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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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1960년대 영국의 시대 분위기와는 달리, 젊은 부부는 서로에게 충실하며, 성실하고, 무엇보다 가족의 가치를 인생의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 두 사람은 전통적인 가정, 대여섯 명의 아이가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무리하여 큰 집을 구입하고, 아이가 태어난다.

 

하나, 둘, 셋, 넷... 아이들은 전부 사랑스럽다. 부모를 비롯하여 친척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다. 그리고 다섯째 아이. 그런데 이 아이로 인해 이상적으로 보였던 가족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언뜻 보면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생각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안 봤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설은 그 영화와는 완전히 다르다. 온 가족의 파멸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이지만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어쨌든 각자의 자리를 지키는 결말을 보여주니까. 물론 그 두 세계는 절대 섞이지 않겠지만.

 

이 소설은 여러 층위로 읽힌다. 작가는 절대 그렇게 보지 말라고 했지만 계급의 문제로도 읽히고, 문명과 야만의 대립으로도 읽히며, 가족주의에 대한 허상에 대해서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주인공인 해리엇과 벤, 그러니까 모자 관계에서 출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웹툰 작가가 <케빈에 대하여>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있었다.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엄마인 자신의 경우, 자식을 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를 키우고 있는지 의식하게 된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와 연결되어 있던, 마치 내 팔이나 다리처럼 나의 한 부분이었던 존재가 나와의 연결을 끊고 세상에 나와서 독자적으로 크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경이롭겠지만 한편으로는 충격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한 부분에서 출발했지만, 나와는 분명히 다른 존재. 거기에 대한 원천적인 공포심을 바탕으로 하고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자식일 것이다. 굳이 문학 작품을 동원해서가 아닐지라도, 우리 주변에서는 이런 경우가 너무나 많다. 자식의 모든 것을 장악하려고 하는 부모와, 거기에 대항하는 자녀들 간의 이야기가 종종 들린다. 이 책의 해리엇과 데이비드도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향을 완벽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거기에 보란듯이 다섯째 아이는 그 체제 밖에서 있기를 선택한 것이고.

 

이 책을 보다 보면 작가의 개인사가 자꾸 떠오르게 된다. 영국 국적이지만 이란에서 출생하였고, 짐바브웨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두 차례 결혼하고 두 차례 이혼하였으며, 세 자녀를 두었던 그녀의 삶. 문명과 야만의 대립, 통제할 수 없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리 상태는 상당 부분 그녀의 삶에서 발췌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팟캐스트 덕분이었는데, 두 남성 진행자의 이야기가 흥미롭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좀 아쉽기도 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이중적인 심리가 사실 이 책 전반에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어서이다. 이 책만큼은 여자 게스트를 포함시키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동일한 팟캐스트에서 <만들어진 승리자들>을 다룬 적이 있는데, 그 책에서 상대적으로 여성이 역사에 기록되는 횟수가 적은 것은 임신과 출산, 육아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절대 경력으로 인정받을 수 없으며, 오히려 개인적인 발전을 저지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아마도 훌륭한 예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이 책만큼은,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경험한 여성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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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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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베르테르를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그때는 읽는 내내 베르테르가 잘 이해되지 않았고, 마지막 장면에 자살을 해 버리는 충격적인 소설로만 기억에 남았다.

 

다시 베르테르를 읽게 된 것은 지하철 신문 때문이었다. 박건형, 송창의가 더블 캐스팅 된 동명의 뮤지컬에 대한 기사와 광고를 보고 호기심이 들었다. 해사한 얼굴의 송창의와 그에 비하면 좀 더 저돌적인 인상의 박건형, 이 두 사람이 베르테르의 타협을 모르면서도 순수한 고집을 지닌 모습을 잘 반영했다고 느껴졌다. 여기에 더 불을 붙인 건 민영기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다른 작품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이 배우는 내가 참 좋아하는 스타일의 배우이다.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유머 있는 모습, 그리고 날카롭지만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고 청량한 목소리 때문에 더 반했던 것 같다. 이 배우가 초연에서는 베르테르였는데 이번에는 알베르트로 나온단다. 결혼 이후 생각이 바뀐 부분이 많았다는데 그 기사를 보고 더더욱 뮤지컬이 보고 싶었다.

 

그게 여의치 않으니 책을 보게 된 것이다. 확실히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쏙쏙 머리에 들어오고 가슴을 푹푹 찔렀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베르테르가 답답한 것은 여전했다. 아니 그 당시 베르테르가 이해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기 때문에 더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가슴으로는 베르테르가 이해되어도 머리로는 납득되지 않았다.

 

나는 여자니까, 아무래도 로테의 입장에서 베르테르를 보게 될 수밖에 없다. 여자의 입장에서 베르테르는 어떤 남자일까. 과연 로테는 베르테르를 사랑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갔다고 한다. 실제로 뮤지컬에서 엄기준이었나? 아무튼 이 배우가 베르테르를 맡았을 때는 로테가 베르테르를 사랑했다고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베르테르가 되어버린 자신이 미쳐버릴 것 같아서-_-;;

 

베르테르는 어찌 보면 나약함과 우유부단의 상징일 수도 있다. 소설 내내 그렇게 보이던 그가 마지막 순간에 권총을 자신에 머리에 댄 것은 어찌 보면 동일한 인물의 행동으로 보이기에 놀랍기도 하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분명히 빌헬름은 로테의 결혼 전 베르테르에게 충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용기 내어 그녀에게 결혼 전에 고백하던가, 아니면 접으라고. 이런 절친의 충고에 베르테르는 나름의 이유를 대어 자신의 주저함을 변명한다. 그 이유가 뭔지 벌써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보기에 같잖은 이유였던 것 같다. 아마도 베르테르는 자신에게 천상의 존재나 다름없던 로테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을 무의식중에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누구 말대로 결혼은 현실이니까.

 

이렇게 현실에 살기를 부정하던 베르테르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한 로테를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마치 엄마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처럼 오직 그녀만을 그리는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이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버리고 그녀의 마음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자 견딜 수 없게 된 베르테르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다. 내가 없어져야 그 둘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긴 채. 유치하고 어리석은 사고이다. 사랑은 ‘all or nothing’이 아니며, 때로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으며,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절벽을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세우고 내려야 할 때도 있으며, 시간이 흐른 뒤 뒤돌아보며 추억할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해 상대에게 고마워하며 다음 인연을 위해서 내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는 것을, 그게 성숙한 사랑이라는 것을, 어른들의 사랑이라는 것을, 베르테르는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사랑이 과연 진짜 어른의 사랑인지 의심하게 되고 그의 슬픔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베르테르는 과연 ‘여자’ 로테를 ‘남자’로 사랑한 걸까.

 

아마도 로테도 이 정도는 눈치 챘을 것이다. 나는 여자니까, 단언할 수 있다. 로테가 사랑한 것은 알베르트라고. 베르테르에게 보낸 것은 연민이라고. 누나가 동생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정도의 애정일 뿐이라고.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난 후 동생들을 위해서는 엄마의, 아버지를 위해서는 안주인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모성애가 넘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넘치는 모성애로 맑은, 한편으로는 고지식한 베르테르를 가엽게 여기며 끌어안았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버거운 짐을 짊어진 그녀에게 알베르트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꺼이 로테의 부담을 함께 감당하기로 일찌감치 결정했던 알베르트가 로테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또 알베르트가 곁에 없었더라면, 그녀는 결코 그녀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테르가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베르트가 로테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며 흥분하는 대목이야말로 베르테르의 좁은 시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테 같은 여자가 왜 내가 아닌 알베르트를 택했을까? 대화도 잘 통하고 영혼의 교감도 잘 되는 내가 아닌,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알베르트를 왜 택했을까? 이런 고민을 왜 베르테르는 해보지 않았을까?

 

이 소설은 대문호 괴테의 젊은 날의 자전적 소설이다. 괴테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어리석은 행동, 하지 말라고. 비록 이 소설의 발표 이후 미친 듯이 ‘베르테르 효과’가 번져갔지만 정작 이 소설을 만들어 낸 작가의 시선은 명확한 것이다. 이런 사랑, 이런 유치한 사랑, 딛고 일어나 아이에서 어른이 되라고 말이다. 거부당한 사랑에 힘들어하던 괴테는 이 소설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연의 슬픔에 매몰되어버린 베르테르, 실연의 슬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괴테, 우리의 슬픔은 과연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진정으로 작가의 생각에 동의하고 싶다면 베르테르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슬픔의 종착은 어디여야 할 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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