인간관에 기반하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경우 매우 분명한 성악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사랑을 통한 다스림과 두려움을 통한 다스림에 대한 비교가 흥미로운데 권위가 아닌 권력에 기반할 것을 주장하는 것, 즉 의무감에 기반하는 사랑이 아니라 처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할 것을 주장함은 마키아벨리의 인간관과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렵다.
...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란 자신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사랑을 하지만, 군주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두려움을 품기 때문에, 현명한 군주라면 타인의 선택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더 의존해야 한다고 결론짓겠다. 다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미움을 받는 일만은 피하도록 해야겠다. – 120쪽

3.세계관
군주론에서 핵심 개념으로 여겨지는 것이 운명 “fortuna”와 능력 “vitru”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 원래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다소 감소하는 듯 하다. 나의 언어로 치환해보면 fortuna는 세상의 우연성, 예측할 수 없음에 근접해 있는 듯 하고, vitru는 그 우연성 속에서 최대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인 듯 하다. 우연성 속에서 필연을 찾아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근대 정치학의 시발점으로 일컫고, 정치철학에서 정치과학으로의 전환이라고 일컫는다. 분명 그러한 요소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연성과 과학성을 미덕으로 여기는 근대학문과는 분명히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포괄적이고 비과학적인 개념은 오히려 현상자체에 더 근접하게 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그리고 군주론의 저술 동기를 고려한다면 이는 결코 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운명은 자신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아무런 힘이 조직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그 위력을 떨치며, 자신을 제지하기 위한 아무런 제방이나 둑이 없는 곳을 덮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러한 격변의 근원이자 무대인 이탈리아를 살펴보면, 당신은 이 나라가 바로 제방이나 방파제가 없는 들판인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나라가 독일, 스페인 및 프랑스처럼 적절한 방파제로 보호되어 있었더라면, 홍수가 그렇게 커다란 격변을 초래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아예 홍수마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171쪽

...우리는 우리의 대처방식이 시대와 상황에 적합할 때 성공하고, 그렇지 못할 때 실패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 곧 영광과 부에 대해서 인간이 상이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 172쪽

운명은 대담한 자들과 벗한다.

따라서 나는 운명은 가변적인데 인간은 유연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신방법이 운명과 조화를 이루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다고 결론짓겠다. 나는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분명히 생각한다. 왜냐하면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자를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175쪽
흥미로운 점은 군주가 되는데 그리고 그 군주의 자리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운명도 있지만, 인간의 운명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 의지와 반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당시 군주의 뜻에 반하는 운명이란 무엇이었을까. 귀족과 민중의 등돌림. 그리고 다른 군주와의 전쟁이었을 것이다. 16세기 이탈리아가 겪었던 어려움,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열망은 이미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절대군주국인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더욱 강해진다. 군주론 자체는 군주가 어떻게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마키아벨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과연 그것이었을까의 의문이 든다. 시대를 읽을 수 있었던 그는 현실적으로 전쟁이 법칙이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주국의 건설이 불가피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군주라는 개인에 대한 조언과 충고를 제시하고 있는 듯 하지만, 과연 이것이 군주 개인에 달린 문제일까 아니면 개별적인 군주를 넘어 군주국이라는 근대적 사유단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일 수는 없을까.

4.정치, 정치가, 또는 정치학에 대한 접근
정치에서 차악을 추구하는 것이 언제부터 일반화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마키아벨리 이후일 수도 있겠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이데아나 지금까지도 정치학자들이 제안하는 정치 모델에 대한 갈구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있어야 할 무언가에 대한 제시는 폭력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차악을 선으로 받아들여라

어떤 정부도 안전한 정책을 따르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행위는 위험을 수반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물의 도리상 하나의 위험을 피하고자 하면 으레 다른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람은 위험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고, 가장 해악이 적은 대안을, 따라야 할 올바른 대안으로 선택한다. – 158쪽

정치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다시 처음의 저술배경과 동기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악함에 대한 뚜렷한 확신, 전쟁의 소용돌이라는 시공간적 배경 속에서 학자라기 보다는 실무가에 가까웠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이유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그가 “현실주의”적인 것은 물론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는 처세술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그의 인간관과 세계관이 인간 본성의 악함과 세계의 알 수 없음, 즉, 불가지론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찾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악한 인간들이 모여있는 세계에서 알 수 있는 것보다 알 수 없는 것이 많은 경우 지도자가 해야할 일, 또는 할 수 있는 일은 범람하는 운명에 맞설 수 있는 최소한의 제방을 건축하는 일이 전부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진리인가 또는 무엇이 궁극적인 지향점이 되어야 하는 가는 적어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사치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현실주의의 시작점이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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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질서
미셸 푸코 지음, 이정우 옮김 / 서강대학교출판부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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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이 말한다는 사실 속에, 그들의 담론들이 무한히 증식된다는 사실 속에 들어 있는 그 위험한 존재는 무엇인가? 그 위험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MAis qu'y a-t-il donc de si perilleux dans le fait que les gens parlent, et que leurs discours indefinement proliferent? Ou donc est le danger?-9쪽

어떤 사회에서든 담론의 생산을 통제하고, 선별하고, 조직화하고 나아가 재분배하는 일련의 과정들 - 담론의 힘들과 위험들을 추방하고, 담론의 우연한 사건을 지배하고, 담론의 무거운, 위험한 물질성을 피해 가는 역할을 하는 과정들 - 이 존재한다.
유럽과 같은 사회에서, 우리는 배제(exclution)의 과정들을 잘 알고 있다.

Je suppose que dans tout societe la production du discours est a la fois controlee, selectionne, organisee et redistribuee par un certain nombre de procedures qui ont pour role d'em conjurer les pouvoirs et les danters, d'en maitriser l'evenement aleatoire, d'en esquiver la loudre, la redoutable materialite.-10쪽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후에는 가장 고귀한 진리는 이제 더 이상 담론이 무엇인가에 또는 그것이 무엇을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있게 되었다.

la verite la plus haute ne residait plus deja dans ce qu'etait le discours ou dans ce qu'il faisait, elle residait en ce qu'il disait.-13쪽

담론에 부과되는 세 가지의 커다란 베제의 체계들 - 금지된 말, 광기의 분할, 그리고 진리에의 의지-16쪽

그러나 철학은 반복이기 때문에, 그것은 개념 뒤에 오지 않는다. 그것은 추상화의 건축물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었으며, 언제나 뒤에 물러앉아 획득된 일반성들과 관계를 끊고 비철학과의 접촉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문제 의식을 따라, 그를 완성하는 것이 아닌 그를 앞서 가는 것, 그의 불안 속에서 아직 깨어나 있지 않은 것에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역사의 단일성, 과학의 지역적인 합리성들, 의식에서의 기억의 깊이를 그들을 환원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며 이 비철학이 우리에 대해 지니는 의미를 드러내는 철학이 나타나다.-49쪽

근대의 주체철학이란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을 초험적 주체의 개념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일련의 노력들이었다. 푸코는 이러한 노력들이 인간에 대한 환상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자가당착에 빠지곤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주체철학을 '인간학'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학에서 깨어나는 것이 현대 철학의 과제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근대 주체철학은 결국 스스로의 범주에 입각해 세계를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과 목적론적 과정 속에서 스스로의 가능성을 실현해 나가는 작품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인간과학들은 근대 철학이 구축해 온 동일자를 무의식이라는 타자에 복속시킴으로써 '병적 의식'이나 '원시적 심성' 또는 '무의미한 담론'과 같은 개념들을 중성화시켰다. 그래서 인간과학이 대상으로 삼는 인간이란 주체철학의 대상인 인간과 대립되는 것이다.-(122-23)쪽

바깥의 사유(la pensee du dehors)

"주어가 배제된 언어를 향한 돌파고, 그 본질로서의 언어의 출현과 그 동일성으로서의 자아 의식 사이의 아마도 속수무책인 양립 불가능성의 드러남, 오늘날 이것은 문화의 판이한 지점들에서 나타나는 체험이다: 언어를 형태화하기 위한 시도들 속에서도, 글쓰기라는 단 하나의 몸짓 속에서도, 신화 연구와 정신분석에 있어서도, 모든 서구 이성의 출생지라고 할 수 있는 이 로고스의 탐구 속에서도, 드디어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 눈에 띄지 않은 채 존재해 온 입 벌린 동공에 직면한 것이다: 언어라는 존재는 주어의 사라짐 속에서만 그 자체로서 모습을 드러낸다."-(132)쪽

언표란 명제나 어구나 담화행위 등과 같은 언어의 존재양태들을 마름질하는 바탕이 되는 질료, 그들이 경우에 따라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의 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기호들의 집합이라는 언어의 원질료는 어떤 가능한 공간 내지 가능한 세계와 관련맺음으로써 언표의 수준으로 상상하며, 다시 이 수준에 어떤 일정한 규정성에 따라 가능성들 중 어떤 경우가 현실화되면 명제, 어구, 담화행위 등이 형성되는 것이다. -(137)쪽

그에 따르면,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때 또는 인간의 경험이 언어화될 때 세계와 주체 또는 경험과 이론 사이에는 인식이나 언어화를 형성시킬 수 밖에 없는 규칙성이 존재한다. 이 규칙성의 장이 바로 인식론적 장(le champ epistemologique)이자 담론의 질서(l'order du discours)이다.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어떤 세계로 인식하는 한 이미 이러한 담론의 질서를 통과해서 인식된 세계이다. 또 주체는 그가 말할 때 이미 이러한 담론의 질서를 통과해서 즉 그 규칙성들에 따라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이 담론의 질서에 상관적으로 세계이며 주체는 이 담론의 질서에 상관적으로 주체인 것이다. 이 언표적 장 또는 담론의 질서는 세계가 그리고 주체가 언어와 관계맺을 수 있는 가능성들의 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세계와 주체는 이 담론의 질서를 통과해서만 관계맺을 수 있는 것이다.-(139-40)쪽

"권력 관계는 다른 유형의 관계들(경제적 과정, 인식 관계, 성적 관계)로 표면화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내재하고 따라서 그러한 관계들에서 생기는 분할, 불평등, 불균형의 직접적 효과이며, 거구로 이러한 차등화의 내적인 조건이다. 권력 관계는 단순한 금지 또는 갱신의 역할을 지닌 상부구조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작용하는 거기에서 직접적으로 생산적인 역할을 한다."-(148)쪽

그래서 푸코에게는 이데올로기의 개념도 달리 파악된다. 우선 이데올로기를 진리나 과학과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해 진리/이데올로기의 양분법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거부된다. 진리/이데올로기란 차라리 진리가 지니고 있는 두 양태일 뿐이다. 진리와 이데올로기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존재하는 것은 지식이며 진리와 이데올로기는 지식이 지니는 양태들일 뿐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학성과 진리를 어떻게 선을 그어 구분할 것인가가 아니고, 진리도 거짓도 아닌 담론 안에서 진리의 효과가 어떻게 생산되는가 하는 문제를 역사적으로 파악해야만 한다"는 점이다.-(153)쪽

(푸코 초기 철학에서 주체는 지식-권력의 망이 형성하는 함수 체계 내에 대입되는 함수값 이상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함)
지금까지 푸코 철학에서 존재론적으로 가장 일차적인 지위를 부여받았던 것은 세계도 주체도 아닌 '담론의 질서'였다. 세계는 담론의 상관자로서 그리고 주체는 담론적 장 속에 자리를 잡는 존재로서 다루어짐으로써 그에게 일차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은 언제나 담론의 질서로서 파악되엇다. 그가 권력의 문제를 다루었을 때도 권력은 주체의 표현이나 어떤 실체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망으로서 파악되었다. 요컨대 그는 언제나 철학을 '탈현존화시키고자(de-presentifier)'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철학에 경험이라는 개념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경험이라는 개념은 경험이 이루어지는 세계와 경험을 하는 주체를 논리적으로 함축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이 개념은 그의 철학이 탈현존화의 성격을 벗어나 세계와 주체가 현존하게 되는 영역으로 이동했음을 시사해 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식의 고고학과 권력의 계보학이 포기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두 분석 양탱에 주체라는 문제틀이 부가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푸코의 문제틀은 담론-권력-주체라는 삼자에 의해 구성되며 이 삼자가 구성하는 것은 바로 경험이 되는 것이다.-(166)쪽

안에 의해 바깥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안이란 바깥이 펼쳐지는 운동에서 일종의 '주름(pil)'인 것이다. 그래서 푸코는 주체 철학과 그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나는 사르트르가 자아란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자아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현실적인 결론은 단 하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창조해야 한다. .... 나는 그 역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창조적인 활동을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로 소급시켜서는 안되며, 차라리 어떤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그의 창조적 행위에 소급시켜야 한다."-(167-68)쪽

그런데 푸코에게 이러한 주체화의 시발점을 형성하는 것은 신체이다. [감시와 처벌], [앎에의 의지]에서 신체는 단지 권력의 작용점으로 다루어졌을 뿐이지만 이제 신체는 주체화가 시작되는 장소이자 저항의 시발점으로 기능하는 장소가 된다.-(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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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개역판 까치글방 86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외 옮김 / 까치 / 2003년 5월
구판절판


강력한 도움을 준 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이로부터 거의 항상 유효한 일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즉 타인을 강하게 하는 자는 자멸을 자초할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세력은 술책이나 힘을 통해 증대되는데, 이 두 가지는 그로 인해서 강력해진 자가 두려워하는 것이다.-29쪽

위대한 인물의 모방

...신중한 사람은 항상 탁월한 인물들의 방법을 따르거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을 모방함으로써, 비록 그들의 능력에 필적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에 근접하고자 한다. 그는 노련한 궁사가 목표물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활을 쏘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행동해야 한다. 그는 자기 활의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좀 더 높은 곳을 겨냥하게 되는데, 이는 그 높은 지점을 화살로 맞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목표물을 맞히기 위해서 그곳을 겨냥하는 것이다.-38쪽

더욱이 군주가 타인을 해치지 않고 명예롭게 행동함으로써 귀족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인민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인민들의 목표는 귀족들의 목표보다 명예롭기 때문이다. 즉 귀족들은 단지 억압하고자 하는 데에 반해서 인민들은 단지 억압당하는 데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주는 적대적인 인민들로부터 자신을 결코 보호할 수 없는데, 인민들은 우선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반면에 적대적인 귀족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은 그 숫자가 적기 때문에 어렵지 안핟. 적대적인 닌민들로부터 군주가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그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적대적인 귀족들로부터는 단순히 버림을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군주에게 반역행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68-9쪽

전쟁은 군주의 직업이다.

군주가 권력을 잃게 되는 주된 이유는 군사를 게을리 한 탓이며, 권력을 얻는 이유는 군사에 능통한 덕분이다. -102쪽

윤리적 공상과 엄연한 현실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경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션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얄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사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보다는 잃기 십상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은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의 몰락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필요하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107쪽

...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란 자신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사랑을 하지만, 군주의 선택 여하에 따라서 두려움을 품기 때문에, 현명한 군주라면 타인의 선택보다는 자신의 선택에 더 의존해야 한다고 결론짓겠다. 다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미움을 받는 일만은 피하도록 해야겠다.-120쪽

옛 통치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새로운 통치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는다.

...이전의 정권에서 만족했기 때문에 새 군주에게 적대적이었던 사람들ㅇ느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이전 정권에 불만을 품고서 그에게 호의를 느끼고 그를 도운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계속 유지하는 일보다 훨씬 더 쉽다는 점은 명백하다.-149-50쪽

차악을 선으로 받아들여라

어떤 정부도 안전한 정책을 따르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모든 행위는 위험을 수반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물의 도리상 하나의 위험을 피하고자 하면 으레 다른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려 깊은 사람은 위험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고, 가장 해악이 적은 대안을, 따라야 할 올바른 대안으로 선택한다.-158쪽

운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운명은 자신에게 저항하기 위해서 아무런 힘이 조직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그 위력을 떨치며, 자신을 제지하기 위한 아무런 제방이나 둑이 없는 곳을 덮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러한 격변의 근원이자 무대인 이탈리아를 살펴보면, 당신은 이 나라가 바로 제방이나 방파제가 없는 들판인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나라가 독일, 스페인 및 프랑스처럼 적절한 방파제로 보호되어 있었더라면, 홍수가 그렇게 커다란 격변을 초래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아예 홍수마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71쪽

...우리는 우리의 대처방식이 시대와 상황에 적합할 때 성공하고, 그렇지 못할 때 실패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 곧 영광과 부에 대해서 인간이 상이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172쪽

운명은 대담한 자들과 벗한다.

따라서 나는 운명은 가변적인데 인간은 유연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처신방법이 운명과 조화를 이루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다고 결론짓겠다. 나는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분명히 생각한다. 왜냐하면 운명의 신은 여신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자를 손아귀에 넣고자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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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6-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울 자기 알라딘 오랜만 :)

kocka 2007-06-28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전출처 : 기인 > [퍼온글] 1만 2천 개의 녹차









출처 : http://blog.naver.com/2x5/140024304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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