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시대의 사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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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라 술술 읽었다. 책 읽는 동안 다른 짓을 거의 하지 않았으니까. 노벨상을 받은 작가, 세계적인 소설이라는 명성에 겁을 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소설의 배경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신의 삶에 맞추어서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검색하면 동명의 영화가 뜨는데 좀 더 대중적인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만 보더라도 이 소설의 이야기가 얼마나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이야기이며, 또 인기를 끌 이야기인지 알 수 있다. 무려, 그 유명한 하비에르 바르뎀이 남자 주인공으로 나온다니 한번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2의 표지는 처음에는 혹시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의 사진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아닌 것 같다. 특별히 인상적이지도 않고 출처도 잘 모르는 사진을 표지로 쓰는 것보다 차라리 영화의 스틸 컷을 표지에 넣었으면 어떨까 싶었다. 아니면 작가의 얼굴 사진을 표지로 쓰든가.

콜레라 시대의 사랑보다 더 유명한 작가의 책은 백년의 고독인데, 백년의 고독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는 작가도 접하게 된 계기가 이동진의 빨간책방이라는 팟캐스트를 통해서였다. 한때 열렬한 애청자였다가 듣기를 중단하게 된 계기는 첫째로는 그 무렵 내가 많이 바빠졌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 무렵 들었던 방송에서 진행자가 한 말 중 전혀 공감이 가지 않으면서도 화가 났던 부분이 있어서였다. 그 멘트만 생각하면 화가 나는지라 안 그래도 부족했던 시간을 쪼개가며 방송에서 소개되는 책을 읽고 방송을 들을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내키지가 않았다. 한 번씩 들어가서 방송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또 요즘은 어떤 책을 소개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까지는 했지만 방송을 본격적으로 듣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방송에 큰 변화가 여러 차례 있었고, 최근 이 방송이 막을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늦지 않게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나의 한 시대가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에 마무리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지치고 정신은 빈곤했던 시절에 방송을 통해 접한 책들을 읽는 시간과 방송을 듣는 시간은 나에게 한편으로는 치유가 되는 시간이었고,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시간이었다. 방송의 멘트가 마음에 걸려 방송을 듣지 않게 된 시점을 생각해보면, 방아쇠를 당긴 것이 그 멘트일 뿐 그 전부터 서서히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이 쌓여왔던 것 같다. 몇 년 동안 누군가의 안내를 받았으나 이제는 나 혼자 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고 생각했고 혼자 사유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그때만큼은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잡고 싶고 매달리고 싶었던 시기에는 전적으로 의존하고 모든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지만, 그 시기를 지나고 나니 이제는 나의 삶을 바탕으로 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의 평에 수긍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은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영원했듯이 나의 한 시대는 이미 지나갔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지속될 것이다. 아직도 나에게는 그 시대가 영향을 주고 있으니까.

워낙 평범한 집에서 검소하게 살았는지라 그는 구두쇠라는 부당한 명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부리는 유일한 사치는 그보다도 훨씬 검소했다. 그것은 사무실에서 2레구아 떨어져 있는 바닷가 별장에서, 가구라곤 여섯 개의 허름한 수공예 간이 의자와 항아리 받침대밖에 없는 이 집의 테라스에 해먹을 걸어놓고 일요일마다 누워 사색에 잠기는 것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부자가 뭐 하러 그러고 사느냐고 조롱했을 때 그가 한 말보다 그를 더 잘 정의하는 말은 없었다.
“부자라니. 난 그저 돈 많은 가난한 사람일 뿐이오. 그건 다른 것이오.”

그러면서 그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 사랑에 대해 배워야 할 유일한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인생이란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이었다.

사실 플로렌티노 아리사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별로 사랑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 외에도 그를 거의 알지 못했으며, 그의 편지에는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같은 열정이 담겨 있지 않았고, 그의 결심을 보여줄 그 어떤 감동적인 증거도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후베날 우르비노의 구혼은 결코 사랑의 이름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제안했다고 하기엔 이상한 세속적인 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즉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질서, 행복, 눈앞의 숫자 등 모두 더하면 사랑처럼 보일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거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었고, 이런 의문은 그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녀 역시 사랑이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의 문제가 집안의 질식할 듯한 기류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결혼 생할 자체의 속성으로만 이해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에 의해서만 결혼 생활이 존재할 수 있다는 황당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는 서로 혈연관계도 없고 거의 알지도 못하며, 성격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데다 심지어는 성기도 다른 두 사람이 갑자기 함께 살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며 어쩌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결정지어졌을지도 모르는 두 개의 운명을 공유하기로 약속하는 것은 모든 과학적 법칙에 위배된다는 입장이었다.

한편 우르비노 박사는 신혼여행 때처럼 아내를 완벽하게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던 사랑의 일부를 아내는 아이들에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인생 최고의 시기를 아이들에게 모두 바쳐버렸기 떄문이다. 그러나 그는 나머지 사랑으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웠다. 그토록 염원하던 가정의 화목은 페르미나 다사가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한 맛있는 음식이 나왔던 어느 축하 만찬 석상이라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상당한 양의 음식을 먹고 난 그녀는 너무나 맛이 있어서 다시 그만큼을 더 먹었고, 예의를 차리느라 더 이상 먹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그제야 가지 퓌레를 전혀 의심도 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두 접시나 비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통해 똑같이 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다른 방식으로는 함께 살 수도 서로 사랑할 수도 없으며, 이 세상에 사랑보다 어려운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너무나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결혼 삼십주년이 될 즈음에는 둘로 나뉜 한 몸처럼 되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의 생각을 짐작하는 경우가 무수히 일어났다. 공개 석상에서 한쪽이 말하려 했던 것을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하는 우스꽝스러운 사건도 발생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같은 공감을 불편하게 느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일상적인 몰이해와 순간적인 증오, 상호간의 거친 말과 부부 사이의 찬란한 영광의 번갯불들을 함께 극복해 왔다. 그 무렵은 두 사람이 서두르지 않고 지나치지도 않게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를 사랑했던 시기였다. 두 사람은 역경을 이겨내고 형언할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또렷이 의식하고 있었고 그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인생은 그들에게 또 다른 치명적인 시련을 가할 것이 분명했지만, 그런 것은 더 이상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반대편 기슭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정말 황당한 죽음이었어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죽음이란 없소.”
그러고는 괴로운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특히 우리 나이에는 말이오.”

과부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 첫해만으로도 충분했다. 남편에 대한 기억은 정화되어 더 이상 그녀의 일상생활이나 은밀한 생각, 혹은 아주 단순한 의도에도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으며, 그녀의 삶을 괴롭히지 않고 그녀를 인도하는 보호자가 되었다. 종종 그녀가 진심으로 필요로 할 때면 환영이 아닌 살과 뼈를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남자의 변덕을 부리지도 않았고, 가장으로서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그녀를 사랑했던 것처럼 다정한 말과 적절치 않은 키스로 사랑의 의식을 치르며 자기를 사랑하라면서 힘들고 귀찮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그가 아직도 살아서 집 안에 있다는 확신을 주었고, 그녀는 그런 확신에 기운을 얻곤 했다. 그것은 당시의 그녀가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그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그토록 사랑을 갈망했던 이유를, 그의 공적인 삶의 지주로 보이던 안정을, 실제로는 한 번도 찾지 못했지만 그녀에게서 찾으려 안달을 떨었던 이유를 이해했다. 어느 날 절망의 절정에서 그녀는 이렇게 소리친 적이 있었다.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 모르겠어요?” 그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은 채 특유의 몸짓으로 안경을 벗고는 어린애 같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투명한 눈물로 그녀를 적시면서 “훌륭한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안정이오.”라는 한마디의 말로 그의 참을 수 없는 지혜의 무게를 그녀에게 느끼게 했다. 과부의 고독을 처음 느끼던 시절, 그녀는 그 말이 당시에 생각했던 것처럼 치졸한 위협이 아니라, 두 사람에게 수많은 행복한 시간을 안겨준 천연 자석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였고, 날이 갈수록 시간이 덧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으며,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미칠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은 넘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정확하고 비극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그는 이성적인 방식으로 죽음이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니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까닭에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또한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깔깔대며 웃으면서 모든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향내 나는 평온한 선실에서 그런 감정을 억제할 수 있게 되자, 두 사람은 경험 많은 노인들처럼 조용하고 건전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것은 그 미친 여행의 가장 멋진 추억으로 그녀의 기억에 영원히 남게 될 사랑이었다. 선장과 세나이다가 생각했던 것과는 반대로, 두 사람은 이미 얼마 안 된 애인처럼 느끼지 않았고, 때늦은 연인으로도 느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부부 생활의 지난한 고통의 언덕을 뛰어넘은 듯했고,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직접 사랑의 심장부로 들어간 것 같았다. 열정의 함정과 환상의 잔인한 조롱, 그리고 환멸의 신기루를 극복하고,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늙은 부부처럼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사랑이지만,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그 사랑의 농도는 진해진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플로렌티노 아리사가 대답했다.
“태어난 이래, 나는 진심으로 하지 않은 말이 단 한마디도 없소.”
선장은 페르미나 다사를 쳐다보았고, 그녀의 속눈썹에서 겨울의 서리가 처음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 다음 플로렌티노 아리사와 그의 꺾을 수 없는 힘, 그리고 용감무쌍한 사랑을 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일지도 모른다는 때늦은 의구심에 압도되었다.
선장이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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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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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이자 피델 카스트로와 우정을 유지했던 정치 운동가이기도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작가의 조국은 혼란 그 자체인 것 같은데, 사실 중남미 국가 하면 떠오르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이 많은 것 같다. 축구 강국, 최고 등급의 커피, 쉽게 구할 수 있는 마약, 불안정한 치안, 부정부패와 카르텔 이외에 다른 것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잊을만하면 간간이 들리는 중남미 지역의 뉴스들 때문에 더 그런가? 멕시코에서 잘 나가던 사업가였지만 살해당한 한 아이돌의 아버지, 사실상 붕괴 위기인 나라를 탈출하는 베네수엘라 국민들, 수개월 단위로 일어나며 한 번 일어날 때마다 사망자가 50명이 넘는 브라질의 교도소 폭동 등 이런 불안정한 나라에서 어떻게 사나 할 정도로 섬뜩한 뉴스가 대부분이다. 찾아보니 콜롬비아는 중남미에서도 비교적 안전하며 전반적으로는 안정적인 것 같다. 어쩌면 콜롬비아 국민들 입장에서는 다른 주변의 국가들과 한꺼번에 엮여서 평가받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겠다.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중남미는 정확히 어떤 의미일까? 인터넷의 정보를 전부 믿을 수는 없으나 대략적으로 중남미는 지역적인 분류인 것 같고, 라틴 아메리카는 문화적인 분류인 것 같다. 즉, 아메리카 대륙에서 북쪽에 위치한 캐나다나 미국은 북미인 것이고, 중간에 위치하면 중미, 남쪽에 위치하면 남미인 것이다. 그럼 중미면 중미이고 남미면 남미이지 왜 중남미인가 할 수 있겠는데, 흔히 들어봤을 라틴 아메리카는 앵글로 아메리카와 구별되는 단어로, 여기서 앵글로 아메리카는 앵글로색슨 족의 영국이 지배한 캐나다와 미국을 의미하며, 현재 중남미에 위치한 대부분의 나라는 라틴 족의 지배를 받았기에 라틴 아메리카라는 것이다. 실제로 라틴 아메리카로 통칭되는 나라들은 라틴 족인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라틴 족의 종교인 가톨릭을 믿으며 라틴 족의 언어인 에스파냐 어나 포르투갈 어를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라틴 족의 문화나 사회 제도가 속속들이 흡수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는 원래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문화와 역사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으며 북미, 중미, 남미의 용어를 쓰는 것이 훨씬 중립적이라는 이야기도 함께 접할 수 있었다. 즉, 콜롬비아는 중아메리카에 위치한 나라로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가 독립한 나라로, 공용어는 스페인어, 국민의 절반은 원주민과 백인의 혼혈이며 대부분의 국민이 가톨릭 신자인 나라인 것이다. 식민지배, 독립, 다인종 다민족 사이에서의 차별. 이 분야에 자세한 지식이 없어도 어떤 문제들이 나타날지는 예상을 할 수 있는데 격동기를 살았던 마르케스 또한 이 시대를 온 몸으로 맞은 사람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 전학년 장학생으로 콜롬비아국립대학교에 진학하여 법률과 언론을 공부하던 중 자퇴하고 유럽과 미국의 특파원으로 신문 칼럼을 쓰던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미신, 토착 신화, 민담 등을 소재로 삼아 중남미 민중의 생활을 그려낸 소설을 발표한다. 문학적인 고귀함, 상업적인 성과, 노벨상 수상.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그의 삶보다 오히려 중남미의 역사가 궁금해지고, 그들의 삶이 궁금해진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51년 9개월 4일 동안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린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17살에 반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고 할머니가 되고도 잊지 못하고 있다가 남편이 죽자 다시 사랑을 고백하여 결국 그녀와의 영원한 여행을 떠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이렇게 간추리고 보면 다소 소름이 돋기도 하는데, 이 소설은 단순히 ‘crazy love’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 삶과 죽음과 노화와 질병과 사랑과 욕망을 다룬 소설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는 제목이 처음 접할 때는 낯설었는데, 다 읽고 나면 이보다 더 적확한 제목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한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한때는 뛰어난 지성과 왕성한 정력을 가졌던 의사 후베날은 여전히 인정받는 의사이기는 하지만 그의 기억력과 체력은 예전만 못하다. 그보다 어린 그의 체스 친구는 본격적으로 다가올 노화가 두려워 자살하고, 그의 죽음을 한편으로는 애도하고 한편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던 노의사는 평생 변함없이 삶의 의지를 불태우던 도중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사망한다. 장례식장에서 과부가 된 노의사의 아내인 페르미나에게 플로렌티노가 다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현재 시점에서 여기까지 진행된 소설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젊은 시절로. 젊음이란 무엇일까. 늙음의 반대가 젊음이라면, 그렇다면 젊음과 늙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열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과연 둘 사이에 차이를 둘 수 있을까. 그렇다면 둘 사이의 차이는 뭘까. 생식 능력? 체력? 소설 속 한 인물을 채 늙기도 전에 늙음이 두려워 스스로 삶을 마감하고, 또 다른 인물은 늙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발버둥치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또 다른 인물은 늙었다는 사실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이고, 또 다른 인물은 갈팡질팡하며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한다. 아직 늙지는 않았지만 늙음이란 어떤 것일까 요즘 고민이 늘어난 나에게 이 책은 여러 모로 생각에 잠기게 했다. 아, 물론 재미도 있었고.

이미 황혼에 접어든 두 사람은 이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그 싸움이 결혼 반세기 동안 가장 심각한 것이었으며, 두 사람에게 결혼 생활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소망을 불러일으킨 유일한 사건이었다는 놀라운 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나이도 들고 성질도 온순해졌지만, 두 사람은 가능하면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간신히 치유된 상처는 마치 어제 입은 상처처럼 다시 피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실컷 이용하도록 해. 넌 젊으니 가능한 한 모든 고통을 겪어보는 게 좋아. 이런 일이 평생 지속되는 건 아니거든.”

카드 점괘는 미래에 오랫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을 것이라고 나왔다. 그녀는 그 예언을 듣자 용기를 되찾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남자와 그렇게 행복한 운명을 누리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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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8
제인 오스틴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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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설득하는 것, 타인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는 것.
이보자 더 중요만 것은 내 자신을 스스로 설득해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내내들었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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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사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3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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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사원

700쪽에 달하는 에마를 읽고 난 직후라서 그런지 짧게 느껴졌다. 술술 읽혀버려 가뿐한 마음도 있었지만, 주인공인 캐서린의 이야기가 좀 더 길게 이어졌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이 책은 사실상 제인 오스틴의 최초의 소설이라고 하는데, 이성과 감성이나 오만과 편견이 여러 차례 개작을 거친 반면 이 소설은 주인공 이름을 바꾼 것 말고는 거의 처음 상태에서 수정이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에 나온 소설에 비해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몇몇 지점이 흥미롭다. 주인공인 캐서린은 당대 고딕 소설이나 낭만 소설에 몰두하고 있으며, 소설을 은근히 경시하던 당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당당히 이야기한다. 사교계에 이제 막 진출한 그녀는 사회 경험이 없기에 미숙하지만, 자신이 읽은 소설을 바탕으로 이해되지 않거나 궁금한 점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간다. 그 과정의 끝은 결국 우스꽝스럽게 끝나는데, 어쩌면 이것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을 설명해 주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전에 소설 읽기에 몰두했었고, 어느 순간 당대 소설의 전형적인 이야기에 한계를 느끼며,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 글 안에서 구현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그리고 그 소설로 인정받겠다는 다짐이 녹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점 때문에 작가는 나중에라도 이 소설을 다른 소설처럼 전면적으로 개작하지 못한 상태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작가로 살겠다는 결심이 본격적으로 설 무렵의 소설은 그 누군가보다도 작가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 있기 때문에. 다음 부분은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래드클리프 부인의 작품들은 매력적이지만, 또 그녀를 모방한 작가들의 작품도 매력적이지만, 그것들에는 적어도 잉글랜드 중부 지역의 인간 본성은 고려되고 있지 않은 듯했다. 침엽수림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악행이 도처에서 자행되는 알프스나 피레네 산맥에 대해서는 그 작품들의 묘사가 충실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스위스, 남프랑스라면 그 소설들에 재현된 것처럼 공포스러운 일들이 자주 일어날 수도 있었다. 캐서린은 자기 나라 너머에까지 그런 의심을 할 엄두를 내지는 않았고, 자기 나라라도 구태여 말해 보라면 북단이나 서단을 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 중부 지역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부인조차 국법에 의해서, 그리고 시대의 풍습에 의해서 안전한 삶이 확실히 보장되고 있었다. 살인은 용납되지 않았고 하인들은 노예가 아니었으며 독약이나 수면제는 대황처럼 약제사한테서 언제라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프스나 피레네 산맥 지대 사람들 중에는 마음 속에 선악이 혼재된 인물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지역에는 천사같이 흠 하나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악마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이 살 터였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그렇지 않았다. 영국인들의 기질이나 습관을 보면 사람마다 선과 악이, 섞이는 비율은 다를지라도 일반적으로 혼재되어 있다고 그녀는 믿었다. 이런 믿음에 따라 그녀는 비록 헨리 틸니와 엘리너 틸니에게서 앞으로 약간의 사소한 불완전한 점들이 보이더라도 놀라지 않을 터였다.

사람마다 선과 악이 일반적으로 혼재되어 있고, 자신이 좋아하고 믿는 사람에게도 약간의 사소한 불완전한 점들이 보여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이 태도는 그녀의 소설과 인간관계 전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랬기에 당시 친척들의 일을 도와주며 살아가는 독신 여성의 삶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꾸준히 글을 쓰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약하지만 때로 강인하고, 냉정하지만 때로 자비로운, 모순 덩어리인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녀의 소설은 전부 여주인공의 결혼에서 끝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제인 오스틴이 두 번 결혼할 뻔했으나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삶을 살았기 때문이겠지. 만약에 그녀가 결혼을 했더라면 결혼 생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깃든 멋진 소설을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아마도 그랬다면 오히려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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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3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김영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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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마

에마는 제인 오스틴의 네 번째 소설이자, 그녀 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소설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의 반응을 얻은 정도였던 이성과 감성 이후 발간된 해에 바로 매진되어 재판을 찍었던 오만과 편견, 뒤이어 역시 곧 재판을 찍은 맨스필드 파크 다음 소설이 이 소설이다. 이 소설은 당시 궁정의 요청으로 섭정 동궁에게 헌정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그녀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로부터 2년 뒤 아마도 암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제인 오스틴은 사망하였고, 사후에 설득과 노생거 사원이 출판되었다. 작가 생활의 전성기가 길지 않았다는 점이 안타깝고 아쉽게 느껴지는데, 아마도 가난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은퇴 및 사망 후 친척들의 도움으로 살았던 그녀의 삶이 계속 마음을 붙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일 것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불규칙적으로 한 권 한 권씩 읽어나가고 있는데,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에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의 순서는 출판되었던 순서가 아니다. 88번째 권이 오만과 편견이고, 132번째 권이 이성과 감성, 283번째 권이 에마, 348번째 권이 설득, 363번째 권이 노생거 사원이다. 맨스필드 파크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아마 언젠가는 나오리라고 본다. 이 순서는 아마도 대중적인 인기, 문학을 업으로 하는 이들의 평가를 종합한 결과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은 단연 1등이고 그 다음이 이성과 감성... 이런 식으로 나름의 서열이 매겨진 셈일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에마는 처음 읽어보는데 내용은 알고 있었다.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영화를 보지는 못했으나 포스터만 보고도 사랑스러워 영화 내용과 사진을 여러 번 찾아봤었다. 다소 비호감일 수 있는 여주인공이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기네스 펠트로 특유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다만 섣불리 읽기를 망설였던 것은 두께 때문이었다. 책의 두께는 700쪽이 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책을 볼 때 흔히 쓰는 독서대에 올려놓기 힘든 정도였다.

700쪽이 넘는 책이지만 분량에 비해서 스펙타클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다 읽고 나면 별 일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마 주변의 사람들에 대핸 서술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 소설이 결코 단조롭지는 않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이해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인 에마는 똑똑한 여성이기는 하지만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집순이에 가깝다. 이 책의 시작은 에마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데, “미인이지 총명하지 부유하지 거기에다 안락한 가정에 낙천적인 성격까지 갖춘 에마 우드하우스”는 “오냐오냐하는 무척 자애로운 아버지의 두 딸 가운데 동생”으로 “언니가 시집을 간 까닭에 진작부터 집안 여주인”이 된 여성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아예 초반부터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성이라고 선언해버린 여주인공이 부유한 집안의 사실상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사실을 본인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다소 거만하게 보이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다. 그 부분을 절대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마음으로만 드러나기 때문에 소설 속 모든 사람들은 에마에 대해 호감을 가진다.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성이 이렇게나 친절하다니?’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독자들은 자기 기준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속으로 무시하는 에마가 소위 ‘재수가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속마음은 작가랑 독자만 아는 것이니까.

아마 작가도 그 부분을 생각했는지 생전에 에마는 독자들이 좋아하기는 어려운 인물이라고 생각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제일 좋아했다는 생각을 밝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분명히 에마는 여러 모로 허점이 많기는 하지만 소설 속의 나이틀리나 제인 페어팩스를 제외하면 제일 사려 깊고 분별력이 있다는 점은 맞다. 웨스턴 부인이 된 테일러 양조차도 에마보다 판단력이 뛰어나지는 않다. 이것은 에마의 나이가 나이틀리보다는 20살 가까이 아래이고, 든든한 부모나 재산을 물려줄 친척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외모와 지혜로만 세상을 살아 나가야하는 제인과는 달리 “인생의 여러 복을 한 몸에 타고난 듯”해 “세상에 나와 스물한 해 가까이 살도록 걱정거리랄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에마와 같은 조건에 처하면 좀 지나치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고 자신을 과대평가한다는 것이 문제점인데, 그녀도 이 두 약점 때문에 그녀가 누리는 많은 즐거움이 희석될 위험이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런 위험을 전혀 느끼지도 못했으니, 그녀에게는 이 약점들이 무슨 불운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소설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네 번째 문단인데, 마치 작가가 앞으로 이 여성이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녀의 약점 때문에 많은 즐거움이 희석될 것이니 어떻게 그녀가 성장할지 지켜봐 달라는 당부처럼 보인다. 사실 에마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다소 속물적인 경향이 있지 않던가? 현대의 우리도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다른 사람들 서열을 매기고, 맨 위에 나를 올려놓으면서 즐거워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그런 가치에 전혀 관심 없는 척 태연히 남들을 대하며 남들에게 관대하고 자상하고 상냥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또 속으로 기뻐하는 마음이 없을까?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옵저버>가 선정한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하는데 이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히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데(말도 안 될 정도로 개인적인 기준 같아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던 것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중에서 꼽으라면 그래도 오만과 편견이 에마를 제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서 한 인간 안에서 이렇게 모순이 되는 점들이 많으며 그것이 극복되는 과정 속에서 한 인간이 성숙해지는 과정을 묘사한 부분을 읽어나가며 충분히 제인 오스틴의 소설 중 가장 윗길로 꼽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은근히 자신의 교양을 자랑하고 싶고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속으로 비웃거나 자신이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지성을 갖춘 사람들에게 경쟁심을 느껴 폄하하고자 하는 모습들은 작가가 한 때 가졌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이 소설이 제인 오스틴의 다른 소설에 비해 길고, 작가가 스스로 제일 좋아하는 주인공이라고 밝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고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성숙해진 작가는 소설 마지막에서 성장한 에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된 마지막 소설이자, 그녀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창작한 소설이다. 그러기에 이 소설보다 앞서 창작된 소설에는 없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지은 소설 설득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오스틴 자신이 에마를 두고 오만과 편견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 작품이 재기에서 떨어진다고 볼 것이고, 맨스필드 파크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이 작품이 양식에서 떨어진다고 볼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오만과 편견의 독자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공감이 갔고, 맨스필드 파크는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나중에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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