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쾨르 해석학의 전후: 실존과 그 의미를 찾아서
사실 우리가 작품을 읽고, 그것으로부터 받는 감동과 충격--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한다--은 사실 심정적이거나 정서상의 변화라고만 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읽기 이전의 나의 세계, 즉 나의 존재 가능성들이 모색된 기존의 세계가 텍스트의 세계, 즉 나에게 제안되는 새로운 존재 가능성들의 세계와 격돌하고 충돌하는 데서 온 효과나 결과일 것이다. (윤성우, <<폴 리쾨르의 철학>>, 철학과현실사, 2004, 52~53 이하 면수만 표시)
결국 텍스트의 세계에 열려 있고, 이에 개방적인 읽는 주체인 독자는 그 스스로가 세계와 그 의미의 지배자이고 하는 자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자기 파악이나 자기 인식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주체다. 자기 이해는 텍스트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자기에 대한 해석을 통하는 다른 길 말고는 없다고 고백하는 주체다. 이런 점에서 신체를 배제한 데카르트적인 코기토만큼이나 "생각함(사유함. penser)"의 의미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우리 자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함"으로 언명한 <<철학의 원리>>(1부, 원리 9)의 데카르트에 대해 리쾨르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내 자신에 의해서만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자각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쩌면 리쾨르가 프로이트와 공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신념인지도 모른다. 이는 또한 리쾨르 해석학의 근본적인 이념을 부정문을 사용해서 정식화한 것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정식화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간 주체의 외화된 언어적 표현물들(상징 텍스트 등)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만 주체의 자기 이해와 자기 파악이 가능하다. (54)
리쾨르와 주체물음
자기(soi)라는 것이 각종 동사 원형(부정법)들의 목적(보오)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철학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자기(soi)를 획득 또는 형성하는 것이 인간의 다양한 활동들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자기(soi)를 파악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제 행위들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행위를 통해 나(자신 혹은 스스로)를 내 행위의 행위자로 인식하며, 나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나(자신을 또는 스스로)를 내 이야기의 화자로서 알게 되며, 나는 (나의 행위에 대한) 가치 평가를 통해서 나(자신을 또 스스로)를 윤리적 주체로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리쾨르 해석학의 근본 이념, 즉 직접적인 자기 인식이나 자기 이해는 없다는 점에서는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속에서의 이 자기의 해석학은 그의 이전의 해석학과 연속선상에 있지만, 텍스트나 기호를 통한 매개적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의 다양한 영역들--그 저작에서 보자면 언어적 실천적 이야기적 윤리-도덕적--을 통해 매개적 자기 해석과 이해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불연속적이다. 이런 점에서 <<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지니는 "종합적" 성격은 그의 이전 철학적 작업들의 단순한 총합이나 합산이 아니라 새로움이 깃든 일종의 재조명이다. 결국 "자기의 해석학"은 이런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을 통해 자기(soi)를 해석함을 말하며, 이 해석학이 이런 제 영역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 탐구의 결과를 수용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앞서 말한 "해석학적 변형"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78~79면)
의지 활동에 대한 기술적 분석을 통해서 육화된 주체의 발견이 있었고 인간의 언어적 표현물에 대한 해석을 통해 세계와 자신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움을 받는 주체가 제시되었고, 타자와 사회의 개입과 참여를 본래적으로 요구하고 자기(soi)로서의 주체 등이 새롭게 등장했었다. 이런 인간 실존 해명이 지평이자 무대가 되었던 신체 언어 그리고 타자 및 제도는 결국 주체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부정문을 사용해서 답한다면 신체 언어 타자 및 제도는 단순한 하나의 동질적이고 독립된 대상만은 아니다. 인간 신체가 한때 데카르트에 의해 기하학의 대상으로서 하나의 연장(res extensa)으로 취급되었고, 과학적 심리학 또는 경험과학에 의해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언어 역시 소쉬르의 기호언어학에 의해 한때 경험과학의 기술 대상으로 자기 폐쇄적인 하나의 대상이었다. 타자 또한 주체에 의해 완전히 구성될 수만은 없는 것이고, 사회나 제도 역시 사회(과)하의 연구 대상으로 국한되고, 고정된 실체로서 변화하지 않는 연구 대상만은 아니다. 긍정적으로 말해본다면 그것들--신체 언어 그리고 타자 및 사회--은 주체에게서는 아주 적극적인 매개체 같은 것이다. 좀더 강한 의미로는 조건과도 같은 것이다.
신체란 주체에게 이를 통해 자신의 기획과 결정이 세계 속에서 실현되게 하는 것이며, 세계로 자신이 열리게 하는 "유기적 매개체"다. 리쾨르에 따르면, 나의 나 될 바는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할 바에 달려 있으며, 나의 존재-능력(존재-가능)은 나의 행위-능력(행위-가능)에 의존한다고 한다. 이 나의 행함의 능력--즉, 이것이 나의 존재-가능이나 존재-능력을 결정짓는 것이다--이 세계 속에서 실현될 때 전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신체라는 유기적 매개체인 것이다. 또 이 신체 없이는 세계 속에서 인간 의도(의지)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주체 그 스스로가 그의 신체를 생성할 수 없는 점에서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다.
언어 역시 하나의 탁월한 매개체인데, 나와 타자 사이에서 소통을 가능케 하고, 나와 세계 사이에서 지시를 가능케 하고, 나와 나 자신 사이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그런 매개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언어 속에서 해결된다거나 모든 것이 언어 속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언어가 이르지 못하는, 즉 언어의 의미 분절에 저항하는 불투명한, 비의미론적 계기들의 세계 속에 있기 대문이다.(1) 하지만 인간 경험이 언어로 다가올 근본적 가능성이 없다면, 그 경험은 혼란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며 참다운 소통의 상태에 들어가기 힘든 것이다. 그래서 언어 없이는 인간이 의미의 장에 들어올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조건일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언어 사용의 주체 이전에 하나의 제도로서 이미 확립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언어는 하나의 조건이다.
타자 및 제도도 신체나 언어 못지 않게 주체에 하나의 매개체이자 조건이다. 언어 사용에서 뿐만 아니라 해우이 여역에서, 책임이 문제시되는 윤리-도덕 영역에서 타자는 이미 주체의 자기 규정 및 자기 이해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타자 없이는 주체는 참된 의미에서 말하고, 행위하고, 이야기하고, 책임지는 존재로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사회 역시 인간 주체의 개별적 역량과 소질을 실현시킬 수 있고, 타인과ㅡ이 관계가 일시적이지 않고 영속화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탁월한 매개체이자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신체 언어 그리고 타자 및 사회가 주체에게 지니는 "조건"의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인간 주체의 창조적 주도권을 무화시키는 "구속이나 강제"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를 위해 리쾨르의 "의존적인 비의존성"이라는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 주체는 자신이 지닌 의존적, 즉 비독립적 상황 속에서도 나름의 상대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신체의 조건 소겡서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으며, 세계 속에서 의도를 가지고 의미 있게 행위할 수 있고, 분별력을 가지고 신체적 제약들에 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미 선재한 언어라는 조건 속에서 우리는 언어 사용자로서 새로운 의미의 생성과 이를 통한 자기 이해의 길을 마련할 수 있으며, 타자와 사회도 소외적이거나 불균형한 관계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타자와 연대하며 사회 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주체에게서 신체-언어-타자 및 제도가 그것만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차원이라든가 타당한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새로운 의미 있는 차원의 발견이 앞으로 열려 있다는 점에서 "자기해석학"은 결코 완결될 수 없으며, 조기에 종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쾨르가 자신의 몇 권의 해석학적 저작들의 제목이나 부제에 붙인 용어들--즉, <<해석에 관하여: 프로이트에 관한 시론>>, <<해석들간의 갈등: 해석학 시론>>, <<텍스트에서 행위로: 해석학 시론II>>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래서 주체는 적어도 리쾨르에게서 계속되는 해석의 결과나 산물로서 재발견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82~85)
(1) 리쾨르는 이를 두고 상징화된 것, 즉 종교 경험에서의 성스러움 그 자체일 수도 있고, 욕망의 정신분석적 경험에서 충동의 비표상적 부분인 감정(affect)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