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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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이 첫 문장은 참 인상적이다. 이스라엘 작가의 책은 거의 읽어 본 것 같지 않은데, 영미권의 이름들이 사실 성경에서 온 이름들이 많아서 등장인물의 이름은 낯설지가 않고 익숙한데, 지명이나 분위기는 또 생경해서 그 사이에서 오는 재미가 있었다.

 

책을 죽 읽어보니 작가의 경우 이 책을 출간하고 나서 두 가지 반응을 다 겪은 것 같다. 하나는 남자 작가로서 여자 화자를 내세워서 소설을 쓴 것이 의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반응, 하나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반응. 아마 그 두 가지 사이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는 이에 대해 어떠한 변명이나 미화도 없이 어느 순간 한나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썼다고 하는데 우리가 살다 보면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까, 특히 나와 생활을 같이 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판단할까 라는 궁금증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화자는 한나이지만, 주인공은 미카엘이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제목도 나의 미카엘이고, 과장하면 한나의 모든 안테나의 끝은 미카엘에게로 향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굉장히 섬세하면서도 우아하고 슬프면서도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소설.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한나가 겪는 마음의 변화에 몸의 변화는 상당 부분 누락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엄청난 신체의 변화와, 그러한 신체의 변화의 급격함 때문에 당연히 수반될 수밖에 없는 정신적 변화에 대한 부분은 빠져 있다는 아쉬움. 이것은 남자 작가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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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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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는 예전부터 많이 들어보았으나 이번에 처음 읽게 되었다. 책의 소개를 보면 출판 이후 이른바 니나 신드롬까지 불었다는데, 그 시대라면 모를까 요즘 시대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낡아 보이는 주인공이지 않을까 싶다. 너무 평가가 박한가? 그만큼 내가 더 나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굳이 태클을 걸어보자면, 중년 남성의 삶의 의미란 딸만큼이나 어린 여성과의 사랑이 아니면 찾아낼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삐딱한 의문이 들기도 하고. 과연 이것이 사랑이 맞는지, 그저 지나가버린 자신의 젊은 날을 붙잡고 싶어 발버둥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평탄하게 살아온 니나의 언니가 니나를 부러워하듯이. 정작 젊은 시절 열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 니나는 언니의 그 안정을 부러워하고 있는데. 슈타인이 실제 니나를 사랑했는지 아리송하다. 열정적이고 불완전한 젊음 그 자체를 붙잡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차라리 대놓고 젊은 여성과 결혼을 하는 남성이 오히려 털털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것도 사랑일 수 있다. 숨이 막히는 사랑이겠지만.

슈타인은 그렇다치고 니나는 어떠한지. 학교 수업을 거부할 정도로 안락사를 반대하면서 정작 남편의 조력 자살에 협조하는 모순. 그 모순 또한 인간의 한 부분인 것은 맞는데, 한 인간 안에서의 변화에 대한 통찰 수준까지 소설이 가지는 않는 것 같다.

전후 세대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성숙한 단계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감정에만 몰두하는 니나는 그저 자기 파괴적인 본능에서 성숙해진 것 같지는 않고, 소설 자체로만 보면 매력적인 소설은 맞는데, 인물이 매력적인 것은 모르겠다. 신드롬까지는....... 정말 모르겠다. 분명히 니나는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 인물일텐데 작가에 대해 찾아보다가 한때 나치주의자였다는 경력이 드러났다고 한다. 스스로를 반나치 인물로 열심히 포장하며 살았다는 것인데, 한 때 이 소설과 니나를 열렬히 마음에 품었던 사람들에게는 아픈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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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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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1967년에 출판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쿤데라는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1950년에 당에 반하는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당에서 추방당했고 1956년 재입당이 승인되었으나 1970년에 또다시 당에서 추방당한다. 농담은 1967년에 쓰인 작품이다. 가벼운 농담마저 허용하지 못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축출되어 버린 주인공을 감안하면 당연히 본인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찾아보니까 이 책의 원제는 Zert 인데, 아마 체코슬로바키아어로 농담이라는 뜻인가 보다.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는 사실상 사투리 정도로 거의 비슷하다고 하니까. 1975년에 프랑스로 망명한 쿤데라는 현재는 체코국적을 회복한 상태인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시기가 1993년이라고 하니 올해로 딱 30년인 셈이다. 1993년부터 쿤데라는 프랑스어로 글을 써왔다고 하며, 이전에 출간된 작품들도 작가 본인이 직접 프랑스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체코라는 나라의 역사도, 쿤데라의 일생도 풍파가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체코라는 나라의 역사를 알아보면 도움이 되겠지만, 비전공자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 그것은 다음 기회에....... 그리고 쿤데라의 소설은 역사적 배경을 몰라도 재미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주인공에게 큰 영향을 준 여자는 총 3명인데, 3명의 여자와 만나고 사귀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어떻게든지 농담적인 요소가 있다. 첫 번째 여자에게 보낸 엽서의 농담 때문에 주인공은 자신이 소속된 곳에서 쫓겨나고 지위를 잃으며 추락한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두 번째 여자와의 만남 과정은 당사자들은 절절하겠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제 3자가 들으면 웃어버릴 부분은 분명히 있다. 세 번째 여자와의 만남은 과연 이 만남이 어떻게 결말을 지을지 조마조마하면서 보다가 소설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게 되면 이것은 그야말로 단어 그대로의 Toilet Humor . 사실 이 소설 전체가 거대하고 촘촘하게 잘 짜인 블랙코미디이며, 인생이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흔한 클리셰로 AI가 농담을 할 줄 알고 이해하게 되면 인간성을 획득한 것으로 묘사되는 예술작품이 참 많은데, 이것이 제거된 사회는 그야말로 로봇들만의 사회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robot도 체코어라고 한다. 영어가 아니라.

자꾸 단어에 집착하면서 리뷰를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로 소설을 새롭게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반복해서 생각하게 된다. 특히나 작가는, 화가나 무용가와는 달리 특정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사람이 아닌가. 쿤데라의 작품도, 작가 개인에 대한 호기심도 계속해서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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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6
앙드레 지드 지음, 동성식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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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앙드레지드의 소설 3편이 실려 있다. 순서대로 좁은 문 / 전원교향곡 / 배덕자 가 실려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소설은 좁은 문일 것이고, 개인적으로도 읽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도 좁은 문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알리샤는 이 숭고한 사랑이 변질될까봐 두려워했던 것 같고 사랑을 했어도 현실을 냉정하게 볼 줄 알았던 쥘리에타는 스스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결국 사랑을 하는 것도 나인 것을. 이런 사랑이 요즘 세상에 얼마나 공감을 자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민도 쉽지 않을 것 같고.

 

좁은 문의 맨 앞에 보면 이 소설을 아내에게 바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앙드레 지드는 사촌 누나와 결혼했다. 이렇게 보면 좁은 문은 작가 부부의 이야기를 상당 부분 반영했을 텐데, 이 소설뿐만 아니라 전원교향곡과 배덕자도 역시 작가의 개인사가 반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덕자란 한자를 살펴보면 덕을 배반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an immoral person 쯤으로 해석되는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개신교 신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고, 신경발작으로 인해 중퇴하고, 사촌 누이와 결혼했으나 육체적인 사랑을 배제하고 정신적인 사랑만을 추구하느라 죽을 때까지 별거하였고, 자녀 1명은 사생아인 것으로 보이는데 동성 연인에 대한 일화도 있다. 이런 작가가 순서대로 배덕자, 좁은 문, 전원교향곡을 써 냈다는 사실을 보면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리스도적인 윤리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여기 실린 소설이 전부 하나의 소설 같다는 느낌도 들고. 전원교향곡까지 도달해서는 눈을 뜨고도 알지 못했지만 주변은 알고 있던 사랑을 뒤늦게야 인정하게 되는데 작가가 스스로를 경멸하고 혐오하다가 스스로에게나 주변에게 그 전보다는 너그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작중 주인공과 작가를 지나치게 혼동한 나머지 오독한 탓일까. 읽는 내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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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
제임스 M. 케인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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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는 후치타 쓰구지의 커플이라는 그림이다.

후치타 쓰구지로 찾아도 검색이 되지 않아서 무명 화가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 본명이 후치타 쓰구하루라고 한다.

유럽 사람들이 읽기 어려워 이름을 바꾸었다고.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을 정도로 프랑스에서 성공한 일본 화가였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인생에 대해서 읽어보니 썩 호감이 가지는 않는다.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림들도 미술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와닿지 않고.


그러나 이 표지의 그림만은 독특하면서도, 책의 내용과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영화로도 히트를 친 이 작품은 원래 우편 배달원은 벨을 두번 울린다 였다고 하는데, 영화 개봉 당시 해당 직업과 관련된 부처에서 항의가 있어서 지금의 제목인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로 바뀌었다고 한다.

독특한 제목이라 대체 왜 이 제목인가를 생각하며 책을 계속 읽어나가게 되는데, 끝까지 다 읽고 나서 해설까지 읽으면 아하, 하게 된다.


길지 않은 소설이고 현란한 미사여구가 없는 소설이고 담백하고 간결한 소설이다. 바로 이 소설이 유일하게 멋을 부린 부분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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