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수용자 형성과 지속성의 원리

5.1 미디어 이용의 이유

수용자 측면 - 개인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미디어 측면 -내용, 표현, 환경 등의 어떠한 요인들이 수용자의 주의력을 끌고 유지하는가

개인적인 동기에 관한 질문은 미디어 생산물과 내용에 관한 언급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두 측면간에 정확한 구분을 할 수 없다.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미디어 경험은 특이하고 다양하며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5.2 수용자 형성에 대한 구조적 접근

미디어 이용이 사회 구조와 미디어 구조의 일정한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미디어 이용의 구조적 모델 111p)

한 개인이 특정한 만족을 얻기 위하여 동기가 부여되었을 경우(예를 들어, 스포츠 뉴스의 특정한 항목), 미디어 구조에 따른 영향을 덜 받는 반면, 미디어에 관심이 적은 수용자는 특정한 내용과 그 구성에 따라 영향을 더 받는다.

미디어 체계는 사회에 주어진 사실들(예를 들어, 경제적, 문화적 그리고 지리적 조건들)을 반영하면서 사회적 배경에 관한 요인들과 부분적으로는 특이하고 우연적인 것들에 의해 결정되는 수용자 요구에 반응한다.

*주체와 구조. 어느 쪽으로만 강조해도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나온다. ‘경향성’이라는 것으로 발화해야 한다. 혹은 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어떠한 효과를 발생시키는지를 물어야 한다. 설명력, 파급력, 설명할 수 있는 분야 범위.

5.3 기능주의적 모델: 이용과 충족 접근

중심 문제는 사람들이 미디어를 <왜> 이용하며 무엇을 위하여 이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기능주의 사회학은 미디어를 결속, 문화적 지속성, 사회 통제, 공공 정보의 광범위한 유통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또한 개인의 지침, 휴식, 적응, 정보 정체성 형성 등과 같은 관련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5.3.1 재발견된 이용과 충족

기본적 가정

1. 미디어와 내용 선택은 이성적이고 특별한 목표와 만족을 위해서 이루어진다(수용자는 능동적이고 수용자 형성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2. 수용자 구성원들은 동기에 따라 표현할 수 있고 개인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환경에서 나타나는 미디어와 관련된 욕구를 인식하고 있다.

3. 개인적 유용성이 수용자 형성에 있어서 미학적이거나 문화적 요인보다도 더 중요한 결정요인이다.

4. 수용자 형성과 관련된 대부분의 요인들(동기, 인지되거나 획득된 만족, 미디어 선택, 배경 변수들)은 원칙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5.3.2 비평

이러한 접근이 내용에 대한 특별한 형태, 예를 들면 정치적인 내용, 뉴스나 에로물에 대한 선별적인 주의력을 가장 잘 설명한다 하더라도, 미디어 선택과 이용에 있어 성공적인 예측이나 인과관계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일반적으로 미디어에 대한 태도와 미디어 이용의 실제적인 행동간에 연관성이 별로 없으며, 그러한 관계의 예측 방향에 있어서도 불확실하다.

5.3.3 기대-가치 이론

미디어 이용에 있어 개인적인 동기에 관한 이론적 본질은 미디어가 과거 경험을 기초로 하여 수용자의 잠재적인 구성원들이 기대하는 보상을 제공한다는 생각이다.

5.3.4 미디어 이용의 비기능주의적 대안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의 의미 있는 것으로 미디어 이용을 설명하려고 시도.

5.4 수용자 선택의 “실용적” 모델

5.4.1 “수용자측” 요인들

사회배경과 환경, 개인적 속성, 미디어와 관련된 욕구, 개인적 취향과 선호, 여가시간 동안 미디어 이용에 대한 일반적인 습관과 특정한 시간에 이용하는 수용자 유효성, 유효한 선택과 소유한 정보의 양 및 종류에 대한 인식, 이용의 특정상황, 기회

5.4.2 “미디어측” 요인들

미디어 체계, 미디어 규정 구조, 이용 가능한 내용 선택, 미디어 선전, 적절한 시간과 표현

5.5 취향, 선호 그리고 관심

수용자는 개인적 선호의 뚜렷한 특징에 따라 선택. 이는 정확하게 설명될 수 없으며, 사회배경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특이하고 예측이 불가능.

5.6 수용자 흐름

수용자의 “흐름”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세가지 의문

1. 한 프로그램에서 즉시 그 다음 프로그램으로의 수용자 일부분이 이동하는 <승계 효과>

2. 매일 혹은 매두 동일한 시청자가 연속물이 또 다른 에피소드를 시청하는 <반복 시청>

3. 시청자가 한 채널의 프로그램을 불균형하게 시청하는 채널 <충성도>

5.7 결어

134p 참조. 결국 확실한 것은 없고, 수용자는 파악하기 힘들고, 따라서 연구하기도 힘들다. 기존 연구들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하다. 라는 소리.

6. 수용자 실천: 미디어의 사회적 이용

6.1 미디어 이용과 일상생활

“수용자”가 문화적, 사회적인 실천에 대해 잘 알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 대중 수용자가 조작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시각에 반대, 수용자 주의력을 얻음으로써 그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개념에도 반대.

6.2 미디어 이용의 잘못된 모델

미디어 초기 형태는 특정 사회 집단의 생활방식(직장, 가정, 여가활동)에 적합하도록 그리고 잠재적인 수용자의 열망과 태도에 부응하여 발전.

6.3 미디어 이용의 공적, 사적 영역

어떠한 조건하에서든지 수용자가 된다는 것은 광범위한 사회생활 속에서 의미를 공유하는 한편, 다른 상황에서 친구 및 가족원의 소집단에 의해서 완전하게 개인적이거나 혹은 공유되는 경험을 의미함. 중요한 것은 수용자 경험의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공적이거나 사적으로써의 의미에 대한 정의.

6.4 하위문화와 수용자

미디어 이용이 하위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내며 강화하는데 중요한 역할.

6.5 생활방식

“생활방식”은 일상적인 태도와 행동을 나타내는 일부분. 사회적 지위의 변수, 행동(미디어 이용과 다른 여가시간 그리고 소비실천 등), 태도, 취향 그리고 가치에 관한 광범위한 것들을 포함. 생활방식은 미디어 취향이 사회계급과 교육에 따라 결정된다는 가정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제공. 생활방식은 자기가 임의로 선택한 행동이자 미디어 이용.

(* 이 ‘임의’라는 것. 현상을 어떻게 포착하고 있는가? 똑같이 이를 상당부분 경제/문화 자본에 따른 아비투스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은가?)

미디어 이용에 대해 사회적, 심리적 기원에 관한 연구 결과로써 사회 공동체적 활동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는 유형: 한가로운 주부, 외향적인 활동가, 자제하는 활동가, 노동계급의 야심가. 태도와 신념의 형태에 따라 미디어 이용을 적절히 구별했으며 또한 중요한 성차이를 보여줌. (*실제 그래서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는 일언반구도 없음)

6.6 소수민족과 미디어 이용

6.7 성별화된 수용자

6.8 사교성과 미디어의 사회적 이용

미디어 이용 행위에 지나치게 중독된 수많은 개인들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매스미디어 이용의 결과로서 사회적 접촉이 감소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음.

어린들의 텔레비전 시청과 사회적 상호작용간에 긍정적인 상관관계가 있음.

수용자가 되는 것이 ‘비사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교적’인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옳다.

(*뭔 소리? 그러니까 매스미디어에 의해 ‘자폐된’ 개인들이 존재는 하지만, 이들이 ‘매스미디어’ 이전에도 어짜피 그럴것인 사람들이고, 이 매스미디어 때문에 사회적 접촉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라고? 노동시간 단축은 이제 매스미디어 ‘이용시간’으로 환원된 것? 통시적인 분석이 아쉽다. 애들이 매스미디어를 매개로 친구먹는다는 것. 그럼 매스미디어 전에는 어떻게 친밀했고, 더 친밀했는지 등을 따져봐야지, 이를 비역사적으로 있는 사회구조 자체를 전제하고 분석하는 것은 ‘매스미디어’의 효과를 따지기 힘들게 한다. 노동시간 단축과 교육질의 향상에 따른 여가시간과 창조적 활동에의 가능성.....

다른 요소들에 대한 분석이 없다. 답답하다. 나열하되, 입증하려는 시도는 조금도 없다. 그냥 이런저런 연구들이 있었다로 밀어붙임.)

6.9 수용자 수용과 의미 협상

6.10 사회적 병리현상으로서의 미디어 이용

6.11 미디어 이용의 규범적 틀

미디어에 관한 규범적 관심은 원하지 않은 영향력(특히 청소년과 폭력, 성)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생기고, 또 미디어 이용 자체가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미디어에 대한 죄의식은 여가와 기분전환보다는 일을 중요시하는 문화 속에서 사회화 과정에 있어 이해할 수 있는 결과.

(* 또 이런식으로 끝.)

6.12 내용을 위한 규범

6.13 결어

*이 또한 연구가 쉽지 않다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미디어 이용과 내용선택에 있어 개인적인 가치에 대한 영향력은 복잡하고 절대적이며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연구를 통하여 알기는 쉽지는 않다.

(결국 수용자 분석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위해 이 책은 쓰여졌다. 그리고 수용자는 단순한 바보가 아니라는 것은 계속 주장하기는 한다. 그래, 이 책의 ‘수용자’인 나는 바보가 아니라서 이 책을 읽으니까 열받는다.)

*미디어란 무엇인가? (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등) 미디어는 media 매개이다. 어떤 작용을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달하는 매개자(체). 그러면 모든 것은 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내 육체 또한 ‘나’에게 미디어이고, 상대방의 육체도 나에게 미디어로서 작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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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milla Elliott, Rethinking the NOVEL/FILM DEBAT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pp 133~156

5. 문예 영화와 형식/내용 논쟁(Literary Cinema and the Form/Content Debate)

예술간 각색 연구는 19세기부터 지금에까지 항상 비평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비난받아왔다. 이는 비단 예술의 범주들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20세기 미학과 의미론의 중심에 대해 이단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어와 이미지가 번역가능하고 형식과 내용이 분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물, 플롯, 주제, 그리고 수사학이, 소설의 형식에서 빠져나와서 영화의 형식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신비평에서 구조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은 단호하게 형식은 내용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후기구조주의적 의미론은 내용의 정체를 폭로하고 환영으로 만듦으로서, 형식/내용 이분법을 폭발시켰다. 이들에게는 내용이 형식 간에 각색된다는 것이 더 이단적인 주장이 되었다. 사실 후기구조주의적 의미론은 형식과 내용을 혼합시켜서, 내용이 순수한 형식 속으로 증발된다.

따라서 단어/이미지, 형식/내용 도그마는 각색을 이론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각색이, 문화적으로는 어디에나 있다. 각색의 유행이 의미론과 미학 이론을 어디에서나 맞선다. 그래서 학자들은 각색이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그것의 환영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거나, 내용이 형식과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론적 이단을 주장하게 된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움베르토 에코인데, 그러한 입장은 소수이다. 그러나 어떠한 학자도 옛날 형식 내용/이론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이 이단에서 한발 물러나서 이론적 정확함에 반하는 수사로 나아갈 뿐이다. 이 장에서는 각색 과정에 관해, 내용과 형식의 분리를 말하는 비공식적인 여섯 개의 개념들을 탐사할 것이다. 이 개념들은 비평 이론과 영화감독들과 각색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에서 비롯한 수사들이 합쳐진 것으로, 형식/내용 도그마 자체에 압력을 가한다. 이들은 여기서 이상적이고, 기술적이고, 경험적으로 ‘사실’인 것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영화제작과 비평에서 작동되는 개념이다. 소설이 영화적 기표로 충실하게 재현되는 것으로 바라보던지, 소설이 영화적 기호들로 더 완전하게 재현되어야만 하는 불완전한 기호로 간주되던지, 또는 소설과 영화가 서로 재현하여 더 객관적인 의미를 공유하던지, 이 각색의 문제가 어떠한 다른 소설/영화의 논쟁보다도 경쟁적 관계를 형성한다. 담론에서 수많은 형태로 들어났기에, ‘형식’과 ‘내용’은 이 논의에서 다양하게 이해되어야만 한다. 전체적 예술 형식과 그들의 “주제”(내용)에서부터 기표와 기의에 이르기까지. (*이 장에서는 󰡔폭풍의 언덕󰡕을 이중의 방법으로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나는 개념 유비들을 드러내주는 대상으로서, 또 하나는 영화 속 대사나 상황과 유비를 대응시키면서. 문학적인 문학 이론서.)

5.1 각색의 영혼적 개념(The Psychic Concept of Adaptation)

20세기에 내용을 비평적으로 환영화하는 것은, 소설에서 영화로 전달되는 것이 “텍스트의 영혼”으로 이해하는 각색에 대한 영혼적 개념에 큰 책임이 있다. 이 텍스트의 영혼은 일반적으로 저자의 영혼이나 개성과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20세기 비평가들은 이러한 작가적 영혼을 덜 신비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 작가적인 영혼이나 개성은 작가의 의도, 상상, 스타일로 변화된다. 보다 확실한 문학적 징후를 찾는 비평가들은 텍스트의 영혼을 작가적 스타일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적 스타일 또한 신비적 경향을 남긴다. 이는 항상 ‘말로 할 수 없는’ 어떤 요소를 항상 간직하고 있다.

각색의 영혼적 개념은 단지 영화 형식과 작가의 문학적 영혼을 혼합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는 텍스트의 영혼이 저자에게서 소설로, 소설에서 독자-영화감독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관객으로 전달되는 영혼적 연결의 과정을 가정한다. 형식은 변화하지만 영혼은 똑같이 남아있다. 텍스트의 영혼은 형식을 넘어서 생명을 유지하고, 이러한 영혼은 형식에 속박되지도 의존하지도 않는다.

각색의 영혼적 개념은 다음과 같이 보여질 수 있다. 괄호는 없어도되는 형식이다.

소설의 영혼 -> (소설의 형식) -> (독자-영화감독 반응) -> (영화) -> viewer 반응

텍스트의 영혼은 형식이 없는 의식인 전텍스트적 영혼에서 기원하고 영화 관객의 반응이라는 후텍스트적인 반응으로 끝난다. 이 전텍스트적 영혼은 일반적으로 작가의 의도, 개성, 상상으로 파악된다. Orr은 작가 의도에서 시작하고 독자 반응으로 끝나는 모델은, 비록 커뮤니케이션 연쇄의 양쪽에 작가 의도와 독자 반응이 나타난다고 해도, 둘 다를 무시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즉, 음성적 또는 영화 텍스트의 영혼은 이 담론(화자가 독자나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과 서사성(독자/관객이 텍스트의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의 기능 둘 다이다. 저자의 영혼은 시의 그림에 관한 논의에서 종종 등장했었다.

텍스트의 영혼에 대한 충실성은 전형적으로 소설의 문자나 형식에 대한 반충실의 요구와 함께 간다. 각색의 영혼적 개념은 텍스트의 영혼에 진실하기 위해서는, 각색은 반드시 문학적 시체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소설 각색에 관한 영혼적 환영은 개인적인, 영화적인, 문화적인 의제(agenda)를 소설에 투사하여 이를 영혼이라고 규정하게 한다. 문학 작가의 권위가 이러한 아젠다와 투사의 정당함을 인정하는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다른 담론들에서는 붕괴된 저자가 각색 비평과 상업 광고에서는 그 영향력을 상실하는데 오래 걸렸다. 20세기 대부분에서 영혼 이론은 각색 비평을 영화 학위보다는 문학의 보호 하에 두었다. 문학 학자들이 영화가 작가의 영혼을 획득했는지 여부를 판단했다. 가끔 영화 평론가들은 영화 각색이 문학 비평의 에러를 바로잡는다는 주장도 했다. 심지어는 영화가 저자 자신이 자각하지 못했던 작가적 의도를 충족시켰다는 주장도 있었다. Branagh의 프랑켄슈타인이 그러한데, 그녀는 패미니스트적 비평과 마찬가지로, 소설의 에피소드를 짜르고 붙여서 페미니스트적인 것으로 묶고, 문학 비평가들이 페미니스트적인 비평 코멘트를 붙이는 곳들에다 페미니스트적인 씬을 첨가했다. 이처럼, 각색의 영혼적 개념은 작가의 영혼이나 의도라는 이름하에 새로운 영혼이나 의도가 들어올 수 있는 재현 공간을 열어놓는다.

5.2 각색의 복화술적 개념

각색의 복화술적 개념은 소설의 기호를 비우고, 이를 영화적 영혼으로 채워 넣는다. 영화가 소설을 각색할 때는 살아있는 영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은 시체를 받는다. 복화술사처럼 죽은 소설을 기대놓고, 침묵의 시체 속으로 음성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각색 비평가들은 텍스트의 영혼은 그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의 합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복화술적 각색은 롤랑 바르트의 메타언어에 관한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의미 체계는 텅빈 형식으로 간주되고, 계속해서 두 번째 체계의 내용으로 채워진다. 첫 번째 체계에서 기호인 것이, 두 번째에서 단지 기표가 된다는 것이다. 전달되는 기호가 순수한 형식이 될 때, 의미는 그 우발성을 뒤에 남긴다. 기호는 스스로를 비우고, 그것은 불모지가 되고, 역사는 증발되고, 오직 문자만이 남는다. 이와 같은 복화술적 개념은 바르트의 이 이론을 따라 다음과 같이 된다.

소설의 기호 - 소설의 기의 = 소설의 기표 (소설의 체계)

소설의 기표 + 영화의 기의 = 각색된 것의 기호 (영화 각색 체계)

이러한 등식은 ‘영화’와 ‘각색’을 구별한다. 각색은 순수한 영화가 아니라 소설과 영화의 복합물이다. 대부분이 문학각색 영화에 대해 소설의 풍부함을 재현하지 못하는 것에 영화에 책임을 묻는다면, 이러한 독해는 소설의 의미가 비워진 곳에 초점을 맞추고, 영화가 덧붙인 의미에 주의를 기울인다.

종종 각색은 영화와 소설 공동의 투사, 공동의 현현이 맞물리면서 기묘한 이데올로기적 혼합을 발생시킨다. 바르트는 기의가 두 번째 체계에서 완전히 비워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형식은 의미를 억압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의미를 불모지처럼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는 거리를 만든다. 내용은 추상적이고 정화된 본질이 아니다. 이것은 형식이 없고,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응축물이다. 개념에는 고정성이 없다. 그들은 생성되고, 변하고, 붕괴되고,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이처럼, 복화술적 모델은 완전히 텅 빈 시체가 완전히 새로운 영혼에 의해 움직인다는 주장이지만, 언제나 이는 그렇지 않다. 각색에 대한 복화술적 개념이 처음에는 영혼적 관점에 정반대인 것처럼 나타나지만, 찌꺼기인 의미가 텅 빈 형식 안에 남아있다는 것은, 영혼이 소설에서 영화로 각색과정에서 전달된다는 생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둘 다 의미가 애매한 영혼이 형식으로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개념은 같은 동전의 분리될 수 없는 양면으로 나타난다.

5.3 각색의 유전적 개념

각색의 유전적 개념은 각색에 대한 서사학적 접근에서 잘 나타나있다. 서사학자들은 문학에서 영화로 이전되는 것은 유전 구조와 유사한 심층 서사 구조라고 한다. 문학 영화 각색의 서사학적 연구자인 Brian McFarlane은 ‘서사’를 사건과정에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는 인물들 수반하는, 우연히 연결된 사건들의 연쇄로 규정한다. 서사의 주요한 기능이 심층 구조를 형성하고, 이러한 요소들은 소설에서 영화로 직접적으로 이전될 수 있다. 물론 소설에 대응하는 영화적 기호를 발견하는 ‘적확한 각색’이 필요하다. 소설과 영화는 같은 스토리, 같은 원료를 공유할 수 있으며, 다른 플롯 전략에 따라서 구별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각색에 대한 서사학적 접근은 내용과 형식의 분리라는 문제를 회피하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서사 이론의 중심적 개념들은 형식과 내용을 보다 높은 범주에서 나누고 있다. 채트먼의 histoire, discours 나 statement와 utterance, syuzhet 와 fabula 등. 각각의 사례에서 첫 번째 개념은 내용(무엇이 말해지는가)이고 두 번째는 형식(어떻게 말해지는가)이다.

서사학적 접근은 소설과 영화 둘 다 가지고 있는 서사의 더 높은 범주에서 형식과 내용을 나누는 접근을 하며, 기본 범주인 개별 기호들 수준에서의 형식과 내용 분리를 미리 제외한다. 그러나 때때로 기호의 변화가 심층 서사 구조를 해체하기도 한다. (* 그예를 󰡔폭풍의 언덕󰡕을 통해 분석하고 있음) 명백하게, 심층 구조는 완전하게 그것이 현시하는 물질과 분리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서사학적 적용은 영혼적이고 복화술적인 개념의 오염에서 면제된 것이 아니다. 서사학적 독해는 텍스트성과 구조성이라는 객관성에 입각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인(주관적인) 선택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서사의 주요한 핵심 기능을 선택하는 것만해도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제거할 수 없는 주체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제거가 각색에 대한 더 분명한 이해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암시가 문제다. 독자 반응 이론에 기반한 다음 각색이론은, 서사학자들이 피하는 그 주체성을 강조하고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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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home.naver.com/deadbird99/political_compass_frame.htm

 

 

Your political compass

Economic Left/Right: -6.25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6.31

Authoritarian
Left





















Right
Libertarian
 

흠.. 저는

Economic Left/Right: -6.25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6.31

 

이렇게 나오네요;;;

역시;; 경제적 좌파이고 사회해방론자?

ㅡ,.ㅡa

 

심하게 왼쪽이고, 심하게 아나키틱한데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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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2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해요. 님보다 아주 조금 더 오른쪽으로, 위쪽으로 였던거 같은데. 아님 거의 차이 없거나.

비로그인 2007-04-20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uthoritarian
Left





















Right
Libertarian

 

저랑 비슷하군요. 후-    (간디, 달라이라마, 만델라님과 같은 성향, 영광이네요)


가넷 2007-04-20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디족.. ^^;;;

마법천자문 2007-04-20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conomic Left/Right: -8.50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2.92

다 좋은데 달라이 라마 따위가 도대체 왜 저쪽에 있는가???

비로그인 2007-04-20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테츠님하고 같아요. 간디, 달라이라마, 만델라... ^^;

닉네임을뭐라하지 2007-04-2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해봤는데 비슷하게 나오더군요 ㅎ

기인 2007-04-2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알라디너들의 성향? ㅎㅎ
울프님은 극단적으로 왼쪽이시면서 동시에 덜 아나키틱 하네요. '진짜 좌파' 스럽습니다 ^^ ㅎ

마늘빵 2007-04-21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실제로 제가 느끼는 전 제 지점보다는 오른쪽으로 가있는거 같아요. 위쪽은 아닌거 같구.

나비80 2007-04-2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conomic Left/Right: -6.13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 -6.05
그래도 제가 기인 님 보다는 좀 더 사회 적응자(?)인 것 같군요. ^^

kocka 2007-04-22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 이거 재미있네요 Economic Left/Right: -5.0
Social Libertarian/Authoritarian:-5.59

기인 2007-04-2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ㅎㅎ +로 나오는 분이 없어서 아쉽네요~ ㅋ
 

리얼리즘의 목표는 사회 현실의 생득적 변증법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은 종종 광범위하게 역사 내부의 자발적, 적극적 발전 경향 혹은 추세를 암시해 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거듭해서 사회적 발전 경향에 관한 이러한 잠재적 인식을 그것의 노골적이고 교훈적인 경향을 들어 참여 예술 art engagee과 구별한다. 후자는 일관된 이데올로기적 입장으로부터 착안되었다.. 리얼리즘은 그 근거에 흐르는 특별히 예술적인 인식으로 시종일관되고 혹은 뒤범벅된 개념들로부터 무질서하게 발생하지만, 그 사건의 흐름은 잠재적으로 비교훈적으로 제공된다. 경향적인 예술이 획득되어야 할 적극적인 목표를 갖고 있는 반면, 리얼리즘은 대부분 집중적이고 적극적인 열망을 결여한 당대의 사회적 소외에 대한 강력히 반대입장을 취함으로써 생겨난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다. 즉 브레히트의 "콤뮌의 나날들"(Days of the Commune)처럼 부분적으로는 리얼리즘의 성향을 매우 강력히 띠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규정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역사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예술은 단 하나의 세계관과 단 하나의 청중반응을 강조하든가 아니면 청중으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견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불안정하고 다의적인 예술적 리얼리즘을 강조하든가, 이 두 방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스테판 모라브스키, 마르크스 엥겔스 문학예술론, 한울, 198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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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진보평론  제28호
남구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읽히고 논쟁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라고 볼 수 있다. 레닌이 글을 쓰던 시기는 짜르의 폭압적 전제정치가 힘을 발하며 노동자 운동과 사회주의 및 민주주의 운동을 탄압하던 때였다. 아래로부터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중운동과 이에 대한 탄압, 혁명적 운동 조직의 영세성 및 수공업성이 레닌이 극복하고자 하던 대상이었다. 80년대의 우리나라 역시 군부 독재에 의한 정치적 탄압을 극복하고, 모순의 증대에 따라 노동자 민중이 대중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시기로 레닌이 글을 쓰던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당시의 활동가들이 레닌의 테제들을 바로 받아들여 운동의 무기로 사용하려고 시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레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쟁점이 되었던 것은 ‘경제주의’라는 문제였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전제주의 타도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정세에서 노동자 대중의 즉자적이고 경제적인 요구에 운동을 묶어두려는 경제주의자들이 “혁명조직을 강고히 하고 정치 활동을 확대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는 대신에, 노동조합주의 투쟁만을 하라고, 뒤로 가라고 요구”(45)하는 한편 “전제주의 타도를 대중적 노동운동의 첫째 과제로 내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과제를 눈앞의 정치적 요구를 (대중운동의 이름으로) 얻어내기 위한 투쟁이라는 임무로 격하시켰다”(59)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레닌의 경제주의 비판은 군부 독재에 대한 투쟁이 전사회적이고 전계급적으로 요구되던 80년대 초에 대중의 요구를 강조하며 투쟁을 방기하고 조합주의적 투쟁에 제한하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서 우리나라의 현실에 적합하다고 받아들여졌으며, 소위 ‘사투(사상투쟁)’의 기본서로 활용되었다.


처음 소개되던 당시에는 공식 출판된 번역판이 아니라 노트에 수기로 번역한 복사판이 돌아다녔는데, 경제투쟁을 모두 경제주의로 오역하는 바람에 모든 경제투쟁 자체를 부정하는 일도 벌어졌다. 경제주의자들을 박멸한다고 경제투쟁이 벌어지는 곳에서 투쟁을 가로막고 논쟁을 벌이는 해프닝까지 있었던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다행히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독일어로 읽을 수 있었으며, 후배와 토론하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당시 돌아다니던 노트를 구해 대조하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씁쓸한 남한 현실... 결국 누가 '원문'을 읽었느냐로 결정된다. 레닌은 20세기 초 러시아의 정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구체적인 투쟁 대상과 함께 논쟁하며 쓴 책인 것을...) 사실 경제투쟁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투쟁이 전사회적인 차원의 정치적 계급적인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가로막고 개별 사업장 또는 지역적 투쟁에 머무르게 하려는 경제주의적 경향을 문제 삼아야 한다. 경제투쟁은 보다 상승된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는 싹으로서 더 성장해야하는 것으로, 경제투쟁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그 싹을 밟고 뿌리를 뽑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요컨대 경제 ‘투쟁’이 아니라 경제 ‘주의’가 문제로,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경제적 요구‘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입장, 결과적으로는 노동자 민중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는 경향이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제적 요구에 대한 경제 선동만을 중시해서는 안 된다. “경찰의 폭압과 전제주의의 광폭함이 드러나는 모든 현상들, 온갖 사례들이 그 같은 (대중의) ‘끌어들이기’를 위해 부족함 없이 ‘널리 활용될 수 있는’ 수단이다. 결코 경제 투쟁과 관련된 현상들만이 그런 ‘활용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76-77) “경제 투쟁을 바탕으로 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생활과 정치 생활의 전반적인 모든 현상을 바탕으로 이 같은 요구를 정부에 제기하는 것”(82)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계급의 문제에 개입하여야만 하며, 심지어는 ‘자유주의적’ 또는 ‘민주주의적’ 문제에도 노동자 계급 정치적 관점에서 개입해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레닌을 인용하자면, “노동자들이 전횡과 탄압, 폭력과 권력 남용이 행해지고 있는―그것이 어느 계급에 관계된 것이든―각종의 모든 사례들에 대응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다면……노동자들이 구체적인, 게다가 항상 절박한 (당면한) 정치적 사건과 사례들을 통해 다른 사회 계급들의 지적·도덕적·정치적 생활이 표출되는 모든 현상에 걸쳐 그것들 각각을 관찰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계급, 계층, 집단의 생활과 활동의 모든 측면에 대해 유물론적 분석과 유물론적 평가를 실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의식은 진정한 계급의식이 될 수 없다”(91). 심지어는 노동자 계급에게만 시야를 제한하려는 경제주의적 입장은 반동적이라고 쓰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주의, 관찰력, 의식을 배타적으로, 혹은 그렇지는 않더라도 우선적으로 노동자 계급에게로 돌리려는 자는 사회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의 자기 인식은……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충분하고도 명료한 이해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제 투쟁이 대중을 정치 운동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널리 적용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우리 ‘경제주의자들’의 설교는 그 실천적 중요성으로 볼 때 극히 유해하며, 극히 반동적이다”(91). 농노제 폐지, 지방 자치제 도입 요구, 자유주의자에 대한 탄압의 폭로 등 자유주의적 요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개하여야 하는데, 이와 같은 자유주의적인 내용의 투쟁들을 하는 것을 “자유주의와 타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사회 민주주의 당을 ‘고용주와 정부에 대한 경제 투쟁’으로 끌어가고 있으며, 또한 ‘자유주의적인’ 문제에 매번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사회 민주주의적 태도를 명확히 해야 하는 임무를 포기하고 자유주의 앞에 굴복하고 있기 때문”(123)이라는 것이다. 레닌은 나아가서 ‘모든’ 주민 계급 속으로 나아가는 과제야 말로 계급적 관점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노동조합주의 정치를 노동자 계급정치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핵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107-114).


실제로 개별 사업장에서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재생산, 즉 자본관계의 재생산은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재생산을 전제로 하고 있고,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재생산은 전 사회적 수준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지배관계의 재생산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개별 사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다 나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은 물론 그것이 이윤과 자본의 축적조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서 자본을 약화시키는 의미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서는 자본주의적 관계 자체를 지양할 수 없다. 아무리 삶의 질이 상승한다고 해도 고작해야 ‘황금의 족쇄’를 차고 있는 노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 정치 역시 사회의 모든 계급에 대해 또한 모든 사안에 대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경제주의에 대한 오해와 함께 레닌의 ‘비판의 자유’에 대한 부분도 흔히 레닌주의의 이름으로 비판을 억압할 때 잘못 이용되고 있다. 레닌은 당시 베른슈타인류의 기회주의자들이 ‘비판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경향과 논쟁하였다. 레닌에 따르면 “베른슈타인은 매우 정연하게 합의된 ‘새로운’ 논거와 사고들로 완전 무장하여 이 같은 정치적 요구를 내세웠다. 사회주의에 과학적 근거를 부여하고 역사의 유물론적 이해라는 관점에서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불가피성을 입증할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점증하는 빈곤, 프롤레타리아트화, 자본주의적 모순의 심화 등의 사실은 부정되었다……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사상은……계급투쟁 이론은……부정되었다”(8). 요컨대 레닌은 여기에서 비판의 자유라는 겉포장 속에 숨어 있는 기회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비판 자체를 막는 것, 즉 하나의 올바른 입장이 전제되고, 그에 대한 비판을 ‘자유주의자’로 몰아가는 식으로 비판 자체를 부정하고 풍부한 토론을 막을 경우에 레닌이 원용되는 것은 레닌의 원래 의도가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맑스는 애초에 ‘비판적(kritisch)’이며 ‘혁명적(revolutionär)’일 것을 요구했다. ‘혁명적’ 맑스주의를 표방하던 당대의 이론가들은 각기 노동자의 투쟁을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단지 착취의 조건을 약간 개선하는 데에서 그치게 하려는 경향들, 즉 라쌀레나 베른슈타인, 카우츠키류의 개량주의와 투쟁하였으며, 이러한 점에서는 레닌도 맑스 엥겔스, 그리고 그람시는 말할 것도 없고, 로자를 포함한 대다수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혁명적 맑스주의의 큰 방향성을 공유한다면, 그리고 오직 하나의 올바른 입장이 완전한 형태로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급적 정치적이고 전사회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지양을 위한 노동자 운동의 전략 전술과 관련된 이견은 충분히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토론되어야 한다. 레닌 스스로도 󰡔제국주의론󰡕, 󰡔국가와 혁명󰡕, 󰡔무엇을 할 것인가󰡕 등의 저작들을 통해 개량주의/기회주의자들에게는 적대적이었으나, 논쟁 관계에 있었던 당대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인 로자와 그람시, 나아가서는 멘셰비키였던 트로츠키와도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레닌을 절대화하고 독점한 후, 하나의 올바른 입장을 가지고 더 이상의 논의에 빗장을 지른 채 비판을 하지 못하게 하는 해석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대중과 정치적 지도에 관해서도 레닌은 흔히 거꾸로 해석되고 있다. 올바른 정치적 지도와 이를 따르지 못하는 어리석고 환멸을 느끼게 하는 대중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거꾸로 모순이 첨예하게 발전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터져 나오는 대중 투쟁에도 불구하고 이를 따라 잡지 못하는 운동의 지도부가 오히려 문제였다. 요컨대 대중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지도부가 바로 레닌의 고민의 대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에 따르면 “대중이 자생적으로 고양되면 될 수록, 운동이 더욱 널리 퍼져 나가면 나갈수록,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정치적, 조직적 활동에서의 더 많은 의식성에 대한 요구는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속히 커진다.”(68). 그러나 “혁명가들은 ‘이론’에서도, 활동에서도 이러한 대중의 고양에 뒤처졌으며, 전체 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중단되지 않고 계승되는 조직을 건설하지 못했다”(68)는 것이다. 요컨대, “대중의 혁명적 활동성을 과소평가”(102)한 채 “대중의 자생적 고양에 미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데올로그들’, 혁명가들,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후진성”(137)이야말로 레닌의 비판 대상이었다. 레닌이 대중의 자생성을 넘어서는 혁명적 의식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대중의 자생성을 무시한다든지, 잘못된 의식성을 정당화시키고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 레닌주의 또는 정통의 이름으로 레닌의 의식성과 정치적 지도 구심에 대한 강조가 대중의 자생적 운동을 비판한 것으로 독해되어 오히려 대중 운동을 단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레닌이 마치 지도 중심과 의식성만을 강조하면서 대중의 자생성을 무시하는 듯이 해석되면서, 대중을 강조하는 입장을 대중 추수주의로 비난할 때 레닌의 경구가 활용되어온 것이다. 자신들이 지도 중심을 자처하면서 경제주의를 뛰어 넘지 못한 의식성을 가지고, “후위의 이론과 실천에다 ‘전위’라는 이름표를 달아매는 것”(117)만으로 오히려 대중운동의 혁명적 역동성을 재단할 때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그럼에도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레닌에게서 뜨거운 감자인,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의식성의 문제. 논자는 이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는 논란거리이다. 당대 러시아의 대중과 현대 남한의 대중 간의 격차. '대중'이란 무엇인가 등등...)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의 경제주의 비판의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제적인 것을 넘어서 계급적, 정치적인 운동이 요구된다는 점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레닌의 경제주의 비판은 예나 지금이나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레닌의 경우에 짜르의 ‘전제주의적 폭압 정치의 종식’이라는 정치적인 과제를 전면에 제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면에서는 러시아적 특수성을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 스스로 여러 곳에서 노동운동이 성숙하였고 민주주의가 발전한 독일과 같은 나라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레닌의 테제들은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러시아의 특수성 속에서 레닌의 테제를 이해하는 사적 유물론적인 독해는 자생성/의식성, 나아가서는 대중/정치적 지도와 관련된 논의로 연장될 수 있다. 경제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관계와 관련된 문제라면 자생성/의식성의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이고, 대중/정치적 지도의 문제는 조직론적인 문제이지만 경제주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관계 속에 있다.


레닌과 논쟁 관계에 있었던 당대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입장들 역시 우리는 그들이 활동하던 각 나라의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람시는 시민사회에서의 헤게모니적인 정치 전략을 강조하면서 서구 유럽의 특수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람시의 구상은 ‘현대의 군주’로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정치정당의 의식적인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는 달리 당시 파시즘이 정치적인 억압 보다는 시민사회 영역에서 문화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 전략을 구사하면서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을 보면서, 이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서 기동전보다는 진지전을 강조하는 시민사회적인 헤게모니 전략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로자는 레닌이나 그람시가 정치정당의 지도, 즉 의식성을 강조한 것과 달리 대중 투쟁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비대하게 성장하여 관료화된 노동자 정당이 오히려 대중 투쟁의 역동성을 억누르고, 정치적 지도의 이름 아래 조율하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되고 있다. 잘못된 정치적 지도에 의해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진출이 억압되는 것을 돌파하기 위해 정치적 대중 파업이 주된 전술로서 제기된다. 이들은 각기 나라마다 형태를 달리 하며 존재하였던 노동조합주의 및 경제주의/기회주의와의 투쟁을 전개하면서,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노동자 운동과 자본주의의 지양을 위한 전략 전술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올바른 전략 전술이 어떤 것인지를 논하기에 앞서, 여기서는 일단 사적 유물론적인 독해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서 그치고자 한다. 그러할 때, 그람시안, 정통 레닌주의, 로자주의 등 하나의 입장이 절대화되면서 다른 입장들을 적대시하는 식의 비생산적인 논쟁은 불식되고, 각각의 입장들은 새로운 전략 전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풍부한 재료로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레닌의 문제의식을 러시아적 특수성 속에서 독해하여 개량주의 비판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적용하려고 한다면, 최소한 변화된 지형 속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질문들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야 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 전술을 발전시켜내지 못하고, 개량주의에 대한 비판이 잘못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끝날 때 개량주의 비판은 현실성을 상실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민주화가 진행된 이후 변화된 지형 속에서 가지는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레닌의 정치적 쟁점에 대한 개입은 전제 군주인 짜르의 폭압을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레닌 스스로 서구와 달리 의회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하고 언론의 자유가 없으며 전국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의 활동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러시아에서는 비밀리에 움직이는 철의 조직이 전국적 정치 신문을 매개로 비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비합법활동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발전한 조건 아래에서는 다른 전술이 구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합법 공간에서의 공개적인 활동과 함께 선거주의 또는 기회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선거에 대한 대응이 가능한 전술이 제출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가 위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듯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역시 항상 위기적이며 다시 파시즘적인 정치가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부르주아 정치의 부드러운 외피 속에는 고양이 발톱 같은 폭력성이 항시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네오콘, 네오 나찌, 신보수 우익의 등장에서 볼 수 있듯이 제국주의가 군사화하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민주화에 따른 새로운 전략 전술의 개발뿐만 아니라 폭압적인 형태의 정치에 대한 대비 역시 언제라도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의 지구화와 신자유주의 지배전략의 세계화에 따라 개별 국가를 막론하고 노동자 민중의 쥐어짜기가 진행되고, 노동시장 유연화의 결과 비정규직이 증대되는 지금, 경제주의의 문제를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것’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에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의 중요성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반대전선만이 강조되고, 정치적 전략의 부재 속에 여타의 정치적, 계급적 투쟁이 방기되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전의 레닌주의자들이 경제주의를 잘못 해석하여 정치주의적 경향 속에 모든 경제투쟁을 부정하고 당물신주의에 빠졌었다면, 요즈음에는 거꾸로 노동자의 눈앞의 이해관계만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만을 강조하면서 여타의 정치적 사안에 대한 대응을 도외시하는 경제주의적 경향을 볼 수 있다. 경제주의는 정치주의의 반대물로서 두 가지 경우 모두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시기의 지구화는 전방위적이어서 노동만이 아니라 환경, 교육, 의료, 복지 등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이 맹목적인 자본 축적 욕구 아래 직접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지배전략 중의 하나에 불과해서 신자유주의 반대 그 자체 만으로서는 사회 안전망 확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자유주의적 해법, 또는 케인즈주의적 분배전략을 중심으로 한 사민주의적 해법으로 귀결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이 또 다른 하나의 자본의 지배 전략으로의 변화만을 끌어낼 뿐 자본 자체의 지양으로 발전해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우리가 교훈을 끌어낸다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반신자유주의 전선이 경제주의적 투쟁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지양 전략 속에 배치되어 전사회적이고 지구적인 관점에서 정치적 계급적 투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계급 정치적 전망이 부재할 경우 결국 투쟁의 흐름은 경제주의적 투쟁을 넘어서지 못한 채, 정치적 맥락에서는 무능함을 보이거나 결국은 선거주의 정당에 귀의하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의 한미 FTA 반대 투쟁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미 FTA는 지금의 형태로는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무역주의에 기초하여 노동 환경 규제 등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 막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미국과 한국 둘 다의 초국적 자본의 이해만을 반영하고 있으며, 굴욕적이고 투명하지 않은 졸속 협상에도 불구하고 자본 측에서는 한미 FTA를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협상 과정에서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폭로는 의미가 있으며, 한미 FTA 반대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반자본적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미 FTA는 반대하면서 미국이 아닌 중국 또는 인도 등 우리나라가 불리하지 않은 나라들과의 자유무역 협정은 지지한다든지, 또는 자유무역을 반대하고 보호주의로 가는 것이 해법은 아닐 것이다. 한미 FTA는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세계지배전략의 경제적 측면으로서,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는 평택으로의 미군기지 확장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두 가지 모두의 경우에서 우리나라는 미국 패권주의의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전진기지이다. 한편 NAFTA 10년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NAFTA의 수혜자는 각국의 (그중에서도 미국의) 자본이며, 피해자는 미국, 멕시코, 캐나다의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한미 FTA 반대는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정치 군사적 측면까지 고려한 전방위적인 대응을 요구하며, 지구적인 수준에서의 연대를 바탕으로 한 자본/제국주의 모순의 지양이라는 관점에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조금은 논자의 입장에 의해 선별된, 특히 대중의 문제에 있어서, 글이고, FTA문제에 대해서는 뻔한 대답만이 도출되었다. 구체적인 '사회구성체'에 대한 분석이 다시 시작되거나, 다른 용어로라도, 현재 남한사회, 나아가 세계사회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없으면 공허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만 도출될 뿐이다... 그래도 레닌에 대해 개설적으로 읽기에는 괜찮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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