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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폴테쓰파의 선언>

임화의 1926년도 글. 흥미롭다. 맑시스트 이전의 임화. 사회 진화론은 이미 이 시기에도 뿌리박혀 있었던 듯.


'우리 빈약한 여명기에 잇는 조선예단' '일본에도 잇셧스나 복잡과 몽매한 극에 잇다' '고-간'의 그림이 모양화라고 단번에 말한다면 대단한 광언갓치 생각되나' 등. 서구-일본-조선 이라는 위상이 작동되고 있다.

'녯날 고시대엔 권위잇는 상류사회의 귀부인들이 기라를 걸고 호기잇게 왕래하든 곳이엿스나 근대엔 보기에도 지져분한 하층 라전인종에 재굴로 재굴에 모번지' 라는 말에는 '귀부인-빈자'의 위상이 나타난다. 맑시스트 임화여, 너는 젊은 시절 글들을 불태웠는가?

언제나 고등학교 중퇴 임화의 폭넓은 지식에 감탄을 했는데,
프랑스 고대의 동굴 벽화를 '그림이 아마도 동굴에 장식 목적으로 벽화갓치 쓰여저 잇는 것'이라는 데는, 임화의 무식이 드러난다. 물론, 그 무식은 특기할만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임화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것.

결국 이 글의 핵심은 '폴테쓰파'의 미술인 것. 그 미술에 임화가 매료된 이유는? 아마도 이것.

인간에 전정력의 발현을 가지고 곳 예술에 생명으로 하랴고 했다. 즉 석기시대에 '더-동'동에 벽 갓흔 훌융한 조각이 엉긴 것을 생각해 보면 고대인류에 대정력은 야수와 영지를 쟁탈하는 데 발현하고 잇는 것이다. 그러고 이 대정력이 야수를 정복하고 우마 갓흔 것을 가축으로 잡아온 대승리에 광영에 취해 잇슬 때에 제작임으로 도저히 근대에 것과는 상상조차 밋치지 못할 생명잇슨 예술이 생긴 것이라고 그리엿다. 또한 '폴테쓰'파에 주장에 대체를 드러보면 풍요한 토지에 주민은 수직적 에술을 짓고 빈약한 토지의 주민은 수평적인 예술을 창조했다고 한다. 이것은 즉 풍요한 토지 이집트 갓흔 나라에 사는 민족은 만족한 토지에 집착하고 그 토지를 직히는 데 전정력을 쓰고 잇슴으로 이집트인에 폴테쓰는 그 십자탑이나 '오레리슥크'와 갓흔 수직적 예술을 산출한 것이다. 여기서 폴테쓰파의 선언에 제일조가 된 '조각의 정력은 첨형의 산이다'란 의의는 이 수직적이란 것을 의미함이다.


사회와 예술에 대한 성찰. 너무 광범한 구분이나, 매력적이다.
최남선, 정지용이 '바다-> 산'으로 나아간 것은 무엇? 친일로의 행적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는가. 기존에는 근대 문물이 밀려오는 '바다'에서 전통의 '산'이라고 했지만, 최남선, 정지용은 결국 '민족->친일'의 구도(이러한 구도설정이 거칠게 나마 가능하다면)로 갔던 것.
어쩌면 '빈약 -> 풍요'의 도식이 가능? 그저 한 번, 들이대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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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서는 "이 가난한 평론집을 내 개인의 측으로 볼 때는 내 자신의 문예의 세계에 있어 일본국가의 모습을 발견하는 데 이르는 혼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김윤식 역)라느 서문을 가진 "전환기의 조선문학"이라는 평론집을 낸 바 있다. 1940년 가을부터 신체제운동이 대두되고 익년에 문예지는 "국민문학"(최재서 주재) 하나로 통합되었으며 동년 태평양전쟁, 1942년 5월부터 징집제도가 실시되었다. 1933년 나찌는 비평통제법을 발표하여 비평가란 말을 말살하고 '예술 기술자'라 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그는 비평의 새로운 길을 보수적인 데 두고 있다. 흄, 엘리어트의 노선을 말하고 일본적 가치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보도연습반' '수석' 등의 창작까지 발표하고 있다. 대체 이토록 철저한 그의 신념이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 의문이 마지막으로 남는다. 우리가 이 점을 그토록 해괴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가 그토록 부르짖은 지성 때문이다. 지성 혹은 그가 말하는 숙지란 그러면 대체 무엇이었던가. 이 점은 까다롭고도 지극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지성을 빙자한 허다한 위악과 비극의 가능성을 우리는 지금도 도처에서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개인적 체질이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할 흥미조차 나는 갖지 않는다. 다만 본고와 관련된 부분만에 대해 한마디 발언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의 영문학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신주처럼 모신 흄이 군국주의자로 전사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영문학풍토에서 빛나는 레지스탕스 정신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전통과 질서와 안개와 반달리즘에 대한 문화옹호는 있었을지언정 처절한 연대의식과 조국위기에 대한 자각이 그가 익힌 영문학풍토에선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조국의 위기조차 그들에겐 없었던 것이 아닌가). 그가 진작에 독일이나 프랑스의 지성풍토를 익혔더라면 하는 생각을 불금한다. 지성의 한 변형인 헉슬리의 새타이어가 배부른 지식성에 대한 것이었고, 영국은 그 조국의 역사가 엘리어트의 전통 속에 정통을 줄 수 있도록 넉넉한 것이었다(엘리어트가 Criterion지를 자진 폐간한 사실을 보라). 나는 결코 영문학의 지성이 담담하다든가 이상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 그럴 수 있으랴. 다만 최재서가 영문학지성을 오해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터일 뿐, 따라서 최재서 지성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 결여된 사이비지성이라 본다. 그의 비평정신이 영광스런 레지스탕스 문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우리 신문학사상 가장 아픈 한 대목이다. 이 아픈 대목 떄문에 앞으로도 이 방면의 순례자를 위해 누군가가 언어를 낭비할 것이다.

김윤식, '최재서론 -비평과 모더니티', "현대문학", 1966, 3.


선생의 글을 인용해서, 나의 주장의 지지대를 만드는 일은, 사실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압축적으로, 보다 설명력있게, 제시한 선생들의 글은 게으른 나에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최재서의 수준이 '얕다'라는 것, 또는 그의 '가벼움'. 물론 '얕다', '가볍다'라는 것은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 기준하에서 논의될 사항이라고 생각된다. '절대적 기준'이란 것은 설정하기에 따라서 최재서의 수준이 절대적으로 '얕다', '가볍다'고 논의될 수조차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한 '절대적 기준'은 자의식의 건강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선의 비평가로서의 자의식. 식민지 시대 조선이라는 특수성을 어떻게 영국의 비평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파헤쳐 나가고 이데올로기 투쟁을 할 것인가의 문제. 도대체 왜 지금 '이 짓'을 하느냐의 문제. 혹은 왜 그들은 '저 짓'을 하냐의 문제. 아직은 최재서에게서 그러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최재서라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가 없다.
자네, 지금 왜 그거 하고 있나.
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최재서를 읽어내야한다.

앞으로 이를 찬찬히 점검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는 왜 '이 짓'을 하는 것인가.

만약, 질문에 대한 답이 구해지지 않을경우, 그리고 돌연 구해질 경우,
이는 하나의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발견시대, <<문학과 지성>>

제목처럼 이제는 문학창조시대가 아니라 문학발견시대라고 주장하고 있는 글. 주요한과 김동인의 '창조'가 떠오른다. 문학의 힘을 믿고, 문학의 근대화로 조국의 근대화를 꿈꾸었던 초창기 몇몇 천재들의 모험.

독립을 위해 상해로 달려가던 젊은 주요한의 뒷모습...


이제는 1930년대. 경성제국 영문학 전공의 최재서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중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것.. 이라고 외치며

카프 진영에게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 식민지 사회에서, 지식인의 쁘띠-부르주아적 면모란 바로 이런 것... 더 이상 젊은 지식인-문사 집단(계급)은 1910년대말처럼 전위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못하다. 이에는 KAPF라는 집단과 이를 뒷받침하는 조선공산당 때문.


이러한 정세 속에서 최재서는 특이하게도 학생과 비평가의 대화형식으로 글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김윤식 선생의 주객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최재서 자체도 어떤 '객'이 필요했을까. 그의 말대로 '문학 발견'시대에 비평으로서, '학생'과 대화하는 '비평가'의 존재.


글을 읽다보면 그도 '리얼리즘'을 제창하지만, 당대 카프 진영의 '사회적 리얼리즘'은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조적을 자신의 이론을 토대로 현실을 분석한다는 것이 그것. 그래서 그가 주창하는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민중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작기는 자기의 개성을 드려다보지말고 눈을 민중으로 돌리라!

개성의 미를 세련하지말고 민중의 진리를 발견하라!

개성의 예언자가 되지 말고 민중의 노예가 되여라!


라는 구호... 예언자 내지 지도자적 긍지를 버리고 민중의 충실한 발견자 내지 기록자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


그러나 당연히 공허한 이야기. '있는 그대로'라는 것, '세계관에 의해 투영 변형 된 세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날 현실'이란 것.

그것.. 은 무엇? '물자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최재서는 덧붙인다. '물자체'를 매개할 수 있는 방법.


누구를 표본삼으면 좋을까요?

고대의 이름도 없는 민요작가.

그리고 또 덧붙인다. 

민요는 민중의 집단 창작이라고.


그렇다면 20세기 중반, 민요작가를 본받으라는 이야기는 무엇?

앞서 이야기한 창조의 주요한이 마침내 조선에 돌아와 시도했던 것?

1940년대 국민문학파의 것?


민중의 기록자이면, 민요 채집이나 잘 해 둘 것을.

민요 창작은 또 무슨 수작. 

 

 예언자 내지 지도자적 긍지를 버리고 민중의 충실한 발견자 내지 기록자가 될 필요가 있다는 것.

을 '평론'이라는 정론성 강한 글로서 '지도자적 긍지'를 가지고 계몽하려는 최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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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론 시론

시의 '과학'을 추구. 물론 일원론적인 학문관을 보여준다. 기존의 시학이 시란 무엇이냐, 시란 왜 있느냐는 질문에 해명하려고 노력했다면, 자신은 시란 어떻게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

물론, 이는 문제가 있다. 시란 '어떻게' 있느냐 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그 전제에는 '시'라는 것의 외연과 내포, 그 정의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가정하에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구히 완성된 시학이라는 것을 미리부터 규정할 수는 없다. 오늘의 문명생활이 사람들의 문화적 충동을 더욱더 복잡다기하게 해갈수록 어떤 문화부문의 일반성까지에 새로운 사태가 나타나도록 변천이 심할 수 있으며 그 문화부문을 취급하는 일반적인 과학도 그 사태마저를 포용하고도 남을 수 있게 체계의 확충 갱신을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김기림이 시를, 또는 시학을 바라보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자연과학과 다르면서도 같다. "자연에 있어서의 사태란 '나타나는 것'이고 문학에 있어서의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시의 사태들의 사실적 기술, 이것이 우선 시학의 첫째 임무이고 이를 통해서 시의 일반적 성질을 정리한다. 자연과학과 같다. 기존의 시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태들이 누적될 때, 새로운 시학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역시 문제. 자연과학에서 '사태'란 연구실에서 통제된 조건 하에 일어나는 일. 혹은 자연에서의 어떤 물리,화학,생물적 사실들을 연구하는 것.

그러나 '시'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것? 무엇? 이의 규정을 회피한다면. 결국. '시'라는 것은 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자신들이 '시'라고 주장하는 것과 독자들이 '시'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종합. 그래. 이렇게 뿐에 규정될 수 없다.

그래, 그래도 이 정도 규정으로 만족하고 --그러나 과연 이런 규정이 유의미한지에 대한 의심을 품고-- 그의 이후 글로 넘어가기로 한다.
 
 

'조만간 학문은 모조리 과학으로 통일되어야 할 운명에 있다고 본다.' 김기림의 명제. 여기서 과학이란 엄밀한 진리의 입증. 자연과학적 모델에 입각한 것이다.


'과학적 태도는 오늘이 시인의 새 '모랄'이며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흥과 함께 자라난 세계의 새 정세가 요구하는 유일한 진정한 인생태도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가치판단이 아니라 '사실'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시가 조직하고 통일할 것은 과학적 세계상에 알맞은 인생태도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과학적 태도와 근저에 있어서 일치하는 것이리라.'



또 다음 글에서 그는 감상과 비평을 구분짓는다. 최재서가 비평을 감상의 합리화로 규정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의 취미에 입각해서 다른 사람의 작품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에 대해 김기림은 '유감'이라고 표현한다.


스스로 비평가이자 시인이었던 김기림은 비평가가 시인일 때는 자신의 시론을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흥미롭다.



정말 흥미롭게도, 과학적 '시학'을 주창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글을 '시론'이라고 이름붙였다. 김기림은 스스로 '시론'과 '시학'을 엄밀히 구별하고 있다. '비평학'과 '비평론'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따르면 '시학'은 시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이고, '시론'은 시에 대한 구체적 논의로 시인의 시론은 자신의 시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려는 경향을 띠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김기림은 자신의 '과학적 시학'에 대한 이야기를 왜 '시론'이라 이름붙였던 것인가.


김기림의 글에서의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전혀 배제된 '사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신뢰가 우선 첫번째이다.


어떤 명제를 사실에 비추어 판단하는 작업을 과학이라 불렀던 것. 20세기 초반에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을 보고 놀라버린 일군의 철학자, 문학자들의 면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래, 과학사회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의 작업에 의해서 이제 '과학=진리'라는 도식은 허위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는 양쪽에서 아직도 설전을 계속 중이고,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지적 사기>라는 형태의 '사기'로 이루어졌다. 현대 과학자가 유명 과학사회학 잡지에 말도 안되는 논문을 게재한 후, 과학사회학자들의 무식과 허위를 꼬집었던 것. 그럼에도 '과학자' 또한 인간임으로 어떠한 '사회'를 형성하고 이는 사회학의 영역임은 분명하지 않는가? 황우석 사태 이후 한층 더 활발해진 과학사회학, 과학철학자들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둘째로, 시와 사회와의 관계를 논하기도 하지만, 이는 단어 그대로 언어가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에 있어서 시도 사회적 산물임으로 둘은 관계가 있다는 식이다. 사회가 '과학적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으로 시도 '과학적 세계관'을 표출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런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적은 없다.


종종 카프를 대타항으로 설정한 듯한 발언이 눈에 띈다. 카프가 말하는 '과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김기림은 논쟁하고 있지는 않다. 김기림 말처럼 용어를 자기 마음대로 서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기림은 직접적으로 투쟁하지 않는다. 이 용어를 '전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다. 내공의 힘이다.

 

30년대의 소묘

"임화씨의 신문학사 연구로 현대소설의 어머니로서의 이른바 신소설의 성격이 매우 천명되었는데 그것은 거진 공통하게 '유토피아'적 요소가 중심 게기가 된 것으로서 우리 밖에 있는 '놀라운 새 세계' 즉 문명사회로 향하여 호기와 경이의 눈을 뜨고 있었다. 신구 두 대척되는 정신의 갈등-- 즉 중세와 근대의 투쟁같은 것이 작품의 기축이 된 것은 역시 춘원의 일부의 작품에서 시작된 듯하다."


 

 

 

 

 

 

깔끔한 정리.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1920년대 이후 조선 문인들의 글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지적해내는 것, 그 이상의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는 바탕이 된 것이고, 여기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할 것.

최재서가 영문학의 에피고넨이라면, 김기림은 서구 근대 과학, 문명의 그것이다. 언제나 '과학'을 강조한다.

"새로운 세계의 구조에 있어서도 과학정신은 의연히 가장 정확한 지표일 것이고 또 과학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조언자일 것이다"

엘리티시즘의 최재서와 달리, 보편 과학을 추종하는 김기림. 천재보다는 민족의 힘을 강조한다.

"새로운 원리의 발견이거나 역사적 결산이거나 그것은 어떠한 개인의 머리에서 번뜩이는 천재적 환상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인의 창의가 아무리 뛰어났다 할지라도 한 민족의 체험으로써 결정되고 조직된 연후에 비로소 시대의 추진력이 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이라는 역사적 일순의 특이한 성격인 것같다."

그는 근대는 습득해야할 것이라고 전제한 후에도, 각기 문화는 보존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어떻게 해결가능한 모순인가? 근대는 문화 이전의 제도인가. 그가 말하는 문화란 무엇일까.

"한 민족의 문화는 늘 그 자신의 존엄과 독창성과 의욕을 가지는 것이고 따라서 거기로 통하는 길은 오직 사랑과 존경을 거쳐서만 뚫려진다. 한 민족이 세게에 향해서 실로 그 자신이 이해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문화를 버림으로써 얻어질 리는 만무하다. 보다도 전통 및 생리와 보편성과의 충격과 조화와 충격의 끊임없는 운동을 따라 그 자신의 문화를 더 확충하고 심화하고 진전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근대'라는 것은 '보편성'이라는 것. 언제나 '후진'으로 표현하고 있는 조선의 문화는 그 보편성을 우선 획득한 후에, 자신의 존엄과 독창성을 올바로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임화와 상통할 수 있는 것.

1908년 동갑내기 비평가. 임화/최재서/김기림. 김기림은 임화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최재서는 김기림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 보인다. 물론 카프를 대타항으로 설정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김기림은 최재서를 의식했을까?

임화를 의식한 듯 보이는 발언 또 한가지. 김기림은 임화를 인정하고 있던 것 같다.

"어느 시기에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학사를 요망하는 기운이 움직인다고 하면 그것은 그 시기의 문학이 자신의 계보를 정돈함으로써 거기 연결한 전통을 찾아서 그 앞길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는 요구를 가지기 시작한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어느 사이에 엄정하게 객관적이래야 할 문학사에 시대의 주관적 요구를 침투시킨다."
(1939. 10.) 

 감상에의 반역
시론에서 '시'에대한 정의를 굳이 피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나름의 시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논쟁의 중점이 되면 안 되겠기에 그는 이를 내세우지 않지만, 언뜻언뜻 이것이 나타난다.
"시란 가치의 형성이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좁은 개성의 울타리를 넘어서 한 시대의 보편적인 문화에 늘 다리를 걸쳐 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의 당시나 고시조는 결코 이러한 것으로서는 우리의 감상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의 시'에 당시나 고시조는 포함될 수 없다는 것. 김기림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시'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시가 등장할 때면, 구시대의 시론을 가지고는 이를 시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고 한다. 열린 생각이다. 그러나 논쟁에서는 교묘하게도 그는 조선의 시가 '과거'의 시라고 규정하고 만다. 당사자는 이것이 '오늘'의 시라고 하면 그만이지 않는가. 그리고 김기림의 논리대로 김기림의 시론은 그 폭이 너무 얕아서 자신의 시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 그만...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는 '근대'의 중심은 영국과 프랑스 시들의 조류를 끌어온다.

 

"시인은 시를 제작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시인은 한개의 목적=가치의 창조로 향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의도된 가치가 시로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소박한 표현주의적 방법에 대립하는 전연 별개의 시작상의 방법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주지적 태도라고 불러왔다."


"시인은 그의 독자의 '카메라 앵글'을 가져야 한다. 시인은 단순한 표현자 묘사자에 그치지 않고 한 창조자가 아니면 아니된다."


"시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시인의 마음이 외부적 혹은 내부적 감성에 의하여 충격되었을 때의 그 마음의 비상성의 표현이다. 그것이 독자의 의식면에도 거진 같은 진폭을 가진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시에 나타나는 현실은 단순한 현실의 단편은 아니다. 그것은 의미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현실)이 전문명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에서 굳세게 파악되어서 언어를 통하여 조직된 것이 시가 아니면 아니된다. 여기서 의미적 현실이라고 한 것은 현실의 본질적 부분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것은 현실의 한 단편이면서도 그것이 상관하는 현실 전부를 대표하는 부분이다."


리얼리즘적이다.


"시(제작이 필한 작품으로서)는 애매성과 감상성을 배제함으로써 명랑성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꾸준한 지적 활동에 의하여 얻을 수가 있는 일이다. 통제되고 계획된 질서 이외에 마저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으면 그 부분이 애매성을 가져온다. 또한 시를 감정에게 맡겨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감정은 늘 혼돈하려고 하고 비만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감정의 비만이 다시 말하면 감상이다. 시를 이러한 비대증에서 건져내서 그것에게 '스파르타'인과 같은 건강한 육체를 부여하는 것이 오늘의 시인의 임무다."


명랑하고 지적이고 모랄이 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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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쾨르 해석학의 전후: 실존과 그 의미를 찾아서

사실 우리가 작품을 읽고, 그것으로부터 받는 감동과 충격--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한다--은 사실 심정적이거나 정서상의 변화라고만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읽기 이전의 나의 세계, 즉 나의 존재 가능성들이 모색된 기존의 세계가 텍스트의 세계, 즉 나에게 제안되는 새로운 존재 가능성들의 세계와 격돌하고 충돌하는 데서 온 효과나 결과일 것이다. (윤성우, <<폴 리쾨르의 철학>>, 철학과현실사, 2004, 52~53 이하 면수만 표시)

 

결국 텍스트의 세계에 열려 있고, 이에 개방적인 읽는 주체인 독자는 그 스스로가 세계와 그 의미의 지배자이고 하는 자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자기 파악이나 자기 인식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주체다. 자기 이해는 텍스트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자기에 대한 해석을 통하는 다른 길 말고는 없다고 고백하는 주체다. 이런 점에서 신체를 배제한 데카르트적인 코기토만큼이나 "생각함(사유함. penser)"의 의미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우리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함"으로 언명한 <<철학의 원리>>(1부, 원리 9)의 데카르트에 대해 리쾨르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내 자신에 의해서만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자각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쩌면 리쾨르가 프로이트와 공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신념인지도 모른다. 이는 또한 리쾨르 해석학의 근본적인 이념을 부정문을 사용해서 정식화한 것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정식화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 주체의 외화된 언어적 표현물들(상징 텍스트 등)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만 주체의 자기 이해와 자기 파악이 가능하다. (54)

 

 

리쾨르와 주체물음

자기(soi)라는 것이 각종 동사 원형(부정법)들의 목적(보오)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철학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자기(soi)를 획득 또는 형성하는 것이 인간의 다양한 활동들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자기(soi)를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제 행위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행위를 통해 나(자신 혹은 스스로)를 내 행위의 행위자로 인식하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나(자신을 또는 스스로)를 내 이야기의 화자로서 알게 되며, 나는 (나의 행위에 대한) 가치 평가를 통해서 나(자신을 또 스스로)를 윤리적 주체로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쾨르 해석학의 근본 이념, 즉 직접적인 자기 인식이나 자기 이해는 없다는 점에서는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속에서의 이 자기의 해석학은 그의 이전의 해석학과 연속선상에 있지만, 텍스트나 기호를 통한 매개적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의 다양한 영역들--그 저작에서 보자면 언어적 실천적 이야기적 윤리-도덕적--을 통해 매개적 자기 해석과 이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불연속적이다. 이런 점에서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지니는 "종합적" 성격은 그의 이전 철학적 작업들의 단순한 총합이나 합산이 아니라 새로움이 깃든 일종의 재조명이다. 결국 "자기의 해석학"은 이런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을 통해 자기(soi)를 해석함을 말하며, 이 해석학이 이런 제 영역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탐구의 결과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앞서 말한 "해석학적 변형"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78~79면)

 

의지 활동에 대한 기술적 분석을 통해서 육화된 주체의 발견이 있었고 인간의 언어적 표현물에 대한 해석을 통해 세계와 자신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움을 받는 주체가 제시되었고, 타자와 사회의 개입과 참여를 본래적으로 요구하고 자기(soi)로서의 주체 등이 새롭게 등장했었다. 이런 인간 실존 해명이 지평이자 무대가 되었던 신체 언어 그리고 타자 및 제도는 결국 주체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부정문을 사용해서 답한다면 신체 언어 타자 및 제도는 단순한 하나의 동질적이고 독립된 대상만은 아니다. 인간 신체가 한때 데카르트에 의해 기하학의 대상으로서 하나의 연장(res extensa)으로 취급되었고, 과학적 심리학 또는 경험과학에 의해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언어 역시 소쉬르의 기호언어학에 의해 한때 경험과학의 기술 대상으로 자기 폐쇄적인 하나의 대상이었다. 타자 또한 주체에 의해 완전히 구성될 수만은 없는 것이고, 사회나 제도 역시 사회(과)하의 연구 대상으로 국한되고, 고정된 실체로서 변화하지 않는 연구 대상만은 아니다. 긍정적으로 말해본다면 그것들--신체 언어 그리고 타자 및 사회--은 주체에게서는 아주 적극적인 매개체 같은 것이다. 좀더 강한 의미로는 조건과도 같은 것이다.

신체란 주체에게 이를 통해 자신의 기획과 결정이 세계 속에서 실현되게 하는 것이며, 세계로 자신이 열리게 하는 "유기적 매개체"다. 리쾨르에 따르면, 나의 나 될 바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할 바에 달려 있으며, 나의 존재-능력(존재-가능)은 나의 행위-능력(행위-가능)에 의존한다고 한다. 이 나의 행함의 능력--즉, 이것이 나의 존재-가능이나 존재-능력을 결정짓는 것이다--이 세계 속에서 실현될 때 전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신체라는 유기적 매개체인 것이다. 또 이 신체 없이는 세계 속에서 인간 의도(의지)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주체 그 스스로가 그의 신체를 생성할 수 없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다.

언어 역시 하나의 탁월한 매개체인데, 나와 타자 사이에서 소통을 가능케 하고, 나와 세계 사이에서 지시를 가능케 하고, 나와 나 자신 사이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그런 매개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언어 속에서 해결된다거나 모든 것이 언어 속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언어가 이르지 못하는, 즉 언어의 의미 분절에 저항하는 불투명한, 비의미론적 계기들의 세계 속에 있기 대문이다.(1) 하지만 인간 경험이 언어로 다가올 근본적 가능성이 없다면, 그 경험은 혼란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며 참다운 소통의 상태에 들어가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언어 없이는 인간이 의미의 장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언어 사용의 주체 이전에 하나의 제도로서 이미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언어는 하나의 조건이다.

타자 및 제도도 신체나 언어 못지 않게 주체에 하나의 매개체이자 조건이다. 언어 사용에서 뿐만 아니라 해우이 여역에서, 책임이 문제시되는 윤리-도덕 영역에서 타자는 이미 주체의 자기 규정 및 자기 이해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타자 없이는 주체는 참된 의미에서 말하고, 행위하고, 이야기하고, 책임지는 존재로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사회 역시 인간 주체의 개별적 역량과 소질을 실현시킬 수 있고, 타인과ㅡ이 관계가 일시적이지 않고 영속화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탁월한 매개체이자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신체 언어 그리고 타자 및 사회가 주체에게 지니는 "조건"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 주체의 창조적 주도권을 무화시키는 "구속이나 강제"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를 위해 리쾨르의 "의존적인 비의존성"이라는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 주체는 자신이 지닌 의존적, 즉 비독립적 상황 속에서도 나름의 상대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신체의 조건 소겡서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세계 속에서 의도를 가지고 의미 있게 행위할 수 있고, 분별력을 가지고 신체적 제약들에 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미 선재한 언어라는 조건 속에서 우리는 언어 사용자로서 새로운 의미의 생성과 이를 통한 자기 이해의 길을 마련할 수 있으며, 타자와 사회도 소외적이거나 불균형한 관계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타자와 연대하며 사회 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주체에게서 신체-언어-타자 및 제도가 그것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차원이라든가 타당한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새로운 의미 있는 차원의 발견이 앞으로 열려 있다는 점에서 "자기해석학"은 결코 완결될 수 없으며, 조기에 종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쾨르가 자신의 몇 권의 해석학적 저작들의 제목이나 부제에 붙인 용어들--즉, <<해석에 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시론>>, <<해석들간의 갈등: 해석학 시론>>, <<텍스트에서 행위로: 해석학 시론II>>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래서 주체는 적어도 리쾨르에게서 계속되는 해석의 결과나 산물로서 재발견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82~85)

 

(1) 리쾨르는 이를 두고 상징화된 것, 즉 종교 경험에서의 성스러움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욕망의 정신분석적 경험에서 충동의 비표상적 부분인 감정(affect)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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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설의 정의
사소설은 대상 지시적, 주제적, 형식적 특성 등과 같은 그 어떤 객관적인 특성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그 대신 독자가 해당 텍스트의 작중 인물과 화자 그리고 작자의 동일성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 텍스트를 사소설로 만든다. 사소설은 일종의 읽기모드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것은 사소설이 단일한 목소리로 작가의 '자기'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거기에 씌어진 말은 '투명'하다고 상정하는 읽기 모드이다(지금 열거한 특성들은 이제까지 사소설의 '내재적인' 특징으로 간주되어온 것이다). 사소설은 특정한 문학 형식이나 장르라기보다는, 대다수의 문학 작품을 판정하고 기술했던 일종의 문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패러다임이다. 즉 어떤 텍스트라도 이 모드로 읽힌다면 사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Tomi Suzuki(한일문학연구회 옮김), Narrating the Self: Fictions of Japanese Modernity(이야기된 자기 -일본 근대성의 형성과 사소설담론), 생각의 나무, 2004, 31면. (이하 면수로만 표기)
 
사소설의 주제와 '자기'의 문제
가사이 젠조와 그 후속 작가들의 소설에는 주제상의 일정한 유사점이 있다. 즉 아내나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의 갈등이나 빈곤, 질병, 고독, 창조력 결여의 의식으로 괴로워하면서, 글을 쓰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소설가나 예술가의 한심한 나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자각적인 사소설 작가에 대한 전기적 정보를 접하면, 분명히 그들은 모두 '예술'과 '실생활'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소설 작가가 일상생활을 충실하게 묘사했다고들 말하지만, 오히려 그 사소설 쪽이 종종 그들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자화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와 필요에 그들의 행동 자체가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소설 비평 담론의 주요 관심사들 중 하나인 예술과 실생활의 상관 관계가 자각적인 사소설 작가들의 주요 주제가 되어 있었다.

(....)

다이쇼 후기까지 독립된 사회적 윤리적 주체인 개인의 '자기'라는 이념은 광범위하게 인생, 문학, 예술의 기본적인 전제로 간주되었다. 한편, 당시의 많은 지식인은 급격하게 확대된느 산업화 대중 사회에서 계급 대립, 계급 투쟁에 대한 의식을 심화시키고 마르크시즘에 이끌려 들어갔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개인주의의 소박함에 의문을 제기하며, 1920년대 중반 이후 큰 여향력을 떨쳤던 마르크시즘에 그들이 이끌려 들어간 것도, 후쿠모토 가즈오가 '반성'적 개인 주체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는 데서 볼 수 있듯, '진정한' '자기'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32~33면.)
 
문학과 근대화 -최승만론 참조
새로운 '소설' 개념의 대두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자유 민권 운동의 융성과 쇠퇴 및 정부 권력의 강화와 직접 관계되어 있다. 자유 민권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일 때 국가의 도립과 개인의 독립이라는 근대 국민 국가의 상보적 인명르 자각한 야심적인 청년들은 민권가로서 '정치 소설' 집필에 착수한다. 츠보우치 쇼요의 사회적 지적 배경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지만, 작가이기 이전에 우선 정치 활동가였던 정치 소설 작가들과 달리 쇼요는 대학 출신의 엘리트로서 '직업' 소설가가 되려는 전례 없는 길을 선택했다. 이 전대미문의 선택이 젊은 세대에게 준 충격을 우치다 로안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소설에 게사쿠(희작)라는 낮은 지위로부터 한 발 내딛어 문명에 기여하는 중대 요소, 당당한 학자의 삼여으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사업으로 뛰어올랐다. 지금까지 정치 이외에는 청운의 길이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천하의 청년들은 이 새롱누 세계를 발견하고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모두들 일제히 문학으로 뛰어갔다.

후타바테이 시메이, 기타무라 도코쿠, 야마지 아이잔, 마사오카 시키, 도쿠토미 로카, 기노시타 나오에, 우치다 로안 등을 비롯해 자유 민권 운동에 의해 정치에 눈을 뜨고, 그 융성과 쇠퇴를 목격한 다수의 청년 학도는 메이지 정부가 급속하게 '공정 내셔널리즘'을 강화한 1880년대 말 내지 1890년대 초부터 '문학', 그중에서도 새롭게 의의를 부여받은 '소설'로 향했다. (65면.)
 
기독교의 의미 -최승만론 참조
1880년대 말에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부터, 도코쿠는 스스로를 거듭 '패군의 장수'라 불렀고, 국가와 국민을 구할 '영혼의 검'이나 '진리의 창'으로 싸우는 '위대한 전사'로 시인을 규정했다.
이렇나 메타포들은 도코쿠 세대의 많은 젊은 기독교도들에게는 비유인 동시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정신성'은 스스로의 정치적 야망, 애국적 희구, 그리고 '권력에 대한 의지'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1892년 부터 1893년에 걸쳐 도코쿠는 일본에서는 아직 달성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는 '정치적 자유' '정치적 독립'과 구별되는 '정신의 자유'와 '정신의 독립'을 주창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을 "무사와 평민을 하나의 국민으로 취급함"으로써 개인적 정신의 자유를 일반인드에게 분배하려 했던 '혁명'으로 규정한다. 자유 민권 운동이 '개인적 정신'의 발현을 급격히 진전시켰다고 한 후, 사람은 정치적인 속박으로부터 독립된 ㅈ어신의 자유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도코쿠는 논한다. 왜냐하면 '정신'이나 '내부의 생명'은 우연적인 물질적 조건으로부터는 독립해 존재하기 떄문이다. 즉 이 '내부의 생명'은 '타계의 ㅈ어신'에 조응하며, 신이라고 불리는 '우주의 정신'에 대응되기 떄문이다. 도코쿠는 정신의 자유, 정신의 독립을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했지만, 그의 자세는 여전히 매우 정치적이며 '애국적'이었다. 그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상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가치 이념의 시스템을 제시함으로써, '세상을 위해 살고 백성을 보살필' 것을 희구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젊은이들에게 기독교는 서양의 문학 및 문화(그것을 아는 것이 메이지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되어진 것)에 그들이 강력히 경도된 사실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젊은 도코쿠가 직접 쓴 정신적 발달에 대한 글 자체가, 당시 신문에 게재되었던 디즈레일리의 소설 '콘테리니 플레밍'으로부터 촉발된 것이고, 도코쿠 자신이 곱개했듯이, 전투나 병사 등의 메타포 또한 언래 패트릭 헨리의 미국 '독립선언'과 같은 서양 텍스트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우에무라 마사히사나 우치무라 간조같은 메이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청년들에게 성서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학도 소개했다. 그리고 새로이 기독교도가 된 젊은이들을 매혹한 바이런, 셰릴, 워즈워드, 카알라일, 에머슨 등 서양 낭만주의의 주요 싱니이나 사상가의 대부분이 애국적인 정치 활동가였으며, 문학 활동과 정치 활동의 대립보다는 연속성을 보고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양학 교육을 받고 1880년대 말부터 1890년대 초두에 걸쳐 기독교로 개종한 젊은이들에게 기독교는 개인과 국가 쌍방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계몽 사상의 자유주의적인 정치 이념 및 서양 낭만주의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었다.
도코쿠, 호시노, 시마자키 등 젊은 기독교도들은 기독교적 인도주의의 교양 잡지인 <<여학잡지>>의 기고자들이었다. 그들은 1893년에 문예지 <<문학계>>를 창간했다(이것은 원래 <<여학잡지>>의 문학부문으로 출발했지만, 곧 딕립된 문학 잡지가 되었다). <<문학계>>에서 도코쿠는 그들의 사명이 넓은 의미에서 시인이라고 선언했으며, '시인과 철학자의 위대한 사업'은 볼 수 없는 '내부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에머슨이 말하는 'say')이며, 신에 의해 창조된 '근본의 생명'에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도코쿠에 의하면, '문예'는 '사상'과 '미술'로 이루어지며, 그 독특한 사명은 "인성, 인정의 다양한 현시를 관하고" '우주의 정신'이나 '절대의 Idea', 즉 '상세계'의 '크고 크고 큰 실재(리얼리티'에 다다름으로써, '극치를 사실(리얼리티)에 입각해서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하고, 불가시의 '내부 생명'을 전하는 데 있다.
이 문학관은 '소설'에 대한 새로운 담론과 궤를 같이하지만, 도코쿠 및 <<문학계>>는 분ㅁ여히 새로운 한 가지 요소를 도입했다. 즉 문학이 파악하고 제시해야 할 '진리'가, 신으로부터 유래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수여 받았다고 간주된 개인적 '자기'와 연결되었던 것이다. 도코쿠 이전의 지배적인 비평 담론에서 '진리'는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인 틀로 논의된 것이 아니었다. 즉 그것은 상상된 실재로서, 즉 그모델이 서양에서는 현존하지만 일본에는 아직 달성되지 않은 현실로서 진화론적 시야 아래 가상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적, 에머슨적 관점을 끌어들임으로써 도코쿠나 그의 신봉자들은 이 '진리' 내지 '인성의 진리'를 보편적인 것으로 동화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들 모두의 내부에 그것이 내재한다고 설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도코쿠에 따르면 '내부의 생명'은 인간의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정신'과도 조응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의 '아'"를 극복했을 때, 사람들은 이 '우주의 정신'에 도달하 룻 있을 터였다.
그 후 <<문학계>>의 동인 대부분은 기독교를 떠났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들뿐 아니라 보다 큰 문학적, 사상적 영역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 흔적의 기원은 머지 않아 잊혀진다. 그러나 기독교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신념을 강화함으로써, 문학의 가치와 권위를 높임과 동시에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관점도 형성했다. 특히 내부의 자기와 정신의 자유가 갖는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의 사회 역사적 제약을 관념적으로 초월하는 것을 간으하게 했던 것이다. 사실 도손 등의 <<문학계>> 동인들이 1890년대 중반까지 기독교를 버린 것은 실로 정신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려는 명분 떄문이었다(도코쿠는 1894년 자살했다). 다야마 가타이, 시가 나오야의 장에서 알 수 있듯이, 도코쿠가 정신의 자유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기 위한 열쇠로 생각한 '신성한 연애'라는 이념응ㄴ 동시대의 청춘 남녀를 비롯해 그 후의 세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연애의 정신성'에 대한 희구와 끊임없는 '육욕'의식 사이의 갈등을 나았다는 점이다. 기독교에 의해 환기된 이 양극성은 그들에게 기독교 자체의 속박을 느끼게 했다. 1890년대 중반 이후, <<문학계>>는 기독교에 등을 돌리고 이교도의 전통, 특히 유럽의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를 상찬하기 싲가했으며(이러한 조류 자체가 서구 낭만주의에서 배운 것이다),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궁극적 수단으로 연애와 예술에 기대의 시선을 던졌다.
예컨대 도가와 슈코츠는 1894년 <<문학계>>에, '사랑'이야말로 "인생에서 첫 번째의 것"이며, "사랑을 잃는 것은 인ㄱ나의 본소를 잃는 것이다. 인간의 본소를 잃는 것은 인생을 잃는 것이다. 인생을 잃는 것은 우주의 생명과 천지의 신을 잃는 것이다"라고 쓴다. 슈코츠는 그 자신을 포함한 기독교들이 신이라 부르고 있던 것을 '생명'이라느 개념으로 치환하고, 이 생명의 이름 하에 기독교를 부정했다. 청일전쟁 발발을 앞두고, 이제 "많은 생각이 혼돈 속에 뒤섞여 있는 곳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고 생명이 발해 오니, 이 국민으로 하여금 이 국민이게 해야 할 때이다"라고 격앙된 어조로 말하게 된 슈코츠는, 그 전쟁이 메이지 유신의 '혁명'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국민 대혁명'의 계기라고 시사하면서, "이 혁명은 반드시 종교와 미술의 相海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자랑스럽게 단언하고 있다.
1890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의 부진 및 '자기'나 '자아'에 대한 관심 고조는 모두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 내셔널맂므의 대두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청일전쟁은 일본인에게 국민 의식을 강화함과 함께, 이어서 일어난 삼국 간섭으로써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힘을 통감케 했다. 젊고 영향력 있었던 평론가 다카야마 초규는 청일전쟁 지구, 근대 국민 국가는 중세의 종교 지배를 극복한 "인류 발달의 필연적인 형식"이고, 이 형식은 "민중 최대의 행복을 기도한다"고 말해, 국가 의식과 국민 의식을 높이 상찬했다. 초규는 국가의 '자주 독립의 정신' '군민일가'를 특색으로 하는 '건국의 정신'과 '국체'를 강조하고 있다. 곧 그는 휘트먼의 '개인주의'를 상찬하기 시작한다.
(...)
진보적 지식인이 서양 문명의 본질이라고 간주한 기독교는 그들에 게 자신들이 놓인 역사적 상황을 국가 안팎에서 초월하기 위한 관념적이고 '보편적인' 입각점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는-니체의 기독교 비난을 통해-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달성하기 위해 극복되어야 할 제도로 생각되었다.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논문 '미적 생활을 논한다(1901년 8월)에서 쵸규는, "본능이란 무엇이낙. 그것은 인생 본연의 요구이다. 인성 본연의 요구를 ㅁ나족시키는 것, 이를 미적 생활이라고 부른다"고 줒아했다. 그리고 슈코츠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미적 생활' 추구의 특권적 활동으로서 '연애'와 '예술'의 절대적 가치를 강조했다.
세기가 바뀔 무렵, 생과 자기에 대한 찬미는 문학적, 사상적 세계의 추진력이 되었다. 쵸규의 '갱니주의'와 '본능'의 찬미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시기에 대두한 '개인' '자아' '자기'라는 중심 개념은 '국민'또는 민족주의적인 '국민 정신' 등의 개념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것들과 확실하게 구별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쵸규는 문학자들에게 "오히려 방해물로도 보일 만한 그들의 갱니주의가 그렇게 일국 문명의 큰 동력이 될 수 있"는 '시인 니체'의 예처럼 "숭고하고 위댛나 천직"에 눈뜨기를 바랐으며, 그러기 위해 문학자는 "구미의 시인, 소설가의 최근 걸작을 완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74~80면.
기독교에 끄린 청년들의 동기는 주로 '자기' '자아' 추구에 대한 희구였던 것 (위의 책, 332면.)

<<창조>> 파의 생각을 보완할 수 있는 것.
 
요시노 사쿠조와 사소설의 출현
1920년대 중반 사소설 담론의 출현은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에 걸친,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알려진 자유주의적 사회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본의 공업화는 청일전쟁 후 그 속도를 더 했고, 러일전쟁 후에는 더욱 진전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현저하게 확대되어 도시 노동자층의 인구를 증가시킴으로써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의 사회적 기반을 제공했다. 운동의 직접적인 추진력이 되었던 것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 요시노 사쿠조가 주창한 '민본주의' 개념이었다. 요시노는 민중에 대해서는 개인의 인격 발전을, 상류 계급에 대해서는 인도주의적 배려와 반성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된 관점에서 아베 지로는 '인격주의', 즉 모든 사회 개혁의 기반으로서 개아의 성장과 발전을 제창했으며, 시라카바파는 개아 추구의 발전으로서 '인도주의'를 들고 나왔다. 다이쇼 시대 중반 무렵에는 인격주의와 인도주의 모두가 널리 영향력 있는 이상이 됨으로써,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윤리적 기반을 형성했다. (100~101면.)
 
'진정한 사소설' 
1926년 일반인을 상대로 한 라디오 강연에서 사토 하루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한 사소설'은 작가가 사생활상의 경험을 쇄말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이 하나의 운명을 만나 어떻게 좌절했는가, 어떻게 그 운명과 싸우려고 했는가 하는 그런 기록을, 가능한 정직하게 쓴" 귀중한 글이고, "읽는 쪽에서도 스스로 식은땀을 흘리며 쓴 소설가 자신이 된 듯한 공감을 갖고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106면.)
 
사소설과 문단
대조적으로 20세기 초두 이후 근대 이후의 작가들-자연주의라는 이름 아래 사소설이라고 불리는 자전 문학 형식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사회를 버리고 협소하게 고립된 '문단 길드' 내부에 살면서, 그 속에서 "내적 자아 속에 있는 원시적인 나쁜 것"을 숨기지도 왜곡하지도 않은 채 꾸준히 추구하고 두려움 없이 표현했다. '가장인' '가면 신사'인 유럽 소설가에 비해, 일본의 사소설 작가는 '돔아자' '도망 노예'이며 현세인으로서 사회적 체면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토에 따르면 '문단 길드'는 고립된, 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적인 폐쇄 세게이며, 소설가는 그 안에서 현실의 사회-외부의 봉건적이고 반동적인 세계-를 버리고 꿈과 같은 세계의 일원이 된다. 거기에서 소설가는 정부가 메이지 말기 이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이나 책임의 하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었다. 이토는 문단 길드가 은둔자의 폐쇄적인 세계와 닮았다고 보면서, 문단 길드에서 창조된 사소러의 배후에는 불교나 신도의 은자 전통이 있다고 말해, 사소설 계보의 '기원' 구축을 보강했다.

(....)

근대 일본의 작가들은 사회 전체를 표현하거나 사회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인간 관계만의 추출'은 물론 '자기를....담담하고 냉혹하게 떼어놓고 간결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112~113면.)
 
사소설과 도피
사소설은 작가가 작중 인물(소설가 자신)을 사회와의 관계에서 객관화하지 않는 것 (115면.)

채만식은 왜 일제 말기 사소설을 썼을까.
현실은 일제 파시즘 이었음으로. 그는 도피중?
 
사소설과 심경소설
히라노 켄은 '사소설의 이율배반'에서, 앞에서 본 이토의 분류를 발전시켰다. 즉 그는 '심경 소설'을 '조화자'의 문학으로, '사소설'을 '파멸자'의 문학으로 명명함으로써 양자를 대치시켰다.

사소설을 멸망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심경 소설은 구원의 문학이다. 사소설을 어쩔 수 없이 혼돈스러운 위기 자체의 표백이라고 한다면, 심경 소설은 벗어날 수 있었던 위기 극복의 결어이다. 전자가 외계와 자아의 이화감에 근거한다면, 후자는 그것의 조화감에 도달하려 한다. 인간 실존의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음이나 죄 많음에서 발생하는 생의 위기감과, 그런 위기감을 초극하는 데서 생기는 청명한 운명감의 조화, 전자는 그 구원을 예술 쪽에서 찾으려 하고, 후자는 실생활 쪽에서 찾고자 한다. 이런 징표의 상이가 나타나는 까닭은, 원래 전재가 무이상 무해결의 자연파에서 파생되었고, 후자는 이상주의적인 시라카바파에서 유래되었다는 데 있다. 즉 사소설은 파멸자 현세 포기자의 문학이고, 심경 소설은 조화자 현세 파지자의 문학이다. 치카마츠 슈코에서 가무라 이소타를 거쳐 다자이 오사무에 이르는 계열과 시가 나오야에서 다키이 고사쿠를 거쳐 오자키 가즈오에 이르는 계보가 거기서 자연히 구별되기 떄문이다.

'파멸자의 사소설'과 '조화자의 심경 소설' 이라는 히라노의 분류는 상이한 두 가지 규준에 기초하고 있다. 즉 텍스트의 내적 주제적 측면과 상호 텍스트적 전기적 차원이 그것인데, 이때 양자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히라노에 따르면, 파멸자의 사소설은 죄 많고 사악하고 부끄러울 만한 행위에 의해 야기된 위기를 묘사하고, 그에 대한 확실한 해결이나 구워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조화자의 심경 소설은 위기를 극복한 결과로서 얻은 아양된 심경을 나타낸다. 전자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이고 운명론적인 태도를, 후자는 낙천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태도를 표현한다. 두 가지 유형의 차이점은 작가의 '실생활'과 '예술' 활동의 관계에도 기인하고 있다. 사소설 작가가 자신의 예술을 통해 구워을 찾고 개인적 위기의 해결을 꾀하는 데 비해서, 심경 소설의 작가는 실생활 안에서 개인적 위기의 해결이나 구원을 구한다. 전자는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사생활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사람, 후자는 사생활을 최우선으로 하며 예술 작품 쪽은 개인적 위기를 극복한 결과이자 부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나카무라는 1935년에 쓰여진 '사소설에 대하여'에서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소설론'에 호응,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이래 사소설의 전통은 "실생활에 의해 초래된 그들의 생활 감정을 해석하거나 사회와의 대결을 통해 진정으로 객관화하지도" 못한 채, "사회와 교섭하지 않는 자신의 일상생활을...표현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116~118면.)

채만식의 '사소설'은 물론 이 구도에 정확히 떨어지지는 않지만,
'심경소설' 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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