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맑스를 다시 공부하고 있다. 맑스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맑스의 저작을 읽고 있다는 것. '맑스주의'를 공부하고 있어도 사람들이 '새삼?'이라는 판국에, '맑스'를 다시 읽고 있다는 것.

새삼. 그래 새삼.

어쨌든 학부 때 읽었던 맑스는 사상체계라기보다는, '도구'나 '방법론'으로 '무비판적'으로 '해석'의 수준에서 읽었기에, 정합론적인 체계로서 읽어보려는 셈. 그러나, 역시 그러니 만만치 않다.

어쨌든 나름 '시리즈'로, 맑스를 공부하다가 의문이 나는 것들을 적어 두기로 한다. 알라딘의 고수님들이 지나가시다가 댓글을 달아주시거나, 내가 나름 정리해 두었다가 주위 맑시스트(?)들에게 묻든지 할 목적이다. 결국은 공부하려면 의문이 있어야 한다. 우선은 정리가 되야, 의문을 풀던지 말던지 하지! 그래서 쓴다.

첫번째 시리즈! ㅋㅋ -_-;

Pt 개념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있어서의 '실천' -맑스를 공부하다 생기는 의문 1

맑스에게 있어서, '맑스주의'에 있어서 Pt 개념 (최근 네그리-하트에 의한 '다중'이든 간에 어쨌든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혁명적 주체'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이 개념 때문에 절망한 사람도 많다. 왜? 실제 우리가 마주치는 pt계급과 맑스가 말한 pt 계급 사이의 격차.

부르주아 사회에 '진정한 pt'는 존재하는가? pt는 생성중에 있는가? 즉 혁명적 주체로서의 pt는 결국 혁명의 순간에 탄생하는 것인가?

pt 계급의 운동방식 또는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은 소위 '유물론적 변증법'의 논리적 전개를 따른다고 했을때, 그렇다면 이 '유물론적 변증법'은 외부 '현실'의 작동방식에 대응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는 역사의 전개로 증명되는 것인가. (즉 헤겔적인 의미인가?)

그렇다면 현실 자본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가능태로서 존재하고, 이는 '실천'을 매개로 공산주의라는 현실태로 정립되는가? 그렇다면 이 '실천'은 변증법 외부에 있는 것인가, 아님 내부에 있는 것인가. 내부에 있다면 그때 '주체'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변증법 자체가 '주체적'이라면, '비주체적'인 것, 즉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 변증법적으로 작동한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주체'이지 않는가? 모든 것이 '주체'라면 '주체'라는 것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 유명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11번째 테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에 입각해서 위 질문들을 해석한다면.

결국 pt계급은 생성중의 가능태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이는 실천을 통해서 현실태로 변화하는 것이며, 맑스의 철학은 이 실천을 가능하게하는 '무기' 즉 '도구'(또는 하나의 실천)인 것인가? 그렇다면 이 철학 '자체'로 놓고 본다면 '외부' '실천' 또는 '정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가. 또는 정말로 맑스가 포이에르바하의 테제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의 '실천'으로서의 철학인가?

이 철학 '자체'로는 정합적이지 않고, '외부' '실천' 또는 '정치'라는 콘텍스트가 이 '내부' 철학에 의해 현실태로 변모할 때, 이 철학 또한 '자체'적으로 정합적이게 변모되는 것인가.

이렇게 철학 '자체'와 실천을 구분할 수 없는 것인가. 결국 이것인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하면, 이 '철학' 자체가 실천이다.

그러면 맑스의 철학 자체는 변증법적인 운동 과정에 놓이는 것.

음. 과정 중에 있는 변증법이라. 역시 흥미로운데...

그러면 결국 '맑시스트'가 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 맑스를 받아들이는 것과 아닌 것은, 전부 혹은 전무의 선택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느냐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느냐의 선택인 것일까.

변증법적 유물론을 인정하고, 또 맑스주의의 근본적인 전제인 혁명성을 받아들인 이후라면 이는 내부적으로 작동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일까.

닫힌 체계? (포퍼 아저씨가 생각나는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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