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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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는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페터 한트케 세트가 있다고 한다.

소망 없는 불행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관객모독


관객모독은 읽었고,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도 이번에 읽었으니 다음 차례는 소망 없는 불행이다.


이 책은 제목이 참 인상적이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얼마나 불안할까.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도 불안한데.

이 책의 제목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2002년 월드컵 당시 4강전을 결정짓는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간 홍명보가 환히 웃으며 뛰어오는 장면이다.

만약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스페인 골키퍼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으리라.


이 책의 첫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하러 가서는 자신이 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꾼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것을 해고 표시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났다.그는 길에서 팔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옆으로 지나가는 차는 택시가 아니었다. 사실 블로흐가 택시를 부르려고 팔을 높이 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났다. 블로흐는 고개를 돌렸다. 택시 한 대가 뒤에 서더니, 그에게 빨리 타라고 했다. 블로흐는 몸을 돌려 차를 타고 나시마르크트로 가자고 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골키퍼인 셈이다. 아마도 유럽 작가가 쓴 소설이니까 주인공이 축구 선수였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나 일본 작가였으면 야구 선수였을 수도 있다.

시작에서부터 순간순간의 '삑사리'가 느껴진다. 이 골키퍼 출신 조립공은 앞으로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야말로 이런 '삑사리'를 경험하게 된다. 독자도 자연스레 같이 느끼게 된다.


표지 그림은 에드바르 뭉크의 1893년 작품 절규인데, 그야말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감,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망연자실, 말문이 막힐 정도의 막막함이 흘러 나오는 그림의 정서가 소설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찰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하고 블로흐가 말했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키커가 맹렬히 달려왔다. 환한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는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페널티 키커는 그의 두 손을 향해 공을 찼다.


이 책은 뒤의 작품 해설이 아주 훌륭한데, 일부를 여기에 옮기고자 한다.


공사장에서 눈짓 한 번으로 일꾼을 해고한다? 독자가 볼 떄 이것은 석연치 않은 일이다. 서류로 통지된 것도, 말로 전달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현장감독이 힐끗 쳐다본 것을 주인공이 해고 표시로 지레짐작하고 공사장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중략)

블로흐가 정식 직원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고 추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해고라는 표현이 어디에도 없는데 주인공이 스스로 그렇게 믿고 떠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독자가 보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블로흐라는 이 화상이 왜 다른 일꾼들보다 늦게 공사장에 출근했느냐 하는 것일 테고, 혹 주인공은 정해진 시간에 순응하는 힘을 이미 상실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블로흐가 노동자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해고를 지레짐작으로 판단하고 공사장 밖으로 나오자, 주변이 전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화창한 10월 어느 날이었다. 노점 판매대에서 따끈한 소시지를 시켜 먹은 후 그 사이를 지나 극장 쪽으로 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되도록 많은 걸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극장 안으로 들어와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8쪽) 왜 주면 모든 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으며, 극장 안으로 들어와서야 안심이 되었을까?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 주인공으로서는 당연한 심리 상태가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어지는 사생활 묘사를 보면 꼭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지만 아무에게도 연결되지 않고, 길가에 서 있는 순경에게 인사를 해 보지만 순경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다.(8쪽) 공원 주변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처에게 전화를 걸어 연결이 되지만 그녀는 블로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는 공원 커피 숍에 들어가 맥주를 한 잔 주문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가져오지 않자 그냥 나온다.(16쪽)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는 블로흐가 해고 이전부터도 이미 친구들과 소통이 단절된 상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또 해고 이전에 결혼을 했었는데 지금은 헤어져서 혼자 살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저런 작은 일상 생활, 즉 길거리에서 경찰과 인사를 나누는 일이라든가 공원 커피숍에서의 맥주 주문 등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주인공은 사생활에서도 이미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주변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과 소통이 단절된 상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또 해고 이전에 결혼을 했었는데 지금은 헤어져서 혼자 살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저런 작은 일상 생활, 즉 길거리에서 경찰과 인사를 나누는 일이라든가 공원 커피숍에서의 맥주 주문 등도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주인공은 사생활에서도 이미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주변과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중략)

지난 19세기 문학의 주인공들은 이미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를 탄식하고, 신의 죽음과 인간성 상실을 못내 서러워하며, 분노에 찬 반항도 해 보고 영웅의 객기 같은 것도 부렸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블로흐의 모습을 보면, 그 모든 것이 이제는 철 지난 유행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의 블로흐에게는 그가 일하는 곳에 늦게 출근한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는 대화를 주고받을 짧은 순간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대화란 주체가 하는 행위이지 도구에게는 가당치도 않는 일이다. 그저 눈짓 한번으로 달랑 목이 떨어져 쫒겨난다. 그런 시대에 그와 우리가 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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