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토리(박모 옮김),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현실문화연구, 1994.
1.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이데올로기/대중문화 popular culture
결국 무엇을 ‘popular culture'라 명명하고, 어떠한 전제와 목적 하에서 연구할 것이냐가 문제가 되는 지점이다. 물론 이는 변증법적으로 실제 자료와 연구과정에 따라서 구체화될 성질의 문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유용한데, 이 개념자체가 변증법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현상과 힘의 역학을 제시하고, 따라서 이를 변증법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한다.
대중문화라는 영역은 지배계급이 헤게모니를 얻고자 하는 시도와 이에 대한 반대의 형태로 짜여 있다. 그러므로 대중문화는 지배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강요된 대량문화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대항의 문화들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여러 가지 조합으로 지배적, 피지배적 또는 서로 상응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가치와 요소들이 ‘섞인’ 두 문화의 타협장소라고 할 수 있다. (27)
물론 이 개념은 쿤의 ‘패러다임’에 관한 연구처럼, 실제적 ‘문화사적’인 연구를 통해서 뒷받침되어 어떻게 헤게모니 교체가 이루어지는가를 긴 호흡으로 탐구해야 한다. 이 ‘헤게모니 교체’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용어는 저널리즘에서 너무 일상화되고 상투화되어, 그 혁명성을 사장(체게바라를 문화상품으로 전유하듯, 헤게모니를 정치 집권으로 전유한다)시키고 있다. 이게 3~4년마다 전환되는 것이라면, ‘한나라당’과 ‘열우당’의 권력싸움이 ‘헤게모니 교체’라면, 그게 무슨 헤게모니인가?(아니면 어떠한 다름이 있는가?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의 차이? 2002대선에서 반한나라당 노선은 어떠한 계급적 분석과 실천적 판단에서 비롯한 것일까? 참고로 그람시의 ‘진지전’개념을 원용하며 수구에 대한 헤게모니 투쟁이라는 글을 부록?으로 제시한다. 이건 유머의 수준을 초월한지 오래다.) 이러한 정치 권력싸움이 ‘헤게모니 교체’라고 떠드는 것 자체가, ‘한나라-열우당’ 근저에 있는 ‘공통된’ 헤게모니의 지속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이러한 구분은 내 정치적 입장에 따른 구획이다. 수구와 보수 사이, 친일파-독재 잔재와 합리적 부르주아지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그으려는 노력은 어떤 의미와 효과가 있는가? 이것이 오히려 현정세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ex) 반창연대, 유시민의 민노당 ‘사표’ 발언 등.
2. ‘문화와 문명’의 전통
a. 문화 근대화의 세가지 유형? 미국, 서구, 식민지
‘무정부’에 반대하여 문화는 국가를 제시한다. 즉 “우리는 권위를 필요로 하며... 문화는 국가의 이상을 제시한다.” 두 가지 요인이 국가를 필요하게 만드는데, 첫째는 권위의 중심 역할을 하던 귀족층의 쇠퇴이며, 둘째는 민주주의의 출현이다. 이들은 함께 무정부에 적합한 토양을 만들었다. 해결책은 문화와 강제의 혼합으로 이 토양을 제거하는 것이다. 아놀드의 문화화된 국가는 중산층이 이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만큼 문화화될 때까지 노동계급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욕구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행하는 것이다. 국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첫째로 더 이상 하이드파크에서 데모가 일어나지 않도록 탄압하며, 둘째로 또한 문화의 ‘아름다움과 빛’을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42)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가 행복하게(?) 결합된 또는 그렇게 움직였던 영국과는 달리, 조선은 어떠했는가? 자본주의=스테이트와 네이션의 분리. 여기에 권위의 중심이었던 ‘소중화’주의와 민족주의는 일제(스테이트)의 지배문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해 저항했고(또는 쉽게 타협할 수 없게했고), 식민지 시기 일제의 통치가 마침내 대동아공영권으로 ‘자본주의=스테이트->네이션’을 결합시키려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기까지 저항의 지점을 생성했다. 이러한 ‘소중화’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은 주체/식민객체들을 점유하려는 양방향의 운동성으로만 식민지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많은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상 또는 회색공간의 복원. 너무 냉소적이고 성급하게 ‘그런데?’라고 묻기 전에 살펴보면, 이러한 연구들은 ‘대중’이 실제 움직이고 사고했던, 즉 그들의 ‘문화’를 살펴보는 것을 통해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다 정치하게 살펴보고, 대중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의 일환으로 제출된 것일까? 또 미국예외주의적 언급(60)에서 서구가 귀족문화 해체 후에야 비로소 부르주아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미국, 서구, 식민지라는 세 가지 유형의 (근대화) 문화사가 설정될 수 있을까?
B.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 또는 아비투스와 문화대혁명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에 있어 민주주의의 위협은 리비스주의자들에게는 끔찍한 것이었다. 게다가 Q. D. 리비스는 “권력을 쥔 자들은 더 이상 지적 권위와 문화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놀드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전통적 권위의 붕괴가 대중민주주의의 발흥과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이 두 현상은 문화화된 소수를 압박하고 동시에 ‘무정부’가 설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었다. (47)
이러한 엘리트주의에 반대하여(스토리의 책에서는 그러한 톤이있다) 극단으로 밀어붙이게 되면, 떠올려지는 것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다. 대중주의, 하방운동, 홍위병들의 난립으로 이루어져서,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모든 활동, 심지어 의료행위까지도 ‘인민’이 할 수 있다고 믿고, 청소년 홍위병이 외과수술책을 보고 수술을 집도했다고 한다. 이러한 수준높은 ‘과학’과 대비되게 수준높은 ‘문화’라는 것이 과연 엘리트들만 ‘향유’하고 practice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제대로’ 오페라를 감상하기 위해서, 현대미술에 감탄하기 위해서, 현대음악을 비평하기 위해서는 의대에서 공부를 하는 것처럼, 일정량의 전문지식을, 사실 상당한 량의 지식을 쌓아야 한다. 과학과 유비해서 말하자면, (혹은 문화비평 또한 하나의 ‘과학’이라는 의미에서)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명제는 어떻게 부정될 수 있을까? 혹은 부정되어야 하는가? 이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대중주의’적 ‘이데올로기’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역사발전‘법칙’에서의 pt의 역할과의 관련성.
3. 문화주의
문화의 가장 일반적인 정의에서조차도 우리는 세 개의 층을 구별해야만 한다.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충분히 인식되는 그 시대, 그 공간의 살아있는 문화가 있다. 또 예술로부터 가장 일상적인 내용들까지 갖가지 종류의 내용들이 기록된 한 시대의 문화가 있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문화와 각 시대의 문화를 연결해주는 요소인 선별적 전통의 문화가 있다고 할수 있다. (84)
윌리엄즈가 나누는 문화의 세 층위 중, ‘실재’라고 할 수 있는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충분히 인식되는 그 시대, 그 공간의 살아있는 문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윌리엄즈는 ‘19세기의 독자는 후대의 어떤 독자도 완전히 재생시킬 수 없는 그 시대의 소설들이 다룬 삶의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바로 현재 우리에게는 선택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과연 그러할까? 그러한 경험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있는가?
윌리엄즈에게는 문화적 전통의 선별성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선별성은 항상 (필연적으로) “한때는 살아있는 문화였던 것에서 상당부분이 배제된” 문화기록이나 문화전통을 만든다. (84)
‘완전한 과거’의 ‘보편적 경험’을 공유하는 대중이라는 것은 허구다. 그러한 허구를 전제하는 이유는 윌리엄즈의 문화연구 목적이 ‘실제 문화적 과정’을 드러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있다고 전제함으로서 인식론적으로 편해지는 ‘물자체’와 같은 통합적 과거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5. 마르크스주의
5.1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문화에 대한 마르크스적 접근은 무엇보다도 문화의 텍스트와 실천행위들을 그것이 산출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소비와 수용이라는 변화하는 상황들 속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적 방법론이 문화에 대한 여타의 ‘역사적’ 접근과 구별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 때문이다. (...) 분석의 핵심은 사회가 자신의 존재방식, 곧 특정한 생산양식(*한 사회가 생필품(식량, 주거 등)을 생산하기 위해 조직된 방식)을 만드는 방식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형태, 더 나아가 미래의 발전까지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144-145)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 상부구조는 토대를 표현하는 동시에 정당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대가 상부구조의 내용과 형식을 ‘조건’짓거나 ‘결정’짓는다. (...) 엥겔스가 주장하는 것은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의 토양을 만들기는 하지만, 여기서 일어나는 활동들이 온통 다 이러한 사실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것이 명확히 한계를 짓고 영향은 주지만), 이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제도들이나 그 외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는 결코 역사의 주된 힘은 될 수 없으나, 역사적 변화나 사회안정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로서 활발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145-147)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대중문화는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적 형태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분석에 있어서 유물론적 역사관은 어떤 내포의미를 가지는가? 우선 첫째로 어떤 텍스트나 실천행위의 이해나 설명을 위해서는, 이를 이것이 생산된 역사적 시기에 놓고, 이것을 산출한 역사적 상황에 입각해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이 있다. 즉 역사적 상황은 궁극적으로 경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문화분석이 경제분석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문화적인 요소들은 경제적 요소들의 수동적 반영이 되고 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경고하듯(...), 행위주체와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변증법의 작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147)
카우츠키 이래 속류 맑시즘의 기계적 결정론을 반박하며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를 상기한다면, 기계적 결정론은 맑시즘에 전적으로 반한다. 행위주체(맑시즘에서는 집단 주체로서의 pt)의 혁명적 주체성이 중요한 것이고, 맑스주의적 입장에서의 문화분석은 단순화시켜 말해본다면, 궁극적으로는 이 집단 주체로서의 pt가 ‘왜 움직이지 않는가’며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가’라고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일어나게 할 것인가의 문제. 끝끝내 망하지 않은 자본주의에 대한 ‘변명/설명’으로서의 대중문화. 파리꼬뮌 이후 맑스, 68이후 알튀세르.
5.2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 장은 아도르노, 마르쿠제, 호르크하이머와 벤야민으로 양분된다.
a. 아도르노, 마르쿠제, 호르크하이머
이들은 고급문화와 문화산업을 구분하며, 전자는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살리고, 대량문화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하지만, 후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되도록 만든다고 한다.
문화산업은 ‘규격화, 상투성, 보수성, 허위, 조작된 소비상품’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문화를 생산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정치성을 희석시키며,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정치, 경제적 목표로만 그들의 지평을 제한한다. (...) 짧게 말하면 문화산업은 ‘군중 the masses'들이 현재의 한계 이상 생각하지 않도록 조장한다. (149-150)
‘정통’ 문화는 종교의 이상적 기능을 이어받아 현재 한계를 뛰어넘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살리고, 대량문화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다. 이는 정통 문화가 교훈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그 ‘내용’으로 명령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형식’으로 설득한다는 것이다. (150)
문화산업은 이익의 추구와 문화적 동질화를 위해 ‘정통’문화로부터 비판적 기능과 부정의 방식, 즉 ‘위대한 거절’의 기능을 박탈한다. 상업화는 또 ‘정통’문화를 또다른 문화적 상품으로 개조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 그 가치를 하락시킨다. (153)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하면 자본주의하의 노동과 여가는 강제적인 연관성을 갖게 된다. 즉 문화산업의 효과는 노동의 성격에 의해 보장되며 노동과정은 문화산업의 효과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산업화가 노동시간을 조절하는 것처럼 문화산업의 궁극적 기능은 여가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다. 자본주의하에서의 노동은 감각을 무디게 하며 문화산업은 대신 그 과정을 더욱 존속시킨다. (...) 노동은 대량문화로, 대량문화는 노동으로 돌아가게 한다. 유사한 방식으로 문화산업에 의해 배포되는 예술 또는 정통 문화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문화산업의 범위 밖에서 작용하는 정통 문화만이 이 순환작용을 깰 수 있는 것이다. (154-155)
현대예술은 ‘상품’으로서의 자신을 거부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예술가라는 조건하에서 움직인다. 문화산업의 범위 밖이라고 해도, 자본주의는 엄연히 작동하는 것이다. 도배와 집수리를 하면서 예술을 하는 문화노동자들에 대해서 언론은 이를 바탕으로 문화노동자에 대한 처우개선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다시 문화노동자들을 체제내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포섭과정에 다름이 아니다. (부록 2참조) 아도르노 등의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대해 스토리는 문화산업이 소비자들을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식별력있는 공중에게 산업체가 필사적으로 음반을 팔려고 한다면서, 음반의 80퍼센트가 사실상 돈을 잃는다는 통계적 수치를 제시한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소비가 적극적인 행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각 음반사의 광고 홍보 규모 등은 따져보지 않았는가? 더 광고를 많이한 비누와 그렇지 않은 비누와, ‘대량문화’사이의 얼마만큼의 큰 질적 차이가 있는가?) 최근에 한국 영화산업의 거품이 빠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대부분의 영화가 수익을 내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대중문화가 소비자들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사 선택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괴물의 스크린독점으로 인한 스크림독점규제법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괴물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괴물이 우리에게 제공된 것인가? 물론 이것이 일방향적인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문제는 어느지점을 공격해 들어갈 것인가가 아닌가?
b. 벤야민
아우라의 쇠퇴는 문화 텍스트나 생산물을 전통의 권위와 儀式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는 텍스트나 행위의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며 다른 맥락에서나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게 해준다. 더 이상 그 중요성은 전통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의문시되기까지 한다. 즉, 의미는 소비의 문제로, 즉 수동적(아도르노에게는 심리적) 사건이 아닌 능동적(정치적) 사건이 된다. (...) 소비 또한 변화하여 기존 종교적 제의의 위치에서 미학적 제의로 옮겨왔으며, 이제 또다시 정치적 실천으로 기반을 옮기고 있다. 문화는 대량문화가 되었을지언정 소비는 대량소비가 된 것이 아니다. (...) 의미와 소비의 문제들은 수동적 관조에서 능동적 정치투쟁의 문제로 변화한다. ‘기계적 복제’의 긍정적 잠재성을 받아들인 벤야민의 견해는 ‘아우라’의 문화에서 ‘민주적’ 문화로 옮겨 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는 더 이상 유일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논의가 허용되고, 그것을 사용하고 변화시키는데 얼마든 열려 있는 것을 의미한다. (...) 아도르노가 의미를 생산양식에서 찾으려고(즉 문화텍스트가 어떻게 생산되었는가에 따라 소비와 의미가 결정된다고하는) 했다면, 벤야민은 의미가 소비의 순간에 생산되는, 생산양식과 상관없이 소비과정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159-160)
아도르노보다 벤야민이 실천적으로 더 ‘유용’할 수 있는 지점은, 아도르노에 따르면 우리는 대중문화를 버리고 ‘정통문화’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아도르노의 글쓰기 자의식은 대중들이 아도르노를 읽을 수 없게 만드는데도 불구하고, 이런식으로 대중문화는 썩었어라고 고함을 (*그것도 심지어 대중이 못 알아듣게) 지르는 것을 통해서? 반면에 벤야민은 소비행위에 의미를 부여함을 통해서, 언더그라운 문화나 대중문화의 전유양식에 대해 이해와 긍정적 가치부여를 할 수 있게 한다. 대중문화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를 주체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늘씬한 모델의 광고를 보고 청바지를 입는 것이 아니라, 찢어서 입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결국 대중의 ‘주체성’은 남아있지만 그런 곳에서 ‘소비’하게 만듦으로서 현상태에 만족하게 하고 만다는 아도르노의 비판은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5.3 알튀세르주의
a. 알튀세르
알튀세르는 토대/상부구조의 공식에 따른 기계적 해석 및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헤겔식 관점 양자를 모두 거부한다. 그는 그 대신 사회구성체 social formation개념(‘사회’에 대한 특별한 이론화)을 주장한다. 사회구성체는 세 가지 상이한 실천 즉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관계는 어떤 표현적인 것이 아니다. 즉 상부구조는 토대의 표현이라든지 수동적 반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토재의 존재를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모델은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허용한다. 여전히 결정 determination의 문제는 남아있지만, 그것은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다. 이 결정은 알튀세르가 ‘지배내 구조’라 부르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이는, 경제적 요인이 항상 결정의 요인이 되기는 하지만, 어떤 특정한 역사적 정세에서 경제적 요인이 필연적으로 지배적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예를 들어 봉건제에서는 정치적인 것이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 사회구성체내에서 지배적인 실천은 그 사회 특유의 경제생산 형태에 의존할 것이다. 알튀세르가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있어서 경제적 모순은 결코 순수한 형태를 띠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최종십급의 고독한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결정은 다양한 모순들과 결정들의 구조화된 명시화 articulation, 즉 ‘과잉결정 over determination'으로서만 존재한다. 경제적인 것은 최종심급에서 결정요인이 된다. 이는 다른 심급들이 부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실천이 지배적인지를 경제적 요인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161-162)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화는 문화연구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쳤다. (...)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실제 존재상황과의 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 즉 다양한 재현(이미지, 신화, 생각 또는 개념)의 체계(자체 논리와 엄밀성을 가진)는 이 공식 속에서 결코 단순히 경제적 토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의 실천행위로서 존재한다. (...) 경제적인 것, 요컨대 특정한 역사적 생산양식이 일정한 생산관계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일정한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어떤 원재료를 생산물로 변형시키는 것처럼 정치적 실천행위 또한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변형시키고,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실천행위가 사회구성체에 대한 개인들의 살아 있는 관계들을 변형시킨다고 주장한다. (162-163)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은 이미 맑스-엥겔스도 언급한 것이고, 알튀세는 이를 부각시키면서 이데올로기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닫힌 체계이고, 이는 답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 때문에 비평적 행위는 이러한 닫힌 체계에 내재하는 ‘문제설정 problematic'을 해체하여 징후적symptomatic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문제설정은 텍스트나 실천행위의 조직체인 언술들이 교차 경쟁하며 다양한 조직을 구성하고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또는 이론적 구조이다. 이러한 문제설정은 그 속에 포함된 것 만큼이나 배제된 것으로 인해 역사적 존재의 중요성과 연관되어 있다. 징후적 독해는 이중적 독해로서, 명백한 텍스트를 해석하며 또 여기에서 간과되고 결여된 것을 통해 숨어있는 텍스트를 생산하고 읽는 것이다. 문제설정을 해체하여 그 무의식적 구조를 묻는 방식인 것이다.
b. 마슈레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은 이러한 알튀세의 징후적 독해의 기술을 문화적 텍스트에 적용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텍스트는 의미를 감추고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복합적 의미의 구조이다. 텍스트를 ‘설명’한다는 것은 이를 인지하는 것이다. 모든 문학텍스트는 명백하고 함축적이며 침묵하고 결여된 여러 언술들 사이의 대립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탈중심적이다. 그러므로 비평행위의 과제는 텍스트의 통일성이나 총체적 조화, 미학적 통일성들을 측정하고 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의미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텍스트 내의 균형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비평행위는 텍스트의 침묵이나 부재, 불완전한 구조의 이데올로기적 필연성을 설명하는 것, 즉 텍스트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연출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말하고자 하는 것과 실제로 말하는 것 사이에 하나의 ‘틈’이 있고, 이러한 텍스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억지로 말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텍스트의 ‘무의식’이 성립된다.. 그리고 이 텍스트의 무의식을 통해 그 존재의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조건과의 관계가 밝혀지는 것이다. 텍스트의 무의식은 역사적 모순을 반영하기보다 오히려 이 모순들을 환기시키며 연출하고 보여준다. 텍스트는 항상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시작하고, 이의 해결과정으로서 이야기narrative를 진행시킨다. 그런데 마슈레에 따르면 주어진 문제와 해결책 사이에는 지속성보다 항상 단절이 있고, 이 단절을 연구함으로써 텍스트와 이데올로기, 역사와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도식적으로 보면 텍스트는 세 단계로 나뉜다.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실현, 그리고 텍스트의 무의식(징후적 독해행위에 의해 산출된)이며 이는 역사적 ‘진실’이라는, 억압된 것이 다시 회복되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마슈레적 비평행위는 이데올로기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문학텍스트가 자체와는 모순되는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c. 헤게모니로
알튀세르의 두 번째 공식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존재의 실제 상황과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재현한다. 다른 점은 이 개념이 이제 이 생산의 관계들이 재생산되는 과정까지 포괄하는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사상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즉 교육, 조직된 종교, 가족, 조직된 정치, 미디어나 문화산업 등-의 행위와 생산을 통해 재생산된 살아있는 육체적 행위(예를들어 제의, 관습, 행동의 패턴, 실질적 형태를 갖춘 사고방식)로 인식된다. 이 두 번째 정의에 따르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구성해내는’ 기능이 있으며, 이 기능에 따라 규정된다. (...)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이데올로기의 육체적 행위에 종속되는 주체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두 번째 모델과 이것을 문화이론에 적용하는 것의 문제점은 이것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요구하는 모든 필요불가결한 이뎅로로기적 습관에 맞게 성공적으로 재생산된다. 거기에는 실패나 갈등, 투쟁 또는 저항의 기미조차 보이는 일이 없다.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예를 들어, 광고는 우리를 소비하는 주체로서 호출하는 데 항상 성공하기만 하는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문화연구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연구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5.4 헤게모니 이론
기본적으로 이 개념은 발전된 서구민주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해명하려는 것이다. 헤게모니란 지배적 계층(들)이 단순히 사회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지적 리더쉽을 가지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상황을 지칭한다. 이는 사회에 다수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안정이 있음을 의미하며, 피지배계층이 현재의 권력구조에 자신들을 묶어두는 가치나 이상, 목적, 문화적 의미들을 능동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헤게모니가 다수의 합의를 전제로 하긴 해도, 갈등없는 사회나 상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헤게모니가 뜻하는 바는 이러한 갈등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돌려지고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 지배층 집단의 전략의 일부는 동의를 얻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동의가 얻어지지 않을 때는 항상 억압적인 국가의 기구들-즉 군대나 경찰, 감옥체계 등-의 무력이 사용된다고 주장하였다.
대중문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헤게모니는 매우 유용한 개념임이 밝혀졌다. 헤게모니 이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중문화는 사회의 지배력과 피지배력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성이나 세대, 인종, 지역과 같은 여러 형태에 따라 분석될 수 있다. 대중문화는 합병과 저항 사이의 알력, 즉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보편화시키려는 시도와 피지배층의 저항 사이에서 투쟁이 일어나는, 문화적 교류와 협상(타협적 평형)에 의해 구성된 영역으로 명시화된다. (...) 헤게모니 이론은 대중문화를 어떤 의도들과 반대 의도들 사이에 ‘타협된’ 혼합물로 생각하게끔 해주며, 또한 이것은 ‘위’나 ‘아래’, ‘상업’이나 ‘정통’ 양측 모두에서 비롯된 것이고 저항과 합병의 힘들 사이를 움직이는 저울의 추 같은 것이다.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에 대한 이해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생산’이라는 개념부터 알아봐야 한다. 여기서 생산은 노동자가 원재료를 노동을 통해서 어떠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처럼, 작가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원천인 언어를 가지고 무엇인가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욕구를 통해 작품을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의식적으로 ‘창조’와 대비된다.
이러한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하여 그것이 생산되어진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지만, 작품자체는 이데올로기에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작품은 그 속에 일관되게 관철된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통하여 현실을 파편적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관점이 내포하고 있는 객관적 한계를 명백히 드러낸다. 작품과 이데올로기 간의 모순적 관계가 문학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즉 현실을 총체적으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선택적’으로 반영함으로써 반영과 반영의 부재, 즉 ‘침묵’을 작품은 포괄하고 있고, 이러한 ‘침묵’에 대해 탐구함으로서 그 자체로는 본질적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할 수 없음을 그 속성으로 하는 이데올로기의 환상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과학’적 비평의 기능이다.
작품은 주어진 의미로 귀속될 수 없는 비환원적 성질을 가지며, 이질적 요소의 불균등한 결합에 의한 불완전한 상태 그 자체가 지니는 자율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서, 마슈레의 생산이론은 알튀세가 말하는 심급마다의 자율성을 계승한다. 그럼에도 ‘과학’으로서의 비평은 이를 ‘현실’과의 대조를 통해서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폭로하는데, 그 ‘과학’은 어떻게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가? 맑스주의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지점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맑스주의라는 언어게임 내에서, 또는 그 ‘문제설정’ 내에서 이는 반박당할 수 없고, 기껏해야 다시 ‘실천적 의미’로 돌아올 뿐이 아닌가? 즉 맑스주의는 어떻게 과학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맑스주의적 대답인 ‘실천’을 통해서 보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마슈레가 루카치, 골드만 등의 헤겔적 총체성에 기반한 비평/문학이론을 비판하면서, 이것이 작품을 하나의 의미로 환원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지적은 유의미하다. 마슈레는 텍스트를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반영으로부터 동시에 구해내지만, 결국 작품은 동시에 이 두 곳에 정박되어 있을 뿐이지 않은가? 루카치를 벗어나고, 마슈레도 벗어나면, 도대체 작품이라는 미궁은 현실이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 것이고(또는 전혀 관계없고, 또는 작품마다 다르고), 우리는 작품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일까?
사실 골드만을 방법론으로 주요한의 불노리를 2.8 혁명을 앞둔 동경유학생집단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재단’해 버린 나로서는 뜨끔한 부분이 많은 루카치-골드만 비판이었지만, 정작 마슈레의 작품 읽기는, 텍스트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에 주목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결국 현실 반영과 이데올로기에의 ‘환원’은 똑같다. 맑스주의 문예이론은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문학’이 같이 간다. 마슈레 또한 골드만처럼 ‘진정한 문학’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듯한데...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아닌 ‘진정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대답하려하는 것인지.
(*마슈레에 대해서는 홍성호, 문학사회학, 골드만과 그 이후 와 오민석,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를 참고했음. 단 의문은 발제자의 것이기 때문에, 전혀 뜬금없고 마슈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음.)
8. 대중성의 정치학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스토리의 대중문화에 대한 입장이 논쟁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대중문화연구자의 난처한 입장은, 그들(또는 ‘우리’) 또한 대중문화 속에 있다는 것과 자본주의를 별반 좋아하지 않지만, 자본주의 속에 있다는 것. 두 번째로 대중문화를 생산의 측면에서 볼 지 소비의 측면에서 볼지, 또는 이 둘을 어떻게 연결시킬지 하는 것. 이러한 ‘난처함’은 맑시즘의 역사발전의 주체로서의 pt에 대한 기대와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증오가 굴절되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자기변명만을 생산하고 있다.
우선 대중문화(popular culture)을 생산의 입장에서 보면 mass media와 자본에 의해서 자본주의적 작동 방식에 따라 움직이는 상품 생산과 이를 어떻게 소비자 대중을 조작하여(광고) 먹고 살 것인가로 파악할 수 있다. 어이없게도 스토리가 항상 이에 대해 반례를 드는 것이 영화나 음반시장이나 이익보다는 손해보는 일이 잦다는 것. 이는 개별 자본들의 경쟁에 따른 시장 파이의 나누어먹기 싸움에서 실패한 것이고, 전체 자본의 입장에서 대중문화의 시장은 계속 확장 일로에 있는 것인 아닌가?
또 이러한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누어서, 대중문화는 사용가치에 기반을 두고 소비되는 것이며 소비의 상징적 작업은 단순한 생산관계의 반복이 아니며, 생산자들이 주입시키는대로의 기호학적 확실성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는 모든 상품이 마찬가지 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이 상품이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서 사용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이 어떠한 ‘저항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특히 문화상품은 상대적으로 이것이 다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이것을 사는 대신 저것을 구입하는 결정은 가격이나 물건의 튼튼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스타일과 문화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비는 쾌락과 정체성, 의미의 생산 등에 관심을 가진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그리고 생산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사용의 경제와 교환의 경제라는, 평행선을 달리는 두 개의 경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85)
이것은 너무 나이브한 생각 아닌가? 대중들이 완전히 자본주의의 ‘조작’에 놀아난다고 말하는 것도 현상과 반하는 면이 있지만, 대중의 ‘소비’가 이루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조작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다면 실천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사용의 경제를 분석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스토리는 반자본주의적 생각을 가진 랩이 EMI에서 유통된다고 해서 이들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납품상인’이 아니고 이들을 듣는다고 해서 ‘자본주의 주체로 재생산되어 더 많은 돈을 쓰고 더 많은 이데올로기의 소비를 바라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렇다. 그런데 왜 스토리는 보다 논쟁적인 예를 들지 않았을까? 맑스의 자본론이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또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출판자본에게 이득이 되는 형태로 판매되고 있다고.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진정 혁명적인, 자본가 계급 전체에 적대적일 수 있는 문화는 자본에 의해 유통되는가? 아니면 자본이 전유할 수 있는 것만 유통되는가? 체게바라는 어떻게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가? 결국 왜 스토리는 생산-소비가 자본주의적으로만 유통되는 지점만을 분석과 사유대상을 삼는 것인가? 대중문화에 자본주의 밖은 없는가? 또는 자본주의의 밖은 없어도, ‘틈’은 존재하지 않는가? 베네주엘라의 조합주의 운동 등.
스토리는 ‘모두들 상업문화내에 살고 있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임을 인정한다.’ 드디어 인정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선택과 거부, 의미생산, 가치부여를 통해 스스로 문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이들로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쾌락과 정치는 별개의 것이라서, 왜곡에 대해 웃고 즐길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왜곡‘이라고 말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지할 수도 있다.’
그렇다 지지할 수도 있다. 2002월드컵 때, 월드컵 경기장이 세워지는 과정에 국가의 폭력적인 수단으로 그 땅이 매입되고 경기장이 세워졌는지를 알면서도 월드컵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민족주의에 대해 불편해 하면서도, 광화문에 나서서 응원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그러하다는 것은 ‘진정’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정말 아니라면 어떻게 거기서 쾌락을 느낄 수 있는가?
다시 돌아온 곳은, 대중문화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지점.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아무래도 버리기 힘들다. 대중문화라는 것이 있고, 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기능함으로서, 자본주의적 주체로 대중을 호명하는 것이다. 물론 이 호명이 실패할 수 있고, 대중은 대중문화를 자신의 방식대로 소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호명은 성공하고, 대부분의 경우 대중문화는 ‘서커스’로 기능하는 것이 문제인 것 아닌가? 이러한 ‘대부분’이 중요한 것이고, ‘대부분’은 그렇지만 ‘일부’는 아니라는 지점에 개입할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연구자는 일종의 전위로서, 깃발을 높이 들고 달리는 것이 목표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인식은 어떻게 계몽주의의 함정을 피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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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전을 통한 헤게모니 쟁탈전/서프라이즈 활용법 조회 (43)
얼마 전 신영복 교수가 그람시의 진지전 개념을 언급했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진보적 역량이 위축돼가는 현실에 대해 신 교수는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야기했던 '진지전'의 개념을 소개하며 "진보적 역량을 담을 진지(陣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진지전'은 발 빠르게 정치권력을 틀어쥐는 '기동전'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시민들의 '동의에 의한 지배'가 관철되는 시민사회 내에서 지적, 문화적 실천을 통해 진보적 헤게모니를 형성해나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진지가 작아 보여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며 "특정한 시기에는 작은 진지가 큰 힘을 발휘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인민(people)의 성취로 청와대와 국회(비록 뻘짓 하는 우리당 꼴통들 때문에 제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를 접수한 지금 전면전을 통한 혁명은 불필요해졌지만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언론을 앞세운 수구 세력에게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서프라이즈를 진지 삼아 가열찬 투쟁을 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전 세계 어떤 NGO고 부자 나라와 부자들의 첩자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듯이 우리나라 시민 사회도 극우 첩자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어서 진지전을 하려는 우리에게는 매우 불리한 환경입니다. 언론, 학교, 종교 등이 수구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 주입을 통해 헤게모니를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매우 열세이며 노대통령이 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진지전의 실천방법 하나를 제안합니다. 제가 직접 실천하여서 상당한 성과를 올린 방법입니다. 저는 제 고교 동문회 사이트에서 단계적으로 수구꼴통 선배들의 헤게모니를 뺏어 왔습니다. 물론 선배들은 제가 오프에서 약 4~5년간 동문회에 기여한 바가 있어서 안면 때문에라도 이지메를 하지 못 합니다. 아니 실제는 간혹 이지메를 당하지만 지원자가 나타나서 결국 판세가 바뀔 정도로 되돌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소 오프에서의 자산이 있는 분들이 훨씬 유리하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치밀하게 다음 대선까지 계획을 세워서 대응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자기만의 전문성이 있다면 더 좋습니다. 글재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서프라이즈의 글들을 최대한 활용하면 됩니다.
인신공격을 하지 말고 최대한 예의를 지켜가면서 참여 정부에 유리한 논제들을 순발력 있게 제시하는 방법으로 규칙적으로 글을 올리면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평소에 자주 가는 친목회 사이트나 동문회 사이트 어디든지 고르셔서 언론의 모순, 야당의 행패, 올바른 역사관, 경제를 보는 안목, 국제관계와 북한문제 등등 소재를 다양화하면서 언론이 제시하는 어젠더를 깨부수면 됩니다.
정치인을 직접 거론하면 반드시 역풍이 크므로 그런 문제를 피하면서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지난 대선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이겼기 때문에 필요 없지 않느냐 하실 수도 있지만 3~4 십대분들이 의외로 많이 흔들리고 있다가 제가 제시하는 관점에 아주 크게 안도하고 자신을 되찾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서프라이즈는 결코 작은 진지가 아닙니다. 우리 분발합시다!!!
부록 2
문화예술인 60% “창작수입 月 100만원 이하”
입력: 2007년 02월 26일 18:19:56
문화예술인 5명 중 3명가량은 창작활동 소득이 월평균 100만원 이하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문화예술인들이 생활빈곤 상태에 빠져 도배·집수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공연 관람객 10명 중 7명은 ‘무료 관객’인 것으로 나타나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26일 한국관광문화정책연구원이 기획예산처 사회서비스향상기획단에 제출한 ‘문화분야 사회서비스 실태조사 제도개선 연구’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문화예술인들은 저소득층(기초생활보호대상자, 차상위계층)에 해당되며 이중 생계 자활활동(도배, 집수리사업)에 참여하는 저소득 예술인도 다수인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 문화예술가의 60%가량은 창작활동 소득이 월평균 100만원 이하에 그치고 있고, 창작활동에만 전념하는 예술인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보고서는 “지방도시의 경우 문화예술 활동이 증가하고 있으나 대형 문예시설 위주의 운영으로 소규모 시설과 전업 예술인은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연극·국악·양악·무용 등 1430개 공연단체의 2004년 연간 총수입은 1584억원으로 이중 공공지원 의존수입이 905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자체수입(428억원), 민간부문 의존수입(251억원) 등의 순이었다. 공연단체의 작품당 수입금도 공공지원금이 32.2%로 가장 많고, 자체예산(27.7%), 입장료 수입(24.3%), 민간기부금(13.2%)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2004년 공연 관람객 1167만명 가운데 유료관객은 32.3%에 그쳤고, 나머지는 무료관객이었다.
국내 공연시장 규모는 매년 꾸준히 커지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미국시장의 50분의 1, 일본시장의 10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관철기자 okc@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