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
제임스 M. 케인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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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는 후치타 쓰구지의 커플이라는 그림이다.

후치타 쓰구지로 찾아도 검색이 되지 않아서 무명 화가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 본명이 후치타 쓰구하루라고 한다.

유럽 사람들이 읽기 어려워 이름을 바꾸었다고.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을 정도로 프랑스에서 성공한 일본 화가였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인생에 대해서 읽어보니 썩 호감이 가지는 않는다.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림들도 미술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와닿지 않고.


그러나 이 표지의 그림만은 독특하면서도, 책의 내용과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영화로도 히트를 친 이 작품은 원래 우편 배달원은 벨을 두번 울린다 였다고 하는데, 영화 개봉 당시 해당 직업과 관련된 부처에서 항의가 있어서 지금의 제목인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로 바뀌었다고 한다.

독특한 제목이라 대체 왜 이 제목인가를 생각하며 책을 계속 읽어나가게 되는데, 끝까지 다 읽고 나서 해설까지 읽으면 아하, 하게 된다.


길지 않은 소설이고 현란한 미사여구가 없는 소설이고 담백하고 간결한 소설이다. 바로 이 소설이 유일하게 멋을 부린 부분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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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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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화로 알고 있던 라쇼몬은 사실 여기 수록된 단편 소설 중 라쇼몬과 덤불 속이라는 이야기를 합친 것이다.


여기 실린 단편의 소재는 다양한데, 결국 다 읽고 나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 꿈 속인지 깨어난 후인지, 환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아름답고 신비하게 느껴진다.

모르겠다. 그 당시에는 분명히 센세이셔널한 천재는 맞는데, 달에도 사람이 가고 지구 반대편의 일도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한 세계에서도 여전히 흥미있고 유효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그 시대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모를까, 세대를 넘어서까지 진진할 수 있는 이야기인지. 내가 편협한 것일 수도 있고.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영화 라쇼몬 때문이다. 최근 개봉했다는 라스트 듀얼도 이와 비슷한 전개라고는 하는데. 못 봤으니 정확히는 모르겠다.

라쇼몬, 그러니까 덤불 속의 이야기는 흥미로우나, 그 또한 영화가 원작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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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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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 그림은 캐슬린 톨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표지화) 이라고 되어 있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캐슬린 톨키라는 미국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으로, 미국판 책표지에 쓰인 그림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림의 내용이 그냥 이 책의 그 내용이기는 한데, 매번 표지 그림 찾아보는 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읽기의 재미이기도 해서, 약간 아쉬웠다.

뭐랄까, 책을 읽는 재미가 반감되었다는 느낌?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의 표지 그림은 뭉크의 그 유명한 절규였는데, 이런 건 또 출판사의 재치구나 라며 슬며시 웃기도 했고.

인간 실격의 표지가 에곤 쉴레의 자화상이었는데, 만약 다자이 오사무 사진을 표지로 삼았다면 아무리 잘 나온 사진이라고 하더라도 좀 아쉬웠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단편선이나 위대한 개츠비에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배치한 것도 참 좋았고.

이 그림도 좋기는 한데 책의 내용을 곱씹어 보기에는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판 표지 그림이니까. 미국에서 출판할 때 일부러 책의 내용을 반영하여 화가에게 부탁하여서 이 책을 위해 일부러 만든 표지 그림인데, 그렇기 떄문에 그림 만으로도 책의 주제를 다 던져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중남미 여성들이 부엌에서, 중남미에서 나는 재료를 가지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통적인 음식을 만드는 이야기.

 

이 책이 특별해진 이유는 성과 사랑과 음식을 연결했기 떄문이다. 음식의 이름으로 장이 구별되고, 특별한 행사 때마다 특별한 음식이 만들어지며, 그 음식을 매개로 사건이 일어난다.

결국 여주인공을 버티게 한 것은 남자에 대한 사랑이었는지, 요리에 대한 열정이었는지 헷갈릴 정도이다.

 

이 표지 그림도 좋기는 한데, 이 책과 무관한 다른 그림을 한 번 고민해봤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

퍼뜩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특한 이 책의 내용을 기존에 나와 있는 그림으로 반영하기에는 힘들었겠지.

 

 

음식과 성을 연결하는 것은 이 책이 나오는 시기에는 독창적이었겠지만, 이제는 흔하디흔한 비유이자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는 정작 엄청 독특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의역된 제목인데,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유명해지면서 소설의 제목마저도 영화의 제목에서 그대로 가져와버렸다고 한다.

잘한 의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최소한 절반 이상의 동기는 바로 제목일 것이다. 나도 그렇다.

원제는 초콜릿라떼를 팔팔 끓인 물이라고 하는데, 책 내용은 팔팔 끓인 물이지 절대로 달콤 쌉싸름한 쪽이 아니다.

그야말로 미친 사랑이다. 이렇게라도 너의 곁에 있고 싶어. 우리의 사랑을 이렇게라도 완성하고 싶어. 하고 절절하게 외치는.

딴지 같지만 이 정도로 절절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수도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먹고 사는 문제에서 사랑도 사치였나, 아니 결국 먹을 것을 만드는 부엌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의식 중에 두려웠던 걸까, 결국 이 여자의 삶을 완성시키는 것은 사랑이었나 요리였나.

 

, 그리고 웨딩케이크 사건은... 아무래도 김삼순이라는 드라마에서 차용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옛 연인의 결혼식, 케이크를 먹고 구토하는 하객들... 아무래도 그 장면 맞는 것 같다.

명작은 명작이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오마주 되겠지.

 

 

p. 124~p. 125

"아시다시피 우리 몸 안에도 인을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있어요.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알려 드릴까요?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듯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 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남겨두고 온 차갑고 힘없는 육체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p. 146

어머니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티타는 처음으로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티타의 이런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녀가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고 오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 티타는 이제야 '상추 이파리처럼 홀가분한'이라는 표현의 뜻을 이해할 것 같았다. 함께 자란 옆 상추와 갑자기 헤어진 상추의 느낌이 바로 이렇게 야릇한 느낌일 것 같았다. 함께 얘기는커녕 아무런 의사소통도 해 본 적 없고 그 안에 또 다른 수많은 이파리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겉 이파리밖에 본 적 없는 옆 상추와 헤어졌다고 해서 고통스러워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더 비논리적인 일일 것이다.

 

p. 208

티타는 밀이나 콩, 자주개자리의 씨앗은 자기 모습이 완전히 일그러지고 바뀌는 것도 아랑곳 않고 계속 싹을 틔운다고 생각했다. 이제 티타는 씨앗이나 곡물 들이 새 삶을 주기 위해 자기 몸을 터뜨려 가며 껍질을 벌려 물을 깊이 빨아들이는 게 놀랍고 존경스러웠다. 씨앗이나 곡물 들은 자기 몸속에서 첫 번째 뿌리 끝이 삐죽 튀어나오는 것을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하며, 자신의 원래 모습이 망가져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새싹을 당당하게 세상에 보여 주었다. 티타는 자신도 그런 단순한 씨앗이었더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 자기 몸속에서 뭐가 자라고 있는지 아무에게도 얘기할 필요가 없고, 사회의 비난을 감수한 채 부른 배를 안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씨앗에게는 이런 고민이 없었다. 특히 무서워해야 할 어머니도 없었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사람들도 없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티타에게도 어머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마마 엘레나가 내린 저주가 언제 어느 때 저승에서 떨어질지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티타는 이런 기분을 잘 알았다. 요리법에 나온 대로 따르지 않고 요리할 때 느끼는 두려움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럴 떄마다 티타는 마마 엘레나가 기필코 틀린 부분을 찾아내서 자기가 만든 음식을 칭찬하기는커녕 조리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호통을 칠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부엌과...... 그리고 인생에서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법칙들을 깨고 싶은 유혹도 뿌리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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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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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가 아니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이다.

아마도 책의 내용을 좀 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 제목을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을 조롱하는 편지 때문에 수용소로 보내졌고, 이 생활을 바탕으로 나온 책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이다.

이후 소련 사회를 비판한 책들을 계속 썼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다.

추후 소련에서 추방당하고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소련 붕괴 후 러시아로 귀국한다.

이후 옐친을 지지하다가 비판으로 돌아섰고, 죽을 떄까지 푸틴을 강력하게 지지했기에 장례식도 푸틴에 의해 국가장으로 치뤄졌다고.


현재 세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참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된다. 사망 당시 89세였기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하고 가정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래도 만약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뭐라고 이야기했을지 궁금하다. 

왠지 푸틴을 지지했을 것 같은 이 예감은 뭘까. 단순히 생전에 푸틴을 지지했다는 것 말고도 그의 여러가지 행적을 보면 아마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을 찬성하고, 나토와 유럽연합을 비판했을 것 같다.


솔제니친의 대부분의 사진은 이 표지처럼 턱수염이 수북하다. 하지만 딱 이 표지에 나온 사진은 찾지 못했다.

깎지 않은 무성한 턱수염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진만 봐서는 금방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평생 수용소에서 있던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수용소에서 나와서도 그의 삶은 거대한 수용소에서 생활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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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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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는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페터 한트케 세트가 있다고 한다.

소망 없는 불행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관객모독


관객모독은 읽었고,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도 이번에 읽었으니 다음 차례는 소망 없는 불행이다.


이 책은 제목이 참 인상적이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얼마나 불안할까.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도 불안한데.

이 책의 제목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2002년 월드컵 당시 4강전을 결정짓는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간 홍명보가 환히 웃으며 뛰어오는 장면이다.

만약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스페인 골키퍼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으리라.


이 책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하러 가서는 자신이 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꾼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것을 해고 표시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났다.그는 길에서 팔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옆으로 지나가는 차는 택시가 아니었다. 사실 블로흐가 택시를 부르려고 팔을 높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났다. 블로흐는 고개를 돌렸다. 택시 한 대가 뒤에 서더니, 그에게 빨리 타라고 했다. 블로흐는 몸을 돌려 차를 타고 나시마르크트로 가자고 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골키퍼인 셈이다. 아마도 유럽 작가가 쓴 소설이니까 주인공이 축구 선수였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나 일본 작가였으면 야구 선수였을 수도 있다.

시작에서부터 순간순간의 '삑사리'가 느껴진다. 이 골키퍼 출신 조립공은 앞으로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야말로 이런 '삑사리'를 경험하게 된다. 독자도 자연스레 같이 느끼게 된다.


표지 그림은 에드바르 뭉크의 1893년 작품 절규인데, 그야말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감,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망연자실, 말문이 막힐 정도의 막막함이 흘러 나오는 그림의 정서가 소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키커가 맹렬히 달려왔다. 환한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페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 공을 찼다.


이 책은 뒤의 작품 해설이 아주 훌륭한데, 일부를 여기에 옮기고자 한다.


공사장에서 눈짓 한 번으로 일꾼을 해고한다? 독자가 볼 떄 이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다. 서류로 통지된 것도, 말로 전달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현장감독이 힐끗 쳐다본 것을 주인공이 해고 표시로 지레짐작하고 공사장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중략)

블로흐가 정식 직원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고 추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해고라는 표현이 어디에도 없는데 주인공이 스스로 그렇게 믿고 떠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독자가 보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블로흐라는 이 화상이 왜 다른 일꾼들보다 늦게 공사장에 출근했느냐 하는 것일 테고, 혹 주인공은 정해진 시간에 순응하는 힘을 이미 상실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블로흐가 노동자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해고를 지레짐작으로 판단하고 공사장 밖으로 나오자, 주변이 전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화창한 10월 어느 날이었다. 노점 판매대에서 따끈한 소시지를 시켜 먹은 후 그 사이를 지나 극장 쪽으로 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되도록 많은 걸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극장 안으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8쪽) 왜 주면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으며, 극장 안으로 들어와서야 안심이 되었을까?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 주인공으로서는 당연한 심리 상태가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어지는 사생활 묘사를 보면 꼭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지만 아무에게도 연결되지 않고, 길가에 서 있는 순경에게 인사를 해 보지만 순경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8쪽) 공원 주변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처에게 전화를 걸어 연결이 되지만 그녀는 블로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는 공원 커피 숍에 들어가 맥주를 한 잔 주문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가져오지 않자 그냥 나온다.(16쪽)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는 블로흐가 해고 이전부터도 이미 친구들과 소통이 단절된 상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또 해고 이전에 결혼을 했었는데 지금은 헤어져서 혼자 살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저런 작은 일상 생활, 즉 길거리에서 경찰과 인사를 나누는 일이라든가 공원 커피숍에서의 맥주 주문 등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주인공은 사생활에서도 이미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주변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과 소통이 단절된 상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또 해고 이전에 결혼을 했었는데 지금은 헤어져서 혼자 살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저런 작은 일상 생활, 즉 길거리에서 경찰과 인사를 나누는 일이라든가 공원 커피숍에서의 맥주 주문 등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주인공은 사생활에서도 이미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주변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중략)

지난 19세기 문학의 주인공들은 이미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를 탄식하고, 신의 죽음과 인간성 상실을 못내 서러워하며, 분노에 찬 반항도 해 보고 영웅의 객기 같은 것도 부렸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블로흐의 모습을 보면,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철 지난 유행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의 블로흐에게는 그가 일하는 곳에 늦게 출근한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는 대화를 주고받을 짧은 순간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대화란 주체가 하는 행위이지 도구에게는 가당치도 않는 일이다. 그저 눈짓 한번으로 달랑 목이 떨어져 쫒겨난다. 그런 시대에 그와 우리가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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