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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 / 아르센 뤼팽의 어떤 모험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20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1905년에서 1939년까지 30여 년간에 걸쳐서 이루어진 한 작가의 방대한 상상력과 격동하는 시대의 산물을 읽고 정리하는 시간이 이제야 끝이 났다! 모두 23개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아르센 뤼팽 전집의 모든 작품들을 이번에 처음 읽어본 것은 당연히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책 대여점에서, 우연히 들른 북카페에서 아르센 뤼팽의 모험담을 접할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기에 유명한 에피소드들은 당연히 그 내용은 알고 있었다. 다만 나온 출판사와 번역자가 제각각인데다가 어린이 대상의 편집본들은 상당수 내용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 전집은 시간 순서대로 편집되어 있기에 상호 연결된 스토리를 통해 뤼팽이라는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한 명의 번역가가 투철한 직업 정신과 열렬한 팬심, 집요한 열정, 지치지 않는 근면성실함으로 그야말로 역사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아르센 뤼팽 전집 최종편으로 소개하는 이번 두 작품은 여러 면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우선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는 프랑스에서조차 완전한 모습의 단행본으로 출간된 적이 없는, 명실 공히 뤼팽 시리즈 최후의 작품이다. 가니마르와 빅투아르가 오랜만에 재등장하고, 제 1권에서처럼 대서양 횡단 여객선상의 괴도의 모습이 공개되어, 전체 시리즈의 완성된 사이클이 제대로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특히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작가의 새로운 시도가 배어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그래서인지 이전과는 다른 아르센 뤼팽의 파격적인 모습이 군데군데 형상화되어 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형태로 복원된 유일한 단행본을 펼쳐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뤼피니앵으로서 가슴 설레며 읽을 수 있는 문제작임에 틀림없다. 더불어 소개하는 소희극(小喜劇) <아르센 뤼팽의 어떤 모험>은 모리스 르블랑이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작업한 희곡작품으로서, 무대에만 올려졌지 한번도 출간된 적이 없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 또한 특별하다. 이 작품은 희극(喜劇)인 만큼, 뤼팽의 재기발랄한 유머가 전체 극을 압도하며 이끌어간다. 특히 코믹한 뤼팽의 매력에 반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두고두고 탐독할 만큼 애착이 가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번 해설로는 뤼팽 전집을 마감하며 역자로서 느끼는 감회와 함께, 번역작업에 따른 흥미로운 기록들 그리고 그간 도움 받은 참고자료 목록을 제시한다.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

1. 폴 시너

“......가령 나, 맥 앨러미가 말이오, 당장 오늘 밤 살해당할 걸 각오하고 어떤 수상쩍은 일에 끼어든다고 한번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당신이 신문 사회면을 담당하게 되어 있다면, 필경 당신은 지금 우리 사이의 이 대담을 대단히 중요하게 부각시켜야 할 것이오. 거기에 아주 비장한 색채를 가해서 그걸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끔찍한 결말의 전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말이오. 그런 강렬한 느낌이 마지막 줄에 이르도록 점점 가중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자고로 언론인이나 소설가의 기술이란 사건을 어떻게 준비하고 연출하느냐, 특히 처음 도입부를 어떤 식으로 전개해나갈지 등등, 독자들을 어떻게 하면 그대로 몰입하게 만드는가에 있지요. 자, 그렇다면 과연 무슨 수로 몰입하게 하느냐? 그건 나도 말해줄 수 없다오. 전적으로 재능의 비밀에 관한 문제이니까. 만약, 그처럼 언어를 통해 사람의 주의력을 휘어잡는 비결이 당신한테 없다면, 옷이나 속옷을 만들되 결코 소설을 쓴다거나 기사를 작성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내 말 알겠고, 패트리셔 존스턴?”

“이 봉투 안에는 내가 당신을 위해 작성한 문서가 하나 들어 있소. 당신은 앞으로 여섯 달이 지난 후에만 그 내용을 개봉해 볼 수가 있어요. 즉 9월 5일, 당신은 문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뒤, 정확히 거기에 지시된 대로 따라야만 합니다. 지금부터 그 모든 것을 당신만 믿고 맡기는 거예요. 앞으로 이 봉투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든지, 아니면 아주 안전한 장소에다 보관해야만 하오. 아무도 알지 못하게 말이오! 아무도!......”

2. 11인의 회동

자고로 인생에서는 자기 눈을 감아야 무언가를 명확히 볼 수 있는 시기가 있는 법이다. 누구라도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간절히 필요로 하게 되는 고요한 안정을 바다는 어렵지 않게 가져다준다.

3. 오퇴유-롱샹 대공(大公) 오라스 벨몽

“결국 사건을 가만히 살펴보건대, 언뜻 뤼팽의 지휘하에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집단적 움직임이 실은 그를 난관에 빠뜨리려는 수작인 듯하다 이겁니다. 맥 앨러미가 당신한테 ‘도덕적으로 만족스런 건수’ 운운했다고 했죠? 그 사람이나 프레데릭 필즈 같은 청교도가 보기에, 뤼팽 같은 범죄자를 공략해 가진 것을 몽땅 게워내게 함으로써, 결국엔 그의 엄청난 재산으로 자신들의 집단을 강대하게 배불리는 것만큼 도덕적으로 뿌듯하고 가치 있는 사업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감쪽같이 훔치든, 협박을 해서 빼앗든 말입니다...... 내가 보기에, 이 새로운 십자군의 행동강령이라고 할까, 신조라고 할까, 아무튼 일종의 모토라면 바로 ‘아르센 뤼팽에 대항하는 마피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여기서 ‘마피아[Maffia]’는 흔히 일컫는 범죄 조직 ‘마피아[Mafia]’에다 ‘f’를 하나 더 첨가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리스 르블랑은 실제 범죄조직에다 허구적인 요소를 살짝 첨가해, 자신의 소설 속에 무리 없이 끌어들인 셈이다. 실제로 소설 속의 마피아는 실제 범죄조직 마피아와 닮았으면서 또한 다른 모습이다/역주).”

4. 마피아

“조직이 바로 열한 명에 의해 결성되었다는 점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만약 이득의 분배 시점에 맞춰 남은 인원이 모두 합해 네 명이나, 심지어 세 명에 불과하다면 막상 전리품은 그 서너 명만이 나눠 가지면 되는 겁니다. 바로 그 때문에 놈들은 자체적으로 인원수를 하나하나 제거해간 거구요. 이제 조만간 연속적인 숙청이 진행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최종 결산 단계에 가서는 단 한 명만 남게 될 겁니다. 결국 오는 9월 말쯤에는 아예 조직 자체가 해체되겠죠.”

5. 로돌프 공(公)

분명 누군가 집 안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건물 전체에 악령이 씐 듯한 분위기...... 권총을 부여잡고 잠복해 있거나, 되는 대로 흔적을 따라다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에는 아무도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곳이든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바로 그 옆 방으로부터 옷 스치는 소리, 숨소리, 심지어 마루판이 삐걱대는 소리까지 서로 짜맞춘 듯 가세해, 분명 누군가 있긴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러면 또다시 득달같이 달려들어 문을 열어보는 오라스 벨몽...... 하지만 아무도 없기는 마찬가지...... 그림자도 소음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가끔은 부랴부랴 내빼는 발소리가 어렴풋이 꼬리를 남길 때도 있었다. 물론 그러고 나서는 영락없는 적막이 깔렸고 말이다. 오라스 벨몽은 이처럼 악마적인 조작행위에 대해 점점 혼란스러워졌고, 울화통이 치밀었다. 이러는 와중에도 확인을 해보면 언제나 비밀 출입구는 완전 봉쇄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도대체 이 놈들, 무슨 수로 여길 드나들고 있는 걸까? 이 집! 이 아르센 뤼팽의 집을 말이다!

6. 마피아노의 복수

과연 경찰 입장에서 그 모든 사안마다 좌절의 벽에 부닥쳤다는 고백을 순순히 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이번 사건 전체는 물론이고, 그밖에 해결되지 않은 여타 사건들까지 싸잡아, 어차피 괴도(怪盜)로서의 지난 행적상 언제든 범죄행각으로 귀결되는 게 당연한 도당의 우두머리와 어느 음험한 마피아 사이의 알력 탓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설명방법 아니겠는가 말이다! 항상 유명세와 무사불패(無事不敗)의 전력이 공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도발처럼 여겨지는, 저 붙잡히는 법 없는 인물의 후광을 이용할 기막힌 기회라고나 할까? 역시 경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양측간 곧 신속한 반격이 있을 거이며, 사태가 경찰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가 결국 어느 진영에서건 조만간 공권력의 협조를 구해오리라 기대하면서, 경찰은 그 때 본격적으로 싸움에 개입해 모두를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일단 패트리셔와 오라스 벨몽은 적극적인 추적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치안국이 우선 ‘사태관망’을 유지했고, 혐의자들을 거짓 안전 속에 안주하게끔 놔두자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패트리셔와 오라스 벨몽 그리고 유모 할멈 빅투아르와 어린 로돌프는 무려 4주 동안 여기저기 그늘이 드리워진 광대한 메종-루즈의 아름다운 영지에서 평화로운 휴힉을 맛볼 수 있었다. 정원의 중앙 가로수 길은, 양쪽으로 아케이드처럼 다듬어져 궁륭을 이루는 보리수들 아래로, 석조화분 및 대리석 조각상들이 도열한 가운데 뻗어나가, 저 멀리 초록 빛 초원과 꽃이 만발한 과수원을 앞에 두고 센 강에 인접해 있었다.

7.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어이쿠, 암호랑이 소리네! 사람들 얘기가, 며칠 전 이동 동물원에서 암호랑이 한 마리가 빠져나갔다는 거야. 그 놈이 글쎄 이 지방에서 ‘코르네유 성(城)의 처녀림’이라 흔히 부르는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는군. 사람들이 몰이 수색을 하는 와중에 호랑이가 상처를 입은 데다, 그 때문에 아주 사납고 위험해졌다고 했어. 만약 패트리셔가 그 호랑이와 맞닥뜨린다면......”

8. 새로운 전사(戰士)

암호랑이는 진짜 주의 깊게 그 모든 지시사항을 새겨듣는 분위기였다. 뿐만 아니라, 베슈 쪽으로는 한없이 아쉬운 눈길을 보냈는데, 마치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그냥 두고 떠나는 심정인 듯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인이 맡긴 사명을 받드는 것에 우선 자부심을 느끼는지,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할 모양이었다. 녀석은 천천히 한 발 한 발 아이한테로 다가가 그 듬직한 등허리를 내주었다. 아이는 냉큼 그 위로 올라탔고, 호랑이 머리를 한두 차례 가볍게 토닥이고는, 목덜미를 팔로 감아 안으며 이렇게 외쳤다.
“가자!”

9. 금고

“모든 신분증을 차지하고, 그래서 결국 여기 이 금고들 속 수십억 달러의 소유권을 전적으로 거머쥔 아르센 뤼팽이시란 말이다! 맥 앨러미와 필즈가 마피아 단체를 재건하고, 그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나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조직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나는 그들이 꾸미고 있는 이 일 깊숙이 잠입해 들어왔었다. 물론, 내 이익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켜내기 위함이었지. 나는 그들에게 내 거처와 부하들, 은신처들, 지하 아지트들, 비밀통로들, 은닉처들에 관한 모든 정보를 총망라해 안겨주었어. 결국에는, 내 전 재산을 은밀히 모아두고 있던 바로 이 금고들에 너희들 모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10. S.O.S

“이렇게 해서 150여 명의 경찰관들, 40명의 갱단, 그리고 그만한 숫자의 소총과 권총들은 아르센 뤼팽과 그 연인, 그리고 한 마리 사나운 고양이 앞에서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하나같이 엉터리들 아닌가! 그리도 많은 인원이...... 그렇게 막강한 경찰력이 말이야!......”

11. 결혼

돈은 고스란히 되돌려줄 것이오.
실은 이 몸이
노르망디호(號)(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여객선/역주)에
좌석을 좀 예약해야 하거든.
그대한테 빌린 돈은
거기 선상에서 하룻저녁 승객들의 시계와 지갑을 대상으로 멋들어진 마슐 쇼를
선보임으로써 단번에 상환될 것이니 염려 놓으시도록!
A. L.

아르센 뤼팽의 어떤 모험(희곡)

마르셀린: 누, 누구시죠?
뤼팽: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잠시 그대로 있어요...... 아무 생각 말고...... 차차 설명하리다...... (마르셀린, 잔뜩 겁먹은 표정이다.) 오, 이런...... 두려워 말아요......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
마르셀린: 하지만......
뤼팽: 소리 좀 죽여요, 제발...... 우리 소리가 새어나가면 곤란합니다......(다시 문 쪽으로 가 동향을 살피고 돌아온다.) 그럴 만한 중대한 이유가 있어요. 내가 당신을 위해 이곳에 와서, 이렇게 당신 곁에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선 안 됩니다. (마땅한 설명방법을 깨달은 듯, 좀더 강하게 되풀이한다.) 그래요, 당신을 위해서 온 거요! 오늘 저녁, 당신은 발통-트레모르 댁 무도회에 왔었소...... 거기서 당신을 보았지...... 오, 실은 그게 처음은 아니었소...... 항상 당신을 따라다녔다오...... 시장에서도......
마르셀린(놀란 눈으로 듣고 있더니): 시장에는...... 간 적이 없는데......
뤼팽: 아, 내 말은...... 백화점에 말이오. 그리고 극장에서도 봤었지......
마르셀린: 극장엔 안 가는데......
뤼팽(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오, 제발 내 말 좀 끊지 말아주면 고맙겠소...... 10분밖에는 시간이 없단 말이오......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과 단둘이 얘기할 기회를 고대해왔는지 모르오!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외다! 그러다 마침내 오늘 저녁, 내 친구이기도 한 발통-트레모르 댁에서 무도회가 있었지...... 부인이 참 매력적이지...... 그녀 남편과 나는 같은 서클에서 거의 매일......
마르셀린: 그 여자 분은 과부인데......
뤼팽(여전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가 아니래나...... 그녀 남편이 죽은 이후로...... 아니지, 그 전에 나를 소개해주었으면 좋았을걸...... 난 항상 당신만 바라보고 있었거늘...... (여자한테 바싹 다가서며) 오, 아마도 당신은 나를 볼 수가 없었을 거요...... 항상 당신 시선이 닿지 않도록 숨어있다시피 했으니까...... 워낙 수줍은 성격이거든...... 그런 내가 과연 어떻게 당신한테 말이라도 먼저 걸 수가 있었겠소?...... 그러다 마침내 용단을 내린 거요...... 바로 이곳...... 무작정 이곳에 들이닥치기로 말이오...... 한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절도현장에 와 있게 된 겁니다...... 오늘 저녁...... 나는 단지 당신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잠깐 얘기만 나누고는...... 금세 가려고 했던 거요. 그래요, 잠깐 얘기만 나눈 뒤 가려고 했었소...... 그러니 누구와 마주치지 않아야 할 것 아니겠소?...... 지금이라도 난 그냥 이 출구로 나가렵니다...... 지금 당장 말이오...... 지금 당장...... 내 말 알겠죠?......


해설 : 괴도신사의 재림을 자축하며

물론 아르센 뤼팽이라는 인물에게는 그림자도 있고 빛도 있으며, 그 중간의 어스름한 그늘도 있다. 하지만 진짜 아르센 뤼팽의 정수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열정과 다채로운 해학(諧謔)의 무지개빛 파노라마에 있다. 치열하고 대범할지언정 무겁고 어두운 것은 결코 뤼팽적(lupinien)이라고 볼 수 없다. 뤼팽은 어디까지나 벨 에포크 시대의 산물이며, 벨 에포크는 아직 세계대전을 경험해보지 못해 자신만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유럽 어디서나 우글대던 시절이었다. 뤼팽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꽃 피어난 분위기, 그 속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뤼팽 이미지를 외면하고 굳이 닌자들의 고향인 일본식 도둑의 어두운 이미지를 좇아가는 일부 경우들을 대할 때, 솔직히 안타깝다는 마음뿐이었다. 그것을 결코 취향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기에, 취향보다는 불완전한 일본판 중역에 의한 그릇된 ‘습득’의 결과로 보였기에, 명실상부한 아르센 뤼팽 전집 번역작업은 그 잘못된 ‘습득’의 퇴적층을 갈아엎을 ‘발견’의 쟁기질이 되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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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부인의 복수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9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총 20권에 이르는 뤼팽 전집을 읽으면서 청년부터 중년의 뤼팽까지 한 인물의 일대기를 훑다 보면, 분명히 가상의 인물임에도 그가 한 때 프랑스에서 살다가 지금은 남들이 모르는 어느 한적한 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메인 탐정들에게 크리스티는 나름의 결말을 부여한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젊은 연인에서 손자 손녀가 있는 노부부가 되었고, 누군가는 세월의 흐름을 몸으로 겪으며 늙어간다. 작가가 등장 인물의 죽음을 작품에서 손수 그리는 것은 그 누구의 덧붙임이나 상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완벽주의 때문이겠지만, 때로는 작가의 실수로, 오해로, 사정상 인물의 결말을 그려내지 않은 것은 독자에게 그 인물이 이후에 어떻게 죽었을까 상상하는 해방감을 준다. 사실상 뤼팽의 마지막 말년의 거대한 모험담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어떻게 생을 마무리를 했을까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1894년 사랑에서 시작하여 증오로 끝이 난 것처럼 보인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의 악연(惡緣)은 30년이 지난 1924년 섬뜩한 미스터리를 동반하면서 다시 증오로 부활하여 결국에는 사랑으로 마감하게 된다. 뿌리가 다른 사건들이 서로 절묘하게 교직(交織)되는 가운데, 그 연결 고리를 열쇠로 한 수수께끼가 이번에도 독자의 두뇌를 적잖이 괴롭힌다. 20세였던 라울 당드레지가 이제는 50줄을 훌쩍 넘은 라울 다베르니로 등장하는 만큼, 미숙한 격정보다는 중후한 능란함이 뤼팽의 이미지로 전면에 부각된다. 실제 저자의 의도대로 마지막 모험담이 되지는 못했지만(마지막 모험담은 4년 후에 발표된다), 말년에 이른 영웅의 내면이 유감 없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의 수많은 다른 이름들, 그 다채로운 정체성들을 일괄해 살펴보는 기회를 마련한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서 뤼팽의 파란만장한 전력을 다시 한 번 반추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아르센 뤼팽의 서문
나는 이 자리를 빌려 내 연대기 작가에 의해서 나와 관련한 것으로 기술된 일련의 모험담이 정확한 사실에 부합함을 확인하며, 그 노고에 고마움을 표함과 동시에, 그것이 기술된 방식에 관해서는 다소 아쉬움을 표명하는 바이다.

자고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대중의 구미에 맞게 다듬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은 법이다. 나와 관련한 사건의 경우에는 아마도 가장 괜찮은 방법을 고르려다보니, 나를 항상 돋보이게 표현하고, 언제나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연대기 작가는 내가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상황에 얽매이고, 적들에게 당하거나, 귀하신 경찰 나리들에게 매몰찬 대접을 받았떤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소홀히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설사 실제와 완전히 배치되지는 않더라고, 그것들을 임의로 조절하고, 배열하며, 때로는 발전, 과장함으로써, 나로 하여금 이 겸허한 심성을 더 이상 편히 가질 수 없도록 몰아온 것은 사실이다.

이제 나는 그런 식의 이야기에는 동조할 수가 없다.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사랑해야만 하리......' 나 역시 나의 한계를 알고 있으며, 그것들을 느낀다는 점을 오히려 뿌듯해하는 사람이다. 대신 모든 초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이며 과도하고 불균형하 것에는 끔찍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로 충분한 것이다.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나는 괴이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내 약점 중의 하나가 바로 우스꽝스런 꼴로 보이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제1부 두번째 사건
1. 싸움을 좇아서

철책문 양쪽으로 두 개의 별채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중 오른쪽에 정원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뤼팽은 지체 없이 초인종을 울렸고, 즉시 건물 안으로 안내되었다. 첫인상은 대만족이었다. 일부는 다소 낡고 거의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이나 다름없었지만, 전체적으로 공간이 잘 배분되어 있고, 언제든 잘만 보수하면 기막힌 별장이 될 것 같았다.

뤼팽은 속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바로 이거야...... 나한테 필요한 게 이거라구! 그러지 않아도 파리 근교 어디쯤 적당히 몸 붙일 곳을 마련해서 주말이면 종종 찾아가 쉴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가 말이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게다가 이 어인 횡재인가! 정말 기막힌 우연의 일치 아니겠는가! 일단 운명이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거처를 눈에 띄게 해줌과 동시에, 지갑 한 번 풀지 않고 그것을 통째로 삼킬 수 있게 되다니! 저 모로코 가죽 서류 가방도 결국 이 집을 얻는 데에 보탬을 주기 위해 애당초 눈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어쩜 이리도 일이 척척 맞아떨어지는고!


2. 학살

엘리자벳은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자기 방으로 올라갔고, 개폐식 책상을 열어 늘 하던 습관 그대로 일기장에다가 몇 줄을 끄적였다. 결과적으로는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들이 그 안에 담겨진 꼴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오늘 제롬은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긴 듯, 멍한 표정이었다. 나는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물었고, 그는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대답했다. 내가 계속 다그치자, 똑같은 대답을 하긴 했는데, 조금 더 애매 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엘리자벳.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소. 우린 이제 곧 결혼할 건데 말이오. 무려 1년 전부터 가꿔온 꿈이 조금 있으면 실현될 텐데 말이야. 다만......"

"다만 뭐죠?"

"가끔 미래가 불안하게 생각된다오. 당신도 아다시피 나는 부자도 아니고, 나이가 서른이 가까워오도록 이렇다 할 직장도 없소."

 

"어머나! 하지만 우리의 보물은 진짜로 있답니다, 제롬...... 내가 언젠가 애기한 거 생각 안 나요?...... 우리 부모님 옛 친구 분 중에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 한 분 계신데, 오랜 세월 보지도 못하고 연락도 두절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릴 무척이나 아껴주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 가정교사인 아멜리가 내게 글쎄 이러는 거에요. '마드모아젤 엘리자벳, 아씨는 엄청난 부자가 될 것입니다. 아씨의 오랜 친척 되시는 조르주 뒤그리발께서 자신의 전 재산을 아씨에게 물려주실 게 분명해요. 엘리자벳 아씨에게 말입니다. 지금 병환 중에 있거든요......' 내 말 알겠어요, 제롬?......"


3. 라울이 개입하다

"다시 찾아내려면 어떻게 생긴 건지나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회색 천으로 된 자그마한 자루입니다."

"안에 뭐가 들었죠?"

가브렐 씨는 순간 버럭 화를 냈다.

"그건 오직 내 문제입니다!...... 내 사적인 문제예요...... 돈이든 서류든 잘 갈무리해두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는 여부는 오로지 내 소관 아닙니까?"

"그러니까, 결국 은행권 지폐가 있었던 겁니까?"

가브렐 씨는 점점 더 안달을 내며 내뱉었다.

"아뇨!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왜 거기 은행권 지폐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아니에요...... 그냥 편지가 있었습니다...... 별 쓸모도 없는 서류들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결국......"

"결국 내가 회색의 자그마한 헝겊자루를 찾고 있는 만큼, 사법당국으로서는 그것만 찾아다주면 된다 이겁니다!"


4. 구소 형사의 공세(攻勢)

구소는 퉁명스레 말을 받았다.

"나는 그저 진실의 모든 요소들을 취합하고자 힘쓸 뿐이오."

"이거 보세요, 형사 나리. 자고로 그런 모든 요소들도 어디까지나 예감으로 느껴지는 어떤 진실의 통념에 맞춰서 취합하는 법입니다."

"내게 진실이 어떠하리라는 생각 따위는 없소이다."

"천만에요, 그렇지 않을걸요. 지금 경우만 봐도 당신이 심문해온 과정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당신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사건, 즉 은행권 다발의 도난과 두 건의 야간습격에 주안점을 둔다는 것, 둘째, 간밤에 펠리시앵이 밖으로 나가서 오랑주리 정원에 도달하기 위해 남의 보트를 이용했고, 결국 지폐가 담긴 회색 헝겊자루를 훔쳐냈으며, 새벽 한 시경에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좌우간 어둠 속에 매복했다가 잠시 후 이미 희생된 여자의 약혼자인 무슈 제롬 엘마를 용케 미행해 공격했다는 것이지요. 아울러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펠리시앵이 또다른 부상자인 시몽 로리앙마저 건드린 장본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도사리고 있다 이겁니다!"


5. 포스틴 코르티나와 시몽 로리앙

"내가요? 당신은 나를 알지도 못하잖습니까?"

"천만에! 난 당신을 알아요."

"나를 안다구요, 당신이 라울 다베르니를 알아요?"

"무슨 소리! 당신은 아르센 뤼팽이야!"

라울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당돌한 직격탄이 날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의 진짜 이름이 이처럼 모욕적으로 내뱉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도대체 이 여자가 그것을 무슨 수로 알았단 말인가?......

 

라울은 그런 의문점들에 관해 여자가 아무것도 속 시원히 밝힐 입장이 못 될 것이며, 설사 그럴 수 있어도 단호히 거부할 것임을 대번에 눈치챘다. 저 고집스럽게 생긴 이마와 눈빛만 봐도 그 정도는 단박에 감이 왔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저토록 완강하게 버티는 가운데에도, 여자는 다소 야성적인 매력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기품 어린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본능인지 습관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미모를 항상 적절하게 내세우며 써먹을 줄 아는 여자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비단 블라우스가 날씬한 몸의 윤곽과 균형 잡힌 어깨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6. 조각상

알바르는 즉시 조각상을 공개했고, 바로 그 순간 라울은 엄청난 탄식을 내뱉었다. 그것은 조각가가 느끼기에는 단순히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인한 감탄사에 불과했으나, 실은 그보다 더 놀랍고 아연실색한 정신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된 비명 소리에 가까웠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 조각상은 포스틴 코르티나를 형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여자 얼굴의 형태와 표정, 부드러운 옷감 속으로 짐작할 수 있는 몸의 윤곽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듯했다.


7. 장지-바르

젠틀맨은 부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졸고 있었다. 후텁지근하고 무거운 밤 공기는 두터운 구름 아래로 점점 짙게 쌓여가고 있었다. 정박해 있는 바지선의 불빛이 수면에 반사되어 조용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맞은 편 기슭에는 검게 늘어선 건물들과 트로카데로 궁전의 위용, 교각의 아치들이 건너다 보였다. 제방에는 행인 한 명 눈에 띄지 않았다.

토마 부키는 슬그머니 젠틀맨의 저고리와 조끼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호주머니를 더듬었다. 급기야 안전핀으로 채워진(그것을 열기란 얼마나 까다로운가!) 조끼 안주머니에 이르러서야 은행권 지폐들로 이루어진 두둑한 다발의 촉감이 손가락 끝에 전해왔다. 그는 지체 없이 그것을 빼냈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안전핀 끝에 손이 깊숙하게 찔렸고, 그 바람에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박에 젠틀맨의 선잠이 흐트러졌고, 미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지하지 못하면서도 사내는 화들짝 몸을 도사렸다. 부키는 더 이상 개의치 않고 노골적으로 힘을 모았고, 상대는 빠져나가려는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졌다.

토마가 예상한 것보다 만만치 않은 저항이었다. 상대는 아예 손톱을 세워 살갗을 파고들면서까지 매달렸다. 뿐만 아니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요란을 떠는 것이었다.

순간 부키는 더럭 겁이 났다. 온힘을 다해 상대를 뿌리치는가 하면, 매달리는 몸뚱어리를 바닥에다 질질 끌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힘이 부쳤는지 상대가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이미 부키의 흥분은 스스로 멈출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선 상태였다. 아까보다 정신도 말짱하겠다, 그 내용이 정확히 뭐였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해서는 안 될 속내 얘기를 털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공연히 부아가 났다. 완전히 서로 떨어진 두 남자는 강물이 흐르는 바로 옆에서, 서로 싸우다 만 사람들처럼 마주보며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부키는 순간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부키는 냅다 젠틀맨의 몸을 밀쳐 강물로 떨어뜨렸다. 그는 거의 무의식 중에 저지르고 만 자신의 행동에 기겁을 하며 잠시 동안 멍하니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저지른 것일까? 단순히 젠틀맨의 돈을 날치기하려고? 아니면 5000 프랑을 주기로 한 신사와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려고?

저만치 아래를 내려다보니 젠틀맨은 아직 수면을 들락날락하면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침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부키는 몸을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젠틀맨은 약 1분가량 수중에 그대로 잠긴 채 물살 흐르는 방향으로 헤엄을 쳐가고 있었다. 더 이상은 부키의 시선이 미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나서야 그는 수면 위로 올라와 제방을 따라 능란한 수영실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가 땅에 닿은 것은 그르넬 다리 조금 못 미쳐서였다.

근처에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차에 올라 옷을 갈아입은 다음, 곧장 베지네로 향했다.

새벽 세 시, 라울은 클레르-로지의 아늑한 침대에 몸을 파묻고 잠을 청했다.

 

8. 토마 부키

"아이를 맡기고 농장을 떠난 자동차가 마을을 10킬로미터쯤 벗어난 지점에서 고장이 났고, 이웃 마을에 차를 멈춘 여인은 예비 부품이 공급될 때까지 당분간 기다려야 했다는군. 한데 수리공장에 있던 정비공이 자동차 쿠션 및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는 거야.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여인의 이름이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라나......"

순간 다베르니는 펄쩍 뛰었다.

 

"자네는 그 편지를 직접 봤나?"

"그건 아니지만, 바르텔르미가 읽어줬지."

"내용은 기억하겠구만?......"

"내용까지는 몰라도......"

"그럼?......" 

"이름 하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어떤 이름인데?"

"아이 아버지의 이름."

라울은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다그쳤다.

"당장 말해봐!"

"라울......"

그는 곧바로 상대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부여잡고는 우악스레 내질렀다.

"거짓말 마!"

 

"바르텔르미, 그 놈 완전히 사기꾼이구만. 난 그 자를 알지도 못해. 그 역시 나를 알리 없고 말이야."

"아니, 알고 있던데......"

"무슨 소리야?"

"당신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던걸!"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건가?"

"당신의 옛 부하들 중 한 명이었다고 했어."

"바르텔르미가?"

"그때는 그 이름이 아니었지."

"무슨 이름이었는데?"

"오귀스트 델르롱! 뤼팽이 치안국장으로 있을 당시 총리실 수석경비원 자리에 앉혀놓았던 사람이지!(「813의 비밀」참조)"


9. 대장(大將)

토마 부키는 잔뜩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마침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랬다.

"그건 너무 위험해! 나까지 공범이라고 몰아붙일 텐데! 생각해보라구. 오랑주리 별장이 어떻다느니, 보트를 타고 있었다느니 하다보면, 다들 내가 이 사건에 대해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 아니겠나?"

"공범이긴 하되 수동적인 차원에 머물렀다고 보겠지. 기껏해야 여섯 달 살다 나오면 돼. 무엇보다 자네한테 중요한 건, 자네 형제와 제롬 엘마가 습격을 당했던 시각에 자네는 파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는 거야."


10. "나,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이 명하노니..."

거기에는 흡사 어떤 도당의 우두머리나 폭군이 수하들에게나 내렸을 법한 강력한 명령조의 글귀가 한 줄, 아니 두 줄 적혀 있었다. 필체는 고고하면서도, 굵고 묵직하게 꾹꾹 눌러쓴 티가 역력했다. 아뿔사, 처음 보는 순간, 라울은 할 말을 잃었다...... 예전에 라울 스스로 악마 같은 존재로 불렀던 여자의 필체를 어찌 알아보지 못할쏜가! 늘 가공(可恐)할 지시를 아랫사람에게 내릴 때, 언제나 사용하던 그 여자의 거만하고 혹독한 어투를 어찌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세 번씩이나 라울은 다음과 같은 끔직한 글귀들을 읽고 또 읽었다.

 

아이를 도둑으로, 가능하면 살인자로 만들라.

그래서 나중에 제 아비와 맞서게 하라.

 

검을 휘두른 것처럼 두 겹의 선으로 끄트머리에 한껏 멋을 부린 서명 또한 여전했다.

 

요컨대, 사태는 괜찮은 방향으로 전환한 듯싶었고, 그 와중에 몇 가지 문제도 명확하게 밝혀진 셈이었다. 이를테면 이 사건에서 포스틴의 역할이라는 것도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그녀는 옛날에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과 지극히 미미한 관계에 머문 적이 있고, 우연한 기회에 시몽 로리앙과 사랑에 빠져 프랑스로 오게 된 이후, 자기도 모르게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일 뿐이었다. 물론 바르텔르미와 그 아들이 꾸민 음모와는 지극히 먼 관련만 있을 따름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사랑에 빠진 일개 아녀자였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을 위한 복수심 외에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이러는 게 전혀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칼리오스트로가(家)의 여인이 죽었다는 사실은 라울에게 더없이 다행한 소식이었고, 옛날 그녀가 서명한 저 끔찍한 명령이 실제로 펠리시앵에게 적용되었음을 믿게 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라울을 상대로 해서는 오로지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직접적인 지도 없이는 성공이 불가능한 작전이기에, 그것이 과연 바르텔르미라든가 그의 변변치 않은 두 아들 같은 2류급 인력에 의해 제대로 추진되었으리라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설사 억지로 강행되었다고 해도 결과는 어처구니없이 부정적일 게 뻔하다. 실제로 현재 라울 다베르니는, 어쩌면 자기 자식일지도 모를 한 청년을 느닷없이 앞에 두고도 바르텔르미와 시몽 로리앙이 둘 다 죽어버린 탓에, 숨겨진 진실에 도달할 방법이 전무한 상태인 것이다.

제2부 첫번째 사건
1. 결혼 소식

'오늘에 와서는 적어도 나한테는 모든 게 단순, 명확해졌어. 두 개의 사건이 서로 완전히 분리가 된 거라구. 그러니까, 두 번째 사건(바르텔르미의 협박 건)은 바르텔르미 그 자신과 시몽의 죽음으로, 또 토마 부키의 체포와 포스틴의 고백으로 깨끗하게 걸러진 셈이지. 그런가 하면 첫번째 사건(가브렐 자매 건인데, 사실 나로서는 간접적인 흥미밖에는 없는 사건이지)은 아직 그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은 채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어. 남는 문제는 펠리시앵인데, 아직 그 정체가 모호한 이 문제야말로 이상 두 사건에 공히 걸쳐서 늘어져 있는 느낌이란 말씀이야......'


2. 수상한 방문객

"그 뒤로 친척이라는 사내는 얼굴 내민 적 없구요?"

"전혀 없었지요. 단, 그 뒤로 죽을 때까지 마담 알렉상드르 가르벨은 딸들을 데리고 바닷가 카부르(영불해협 연안인 칼바도스 지방에 위치한 해수욕장. 벨 에포크 시대의 명소/역주)에서 매년 여름을 나긴 했었지요. 한데 그 카부르라는 곳이 말입니다. 마담 알렉상드르의 친척인 무슈 조르주 뒤그리발이 현재 사는 캉에서 불과 2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 좀 이상하죠. 그것 가지고 또 우리끼리 부엌에서는, 틀림없이 카부르의 해변에서 둘이 몇 차례는 만났을 것이다 하며 얘기가 돌았었죠. 물론 두 어린 딸은 모르게 말입니다. 그러다가 오랑주리의 여자 요리사가 한번은 이러는 겁니다. '두고 봐요, 그 남자가 자기 전 재산을 마드모아젤 엘리자벳한테 양도할 테니까...... 보나 안 보나 뻔한 사실이라우. 이미 그 사람과 마담 알렉상드르 사이에 합의가 된 모양이에요. 아, 마드모아젤 엘리자벳은 지참금 하나는 두둑하게 벌어놓은 셈이지!'......"


3. 납치

"그럼 뭐야 이거? 운동선수 아냐? 아주 사내 대장부 아닌가 말이야! 오로지 자기 하는 일에만 노심초사하던 건축가의 껍질을 한 꺼풀 벗기니까, 근육과 운동신경과 의지와 용기, 대범함을 두루 갖춘, 그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사나이가 튀어나오지 않았는가 말이야! 하여튼 그 젊은 치구, 제법 멋쟁이인 것만은 확실해! 주주츠와 복싱, 그리고 사바트(「초록 눈동자의 아가씨」p.131 참조/역주)만 조금 개인교습 해주면 아주 괜찮은 인물 하나 만들어낼 수 있겠어! 이보게 뤼팽...... 자, 어떤가? 그가 자네 아들이라 해도 생각만큼은 나쁘지 않겠지? 아무튼 두고 볼 일이라구, 뤼팽 이 친구야!"


4. 푸른 보석함

'아이를 도둑으로 만들라......'

분명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의도는 그대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펠리시앵은 도둑질을 했고, 그것도 아비가 보는 앞에서 저질렀다. 따지고 보면 이 얼마나 끔찍한 복수란 말인가!

 

그는 깔끔하게 자물쇠를 해체했다. 그러면서 문득, 다른 사람에 의해 도둑질이 행해졌을 경우 속을 뒤흔드는 울분 어린 혐오감을 자기 스스로 남의 서랍을 뒤질 때만큼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아이러니컬한 사실이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도는 것이었다.


5. 결혼이 가능할까?

"괴롭지가 않단 말이더냐? 잠시 후면 벌어질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어? 아니, 어떻게!...... 네가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데, 그걸 두고만 바라본단 말이냐? 도대체 그럼 왜 여자를 납치한 거지?"


6. 증오

"그럼 이걸 봐! 이걸 똑똑히 보라구! 이보다 더 다정하고 사랑스런 여자는 없었어...... 그녀는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그녀를 죽였어! 오, 이 가증스런 인간......"


7. 퇴장할 사람

롤랑드의 목소리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앞의 남자에 대한 경멸과 증오로 온몸이 후들거리면서, 그녀는 온 기력을 다하여 위협과 모욕을 가하고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바짝 치켜들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뭐가 어째?"

"그래서 원하는 게 뭐냐 이거야? 나를 비난하는 거야 알겠는데, 정식으로 고발할 거냐구?"

"그렇다! 이미 편지를 써놓았어."

"부쳤나?"


8. 프리네 상(像)

라울은 1년이 넘도록 여행을 다녔다. 그러는 가운데 두 남녀와 긴밀한 서신 교환을 유지했다. 펠리시앵은 자신이 설계한 도면들을 보내왔고, 그에 대해 자주 조언을 구했으며, 그럴수록 점점 신뢰하는 마음을 편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라울은 그 이상의 가까운 관계는 둘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녀석은 틀림없이 클라리스 데티그와 나 사이에 난 아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를 많이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내 안에 아비로서의 마음가짐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그나저나, 포스틴, 당신 맞죠?......"

"나라뇨? 누가요?"

"맞아! 당신은 제롬이 진범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고, 롤랑드가 그를 쫓아낼 거라는 것도 예상했었어. 결국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 것이 두려워 도망치기 전에, 먼저 그가 자기 집에 들르리라는 것 또한 당신은 훤히 내다보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요?"

"당신은 그의 집 문 앞에서 숨은 채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가 문을 열 때를 기다려 냅다 총을 발사했을 테고...... 그렇게 된 거죠? 아무리 생각해도 제롬은 자살을 감행할 사람이 못 되거든......"

여자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멀리 희미한 수평선을 가리켰다.

"저 너머가 우리 고향이에요...... 코르시카 말이에요...... 어떤 날에는 이곳에서도 어렴풋이 보인답니다...... 저곳에서는 남한테 해침을 당한 사람이 유일하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이란 복수를 이루었을 때뿐이지요......"

"그래서 당신은 지금 행복하오, 포스틴?"
"아주 행복해요. 과거와 그 깨끗한 결말 때문에 더없이 행복하답니다. 그리고 현재 때문에도 행복해요. 어느 부유한 이탈리아 귀족이 나한테 마음을 바친 데다, 제노바에 장밋빛 대리석 궁전까지 선사한 걸요."

"그럼 결혼을 했단 말인가?"

"그럼요."

"그를 사랑하오?"

"그는 일흔 다섯 살이에요. 그나저나 라울 당신은 어때요? 행복한가요?"

 

둘은 평지에서 평지로 이어지는 산길을 걸어서 올라갔다. 가끔씩 알프스의 눈부신 설경과 깎아지른 듯한 산악 풍경이 나무들 틈으로 펼쳐졌다가는 사라졌다.

마침내 대형 정자(亭子)의 열주(列柱)가 이중으로 에워싼 맨 꼭대기 평지까지 다다랐을 대였다.

정중앙에 그야말로 여신의 찬란한 자태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듯한 프리네 조각상이 눈부신 모습으로 서 있는 게 아닌가!

포스틴은 자기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오! 나야!...... 나라구!......"

 

그로부터 10여주 동안을 포스틴은 자신의 이름을 딴 그 별장에서 머물렀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5

굳이 그의 본명을 들라면 아버지의 성(姓)을 딴 이름, 즉 아르센 라울 뤼팽(Arsene Raoul Lupin)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름을 그대로 내세우며 이 천하의 풍운아가 활개를 치는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그나마 자기 본면을 별로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름을 변형하는 경우라면, 라울을 뺀 아르센 뤼팽 그 자체와, 또 아르센을 빼고 모계 쪽 성(姓)을 이어받은 라울 당드레지(Raoul d'Andresy)가 전부이다. 나머지 여러 다른 이름들은 전혀 본명을 추측할 수 없는 글자 그래도 가명(假名)이거나, 보통 관찰력으로는 본명과의 연관성을 눈치채기 어려운 철자 바꾸기(anagramme) 유희의 결과물들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순수한 창작을 통해서 작명(作名)한 것에서부터, 생사에 관계없이 남의 이름을 빌려 쓰는 작태도 허다하다. 한 작품에 하나의 이름만을 사용하는 경우를 비롯해, 여러 다른 이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까지, 모두 40여 종을 훌쩍 상회하는 이름들을 각기 최초로 등장한 순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

 

*라울(Raoul)

두말할 것 없이 아르센 뤼팽이 6세 때 처음 도둑질을 하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이름이다. '왕비의 목걸이'에서 간접적으로 환기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가 하면 무려 26년이 지난 뒤의 얘기를 다룬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에서도 이 라울이라는 이름이 단독으로 등장한다.

 

*아르센 뤼팽(Arsene Lupin)

일단 이 이름을 최초로 내걸고서 본격적인 범죄의 길로 뛰어든 사건이 저 유명한 '마담 앵베르의 금고' 사건이라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뤼팽의 나이 대략 18세 때의 사건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대단할 것 없는, 단순하고 어딘지 상스러운 이름일 뿐이었다. 벨 에포크 시절, '라울'이 보통 귀족풍의 품위 넘치는 이름으로 통했던 반면,2) '아르센'이라는 이름은 다소 거칠고 저속한 느낌을 주는 이름이었다.

 

*로스타(Rostat)

19세의 뤼팽이 마법사 딕슨 곁에서 괴도수업을 받을 때 차용한 가명.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에서 재판장의 입을 통해서 환기된다.

 

*라울 당드레지(Raoul d'Andresy)

단연 「칼리오스트로 백작부인」의 주인공이다. 20세의 팔팔한 나이로 진정한 괴도로 입문하면서 선택한 이름인 만큼, 뤼팽에게는 매우 각별한 이름이라 하겠다. 후에는 아예 뤼팽이라는 이름도 감추고 라울 당드레지 자작으로 행세한다.

 

*베르나르 당드레지(Bernard d'Andresy)

27세인 뤼팽은 이 이름으로 대서양 횡단 여객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간다. 신분은 어엿한 백작. 마케도니아에서 사망한 친척의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결국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에서 가니마르에 의해서 정체가 폭로된다.

 

*데지레 보드뤼(Desire Baudru)

28세 때, 일명 '아르센 뤼팽 탈출하다'로 세간에 알려진 희대의 탈옥사건을 연출하기 위해서 바로 이 이름을 가진 부랑자의 모든 것을 취한다. 뤼팽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변장 솜씨가 제일 처음 제 값을 발휘했을 때의 가명이기도 하다.

 

*기욤 베를라(Guillaume Berlat)

마찬가지로 28세 때 '수상한 여행객'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취한 이름. 뜻밖의 사건의 희생자가 될 뻔했지만, 기민한 대처로 난관을 극복한다. 최초로 직접 경찰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이 등장한다.

 

*플로리아니(Floriani)

기사 작위를 가졌으며, 이탈리아가 고향이고 아마추어 탐정 노릇을 하는 뤼팽의 또다른 이름이다. 드뢰-수비즈 백작부부를 상대로, 20여 년 전에 자신의 손으로 저지른 '왕비의 목걸이' 도난사건의 비밀을 대범하게 공개한다.

 

*장 다스프리(Jean Daspry), 살바토르(Salvator)

뤼팽이 그의 모든 모험단을 세상에 소개할 연대기 작가 모리스 르블랑과 처음 알게 될 때, 바로 이런 이름이었다. 계기가 된 사건은 '세븐 하트' 사건이다. 그 사건 속에서 뤼팽은 또한 「에코 드 프랑스」지의 통신원인 살바토르라는 인물로도 둔갑한다.

 

*그리모당(Grimaudan)

'흑진주' 사건에서 흥신소를 운영하는 전직 형사로 둔갑해 이 이름을 사용한다.

 

*오라스 밸몽(Horace Velmont)

이 이름을 표방하는 뤼팽의 모습이 직접 등장해 모험담을 펼치는 최초의 사건은 '셜록 홈스, 한 발 늦다'이며, 이후 29세 때인 '결혼반지'에서도 아슬아슬하고 멋진 역할로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52세 무렵의 사건인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에서까지 이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뤼팽이 차용한 이름 중 '라울(Raul)'과 더불어 최장수 가명(假名)으로 간주해도 될 듯싶다. 그만큼 처지도 유명 화가에서 사교계 바람둥이, 의젓한 후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미셸 보몽(Michel Beaumont), 무슈 니콜(Nicole), 베른(Vernes) 박사

모두 다 저 격렬했던 「수정마개」사건 때 뤼팽이 차용한 이름들이다. 직업도 수집가, 가정교사, 의사로 제각각이며, 연령이나 행색도 다양하다. 뤼팽 시리즈 전체에서도 워낙 치열한 것으로 유명한 모험담이었던 만큼, 다양한 분신(分身)들로 화할 필요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자크 당브와즈(Jacques d'Emboise)

29세 대의 뤼팽이 이 이름을 가진 실존인물의 모든 정보를 주도면밀하게 빼내, 아예 그 인물 자체로 둔갑함으로써 사르조-방돔가(家)의 여식과 기상천외한 결혼을 성사시킨다. '아르센 뤼팽의 결혼'이라는 단편으로 전해지는 이 해괴한 모험담은 뤼팽의 두번째 결혼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슈 들랑글(Delangle)

니콜라 뒤그리발의 돈다발을 소매치기하기 위해서 치안국 형사 행세를 하면서 잠깐 차용한 이름이다. 이 일로 그는 '지옥의 함정'으로 유명한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른다.

 

*장 도브뢰이(Jean Daubreuil)

'붉은 실크 스카프' 사건 해결을 위한 아지트를 확보하느라 도용한 이름.

 

*폴 도브뢰이(Paul Daubreuil)

'배회하는 죽음' 사건에서 치안국과의 비밀 업무관계를 둘러대며 의문의 소굴을 파고들기 위해서 차용한 이름.


*자니오(Janniot)

30세인 뤼팽이 '그림자 표시'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둔갑한 퇴역 육군 대령.


*막심 베르몽(Maxime Bermond), 펠릭스 다비(Felix Davey), 데스트로(Destro)

셋 다 '금발의 귀부인' 사건을 두고 셜록 홈스와 대결하기 위해서 차용한 이름들. 막심 베르몽의 경우는 젊은 사업가이자 건축가로, 펠릭스 다비의 경우는 세련되고 우아한 기품이 묻어나는 젊은이로 행세하지만, 결국 둘 다 셜록 홈스에게 정체를 간파당하고 만다. 그런가 하면 데스트로는 호텔 지배인이 레스토랑에 있던 한 인물을 지칭하는 장면에서 딱 한 번 스쳐 지나는 이름으로, 이 역시 아르센 뤼팽의 천의 얼굴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수정마개」에서와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모험담일수록 한 사건 안에서 동시다발적인 둔갑술을 부린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는 「기암성」과 「813의 비밀」 등, 뤼팽 최고 경지의 모험들에서 여실히 증명될 것이다.


*라울 드 리메지(Raoul de Limezy), 소비누(Sauvinoux)

라울 드 리메지는 뤼팽이 31세 때 경험한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에서 차용한 이름. 탐험가 남작으로 천재적인 활약을 펼친다. 소비누는 원래 치안국 형사로, 뤼팽이 그 상관인 마레스칼을 농락하기 위해 둔갑한 인물.


*짐 바르네트(Jim Barnett), 로랭(Laureins) 남작, 데느리스(d'Enneris) 남작, 실베스트르(Sylvestre)

짐 바르네트는 32세의 뤼팽이 본격적인 사설탐정으로 나서면서 취한 정체성으로, 본연의 뤼팽 모습에 버금갈 만큼 생생히 살아 숨쉬는 개성 만점의 인물형이다. 「바르네트 탐정사무소」를 통해서 모두 아홉 건의 사건('에메랄드 반지' 포함)을 해결한다. 로랭 남작은 그중 '흰 장갑...... 하얀 각반......'에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잠깐 취한 이름. 또한 '에메랄드 반지'에서는 바쁜 친구 바르네트를 대신한다면서 데느리스 남작이라는 사교계 바람둥이로 나카나 올가 공작부인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하인 실베스트르로 감쪽같이 둔갑해 베슈 형사의 넋을 빼놓는 장면도 압권이다.

 

*돈 루이스 페레나(Don Luis Perenna)

훗날 무척이나 유명하게 될 이 에스파냐귀족의 이름은 사실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에서 일개 시골 성채경매 장면을 통해 제일 처음 선을 보인다. 그러나 이후, 이 이국적인 이름은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벌어질 굵직굵직한 모험들, 즉 「813의 비밀」,「황금삼각형」,「서른 개의 관」, 그리고 「호랑이 이빨」 등에서 종횡무진 맹활약을 보임으로써,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제하고는 가장 화려한 이름이 될 운명이다. 루이스 페레나(Luis Perenna) 라는 이름은 이후에 등장할 폴 세르닌(Paul Sernine), 폴 시너(Paule Sinner)와 함께 아르센 뤼팽(Arsene Lupin)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철자 바꾸기를 통해서 만들어진 가명이다.

 

*장 데느리스(Jean d'Enneris)

33세의 뤼팽이 1년간의 모터보트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와 「불가사의한 저택」 사건을 해결하면서 취한 이름. 일명 마도로스-신사, 혹은 탐정-신사라는 새로운 닉네임을 동반한 자작(子爵)으로 활약한다.

 

*자크 드 샤르므라스(Jacques de Charmerace)

원래는 1905년 뤼팽이 목숨을 구해주려다 실패한 어느 공작의 이름이었다. 4막 짜리 연극 「아르센 뤼팽」에 뤼팽의 또다른 정체성으로 본격 등장한 이후, 유명한 '왕관사건'과 결부되어 여러 차례 언급되는 이름이다.

 

*스파르미엔토(Sparmiento) 대령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에서 34세인 뤼팽이 이 이름을 가진 브라질 갑부로 분해, 기가 막힌 트릭을 선보인다.

 

*안프레디(Anfredi) 남작, 마시방(Massiban), 루이 발메라스(Louis valmeras), 에티엔 드 보드렉스(Etienne de Vaudreix)

모두가 35세의 뤼팽이 겪는 일생일대의 대모험 「기암성」에서 천재소년 이지도르 보트를레를 현혹시키기 위해서 사용한 이름들. 눈 깜짝할 새에 이들 네 존재들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뤼팽의 현란한 둔갑술은 이즈음 해서는 거의 신기(神技)의 경지에 올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보드를레는 매번 속아넘어갔다가 간신히 빠져나오곤 한다. 아마도 「기암성」은 이보다 4년 뒤의 이야기인 「813의 비밀」과 더불어 뤼팽의 화려한 둔갑술이 가장 빛을 발한 경우라고 할 것이다.

 

*라울 다브낙(Raoul d'Avenac)

36세인 뤼팽이 「바리바」의 엄청난 미스터리를 파헤칠 때 사용한 이름. 라울 다브낙 자작의 이면에 아르센 뤼팽이 숨어 있음을 베슈 형사만은 훤히 알고 있다.

 

*세르주 레닌(Serge Renine)

37세인 뤼팽이 자신의 친구 레닌 공작 이야기라며 모리스 르블랑에게 들려준 여덟 가지 섬세한 에피소드는, 불가능을 쫓는 사나이의 기개가 여성을 추구하는 기사도적인 애정관에 절묘하게 융합한 예를 보여준다.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이 에피소드들의 주인공 레닌 공작의 모습에서, 연대기 작가 르블랑은 자연스러게 뤼팽의 모습을 감지한다.

 

*르노르망(Lenorman), 폴 세르닌(Paul Sernine), 앙드레 보니(Andre Beauny)

르노르망 치안국장과 러시아 귀족 세르닌 공작은 마치 빛과 어둠 혹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구도처럼, 정확히 극과 극으로 양분된 페르소나의 모습을 환기한다고 할 수 있다. 뤼팽의 나이 38세에서 시작되어 39세까지 진행된 대모험 「813의 비밀」에서, 적어도 어느 한쪽의 정체가 드러나 둘 간의 균형이 깨지기 전까지, 뤼팽은 르노르망 치안국장과 세르닌 공작의 1인 2역을, 즉 법의 수호자와 그것의 유린자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앙드레 보니는 세르닌 공작이 케셀바흐 부인을 수월하게 만나기 위해서 잠깐 사용한 이름이다.

 

*제라덱(Geradec) 박사

불혹의 나이를 갓 넘겨 이제 막 41세가 된 뤼팽이 「황금삼각형」의 악한(惡漢) 에사레스 베를 퇴치하기 위해, 일종의 극약처방으로 분한 역할이다. 그가 상대에게 자살을 부추기는 장면은 이 사건의 명장면으로 기억될 만하다.

 

*세즈낙스(Segenax)

43세의 뤼팽은 보르스키라는 광인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전설적인 현인(賢人) 세즈낙스의 몰골을 그대로 흉내내면서 한바탕 연극판을 벌인다. 「서른 개의 관」에서 세즈낙스로 분한 뤼팽의 명연기는 거의 보는 자의 혼을 빼놓을 정도이다.

 

*무슈 르콕(Lecocq)

45세 때 치른 「호랑이 이빨」사건에서 리볼리가(街)의 작은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잠시 빈 이름.

 

*빅토르 오탱(Victor Hautin), 마르코스 아비스토(Marcos Avisto)

49세에 이른 뤼팽은 전직 검사의 아들이자 건전하고 유능한 치안국 형사 지망자인 빅토르 오탱이 사망하자 그 정체성을 몽땅 사들여, 오히려 도둑맞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희대의 기상천외한 모험담에 뛰어든다. 다른 자의 이름을 빌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뤼팽의 묘한 모습은 결국 우리 모두의 '정체성 찾기'라는 힘겨운 여정을 보여주는 드라마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페루 출신 관광객 마르코스 아비스토는 그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뤼팽의 또다른 배역이다.

 

*라울 다베르니(Raoul d'Averny)

「백작부인의 복수」에서 나이 50에 이른 뤼팽이 분한 역할. 아버지의 이름 아르센 뤼팽이 라울 다베르니라는 가명 뒤에 가려진 것처럼, 장 당드레지라는 아들의 정체 역시 펠리시앵 샤를이라는 또다른 가면 뒤로 영영 가려진 채 끝이 나는 데에서 일말의 비애(悲哀) 어린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폴 시너(Paule Sinner)

뤼팽 시리즈 최후의 작품인 「아르센 뤼팽의 수십억 달러」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52세에 이른 아르센 뤼팽(Arsene Lupin)의 철자 바꾸기를 통한 가명이다.

 

1) 사실 뤼팽 시리즈의 전체 모험담을 시기순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작품이 집필된 순서와 그 내용의 연대기적 순서가 워낙 뒤죽박죽이거니와, 작품 속에 엄밀한 단서가 주어진 것도 아니어서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 여러 편차를 보일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일례로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으로 본 제라르 귀아슈(Gerard Guasch)의 견해(「수정마개」해설 참조)와 장르 문학 전문가이자 뤼팽 연구가이기도 한 앙드레-프랑수아 뤼오(Andre-Francois Ruaud)의 견해(「아르센 뤼팽」1996, DLM)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단 여기에서는 편의상 좀더 상세한 구분을 해 보이고 있는 후자의 견해에 따르기로 한다.

2) 「오페라의 유령(Le Fantome de I'Opera)」의 라울 드 샤니(Raoul de Chagny) 자작을 떠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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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반 형사 빅토르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8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을 봤을 때는 선명한 초록색 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힘들 때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빅토르가 뤼팽일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도 왠지 모르게 끝까지 속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정신이 사나울 때는 활극이 제일이다. 요즘 들어 이 책을 읽을 때가 그리워진다.

 

「강력반 형사 빅토르」는 뤼팽 시리즈 장편들 중에서는 드물게, 역사나 전설 등에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구하지 않고도, 현재적 사건과 기발한 플롯만으로 긴박감 넘치는 재미를 한껏 누릴 수 있는 수작이다. 각 장(章)이 그보다 하위 장들로 다시 세분되면서 숨가쁘게 빠른 장면 전환을 가능케 하는 기법은 「813의 비밀」에서 이미 한 차례 선보인 것으로, 좌충우돌 전개되는 이 재기발랄한 작품의 스토리 라인에 적절하게 부합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압권은 그 엄청난 반전에 있으며, 작품을 처음 대하는 독자는 물론, 그 결말을 알고 있는 뤼피니앵이라도 빈틈 없이 맞물리는 추리적 구조와 곳곳에 숨은 재치 넘치는 복선을 짚어가는 재미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거론해보기로 한다.

 

1.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강력반 소속 빅토르가 일요일 오후 시네-발타자르에 들어선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기껏 마음 먹은 미행이 그만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오후 네 시 경, 이 북적대는 클리시 대로에 내동댕이쳐진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장터 축제의 혼잡을 피해 그는 어느 카페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석간신문을 눈으로 훑다가, 이런 짤막한 기사에 시선이 멈추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아르센 뤼팽이 요즘 들어 부쩍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며, 심지어 지난 수요일에는 동부에 위치한 어느 도시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다. 그에 따라 파리에서도 일군의 형사대가 급파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또 한 차례 그가 경찰의 손아귀를 따돌리는 일이 발생할 듯싶다.

 

"빌어먹을!"

빅토르는 모든 악당을 개인적인 원수처럼 여기고, 그들에 대해서는 인정 사정 없는 거친 말투를 얼마든지 사용하는 엄한 경찰관의 태도로 중얼거렸다.

 


2. 회색 챙 모자

'월요일, 파리에서 출발한 여섯 시 기차의 객실 안에서 마담 샤생은 레스코 영감 가까이 앉아 있다. 이혼 소손 중에 있는 기혼녀로서, 보통은 어머니와 함께 있지 않는 한, 애인과 함부로 속삭이는 일은 되도록 삼가는 편이다. 월요일, 그녀는 무의식 중에 노란 봉투를 슬쩍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 날만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뭔가 맡길 물건이 있다는 얘기를 애인한테 귀띔해주었고, 필경 짬을 내서 돌돌 말아 끈으로 묶은 문제의 봉투를 은근 슬쩍 애인의 품속에 밀어 넣었을 것이다. 바로 그 동작을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도트리 남작이 간파했을 터. 이미 신문은 빠뜨리지 않고 읽는 타입이라...... 노란 봉투가 눈에 띌 수밖에 없었으니...... 과연 우연이라고만 넘길 일이었겠는가?...... 이윽고 기차는 생-클루에 도착했고, 마담 샤생은 자리를 뜬다. 레스코 영감은 그대로 앉아 가르슈까지 간다. 막심 도트리도 같은 역에서 내려 영감을 미행한다. 결국 그 숙소까지 알아두고, 화요일과 수요일, "라 비코크" 주면을 어슬렁대다가 마침내 목요일 결단을 내린다......'

빅토르는 카페에서 나와 문제의 아파트 건물을 향해 걸어가면서 계속 생각을 전개해갔다.

'...... 이상 그려진 그림에 대한 딱 한 가지 반론 가능성이란?...... 그 모든 일들이 너무도 손쉽게 척척 맞아떨어지고, 너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는 점! 한제, 진실이란 그렇게 즉흥적이지 않고, 그토록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주어지지도 않는 법이거든......'


3. 남작의 정부

빅토르는 여자가 말하는 투로 봐서 사전에 미리 정해진 대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진실이란 때로는 거짓말과 똑같은 어조로 말해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4. 체포

바실레예프 공주라? 빅토르와 라르모나가 그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정보들을 일사천리 조사해내는 데에는 단 하루면 족했다. 즉 그런 성(姓)을 가진 러시아 출신의 유구한 혈통으로 현재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가문은 단 하나뿐이며, 부모형제 모두 체카(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창설된 비밀 경찰 조직/역주)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한 뒤, 알렉산드라 바실레예프 혼자만 구사일생 목숨을 건져 국경을 넘어왔다는 사실. 그의 가문은 아직도 유럽 내에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안하고 부유하게 살아가고 있음. 개성 강하고 다소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의 그녀는 러시아 망명인 사회의 몇몇 귀부인들과 친목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들로부터 여전히 알렉산드라 공주로 불리고 있는 실정. 나이는 이제 서른.


5. 바실레예프 공주

결국 그 자는 바실레예프 공주와 같은 때에 같은 층을 택해 이 호텔에 묵은 셈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337호로 가기 위해 복도 왼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고, 알렉산드라와 합류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꺾어든 것은 아닐까?

빅토르는 여자의 방을 지나치면서 가능한 한 발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숙소에 다다라서는 문을 살짝 열어둔 채로 줄기차게 귀르 ㄹ기울였다.

그런 식의 긴장된 대기 상태가 계속되었고, 몹시 불편한 기분 속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했다. 바로 저 영국인 비미쉬의 친구가 아르센 뤼팽이며, 그가 곧 알렉산드라 공주의 애인일 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추진해온 지난(至難)한 수사활동이 드디어 진일보하게 된 셈이었다. 한편, 그 남자의 젊고 근사한 풍모를 빅토르는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점이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6. 국방공채

"하지만 자동차가 중간 어디에 정차한 일도 없다는데?"

"그러니까,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에는 딱 두 가지가 있을 뿐이죠. 우선 운전기사와 타협을 해서 그에게 꾸러미를 맡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아니라면, 그냥 몰래 자동차 안에 꾸러미를 놔둔다......"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왜요?"

"그러다 아무나 차를 탄 사람이 가져가면 어쩌려고! 세상에 그런 엄청난 거금을 자동차 좌석에 방치해두는 사람은 없지요!"

"그야 그렇죠. 단, 차 안 어디에든 숨겨둘 수는 있겠지요."


7. 공범 만들기

"지금 숙박부를 조회 중이네. 혼자 머물고 있는 영국인 이름을 골라내고 있어. 덩달아 다른 모든 외국인도 조사 대상이라구."

"그건 또 왜 그런가?"

"어차피 뤼팽의 부하 이름을 모르니까, 그게 확실히 영국인일지도 확신할 수 없다는 거지."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지?"

"그들을 하나하나 모조리 아래로 불러 내리든지, 아니면 일일이 객실로 찾아다니며 신분증을 조사한다는 거야. 자네도 틀림없이 조사대상에 들어갈 걸세."

8. 캉브리주 호텔의 대접전

빅토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긴, 알렉산드라 바실레예프가 이곳을 뜬다거나, 그것을 아무도 막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게다가, 빅토르의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그 여자가 굳기 죽치고 앉아 기다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부아가 나는 건 사실이었다......


9. 적진 깊숙이

"그는 계단을 올라갔고, 열쇠를 사용해 문을 따고 들어갔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집, 결단코 자기 집으로 들어간 겁니다. 다른 어디도 아닌 자기 집 말이죠. 비록 시선은 마구 흔들리고, 머리도 지끈거렸지만, 어떻게 자기 아파트, 자기 집 현관을 못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10. A.L.B. 문건

"여자는 막심 도트리가 도둑질뿐만 아니라 살인혐의로도 몰리고 있다는 사실에 여간 당황해하는 게 아니었죠. 한데, 빅토르 형사가 그때 길길이 화를 내는 걸로 인식한 여자의 반응은, 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호들갑을 떠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애인이 채권 다발을 훔쳐낸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으나, 레스코 영감을 죽였으리라고는 단 한순간도 상상조차 못했거든요. 여자는 남자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과 더불어 사법당국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여자의 내심을 도트리는 여지없이 간파해버린 것이죠. 결국 그는 여자가 언젠가는 자신을 고발해버릴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 떄문에 여자를 다시 만나 얘기를 해보려고 한 거죠. 물론 그에겐 아파트 열쇠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는 여자의 의중을 떠보았고, 여자는 위협 섞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도트리도 덜컥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냥 저대로 내버려두어야 하는 건가? 국방공채를 손에 넣어 이제 목표를 거의 거머쥐었는데...... 더군다나 그를 위해 이미 사람까지 죽인 마당에 말입니다...... 과연 마지막 순간에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할 것인지...... 마침내 도트리 남작은 또다시 살인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아껴온 여인이지만, 배신할 것이 너무도 뻔하다보니 갑작스런 증오심이 휘몰아쳤다고나 할까요? 결국 여자를 죽이고 맙니다. 1분 후, 그는 다시 아래로 내려와 얌전히 차에 올라타 있습니다. 교통경찰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지요. 빅토르 형사 역시 전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11. 불안

빅토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어느새 그는 왼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막 달려들려는 브레삭을 향해 브라우닝 권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소동부리지 마, 뤼팽! 여차하면 개죽음당하는 수가 있어!"

버럭 소리친 뒤, 그는 여전히 수화기에 대고 이랬다.

"......알겠습니다, 국장님! 늦어도 45분 안에 이리로 오겠다구요. 물론 내 목소리는 알아보시겠죠? 틀림없겠죠? 그렇죠, 마르코스 아비스토...... 그러니까......결국, 그게......"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우선 브레삭을 향해 씽긋 미소를, 다음 여자를 향해 꾸벅 인사를 보낸 뒤, 저만치 방구석을 향해 권총을 냅다 던지며 이렇게 외쳤다.

"다름 아닌 강력반 형사 빅토르라 이겁니다!"


12. 뤼팽의 승리

수수께끼가 해결된 것은 그 다음날 아바스 통신사(AFP의 전신으로 근대적 의미에서 세계 최초의 통신사. 1835년 설립/역주)가 전 세계로 타전한 아르센 뤼팽의 저 유명한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문제의 전언 내용이 사람들을 온통 환희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 내용을 한 줄 빠뜨리지 않고 여기 게재한다.

 

바로잡음

이제는 대중에게 강력반 소속 빅토르 형사의 역할이 끝났음을 알려야 할 것 같다. 지난 얼마 동안 국방공채 도난사건과 관련해서, 그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아르센 뤼팽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이제는 더 이상 사법당국과 일반 대중을 무지 속에 방치해선 안 되겠기에 하는 말인데, 그것은 또한 아르센 뤼팽의 빛나는 성품과 존경할 만한 이름을 가로채고 행세해온 앙투안 브레삭 선생의 뻔뻔스런 가면을 벗겨내는 역할이기도 했다. 강력반 형사 빅토르는 더없이 열정적으로 자신의 역할에 뛰어듦으로 해서, 그 같은 작태에 대해 얼마나 거부감을 가지고 증오하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보여준 셈이다.

빅토르의 활약에 힘입어 이제 가짜 뤼팽은 철창 신세를 지고 있으며, 강력반 형사 빅토르라는 인물은 개운하게 임무를 완수한 뒤 그 종적을 감춘 상태이다.

다만, 경찰로서의 깨끗한 명예에 단 한 점 오명의 씨앗도 허용치 않겠다는 투철한 생각과 더불어 한 개인으로서의 양심마저 경탄할 만한 수준까지 정화시키기를 바라는 심성에서, 그는 마침내 아홉 장의 국방공채를 이대로 자신이 맡아 가지고 있기보다는 나에게 의뢰해 파리 시 경찰청에 전달해주기를 정식으로 요청해온 바이다.

한편, 1000만 프랑을 어떻게 찾아냈느냐의 문제는, 의자에 얌전히 앉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이상하리만치 어려운 난제를 척척 풀어대는 한 사나이의 기발한 천재성에 대해 조금이나마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그 세세한 전모를 공개해야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무슈 세리포스가 소지하고 있던 서류들 중 하나에는 앙투안 브레삭의 추적에 단서가 되는 'A. L. B. 문건'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이것을 브레삭은 '알바니아 문건'으로 해석했고 말이다.

 

그 즉시 빅토르는 앙투안 브레삭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으며, A. L. B. 라는 세 글자는 다름 아닌 앨범(album)의 처음 세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간파해버린 것이다. 무슈 세리포스의 전 재산 중 절반에 해당하는 1000만 프랑은 알바니아 문건에 들어있는 게 전혀 아니고, 단순히 아동용 우표 앨범 안에 그만한 가격을 호가하는 희귀 우표 컬렉션 형태로 둔갑해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 수완이라면 강력반 형사 빅토르에게 1000만 프랑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데 전혀 모자람이 없지 않을까? 만약 내게 묻는다면 당연히 오케이다.

 

한마디만 더, 내가 보기에, 강력반 형사 빅토르가 그토록 열정적으로 이번 싸움에 매달린 진짜 이유는, 어디까지나 최초에 영화관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한 여인, 저 파렴치한 사기꾼 앙투안 브레삭이 아르센 뤼팽이라는 이름을 달고 실컷 우롱했던 그 가련한 여인을 향한 기사도적인 흠모의 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여인에게도 귀한 혈통의 마나님에 어울리는 생활과 고귀하고 정숙한 여인으로서의 완벽한 위상을 되돌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본다. 내가 그 여인을 자유롭게 놔주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부디 그녀가 현재 은둔해 있는 안전한 피난처에서나마 강력반 형사 빅토르와 페루인 마르코스 아비스토의 이 작별인사와 더불어, 나 아르센 뤼팽의 심심한 인사 또한 받아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아르센 뤼팽

 

이어지는 목요일 오후 두 시, 알렉산드라 바실레예프 공주는 은신해 있던 여자친구의 아파트를 벗어나 튈르리 공원을 한참 동안 산책했고, 그대로 리볼리가(街)로 접어들었다.

복장은 무척 단순한 편이었으나, 항상 그렇듯 이국적이면서도 경이로운 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시선들을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고, 얼굴을 가리는 일도 없었다. 하긴 이제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 중에 뭔가 의심의 눈초리로 볼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인 비미쉬도 앙투안 브레삭도 그녀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오후 세 시, 여자는 생-자크 소광장으로 들어섰다.
낡은 탑의 그늘 속 벤치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처음에 약간 주저했다. 저 남자가 그 사람이라구? 페루인(人) 마르코스 아비스토와도, 강력반 형사 빅토르와도 거의 닮은 점이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코스 아비스토보다 얼마나 젊고 우아하며, 빅토르 형사보다는 또 얼마나 섬세하고 유연하면서 품위가 넘치는가 말이다! 저 젊은 모습, 저 다정다감하고 유혹적인 분위기는 이전 그 어느 떄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어쨌든 여자는 다가가보기로 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역시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분명 다른 사람이었지만, 틀림없이 동일인물이었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남자 곁에 앉았다.

둘은 한동안 침묵 속에서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상태가 두 남녀를 때로는 하나로 묶었다가 때로는 흩어놓는 가운데, 두 사람 누구도 그 감미로운 느낌을 끊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해설 :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4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문학적 가치

요컨대, 스토리의 발단이 되는 발상만 던져놓고 억지로 작품을 끌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발상이 마무리되는 스토리의 대단원까지 정확한 청사진을 마련한 다음에야 집필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맨 위에 인용한 저자 자신의 표현대로, 상상력을 날것 그대로 던져두지 않고, '그것으로 하나의 작품, 즉 문학작품을' 형상화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의미이며, '단순히 꿈꾸는 것'을 넘어 그것에 '적절한 형태를 부여하고, 전체적인 구조에 신경을 쓰는', 이른바 장인적인 작업태도와 소명의식을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조적 배려 덕분에, 처음에는 엉뚱하게만 보이는 발상과 어지럽게 진행하는 스토리 라인으로 다소 황당한 느낌에 휘둘리다가도, 작품의 말미로 치달을수록 하나하나 지리멸렬해 보이던 요소들이 절묘하게 맞물려 정돈되는 과정에 혀를 내두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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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7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살구빛의 책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시작부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화려한 비극이 일어나고, 거기에 대해서 대체 어떻게 결론을 낼 것인지 예측하기도 어렵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사건의 해결에 다다르게 되면 아! 하고 감탄하게 된다. 다른 그 어떤 이야기보다 결말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은 프롤로그에 암시된 바처럼 (알고 보면) 극히 단순한 사건을 소재로 하면서도, 그 전개 방식과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에서 매우 참신하고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제목 자체가 수수께끼인 이 당돌한 작품은 한마디로 '착각과 오해가 한바탕 소동을 부리는 요지경 극(劇)'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아르센 뤼팽의 익살과 여유, 밉살맞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재치가 다른 어느 에피소드보다 더 톡톡 튀는 작품이다. 사건의 해결을, 전혀 상상치 못할 매듭에서 풀어내는 모리스 르블랑의 짓궂은 버릇(?)은 이제 이 능청맞은 작가가 아예 작정하고 독자의 뒤통수 때리기에 재미 붙인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대담하고 한편으로는 허탈하기조차 하다. 모험의 치열함과 격렬함에서는 다소 미진하다는 평이 있기도 하지만, 늘 우리 무릎을 치게 만드는 뤼팽만의 매력에 민감한 뤼피니앵들에게는 결코 빠트릴 수 없는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번 해설에서는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아르센 뤼팽 시리즈가 가지는 특징과 의미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1. 프롤로그: 기이한 상처

단 이쯤에서 한 가지 기억해둘 것은 당시 그 상황은 완벽히 안전한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장면이 계속 진행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어질 어떠한 이유도 찾아볼 수 없는 상화잉었다. 정말이지 느닷없이, 덜컥 발생한 사건이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느낀 바는 제각각일지 몰라도, 분명 목격한 것을 확신하는 내용만큼은 하나같이 똑같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한마디로 전혀 예측할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던 사건이 마치 폭탄이 터지듯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는 사실!(실제로 나중 목격자들의 진술에는 그와 같은 과격한 표현이 공통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일단 살인이 일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물론 그것에 사용된 흉기라든가 총알 혹은 살인 용의자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이 일어났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다. 모두 합해 마흔두 명에 이르는 참석자들 중 다섯 명이 어디선가 번쩍 하는 섬광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그 다섯 명 모두 섬광이 비친 장소나 방향에 대해서는 엇갈린 증언을 하고 있었다. 반면 나머지 서른일곱 명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세 명은 뭔가 둔탁한 폭발음을 들었다고 증언한 데 반해, 나머지 서른아홉 명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2. 금발의 클라라

꺽다리 폴의 정부(情婦)이자, '금발의 클라라'로 알려진 여인이 15시 47분 리지외발(發) 368호 열차에서 목격되었음. 고르주레 형사반장을 즉시 급파할 것. 열차가 도착하기 전, 구인영장은 따로 인편을 통해 생-라자르 역에서 그에게 전달될 것임.

여자의 인상착의는 다음과 같음.

웨이브 진 금발을 양 갈래로 늘어뜨렸고, 눈동자는 푸른색. 20에서 25세 정도. 예쁜 얼굴에 옷차림은 수수한 편. 전체적으로 우아한 자태임.

 
3. 중이층에 사는 신사

그가 거하는 장소는 관리인 숙소 바로 위이자, 후작의 개인비서가 사용하는 방들 바로 밑이었다. 처음 어두컴컴한 현관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거실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고, 오른쪽으로 돌면 방 하나, 왼쪽으로는 목욕탕이 구비되어 있었다.


4. 2층에 사는 남자
후작은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머리 속으로는 프랑스 한복판의 온천도시에서 그토록 흥겹게 시작되었던 감미로운 연애사건이 몽실몽실 떠오르는 것이었다. 당시 테레즈는 가정교사의 자격으로 어떤 영국인 가족을 수행하고 있었다. 장 데를르몽에게 그때 일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난 일종의 변덕스런 장난질에 불과했다. 워낙 무사태평하고 이기적인 성격이었던 젊은 귀족은 자신한테 몸과 마음을 다해 순정을 바쳐오는 여자를 진지한 관심으로 대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따라서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라고 해봐야 고작 몇 시간의 희미한 추억거리가 전부였다. 그런데 테레즈에게는 그 일이 보다 심각하고, 평생을 떠나지 않을 만큼 대단한 사건이었단 말인가? 아무 말도 없이 갑작스레 단행된 이별이 정녕 고통의 씨앗을 남긴 거란 말인가? 하나의 떨어져나온 생명, 바로 이 아이를 말이다......


5. 불법침입

"다시 말해 후작 주변을 염탐하고 있었단 얘기로군요?...... 당신과 같은 이유로 말입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한번은 내 앞에서 후작에 대한 치명적인 원한에 사무쳐 있다는 얘길 한 적이 있긴 해요."

"이유가 뭐랍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그 자의 부하들에 대해서도 아는 게 있나요?"

"아라비안이라는 사람만 조금......"

"그 자는 어딜 가면 볼 수 있습니까?"

"몰라요. 혹시 몽마르트르의 술집에 가면...... 언젠가 들릴 듯 말 듯 그 술집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거든요......"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나요?"

"네...... 에크레비스라고......"

남자는 그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날은 여자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6. 최초의 격돌

"만약 당신이 나라는 사람을 알게 된다면, 내 곁에 있는 한 위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될 겁니다. 그냥 가만히 있어요. 손에 온기(溫氣)가 감돌고 나면, 당신이 얼마나 안전하고 용기를 가져도 되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부여잡은 채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몇 분이 지난 뒤, 다소 안정을 되찾은 여자가 말했다.

"이제 가요."

남자는 관리인 숙소 문을 두드려 대문을 열게 했고, 여자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7. 성채 경매

"네 이놈, 당장 나오지 못할까!"

순간 권총을 쥐고 있던 손이 쓱 사라졌다. 고르주레가 기둥 모퉁이를 돌아들었을 때는 그뒤로 이쪽 아치에서 저쪽 아치까지 쭈글쭈글 드리워진 송악의 장막밖에는 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형사반장은 분명 있던 적이 연기처럼 사라졌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추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가. 그런데 이번에는 그 장막처럼 드리워진 송악으로부터 권총 대신 무쇠 같은 주먹을 내세운 팔 한 짝이 덜컥 튀어나와 달려드는 고르주레의 턱주가리를 정통으로 명중시키는 게 아닌가!


8. 이상한 협력자

"...... 지금 이 얘기를 하는 건, 그 문제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고, 내 관심을 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죽임을 당하고 보석을 도난당했습니다. 즉각 그에 대한 조사가 단행되었죠. 다른 모든 목격자와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도 취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당신은 죽은 여자와 당신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또 무슨 이유로 이 성채를 매입한 걸까요? 별도로 무슨 조사라도 해본 겁니까? 그 당시 신문에서 내가 읽은 사실들말고 더 아는 건 없나요? 볼니크의 비극과 당신이 도둑맞은 유산 사이에 모종의 관계라도 있는 겁니까? 두 개의 사건이 같은 근원과 같은 전개양상 그리고 같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벌어지기라도 한 겁니까? 이상이 내가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정확한 답을 필요로 하는 의문점들입니다."


9. 꺽다리 폴을 쫓아서

아무튼 라울은 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자기도 깜짝 놀랄 정도로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가 머리 속에 떠올리는 여자의 모습은 볼니크 성에서 라울 자신이 자꾸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던 불안해보이고 애매모호한 분위기의 앙토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떤 숙명의 법칙에 이끌리듯, 후작의 서재에 잠입해 떳떳치 못한 어둠의 작업에 여념이 없던 음험하고 번민에 찬 앙토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의 뇌리에 각인된 여자의 모습은 처음 보았을 때, 즉 중이층 비밀장치의 화면에 떠오른 귀엽고도 매혹적인 앙토닌이었다. 얼떨결에 잘못 찾아든 방문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 앙토닌은 삶의 행복과 희망에 들떠 있는, 천진하면서 아리따운 아가씨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매섭고 혹독한 운명 속에서 덧없이 스쳐지나간 순간이었지만, 정말이지 감미롭고도 상큼한 흥분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순간이기도 했다.

"다만-사실 이건 요즘 들어 라울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출몰해온 난감한 문제였는데-다만 그 몇몇 수수께끼 같은 행동들의 이유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어떤 비밀스런 계획이 있기에 후작의 신임을 얻으려고 그 앞에서 알짱댄 것일까? 혹시 그가 자기 아버지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닐까?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는 걸까? 아니면 재산을 노리는 것일까?"


10. 에크레비스 술집

에크레비스 술집은 다분히 수상쩍은 인간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낙오한 그림쟁이나 기자들, 실직했으되 딱히 일자리를 원치도 않는 근로자들, 얄궂은 복장을 한 창백한 젊은이들, 깃털 장식 모자와 화려한 빛깔의 블라우스를 걸친 여자들로 언제나 북적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얌전히 술만 마시는 분위기였다. 그것말고 만약 좀더 다채롭고 특별한 분위기를 원한다면,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바깥의 막다를 골목을 택해 들어가, 뒷방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맨 먼저, 푹 꺼진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어느 뚱뚱보 남자, 즉 이 술집의 주인이 손님 하나하나 들어서는 모습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곳으로 말이다.


11. 카지노 블루

여자는 한동안 지극히 멋진 자태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올이 매우 섬세한 황금빛 천이 머리와 얼굴 일부를 살짝 덮고 있었다. 물론 그 틈으로는 경탄할 만한 가냘픈 금발 타래가 살며시 비어져 나와 있었고......

"맙소사!"

갑자기 라울이 악다문 어금니 사이로 내뱉었다.

"뭔데 그러나?"

어느새 그의 곁에 와 있던 고르주레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12. 두 개의 미소

"그렇지...... 두 여자가 서로 싸우고 있어...... 그러다 이따금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철저히 따돌리고 말이야...... 결코 같은 미소를 공유할 수 없는 두 여자의 존재라...... 왜냐하면 당신이 가진 두 가지 이미지를 구별해주는 게 바로 그 서로 다른 미소이거든...... 하나가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면서 순박하고 어린 티가 나는 미소라면...... 다른 하나는 보다 음울하면서 어딘지 환멸을 담은 미소라고나 할까......"


13. 함정

마드모아젤, 주인님께서 부상당한 채 층계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중이층 서재에 누워 계십니다. 상태는 좋아지고 있습니다만, 주인님께서 마드모아젤을 보고 싶어하시는군요. 그럼 이만.

쿠르빌

 

쿠르빌의 필채를 잘 아는 하인마저도 혹할 만큼 잘 위조된 글씨들이었다. 그만하면 더 이상 클라라를 만류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긴, 설사 만류한다 해도 어찌 그게 가능하겠는가?


14. 대결

"참 바보 같은 질문이로군. 데를르몽 후작이야 거기 초대된 손님들 중 하나였을 뿐 아닌가?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게 전부이지."

"그건 경찰에서 내세운 얘기이고, 현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지."

"그래, 그 현실이 어떤 건데?"

"엘리자벳은 다른 아닌 데를르몽 후작에 의해 살해되고 도난당했어."


15. 살인

그제서야 쿠르빌은 호주머니 속에서 신문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을 낚아 채 읽자마자 라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신문 제 1면 1단 기사가 굵은 활자로 다음과 같이 게재되어 있었다.

 

꺽다리 폴 살해되다! 그의 옛 정부였던 금발의 클라라는 범행현장에서 형사반장 고르주레의 손에 체포되었다. 경찰은 그녀를 살인 용의자로 확신하고 있으며, 아울러 카지노 블루에서 그녀를 납치했던 해로운 애인 라울 씨도 이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이 공범은 종적을 감춘 상태이다.


16. 조조트

워낙 감당하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인 고르주레로서는, 만약 마담 고르주레가 붉은 머리채 풍성한 육감적이고 매혹적인 여인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남편에 대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지지 못했다면, 그만큼 오래 가지 못했을 연애결혼이었다. 탁월한 살림꾼이면서도 다소 가벼운 데가 있고, 남자들 앞에서 애교도 심한 편인 아내는 고르주레 씨의 체면에는 별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동네 댄스홀을 자주 드나드는 편이었다. 그러면서 이 문제 자체에 대한 남편의 잔소리 시도는 일절 용납치 않는 것이었다. 대신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남편이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적절히 받아줄 줄 아는 여자였다.


17. 불안

나중 얘기지만, 그러던 어느 한순간, 지극히 단순하고 자연스런 현실에 맞닥뜨리고, 그때까지의 수수께끼가 깔끔한 해결책을 동반한 채 뒤통수를 때리자, 라울은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을 오히려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다. 라울 스스로 생각해봐도, 실재하는 무엇이라면 적어도 삶이 매일같이 제공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상처럼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 만져보고 감지할 수 있는 인간적인 진실 파악 능력만 제대로 활용해도, 어떤 사태이든 상황에 휩쓸리다가 마지못해 납득하기 훨씬 전부터 대번에 그 정곡을 꿰뚫을 수 있어야 옳았다. 자고로, 사방 백일하에 그 전모가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도록 문제가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18. 두 개의 미소에 얽힌 사연

라울의 삶-즉 아르센 뤼팽의 인생-은 분명 모든 논리적인 현실과는 상반되는 놀랍고도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인 사태들, 도무지 불가사의한 현상들과 충격적인 상황들로 북적대는, 그런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훗날 아르센 뤼팽이 고백한 바에 따르면-그 날 금발의 클라라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눈앞에 나타났던 일이야말로 그의 가장 깊은 내면부터 뒤흔들어버린 최고의 충격적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19. 고르주레, 광분하다

고르주레 부부간의 대화는 마치 폭풍우를 연상시켰다. 다분히 허구적인 인물에 대해서 남편이 공연한 질투심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조조트는 세련되고 예의 바르며 행동거지가 무척이나 섬세한, 그야말로 재치만점의 매혹적인 신사가 가질 수 있는 온갖 장점들을 끌어다가 심술궂게도 그 인물을 잔뜩 치장했다.


20. 승리냐? 패배냐?

"아하! 그렇게 말해주다니 정말 황공하구만그래! 정말로 당신 그 여자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좀 거부할 수 없는 존재여야 말이지! 앙토닌도 날 좋아하고, 올가도 날 좋아하고, 조조트도 날 좋아하고, 쿠르빌도 날 좋아하고, 고르주레도 날 좋아하고......"


21. 라울의 맹활약

"......너 혹시 「몽테-크리스토 백작」읽어보았니? 그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 등장했는지 기억나? 세상 곳곳에서 그를 알았던 몇몇 사람들이 함께 점심을 들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 수개월 전 정확히 그 날 정오에 나타날 거라 약속을 한 건데, 여행 길이 불확실한 데도 불구하고 주인은 반드시 정확한 시각에 그가 나타날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더랬지. 마침내 마지막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주인이 이렇게 말했단다. '여러분, 몽테-크리스토 백작님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지금 그와 같은 믿음과 불안감을 함께 간직하면서 기다리는 듯하구나......"


22. 페르세우스 성좌(星座)의 범행
"......이 돌멩이는 분명 사건 수사 시 경찰의 눈에도 띄었을 것입니다만, 아무도 특별하게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총알이라든가,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뭔가를 찾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내 눈에는 이 돌이 여기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강력한 현길의 증거로 보였답니다. 물론 이것말고 다른 증거들도 있지요. 우선 사건이 일어난 시기 말입니다. 8월 13일. 지구가 문제의 유성군 아래를 지나가는 시기죠. 솔직히 말해서 이 8월 13일이라는 날짜가 내 정신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격이었습니다...... 그 다음 또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는데, 이건 그저 논리적인 추론을 돕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과학적인 증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제 나는 이 돌멩이를 비시에 소재한 한 화학 및 생물학 실험실로 가져갔습니다. 거기서, 새카맣게 탄 인간의 신체조직 일부가 옻칠로 표면 처리된 상태에 있는 걸 보게 되었죠...... 네, 불붙은 화구(火球)에 맞아 새카맣게 타버린 생체로부터 피부와 모발이 포함된 상태 그대로 떨어져나간 조직 덩어리였습니다. 한데 그 돌조각에 아예 찰싹 달라붙어서 세월이 지나도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하여튼 그 적출물(摘出物)은 화학자의 손에 의해 잘 보관되어서 공식적인 연구논문의 소재가 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무슈 데를르몽이나 고르주레 선생이 원하기만 하면 아마 언제든 제출 받아 검토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3

-시대상의 반영, 아르센 뤼팽 시리즈

아르센 뤼팽 시리즈는 단순한 추리 모험소설이라는 장르를 뛰어넘어 당대의 사회상과 시대적 조류를 충실히 담아낸 풍속소설로서도 뜻깊게 읽혀질 수 있다. 실제 작품이 쓰여진 연대로 보자면 1900년대에서 1910년, 1920년, 1930년대로 널리 분포되어 있지만, 웬일인지 모리스 르블랑은 아르센 뤼팽의 모험담 대부분을 1900년대에서 제1차세계대전 전까지의 소위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불리는 '좋은 시절'에 할애하고 있다.

 

이처럼 뤼팽의 모험담이 애써 위치하고자 한 시대는 20세기로 들어선 파리라는 대도시가 그 이전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였으며, 이를 향수 어린 마음으로 추억하는 후대 사람들이 애정을 담아 붙인 별칭이 바로 벨 에포크인 것이다. 코르셋을 과감히 떨쳐버린 여성들의 맵시 있는 패션과 러시아 발레단의 전위적인 무용, 큐비즘으로 대표되는 혁신적인 예술 운동, 온갖 대중 잡지의 폭발적인 발간, 사진과 영화의 대중화, 그리고 엑스선과 무선 전신, 자동차, 비행기 등, 나날이 현대의 기적을 일신하는 과학문명...... 가히 벨 에포크는 모든 것이 놀랄 만한 속도로 변화하는 긍정과 모험의 자유분방한 시절이었다.

아르센 뤼팽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1905년 당시 체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무정부주의자이자 도둑인 알렉상드르 자콥을 모델로 했다는 설도 잇고, 실제로 그 당시 사교계의 살롱마다 우아한 취향의 사기꾼이 심심치 않게 출몰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지고 하지만, 무엇보다 인생에 얽매인 그 무엇도 없이 자유와 방황, 미녀와 예술품, 삶의 희열을 찾아 끝없는 모험을 계속하는 아르센 뤼팽 자신의 운명이야말로 벨 에포크라는 시대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시대예찬이든, 시대유감이든, 아르센 뤼팽은 시대를 무대로 해서 한바탕 운명의 도박을 펼쳐가는 당대의 주인공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뇌리에 아직까지도 아르센 뤼팽의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깊이 각인되어 잇는 레오 퐁탕의 삽화 속 모습 역시 단연 벨 에포크의 하이클래스 신사복장이다. 실제로 소설 속 뤼팽이 그와 같은 복장을 갖춘 일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복장 자체에 대한 묘사도 중구난방이지만 어느새 뤼팽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시르햇에 외알 안경, 흰 장갑에 말쑥한 지팡이, 검은색 프록코트 차림새는 사실 그 당시 부르주아 신사들의 보편적인 전유물인 것이다.

어디까지나 동시대의 파리지앵들을 주요 독자로 발행된 잡지에 연재를 통해서 탄생된 뤼팽 시리즈가 그 시대의 사회 분위기와 정서를 가장 민감하게 대변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종종 실제 사건들이나 인물들, 심지어 그 당시 유행어 등이 불쑥불쑥 언급되면서 뤼팽이라는 허구의 인물은 더없이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받곤 한다.

 

이처럼 단편적이고 재치 만점의 테크닉들은 어쩌면 대중 문학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경쾌한 자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뤼팽 시리즈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다루어지는 사건 자체를 동시대의 가장 화제가 되었던 사건들에서 직접 가져와 시대적 상황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데에 앞장선다.

 

그런가 하면 「수정마개」의 사건이 세계사적으로도 너무 유명한 '파나마 운하 스캔들'을 모델로 한 것임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경향은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더더욱 적극성을 띠게 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아직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813의 비밀」에서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일명 카이저)의 모습이 그나마 위엄을 갖춘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데에 반해서, 이미 전쟁이 터지고 난 후인「포탄 파편」에서 그려지는 황제는 그저 허세로 가득 찬 적군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는 모습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변화야말로 경쟁국가의 원수에서 침략군의 수뇌로 그 대상이 변함에 따라 함께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쪽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와 맥락은 다르지만 아르센 뤼팽에 등장하는 영국인에 대한 혐오감 내지 경멸 어린 태도 또한 그 당시로는 확실한 이유가 있는 정서를 밑바탕으로 한 것이다.

 

뤼팽 시리즈를 읽는 현대 독자들의 눈에는(더구나 이방인으로서!) 이처럼 지나치게 애국주의적이다 못해, 국수주의적이기까지 한 요소들이 다소 불만일 수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당대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라는 데에 먼저 공감을 하는 것이 참다운 뤼팽 시리즈 감상을 위한 순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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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바 / 에메랄드 반지 까치글방 아르센 뤼팽 전집 16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까치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바리바'란 'Barre-y-va'라고 쓰며, Barre는 '만조 때 강어귀로 밀려드는 높은 파도', 'y va' 는 '그곳에 가 닿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붙여서 읽으면 바리바로 읽히는 것이다. 사실 이 제목만 안다고 해서 소설의 트릭을 전부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핵심 키워드가 어디쯤 숨겨져 있는지 알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함께 실린 단편 '에메랄드 반지'가 더 재미있었다.
 
 
이번에 감상하게 되는 「바리바」와 단편 「에메랄드 반지」는 국내에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작품들이다. 「바리바」에서는 센 강 하류 계곡지대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자연현상을 둘러싼 서스펜스가 뤼팽 특유의 화통하면서도 세련된 재치와 결합되어 독자의 상상력을 쉴새없이 소용돌이치게 만든다. 수수께끼적인 요소가 대거 등장하면서, 오랜만에 암호문을 실마리로 삼은 추리의 과정도 만끽할 수 있으며, 작품 후반에 이르기까지 범인을 베일 속에 가려두는 수법도 「호랑이 이빨」 이후 오래간만에 즐길 수 있는 테크닉이다. 저자의 ‘추리소설론(「기암성」해설 참조)’에서도 독특한 작가의 입장을 확인했지만, 「에메랄드 반지」라는 제목의 단편작품은 아마 추리문학에서 모리스 르블랑의 독창적인 입장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애당초 본격 심리주의 작가가 꿈이었던 르블랑은 이 세련된 단편을 통해서 추리의 범주를 무의식이라는 영역으로까지 확대, 심화하는 비기(秘技)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해설에서는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활용된 참신한 기법과 테마를 간략히 살펴보고 그 선구적인 가치를 가늠해본다.
 
 
바리바
1. 밤의 방문객
 
극장의 저녁 공연이 끝난 뒤, 라울 다브낙은 집으로 돌아와 현관의 거울 앞에 멈춰 섰다. 거기에서 그는 우아한 실루엣과 떡 벌어진 어깨, 셔츠 가슴받이를 힘차게 부풀리고 있는 당당한 가슴팍 등, 고급 재봉사의 솜씨가 고스란히 밴 의복 차림의 멋진 몸매를 한동안 뿌듯한 기분으로 들여다보았다.
 
 
"세상 참! 하긴 당신이 너무도 매력적이라,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용건으로 찾아와주셨다는 게 못내 아쉬울 정도랍니다! 그러니까 마치 사람들이 셜록 홈스를 찾아 베이커 스트리트의 그의 집을 찾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이곳을 찾아온 거라 이 말씀이죠? 알겠습니다. 이제 필요한 모든 얘기를 차분히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마드모아젤. 성심껏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자, 어서 말씀해보십시오."
 
남자는 먼저 의자부터 정중히 권했다. 그런데 라울의 예의 바르고 상냥한 태도 덕분에 많이 안정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안색이 상당히 창백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처럼 싱싱하면서 우아한 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까지 이따금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눈빛만큼은 차분한 신뢰감을 담고 있었다.
 
 
2. 테오도르 베슈의 자초지종
 
"좋아, 그럼 이제 내가 자네의 이야기를 대신 풀어내줄까? 만약 내가 틀리거든 그때그때 잡아내도록 하게. 물론 전혀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야. 아주 기초적인 얘기야. 지금부터 잘 들어보게나. 바리바의 장원은 옛날에 바슴가(家)의 영지에 속했었는데,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르 아브르의 어떤 선주(船主)한테 매각된 곳이지. 그의 아들인 미셸 몽테시외는 바로 거기에서 성장해 결혼도 했지만, 아내와 딸을 차례차례 여의고 나서, 결국 베르트랑드와 카트린이라는 손녀 두 명과 더불어 독신으로 살았다네. 지금 자네가 얘기한 두 명의 자매가 바로 그들인 셈이지. 할아버지는 마음 둘 곳을 못 찾아서 그런지 파리로 이사해 정착해보았지만, 1년에 두 번씩은 항상 이곳을 찾는다고 하네. 부활절을 즈음해서 한 달 정도, 그리고 사냥철이 되어 또 한달을 머물다 간다는 거야. 손녀들 중에서 맏이인 베르트랑드는 비교적 일찍 결혼을 했는데, 상대는 무슈 게르생이라고, 파리에 터를 잡은 실업가이면서, 미국에서도 대규모 사업을 운영한다더구만. 어때, 여기까지 동의하나?"
 
 
"한편 어린 카트린은 미셸 몽테시외와, 또 하나,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주인한테 매우 충직한 하인 아르놀드-자기들끼리는 무슈 아르놀드라고 부른다는구만-이렇게 셋이서 살았다네. 한데 그녀는 자라나면서 공부는 그럭저럭만 하는 대신, 워낙 성품 자체가 구속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데다, 약간은 몽상적이고 황당무계하며, 운동과 독서에 열광하는 타입이라더군. 그래서 그런지 오직 바리바 같은 곳에서만 마음을 활짝 펴는가 하면, 오렐천(川)의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나서 풀숲, 사과나무 고목 아래에 벌러덩 드러누워 몸을 말리는 게 유일한 낙이어싿고 하네.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를 무척 사랑하셨다는데, 그 양반 역시 성격이 보통 과묵하고 괴팍한 게 아니라서, 평소에는 화학이나 심지어 연금술 같은 신비주의 학문에만 몰두했다는 거야. 어때, 내 얘기 따라오기는 하는 건가?"
 
 
"그러던 중, 벌써 스무 달이나 된 애기인데, 그때가 9월 말 정도였다고 하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이면 한번씩 머물다 오는 노르망디에서 떠나던 날 저녁, 몽테시외 할아버지가 그만 파리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 거야. 그 당시 언니인 베르트랑드는 남편과 함께 보르도에 있었지. 하지만 즉시 돌아와서, 그때부터 두 자매가 함께 살고 있다는군. 할아버지는 생각보다 적은 유산을 물려주었고, 별다른 유언 한마디 남기지 않았지. 결국 바리바 영지는 그때부터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거야. 장원의 철책들과 정문은 열쇠로 단단히 걸어 잠가둔 상태로 말이야. 아무도 더는 그곳을 드나들 수가 없게 된 거지."
 
 
"그런데 올해 들어와 갑자기 두 자매는 여름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작정했어. 베르트랑드의 남편인 무슈 게르생마저 프랑스로 돌아온 다음 다시 떠났다가, 또 이번에 돌아와서 두 자매와 상봉을 하게 되어 있었다네. 두 자매는 그곳으로 가면서 무슈 아르놀드는 물론, 베르트랑드를 지난 수년간 시중 들어온 요리사 겸 하녀 한 명도 함께 데려가기로 했지. 뿐만 아니라, 마을에 들러 임시로 두 명의 현지 소녀를 더 고용해, 이 참에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저택 청소와 정원 다듬기에 나섰던 거야. 그 결과 장원 일대가 그야말로 진짜 파라두도 저리 가라가 된 거라네!(파라두[Paradou]는 에밀 졸라[1840-1902]의 소설 「무레 신부의 과오(La faute de l'abbe Mouret)」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정원 이름이다. 모리스 르블랑은 이 자연주의 소설의 대가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저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발표했을 때 열광적인 편지를 보냈을 정도로 졸라를 흠모했다/역주) 어떤가, 내 얘기에 동의하나?"
 
 
"그런데 카트린은 얼마 전에 속을 발칵 뒤집어놓은 일련의 심각한 사태 때문에 여전히 우울한 기분이었을 텐데도 의외로 밝게 웃곤 하더군. 그 날 나는 밤 10시 30분 정도에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네. 물론 밤새 별다른 일은 없었고 말이야. 무엇인가 수상쩍은 소리 하나 없었지 그런데 해가 중천에 뜬 정오가 되어서야, 베르트랑드 카트린의 시중을 드는 샤를로트가 헐레벌떡 달려와 이렇게 외치는 게 아니겠나! '마드모아젤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개천에 빠지신 것 같아요......'"
 
 
"자살이라도 했다는 건가?"
 
 
"아들이 그처럼 돈도 없고 신분도 별볼일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걸 백작의 어머니가 싫어하셨지. 그러던 중 어제 아침 피에르 드 바슴의 편지가 카트린에게 배달된 거였네. 우리가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자기는 곧 떠날 예정이라는 내용이더군. 자기 어머니가 억지로 6개월간의 장기 여행을 명하셧다는 거야......잔뜩 의기소침해서 떠나긴 떠나지만, 제발 자기를 잊지 말고 꼭 기다려달라고 카트린에게 간청을 하는 편지였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즉 아침 열 시, 카트린은 집을 나섰고 그 후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거야."
 
 
3. 살인사건
 
"방금의 대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눈 것입니다, 예심판사님. 나는 저가 있는 저 강철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무슈 게르생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만하면 장소나 거리에 대해 충분히 납득을 하시겠지요? 아마도 여기 테라스에서 저 다리 초입까지 직선 거리가 기껏해야 80미터 정도 될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실제로 확인해보시면 알 겁니다-이 테라스에 서 있는 어떤 사람도 저기 다리의 첫째 아치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물론이요, 그 너머로 걸쳐 있는 두번째 아치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든가, 작은 섬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뚜렷하게 바라볼 수가 있다는 얘기이지요."
 
 
"섬의 땅바닥 일대는 온통 가시덤불과 쐐기풀 따위의 덩굴 식물들로 북새통을 이루어서 계단까지 거의 뒤덮인 상황인데, 무슨 이유로 무슈 게르생이 굳이 비둘기 집으로 향하는 건지, 나는 계속 의아해하며 바라보고 있었지요. 마드모아젤 카트린이 그곳에 피신해 있을 가능성은 전무한데 말입니다. 과연 왜였을까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요?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아무튼 무슈 게르생은 문에서 한 서너 발짝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습니다. 저기 문 또렷이 보이시죠? 우리와 바로 정면에서 마주보고 있지요. 큼직한 석재 토대 위에 둥그스름한 벽이 올라가고, 그 안에 나지막한 아치형으로 말입니다. 맹꽁이 자물쇠 하나하고 두 개의 넉넉한 빗장으로 문이 채워져 있을 겁니다. 무슈 게르생은 허리를 수그려 맹꽁이 자물쇠를 쉽게 풀어냈답니다. 그 이유야 나중에 직접 확인해보면 아시겠지만 무척 간단하지요. 꼬챙이 중 하나가 쉽사리 빠져나오거든요. 남은 건 두개의 빗장인 셈이죠. 무슈 게르생은 위의 것과 아래 것을 차례차례 손보았습니다. 이내, 그는 걸쇠를 부여잡더니 문짝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더군요. 바로 그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팔을 들어 막거나 뒷걸음질로 피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아니 심지어 그런 도발이 일어나는 걸 분간할 틈도 없이, 난데없는 총탄이 발사된 것입니다! 총성과 함께 맥없이 뒹구는 무슈 게르생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4. 습격
 
'모든 게 명확해지는군. 백작부인은 아들에게서 여행을 떠나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 두 연인간의 약속은 그대로 공중에 뜬 격이었겠지. 그러다 난데없이 어제 아침 젊은이의 작별 편지가 카트린에게 배달되었고, 기겁을 한 카트린은 바리바를 벗어나, 평상시 밀회를 나누던 장소로 무턱대고 달려온 거야. 물론 피에르 드 바슴 백작은 그곳에 있을 리가 없었지......'
 
 
5. '버으나우 셋'
 
"하지만 워낙 외롭게 지낸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일부러 무얼 숨긴다기보다는 무슨 일이든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거나 좀 과묵하게 넘어가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답니다. 꽤 기분이 괜찮을 때조차도 오로지 내 안에서, 나 자신만을 위한 기분에 그쳤지요. 그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전보다 훨씬 더 내성적으로 되어버렸답니다. 언니를 무척이나 따랐었지만, 그마저 결혼을 해서 떠나버렸지요. 나중에 언니가 돌아와서 그나마 많이 나아졌는데, 더군다나 이곳으로 함께 와 살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하지만 서로 애정을 품으면서도, 우리 사이에는 그때도 지금도 뭔가 서로 함께 해서 행복하다거나, 느긋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완벽한 친밀감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물론 그 날못은 나한테 있지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약혼을 한 몸입니다. 피에르 드 바슴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그 역시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요. 하지만 그런 우리 둘 사이에도 역시 일종의 장벽이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속 시원히 드러내길 꺼려하고, 모든 충동적이고 활달한 태도를 공연히 경계하는 나의 이 천성에서 비롯된 결과죠."
 
 
"......이처럼 소극적인 태도는 보통 여성적인 은밀한 감정에 한해서는 그런 대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특히 그 중에서도 다소 비정상적이고, 특별한 문제에 부닥쳤을 경우에는, 아주 괴상하게 보이기 마련이랍니다. 내가 바리바에 도착한 이후 벌어진 상황이 바로 그런 식이었어요. 정상대로라면 나를 후려쳤던 괴이한 사건들에 관해 일찌감치 얘기를 털어놓아야 했겠죠.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답니다. 실제 벌어진 일로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걸 혼자만 간직하고 있느라, 정작 남들한테는 어딘지 정신이 이상하고 불균형한 여자처럼 비치게 되고 만 것이죠. 결국 그러다보니 나 자신 불안에 찌들다 못해 신경질적이 되어버리고, 심지어 거친 여자로 변해버렸습니다. 내 주위 사람들과 나누기는 싫은 이 고통과 공포의 짐을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하면서 말이죠."
 
 
6. 보셸 할멈
 
"......그렇다면 정녕 내가 미쳐버린 걸까요? 언덕 위애 있는 걸로 늘 알고 있던 나무들인데...... 불과 2년 전에도 거기 있는 걸 보았었고...... 한데도 이미 그땐 그곳에 있지 않았었다는 얘기잖아요?...... 이 지도는 할아버지와 내가 5년 전에 만들어놓은 것이니 말이에요...... 내 머리가 어떻게 이런 착각에 휘말릴 수가 있는 거죠? 그동안 정말 엄연한 사실적 증거에 대항해서 싸워왔어요. 차라리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나무들이 옮겨 심어진 거라 믿고도 싶었죠. 그러던 중, 여기 이렇게 지도가 내 눈이나 기억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나선 거예요. 매 순간 내가 엄청난 착각을 했다는 걸 인정해야 할 판이니, 어떻게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가 있었겠어요? 내 전 인생이 그만 허깨비처럼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모든 과거가 한낱 허상과 거짓으로 점철된 악몽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에요......"
 
 
7. 공증인 사무소의 서기
 
매일 저녁 그렇듯, 덧문은 둘 다 닫힌 상태. 라울이 얼른 걸쇠를 벗겨냈지만, 알고 보니 그것들 모두 밖으로부터 잠겨져 있었다. 제 아무리 격렬하게 뒤흔들어보아도 전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울은 이내 포기하고 옆 방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시간을 너무 지체했는지 정원 쪽으로 의심 갈 만한 징후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힐끗 살펴보아도 당구실 밖 덧문에 큼직한 빗장이 가로질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경 적이 퇴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전날 밤 미리 장치해둔 것이 분명했다.
 
 
8. 유언장
 
아래 서명한 나 미셸 몽테시외는 예순여덟 살의 나이에 신체와 정신이 모두 건강한 사람으로, 충분한 숙고를 거친 소견과 더불어 합법적이고 도덕적으로 내게 주어진 모든 권한에 따라 나의 두 손녀들에게 예전엔 그래도 꽃이 만발했던 바리바 영지 주변의 조촐한 땅을 (분할하지는 말되, 그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수익의 각각 절반씩을 차지하는 형식으로) 물려주는 바이다.
 
영지에 한해서는 개천의 줄기에 거의 준해서 서로 다른 크기의 두 부분으로 나눌 작정이다. 그중 개천 우측 부분, 즉 장원을 비롯해서, 내가 죽는 시점에 그 안에 포함될 모든 것을 다 합한 구역은 카트린의 소유가 될 것이다. 확신하건대, 그 애는 이 할아비와 둘이서 그랬듯이, 그곳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잘 가꾸어나갈 것이다. 나머지 다른 한쪽 땅은 베르트랑드의 소유가 될 것인데, 결혼해서 종종 그곳을 비울게 분명한 그 애도, 아마 거기 낡은 사냥용 별장 정도라면 가끔 들러 쉴 곳으로 흡족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에 더해서, 거길 수리하고 가구도 제법 갖추게 하기 위해, 또 두 유산의 불균형을 상쇄하는 뜻에서, 내가 죽거든 베르트랑드에게 3만5,000프랑어치의 금가루를 별도로 유증하기로 한다. 그것은 내가 직접 만들어낸 것으로, 유언 추가서에 그 정확한 소재지를 밝혀놓을 것이다. 아울러 떄가 도래하면 그 비할 바 없는 보물을 만들어낸 비법 또한 공개할 것이다. 보물의 진실성에 관해서는 언젠가 내가 그중 몇 그램 정도를 보여준 적이 있는 베르나르 선생만이 유일하게 보증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나는 두 손녀들이 내 의지를 준수하는 데 서로간 하등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걸 지금까지 그 애들을 비추어봐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둘 중 하나는 결혼을 했고, 나머지 하나 역시 조만간 하게 될 것인 바, 둘 사이 여하한 오해를 초래할 만한 해석상의 오류도 철저히 차단키 위해, 나는 영지의 지형을 묘사한 도면을 작성해서 내 책상 오른쪽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것을 보면 결코 어떤 혼동도 없을 만큼 확실한 방법으로 표시를 해두었음을 알 것이다. 즉 영지 내부의 두 소유지 경계선은 카트린이 즐겨 숨어들었던 세 그루의 버드나무 중 가운데 놈에서 출발하여, 곧장 정원의 정문 철책을 지탱하는 네 개의 기둥들 중 맨 서쪽 기둥에까지 도달할 것이다. 아울러 쥐똥나무 생울타리라든가, 아니면 말뚝 울타리로 경계선을 표시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아무튼 각자 아무런 불만 없이 편안할 일이며, 오로지 그 원칙에 입각하여 이 유언의 규정들을 정하는 바이다.
 
 
9. 용의자 두 명
 
"알아요...... 그러지 않아도 엄청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린 돈이 너무도 궁했고, 카트린에 비해 터무니없는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그 금가루 얘기가 남편의 정신을 돌게 만든 겁니다.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가 황금 제조의 비법을 발견했으며, 장원과 더불어 개천 우측 땅덩어리를 몽땅 카트린한테 넘기면서, 무한정한 보물 역시 물려주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렇다 해도 카트린은 분명 당신과 그것을 나누었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워낙 남편 고집이 강한지라, 난 어찌 할 도리가 없었어요. 나약하기도 했고, 비겁하기도 한 거죠...... 때로는 울컥하는 심정도 없진 않았고요.; 정말이지 그때 생각으로는 너무도 부당하고......심한 처사라 여겨졋습니다!......"
 
 
"사실 그쯤 되자 나도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카트린에게 죄다 일러바치겟다고 위협했거든요. 게다가 우린 점점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기도 했고요. 사실 올해 동생 결혼을 앞두고 카트린과 함께 이곳에 머물기로 했을 때만 해도, 이걸로 영영 갈라서게 되는구나 싶었답니다. 그런데 두 달 후 남편이 불쑥 찾아와서 난 굉장히 놀랐지요. 남편은 파므롱과의 일에 관해선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도무지 누가 그이를 죽였고, 또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고 있답니다."
 
 
10. 큰 모자를 쓴 사나이
 
"아, 이제야말로 독안에 든 쥐다, 이 놈!"
 
그런데 이에 맞서 귓가에 들려온 것은 처량하게 애걸하는 나약한 목소리였다.
 
"아, 이런...... 대체 왜 이러나? 이거 놓지 못해?"
 
베슈의 목소리였다.
 
라울로서는 길길이 날뛸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이 시간에 하필 이런 데서 잠을 청하긴가? 젠장, 멍청하기는! 그래, 누구와 함께 있었던 거야?"
 
하지만 베슈 역시 보통 화가 나 있는 게 아니었고, 이번에는 자기 차례라는 듯 바짝 뻗대면서 엄청난 괴력으로 라울의 몸을 흔들어댔다.
 
"멍청한 게 누군데 이래? 지금 자네가 어떤 와중에 끼어든 건지 알기나 하나? 도대체 왜 우리를 방해하는 거야?"
 
"우리라니, 그게 누군데?"
 
"당연히 그 여자지! 제기랄! 이제 막 입을 맞추려던 참이었단 말이야! 처음으로 여자가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당장 입을 맞추려는데, 자네가 모조리 틀어놨다구! 이 답답한 친구 같으니라구!"
 
화도 났고 한편 허탈하기도 했지만, 라울은 그가 망쳐놓은 유혹의 장면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는, 허리가 끊어져라 폭소에 또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하하하하...... 요리사였어!...... 요리사!...... 베슈가 드디어 요리사를 품어보려고 했다 이거야!...... 세상에, 내가 그 알량한 예식을 중단시켜버리다니...... 오, 하느님 맙소사! 이런 포복절도할 일이 있나! 베슈가 요리사에게 입을 맞추려 하다니! 돈 후안이 따로 없구만그래!"
 
 
11. 함정에 빠지다
 
아침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정오가 되었을 텐데, 그 어떤 탈 것 이동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필경 두 자매는 전보를 받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라디카텔을 떠났을 것이다. 릴르본에서 기차를 잡아타야 할 테니까.
 
하지만 이런 라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성당 종소리가 오후 한 시를 규칙적으로 알리는 가운데, 그리 멀지 않는 느낌의 외침소리가 이렇게 들려온 것이다.
 
“라울! 라울!”
 
영락없는 카트린의 목소리였다.
 
아울러 베르트랑드의 목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라울! 라울!”
 
라울은 여자들의 이름을 번갈아 고래고래 외쳐댔다.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두 젊은 여자는 그밖에도 여러 차례 라울의 이름을 불러주었지만, 어쩐지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적막......
 
 
12. 복수
 
“혹시 파리로부터 당신들한테 전보 온 것 있습니까?”
 
대답은 베슈가 대신했다.
 
“그렇다네. 첫 기차로 자네한테 와달라는 내용이었어. 자네 집에서 만나자고 말이야.”
 
“그런데 왜 가지 않은 거지?”
 
“난 그러자고 했지. 한데 여자들이 원치 않더구만.”
 
“이유는?”
 
“의심이 간다는 거야. 자네가 그런 식으로 자기들을 떠날 리가 없다는 거지. 그래서 우리 모두 나서서 자넬 찾아보기로 했다네...... 우선 바깥 숲부터 뒤졌지. 그런데 얼마 안 가 우리도 갈피를 못 잡겠더군. 도대체 자네가 떠난 건지 아닌지부터가 말이야. 영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시간만 흘러갔지. 그뒤론 잠도 한숨 못 잤다네.”
 
 
13. 논고(論告)
 
“천만에, 베슈! 그래서 자넨 늘 안 되는 거야. 아르놀드는 살인을 하지 않았네.”
 
 
“모두가 장원을 떠나게 하자는 거였지.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황금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장원에 사람이 죄다 빠져나가서 아무도 보는 눈이 없어야만 황금을 손에 넣기 위한 작업을 벌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그것도 9월 12일이라는 정해진 날짜가 도래하기 전까지 몽땅 빠져나가야만 했어.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두 자매가 기겁을 해서 떠날 결심을 할 만큼,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할 수밖에 없었지. 원체 사람 죽일 천성은 못 되기에, 살인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고 말이야. 하지만 반드시 여기서 내쫓기는 해야만 할 일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는 카트린의 침실 창문으로 잠입해 들어와, 여자의 목을 다짜고짜 조르기 시작했지. 자네가 보기엔 진짜로 공격을 한 거라 볼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저 그런 시늉만 했을 뿐이라네. 목을 조르되, 죽을 만큼은 아니었으니까. 충분히 살해할 시간여유는 있었어. 하지만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겠나? 어차피 죽일 목적은 전혀 아닌 것을 말이야. 그래서 적당히 해두고 냅다 도망쳐버린 거라네.”
 
 
“그녀는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아르놀드의 공범이라네.”
 
“아니지, 그녀가 자네를 구해낸걸?”
 
“회한이 들었던 게지! 지금까지는 아르놀드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의 행태에 적극 협조해온 게 사실이라네. 다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자, 이따위 범죄행각이 더는 싫어졌고, 적어도 아르놀드가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던 거지.”
 
“아니, 그건 또 왜? 그가 무슨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나?”
 
“정녕 알고 싶은가?”
 
“그렇네.”
 
“아르놀드가 범죄자가 되는 걸 그녀가 왜 못마땅해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그렇다니까!”
 
“그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
 
“뭐, 뭐라구? 지금 뭐라고 했나? 감히 뭐라고 지껄인 거야?”
 
“나는 샤를로트가 아르놀드의 정부(情婦)라고 말하는 것이네.”
 
순간, 베슈는 주먹을 한껏 치켜들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야!”
 
 
14. 황금
 
진짜로 라울이 지목한 곳을 보니 동그란 쇠틀에 체의 그것과 똑같은 촘촘한 쇠망이 자리한 사내끼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떤가, 베슈, 설마 개천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싫어? 그럼, 가만히 낚기나 하다가, 체를 따라 바닥을 죽 긁어오게.”
 
“상류 쪽으로 말이지?”
 
“그래, 개천이 원래 방향으로 흐르면서 황금가루들을 운반해와, 결국 체에서 걸러지니까 말이야.”
 
베슈는 즉시 시킨 대로 했다. 사내끼의 손잡이가 긴 편이어서, 기슭의 큼직한 돌멩이에 올라선 채로도 개천의 4분의 3까지 미칠 수가 있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숙한 시간이었다. 라울이 예견한 바가 과연 옳을 것인가? 정말 저 수초들과 섬세한 조약돌들이 즐비한 개천 바닥에서 몽테시외 씨는 자신의 더없이 소중한 황금가루를 거두어들였던 것일까?
 
드디어 베슈가 일을 끝내고서 사내끼를 들어올렸다.
 
금속 망 속에는 조약돌과 얼기설기 수초들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뭔가 반짝거리는 점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분명 황금가루와 그 조각들이었다.
 
 
15. 집정관의 재산
 
아직 젖은 상태인 나무뿌리와 가시덤불이 맨 먼저 제거되었고, 파묻혀 있던 오솔길이 복구되었다. 이어서 원형의 공간이 드러났고, 그 기저를 이루는 자갈층에 곡괭이질이 가해졌다.
 
하나의 장애물이 무너지자 또다른 장애물이 나타났고, 거기에는 보다 섬세한 작업이 필요해 보였다. 모자이크의 흔적과 더불어 역시 조각상 같은 게 세워 올려졌을 다른 토대가 드러났는데, 이제 두남자의 발굴작업은 바로 그 지점에 집중되는 것이었다.
 
사방으로부터 물이 스며들어 적당히 고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개천 쪽을 향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내리친 곡괭이가 석벽을 그대로 뚫고 텅 빈 공간으로 쑥 빠져들었다. 부지런히 구멍 넓히는 작업에 들어갔고, 잠시 후 라울이 램프 불을 켜 확장된 구멍 속으로 들이밀었다.
 
과연 예견했던 대로, 사람이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동굴이 휑하니 열려 있는데, 아마도 장례실로 쓰이던 공간 같았다. 중앙에 뻗은 기둥 하나가 천장을 지탱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유약 바른 흙으로 구운 투박스럽고 뚱뚱한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었다. 지금도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흔히 보는 기름 보관용 단지들과 비슷하게 생긴 것들이었다. 그중 네 번째 항아리에서 떨어져나간 파편들이 끈적끈적한 훍바닥에 흐트러져 있었고, 황금빛의 반짝거리는 가루가 그 가운데 섞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16. 에필로그: 둘 중 누구를?
 
“나는 당신 둘 다 사랑합니다......”
 
“바로 그게 문제예요! 둘 다라는 말...... 둘 다 고만고만할지언정, 둘 중 누굴 더 사랑하는 건 아니죠!”
 
여자의 말에 라울이 발끈하는 제스처를 취하자, 다시 또 여자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아니에요! 인정할 건 인정하세요...... 어차피 베르트랑드나 나나, 우리 둘의 감정은 당신이 모를 리가 없을 겁니다...... 한데도 당신은 우리 둘 다를 향한 감정으로만 그에 응하고 있어요...... 장원에서도 당신은 우리 둘 다를 위해, 그야말로 공동의 선(善)을 위해 싸우셨지, 그 두 사람을 따로따로 분리해 대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여겼어요. 그러다보니 이제는 당신한테 우리 두 사람 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린 거예요. 하지만 자고로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는 그렇게 되어선 곤란하죠...... 이곳 파리에 돌아온 이래, 당신은 하루 건너 번갈아 우리 두 사람을 제각기 따로 보러 왔어요. 그러는 동안 우린 헛된 자존심 반, 질투 반의 심정으로 당신의 결단이 내려지기만을 고대해왔죠. 그런데 이제는 당신이 결코 결단을 내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당신은 언제까지나 우리 두 자매를 똑같이 사랑하려고만 들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뭡니까?”
 
라울은 목이 멘 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대신 우리가 내린 결정을 말씀드리려고 이렇게 온 거예요. 당신은 결정을 내리지 못할 테니까 말이에요.”
 
“그래, 어떤 결정을 내렸나요?”
 
“떠나기로 했어요.”
 
라울은 펄쩍 뛰었다.
 
 
 
에메랄드 반지
 
“마담, 당신은 필경 어떤 의혹 섞인 동작, 경계하는 행동을 실행에 옮겼을 겁니다. 비록 그 상황에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고, 당신의 성향에도 배치되는 짓이지만, 원하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저지르고 만 것이죠. 왜냐하면 무슈 데르비놀의 이름이 어떻든 간에, 덮어높고 그를 에메랄드 반지를 능히 훔칠 수 있는 자로 본다는 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울화가 치밀더군요. 나는 길길이 소리를 질러댔죠.
 
‘내가요? 내가 그런 생각을 한 단 말입니까? 그런 파렴치한 의심을 했다구요?’
 
데느리스 남작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 물론 그런 건 아니죠. 대만, 당신의 무의식이란 놈이 수작을 부려, 마치 당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몰아간 겁니다. 그 놈은 당신의 시선과 사고가 닿지 않는 곳에서 몰래 장난을 쳤답니다. 흔히 끼고 다니는 모조보석 반지들과 무려 8만 프랑에 달하는 진짜 에메랄드 보석 반지 사이에서 재빠른 선택을 하게 만든 거지요. 즉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선택이 이루어졌고, 반지들이 우르르 외발 원탁 위에 놓여졌을 때, 당신은 비할 데 없이 소중한 에메랄드 반지를 역시 무의식 중에 모든 의심스런 시도로부터 차단한 겁니다.’
 
그때만 해도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만한 모함이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요.
 
‘말도 안 되는 얘기에요! 그랬다면 내가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리가 없죠!’
 
‘한데 까마득히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자체가 바로 증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에메랄드 반지가 내 수중에 있어야 하잖아요!’
 
‘아니죠. 그건 당신이 놓아둔 곳에 얌전히 있습니다.’
 
‘내가 놓아둔 곳이라뇨?’
 
‘바로 외발 원탁 위 말입니다.’
 
‘거긴 없어요. 없다는 건 당신도 보고 있잖아요?’
 
‘있습니다.’
 
‘뭐요? 보시다시피 저긴 내 손가방밖에는 없어요!’
 
‘그러게요! 그러니 반지는 당신 손가방 안에 있는 겁니다, 마담.’
 
 
“어쨌든 올가 당신은 반지를 지켜냈고, 데르비놀은 자기 돈을 간수한 셈이로군요. 결국 아무것도 빼앗긴 물건이 없으니, 당신 얘기대로 일을 해주고 알아서 챙기는 게 능사인 바르네트의 원칙에는 정면으로 위배된 경우라 하겠어요. 스스로 손가방 안을 뒤져서 에메랄드 반지를 충분히 후무릴 수가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거예요. 그건 틀림없이 반지보다 더 좋은 걸 바란다는 뜻이겠죠. 그러고 보니 누군가 해준 얘기 하나가 생각나네요. 한번은 그가 일을 해준 뒤 아무 보상도 청구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채무자의 여자를 슬쩍 빼돌려 함께 유람여행을 떠났다고 하죠! 어때요, 올가, 정말 보상 청구치고는 아주 멋들어진 방법 아닌가요? 당신이 지금까지 들려준 그 남자의 모습이나 성향에 정말 잘 어울리는 수법인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올가?”
 
 
 
해설: 아르센 뤼팽의 작품론 2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독창적인 테마들
 
① 이중적인 캐릭터
 
두말할 것도 없이 ‘괴도+신사’라는 아르센 뤼팽의 정체성이야말로 문학에서 최고 수준의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이중적 캐릭터’라고 할 것이다. 특히 시리즈가 횟수를 거듭함에 따라 도둑에서 탐정으로 점차 변모되어가는 이중적 혹은 분열적 주인공의 양상은 아르센 뤼팽이라는 존재의 정체성 자체를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제시함으로써 스토리를 더욱 긴장감 있게 이끌어나가는 동인(動因)이 된다. 처음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에서 완전한 도둑으로 출발한 뤼팽의 정체성은 대작 「813의 비밀」에 이르면서부터 출발점과 완벽한 대극을 이루는 경찰(혹은 탐정)의 이미지로 둔갑을 하며 독자의 정신을 어지럽게 한다. 「813의 비밀」에서부터 현란하게 선보이는 이름 철자 바꾸기(anagramme) 기술과 이전부터도 워낙 유명한 변장능력은 뤼팽의 이중적 정체성을 지탱하는 정교한 테크닉이다. ‘범죄자는 곧 경찰이 될 수 있다’는 고전적인 명제는 누구보다도 버도크(1775-1857)라는 실존인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레미제라블」[1862])과 발자크의 보트랭(「고리오영감」[1834-1835])이 바로 그를 모델로 해서 태어나는가 하면, 급기야 20세기 초 아르센 뤼팽에 이르러 그 가장 완벽한 전형이 탄생한 셈이다. 요컨대, 「813의 비밀」에 등장하는 르노르망 치안국장과 폴 세르닌의 1인 2역 드라마는 선과 악의 이중적 캐릭터가 추리문학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된 최초의 케이스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당연히 이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는 그 당시부터 수많은 추종세력을 불려나갔고, 양상은 좀 다르지만 팡토마스2)라든지 사이먼 템플러3)처럼 한층 발전된 또 하나의 범죄자 유형으로 그 화려한 명맥을 이어간다. 뤼팽 연구가들의 연구 결과, 엘러리 퀸의 「그리스 관(棺)의 비밀」(1932) 같은 수작 역시 아르센 뤼팽 시리즈의 영향권 안에서 가능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실정이다.
 
② 암호화된 전언에 의해서 진행되는 범죄의 테마
 
예컨대 알파벳의 순서에 따라서 희생자가 정해진다든다, 기존의 문서에 나타난 단서대로 범죄의 장소나 시기가 결정된다는 식의 설정 역시 뤼팽 시리즈에서 큰 효과를 본 추리적 장치이다. 「서른 개의 관」을 보면 노스트라다무스 스타일의 아리송한 시구 철자 하나하나에까지 집착하면서 광기 어린 살인극을 저지르는 광인 보르스키가 등장한다. 중세의 한 수사가 그저 운을 맞추기 위해 끄적여놓은 시구 하나하나가 범행의 시기와 희생자의 수를 결정하는 운명적인 예언이 되고 만다.
 
이처럼 암호화된 코드나 언어적 단서가 범죄 자체를 성립시킨다는 테마는 반 다인의 「비솝 살인사건」(1929)이라든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1940)5) 그리고 엘러리 퀸의 「더블, 더블」(1950)6)보다 한 발 앞서서 활용되었다. 「서른 개의 관」과 더불어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 중 “도끼를 든 귀부인” 역시 수수께끼 같은 언어유희에 의거해서 범죄가 엮어지는 테마로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③ 복제된 장소의 테마
 
어떤 하나의 장소가 제시되고, 마치 복제된 듯 그것과 똑같은 장소가 새롭게 범죄에 활용됨으로써,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알리바이가 가능해딘다는 테마는 뤼팽 시리즈 중 「불가사의한 저택」의 주요 테마이다. 이는 분명 「엘러리 퀸의 새로운 모험」(1939)이라든가 프레데릭 다르의 「기중기」(1961)보다 10년 이상 앞선 선례라고 할 수 있다.
 
④ 그밖의 테마와 기법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중 추리적 관점에서 참신한 기법과 테마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은 역시 장편보다는 단편들에서 찾을 수가 있다. 즉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와 「바르네트 탐정사무소」 그리고 「아르센 뤼팽의 고백」 같은 단편 모음집 안의 주옥같은 작품들에서 독자들은 보다 많은 추리적 장치들이 빛을 발하는 것을 느낀다. 미국 출신의 유명한 추리문학 전문가인 하워드 헤이크 래프트7)는 특히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를 두고, 추리소설의 줄거리 얼개 면에서 최고 수준의 작품성을 지닌 걸작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테레즈와 제르맨”에서의 밀실 변사체, “눈 위의 발자국”에서의 조작된 발자국 등의 테마는 그 방면의 고전적 전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영화 속의 단서”에서 현실이 허구를 그대로 모방한다는 테마는 체스터턴류의 발상이 앞서 나간 예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바르네트 탐정사무소」의 단편들 중 “흰 장갑...... 하얀 각반......”에서 선보인 눈에 보이면서도 목격되지 않는 용의자의 테마나 “바카라 게임”에서 알리바이가 형성되는 수법 등도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인 추리적 기법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아르센 뤼팽의 고백」 중 “백조의 자태를 지닌 여인”에서, 별개의 두 사람으로 등장했던 사람이 결국 동일인물이었다는 식의 발상은 「브라운 신부의 지혜」를 통해서 체스터턴이 그보다 1년 뒤에야 본격적으로 천착한 테마이기도 하다.
 
 
2) 피에르 수베스트르(Pierre Souvestre)와 마르셀 알랭(Marcel Allain)의 공저로 이루어진 범죄 소설 시리즈의 백미로서, 「팡토마스(Rantomass)」(1911)를 시작으로 「팡토마스의 최후(La Fin de Fantomass)」(1913)에 이르기까지, 단기간에 총 32편이라는 경이로운 시리즈가 선을 보였다.
 
3) 소위 ‘세인트(Saint)’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레슬리 차터리스(Leslie Charteris, 1907-1993)가 창조한 20세기형 로빈후드라고 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점에서 아르센 뤼팽으로부터 직접적인 영감을 얻어 창조된 캐릭터이다. 1928년 「호랑이와 맞서라(Meet the Tiger)!」로부터 시작해 작가 본인이 직접 집필한 시리즈만 총 19편에 달한다. 프랑스에서의 인기도 대단해, 번역본말고도 수십 여 편에 이르는 모작 시리즈가 프랑스어로 집필, 출판도기도 했다.
 
5) 국내에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6) 국내에는 「일곱 번의 살인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7) 「즐거움을 위한 살인, 탐벙 스토리의 생명과 시간(Murder for Pleasure: The Life and Times of the Detective Story)」(1941)이라는 저서에서, 일반 추리소설 팬들이 추리문학 감상의 주춧돌로 삼을 만한 명작 리스트(1841-1938 출간)를 70여편 이상 추려 제시한 바가 있는데, 그 중 뤼팽 시리즈의 「여덟 번의 시계 종소리」가 당당히 올라 있다.
 
 
(http://home.comcast.net/~dwtaylor1/haycraft.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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