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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ㅣ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평점 :
1. 책의 중반부에서 우르술라는 막연하게 불안을 느꼈다고 나와 있다. 오랜 역사에서 비슷한 이름이 집요하게 되풀이되었고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내향적이고 머리가 좋은 반면, 호세 아르카디오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충동적이며 뱃심은 있으나 비극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다는 사실을 깨닫는 우르술라. 계속해서 헷갈리게 이름을 지은 것은 역사의 반복성을 느끼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고,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지역의 특징일 수도 있다. 작가의 고향인 콜롬비아를 비롯한 남미 지역은 잘 모르지만, 그리스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는 경우가 많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이름이 현재에도 있다는 내용을 다룬 다큐를 얼핏 본 것 같은 기억이 있다.
2. 브라질을 제외한 남미는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남미 작가들이 나라를 떠나 교류를 하는 바탕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남미 독립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남미의 여러 나라를 독립시켰다. 콜롬비아만 하더라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가 전부 콜롬비아에 포함되었었다고 한다. 군부의 지배, 민중의 저항, 외세의 침략 등등을 소설 속에 잘 녹여냈다. 비슷한 키워드로 상징되는 한국의 근대사를 비교해 보면, 한국 독자들에게, 특히 민주화 이전의 한국을 경험한 세대에게는 더 인상적일 수도 있겠다. 온 가족이 모여 사는 대가족적에서 오는 분위기도 한국과 비슷하다.
3. 작가는 콜롬비아 사람이다. 작가의 원래 고향은 카리브해 연안의 작은 마을이고 대학은 수도인 보고타에서 다녔다고 한다. 보고타는 고원지대로, 이곳에 올 때마다 작가는 이방인이 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수도가 고원지대라는 것이 특이했는데, 특이하다고 느낀 것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의 시각 때문인 것 같다. 외세로부터 보호하려면 평지에 있는 것보다 어느 정도 높은 지대에 도시가 건설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마콘도가 세워진 것 자체가 이주로 인해 시작되었고, 마콘도로 오는 사람들, 마콘도에서 성장했지만 마콘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어려운 작가의 심정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싶다.
4. 작가는 어린 시절 부모와 일찍 이별하여 조부모의 손에서 컸다고 한다. 작가의 외할머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흔히 설명되는 이 책의 분위기는 꼭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ㅡ로 시작되는 우리나라 전설이나 민담 같기도 하다.
5. 중고등학교 시절 사회 시간에 국가가 형성되고 문명이 만들어지는 부분에 대해 공부했던 기억이 아주 어렴풋이 난다. 밑줄을 쳐가며 달달 외웠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아무리 쥐어짜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없어 슬프기는 하지만. 씨족에서 부족이 되고, 다시 여러 단계를 거쳐 왕국과 제국으로 이어지는 그 과정이 이 책을 읽으면서 아련하게 떠올랐다. 마치 한 문명의 흥망성쇠를 압축해놓은 듯한 이 책에서 나는 흥과 성보다 망과 쇠 쪽이 더 인상적이었다.
6. 하느님이 세월에 대해서 무명 한 마를 잴 때 터키인처럼 속임수를 쓰지 않던 옛날은 만사가 요즘과는 달랐다고 묘사하거나, 아우렐리아노 가문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가운데에서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밤마다 사람들을 저택으로 불러 술마시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인간이 아니라 개가 죽은 것 같다고, 많은 고생을 하며 동물 엿을 팔아 지탱해 온 이 미치광이 집안의 운명이 타락의 쓰레기통이 되어간다는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7. 작가는 가장 싫어하는 인물을 콜럼버스로 꼽았다고 한다. 바나나 회사가 들어와 마콘도에 일대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의 핵심은 타락과 착취이며, 회사의 기사들이 노무자와의 약속을 회피하였고 역에 모인 수많은 노무자를 사살하였으며 회사의 핵심 인물은 마콘도 밖을 빠져나갔고 마을이 쇠락해진 과정을 보면, 작가의 생각이 뚜렷하게 읽힌다. 끊임없이 외부세력에 시달렸고 남미의 국가들과 그 안에서 발버둥 쳤던 남미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8. 백년 동안의 고독, 백년의 고독에서 백년은 쉽게 알 수 있다. 책을 읽기도 전에 맨 앞에 가계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독은 무엇일까? 고독이라는 단어는 책을 다 읽은 내 기억이 맞다면 중반부에나 가서야 처음 등장한다. 문명의 번영 후에 쇠퇴가 오고 쇠퇴가 오기 바로 직전, 아무도 그 쇠퇴를 예상할 수는 없지만 뭔가 이전과는 달라졌다고 느끼는 바로 그 시기에, 등장인물들은 고독을 느낀다.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닮은 것 같아 약간 떨린다. 대체 고독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라고 하고 누군가는 인간은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그 시간을 잘 활용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현대인과 고독은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쌍의 묶음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에 응팔 열풍이 불었나 보다. 고독하기 전, 고독을 느끼기 전 시대의 이야기라서. 그 드라마의 말미에서 모여 살던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아이들은 성장했으며, 어른이 된 아이들은 그 시대를 그리워한다. 아마도 여기에도 고독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9.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성경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누구를 낳았고 또 누가 누구를 낳았고... 이런 족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데다가, 100살 넘게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합쳐지면 더더욱 그렇다. 개미떼나 홍수, 가뭄 등등은 성경에서 흔히 등장하며 사실과 전설이 뒤섞여 있다. 아이가 바구니에 탄 채로 강에서 떠내려왔다는 모티브나, 누군가를 죽이고 나서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는 장면 등등 수많은 장면들은 성경에서 그대로 모티브를 따온 것이 아닌가?
10. 성경 뿐 아니다. 이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은 그리스로마신화에도 빚을 지고 있다. 책 전편에 등장하는 근친상간의 모티브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 아마도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남미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설, 민담, 설화의 상당 부분도 이 책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된다. 예전에 성경 속 아브라함의 열 두 아들들은 당시 유대인이 열 두 부족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중 열 한 번째 아들인 요셉이 결국 나머지 형제들을 전부 거둔다는 것은 열 한 번째 부족을 중심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해석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아브라함의 아들들처럼 이 책 속의 수많은 이야기들도 상징으로 읽어야 할까? 아님 정말 그 자체로 읽어도 되는 걸까?
11. 집안의 역사는 멈추지 않는 톱니바퀴이며 그 축이 필연적으로 서서히 마멸되는 일이 없다면 영원히 계속 회전하는 바퀴라는 본문 속 내용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한숨을 토해내면서 드는 생각 그대로다. 이 부분이 책의 종반부에 다다라 등장하는데, 부엔디아 가문의 백여년의 역사를 달음박치며 읽어나가다 저 대목에 다다르는 순간, 정말로 한숨이 토해지면서 내가 이 결말을 보기 위해 이토록 달려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허무함과 슬픔, 또 기쁨과 성취감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12. 갑자기 남미로 훌쩍 떠나고 싶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남미에 대한 지식은 축구와 더운 날씨, 그리고 몇몇 유명인이 전부였다. 워낙 기초적인 지식이 없던 터라 이 책 한 권 만 놓고 보아도 전후를 비교해 보면 남미에 대한 내 감정은 천지 차이이다. 물론 잠깐 다녀온 여행으로 그 나라의 전부를 알 수야 없겠지만, 여태까지의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 잠깐의 머무름이더라도 일단 그 곳에 발을 디디고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그 곳 사람들의 말소리를 듣고 눈을 마주치고 공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 나라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착각인 줄 알면서도, 그런 착각에 내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다녀오고 나서 관련 나라의 자료를 찾아보면서 내 지식이 확장되면서 여행 당시의 감동이 증폭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손미나가 페루에 다녀와 쓴 여행기가 눈에 띈다. 다음엔 이 책을 읽어볼까? 아니, 작가와 애증의 관계였다는 페루의 작가 요사의 소설도 좋을 것 같다. 좋은 책은 책장을 덮고 난 뒤, 또 다른 책을 보고 싶게 만드는 생각을 들게 하는 책이라는 내 신조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