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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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는 일단 표지 그림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표지 그림은 폴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이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은 N 포털 사이트를 참고했다.

사이트의 지식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자화상은 폴 고갱이 18914월 타히티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당시에 42살이었던 고갱은 근엄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였으며 침착하고 사려 깊었으나, 때로는 냉소적이기도 했다는 동료의 표현이 있다. 고갱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거울 맞은 편에 서서 고전적인 방식으로 작업하였다고 하는데 평행한 붓터치와 고르게 분포된 빛 효과 덕분에 그의 모습은 자신 있게 그려졌고, 야성적인 표정도 강조되었다고 한다. 고갱의 주위로 보이는 두 작품은 그가 1889년 완성한 두 점의 작품이라고 한다. 좌측에 보이는 작품은 황색 그리스도의 일부분으로 거울에 반사되어 좌우가 뒤바뀐 채 보이는 데 당시 이 작품은 고갱에게 1890년 겨울에 숙식을 제공해 준 친구인 에밀 슈페네커의 아틀리에에 있었다고 하는데 고갱은 이 친구와 심하게 다투고 난 후, 초상화를 완성하기도 전에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오른쪽에 보이는 작품은 그로테스크한 얼굴 형태의 자화상 항아리, 1890년에 에밀 베르나르가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후 슈페네커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이 책의 표지에 딱 맞는 그림이라고 생각된다. 아마도 출판사에서는 표지 그림으로 폴 고갱의 어떤 그림을 넣을 것인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 책은 결국 평범한 직장인으로 만족하면 살고 있는 것 같던 한 작가가 대체 왜 예술의 세계로 뛰어들며 가족도 버리고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는지 그의 마음을, 어두운 동굴에서 손전등 하나로 더듬거리며 출구를 찾아가듯 조심스럽게 짚어가는 책이다. 타히티로 가기 직전에 완성한 자화상. 작가 스스로 자신을 표현한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번민과 고민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한 인간의 의지와 열정이 보인다. 자화상 속 남자는 전혀 혼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갈 길을 명확히 결정한 사람이다. 자신감 있고 안정되어 보인다.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도 느껴질 정도로.

이 작품의 제목은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이다. 두 가지 그림이 등장하는데 왼쪽에 보이는 작품만 제목에 등장한다. 숙식을 제공한 친구의 아틀리에에 있다가 심하게 다투고 난 후 이 그림을 완성하기도 전에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는 뒷이야기를 알고 나니, 어쩌면 서머싯 몸이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스트로브와 블란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면에서 박완서 작가의 나목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나레이터가 등장하는데 서머싯 몸 자신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의학교를 졸업하고 면허를 얻지만 작가 수업을 위해 의업을 포기했다는 작가의 이력을 읽고 나면 뒷부분에 등장하는 자신의 두 동창 의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처음 책을 읽을 때에는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이 너무 많은데 다시 읽으면 그은 밑줄을 다시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면 작가의 감정 과잉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자기애 때문인가 싶기도 한다. 의사 면허를 얻지만 의업을 포기하고 작가가 된 서머싯 몸이 고갱에게 매혹된 이유는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했다는 생각이 들고, 소설이 끝날 때까지 출발점에서 크게 멀어진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사회의 모든 관습을 극복하고 예술가가 된 자기 자신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 고갱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 소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찬미이자 세상에 대한 변호라는 생각을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실제로 소설에서는 고갱(=화자)을 제외한 주변 인물들 중 긍정적으로 묘사된 인물이 거의 없다. 드물게 긍정적인 면이 부각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또한 고갱(=화자)에 비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물들이다. 고갱(=화자)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주변 사람들을 지나칠 정도로 형편없게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떤 구절에서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작가들을 알지 못했다. 이제 보니 아주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내게는 그들이 한 번도 진짜 작가들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21P

 

로즈 워터퍼드는 냉소주의자였다. 그녀는 인생을 소설 쓰는 기회 이상으로 보지 않았고 대중을 소설의 소재로 보았다. 대중 가운데 자기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집에 초대하여 아낌없이 대접했다. 그녀는 명사들에게 약한 그들 대중을 장난스러운 경멸감을 가지고 보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 앞에서는 저명한 여류 작가답게 점잖게 처신했다. -24P

 

더크 스트로브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꼴은 우스꽝스러웠다. 좀 초췌하고 여위기라도 했더라면 동정을 살 수도 있었으련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뚱뚱한 데다 불룩한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불그레했다. 늘 말끔하게 차리고 다니는 사람이라 여전히 말쑥한 검은 웃저고리에 언제나 약간 작아 보이는 중절모를 멋쟁이처럼 쓰고 다녔다. 게다가 배까지 나오는 중이어서, 슬픔의 흔적이라곤 도무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때보다 더 돈 많은 장사꾼처럼 보였다. 때로 그처럼 사람의 외형이 정신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크 스트로브는, 말하자면, 뚱뚱보 토비 벨치 경의 몸뚱이에 로미오의 열정을 지닌 격이었다. 착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늘 실수투성이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진짜 훌륭했지만 평범한 그림밖엔 그려내지 못했다. 감성은 유별나게 섬세하면서도 행동은 투박했다. 남의 일에는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면서도 정작 자기 일에는 그렇지 못했다. 그처럼 허다한 모순을 안겨주고선 이 사내로 하여금 당혹스럽고 냉엄한 세상에 맞서게 한 걸 보면, 조물주의 장난도 잔인하기만 하다. -164P

 

이 소설이 출간 후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작가의 다른 소설이자 먼저 출가된 인간의 굴레에서라는 소설의 인기까지 끌어올렸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소설 자체의 훌륭함보다는 폴 고갱이라는 화가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점은 아보카도에 대한 주석이었다. 타히티에서 화가가 살았던 집 뒤꼍에서는 아보카도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있었는데, 이 아보카도 열매에 배 모양의 과일이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요즘 아보카도를 모르는 한국인이 누가 있겠나. 아마 최근에 나온 책들에는 아보카도를 따로 주석을 달아서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이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가 되었을 때에는 아보카도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책이 사랑받고 있는지 새삼 알았다. 인류가 고갱에 대해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이상 이 소설도 계속 읽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점에서 종점으로 오가는 전차와도 같아서, 이 전차를 타고 다니는 승객의 수를 거의 정확히 알아맞힐 수 있었다. 생활이 너무 편안하리만큼 정돈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끔찍한 생각이 들어서 내 작은 아파트를 비워 주고 얼마 안 되는 소유물을 처분한 뒤,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결정했다. -88P

 

 

셰익스피어도 이아고를 고안해 냈을 때, 달빛과 상상의 실을 엮어 짜 데스데모나를 상상해 냈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 (중략) 자기가 창조해 낸 인물에 살과 뼈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다른 식으로는 방출될 수 없는 자신의 본능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198P

 

세상에는 자비로운 섭리에 따라 분명 독신으로 살게끔 운명지어졌으면서도 고집이 세거나 또는 불가피한 사연으로 그 천명을 거스르는 사내들이 있다. 결혼한 독신주의자처럼 가엾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231P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태어난 곳에서도 마냥 낯선 곳에 온 사람처럼 살고, 어린 시절부터 늘 다녔던 나무 우거진 샛길도,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바글대는 길거리도 한갓 지나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가족들 사이에서도 평생을 이방인처럼 살고,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보아온 주변 풍경에도 늘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끼며 지낼지 모른다.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 바로 그러한 느낌 때문에 그들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뭐가 영원한 것을 찾아 멀리 사방을 헤매는 것이 아닐까. (중략) 그러다가 때로 어떤 사람은 정말 신비스럽게도 바로 여기가 내가 살 곳이라 느껴지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그곳이 바로 그처럼 애타게 찾아 헤맸던 고향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들이 죄다 태어날 때부터 낯익었던 풍경과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정착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이곳에서 휴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254P

 

그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둥근 구멍에 모난 못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곳에는 별의별 구멍이 다 있어, 제 구멍을 찾지 못하는 못은 없었다. 여기라고 해서 그가 더 점잖아졌다거나, 이기적인 성격과 무지막지한 성질이 더 줄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환경이 그에게 유리해졌을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만 살았더라면 그도 다른 사람보다 더 고약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야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서는 기대도 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았던 것, 곧 동정을 얻었다. -2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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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연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0
D.H. 로렌스 지음, 정상준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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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편집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1부를 1권으로 2부를 2권으로 하지 왜 굳이 2부를 쪼개어서 앞부분을 1권 앞에 넣었는지 알 수가 없다. 1, 2권의 분량을 맞추려고 한 것 같은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양쪽의 균형을 맞추고 싶었다면 차라리 쪽수가 적은 편에 작가의 소개나 당시 영국의 시대상이나 사회상을 소개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는 빠지지 않는 작가에 대한 소개도 없고 표지 그림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가위질을 당했던 소설의 역사를 생각하면 완역본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작가에 대한 소개나 표지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소설 읽는 재미가 더 풍성했을 것이다. 표지의 그림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한데 마치 아들이 그린 어머니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하다. 폴은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소녀 같다고 생각한다. 그림 속의 매혹적이고 황홀한 소녀가 내 아들들은요, 내 연인들은요... 하고 입을 열어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에 책을 읽다 보면 이건 어머니의 광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올가미라든지... 사랑과 전쟁이라든지... 등등이 떠올랐는데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굳이 광기라면 아들의 광기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광기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소설 속에서 어머니의 남편이자 아버지도, 다른 형제들도 중요하지 않다. 폴이 만나는 여인들도 일종의 오브제로 느껴진다. 다 읽고 나면 그저 작가의 자아도취이자 나르시시즘의 끝판왕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폴은 어머니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충실했기 때문에 그의 영혼에는 자기희생의 만족감이 있었다. 그녀는 그를 가장 사랑했고 그는 그녀를 가장 사랑했다. 그러나 폴은 어머니의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새롭고 젊은 삶은 너무나 강력하고 긴박해서 다른 것을 향하여 돌진했다. 그것은 그를 미칠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이것을 알아차렸고 미리엄이 그의 이 새로운 삶만 가져가고 그 뿌리는 자기에게 남겨주는 여인이기를 쓰라리게 원했다. 그는 미리엄에 대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싸웠다.

 

폴은 어머니가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는 굴욕과 자의식으로 고통스러웠다. 이제 그의 삶에는 어머니에게 결코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그에게는 어머니와 분리된 삶이 있었는데-그것은 그의 성생활이었다. 그 나머지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속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를 그녀에게 속여야 한다고 느꼈고 그것이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들 사이에는 어떤 침묵이 있었는데 그는 그렇게 침묵하는 가운데 어머니에게서 자기 자신을 방어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에 의해 저주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 때때고 그는 어머니를 미워했고 그녀의 구속을 끊어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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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9
D.H. 로렌스 지음, 정상준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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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연인의 원제는 아들들과 연인들이다. 복수형과 단수형의 차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민음사 판에서는 1권과 2권으로 나눠져 있는데, 원래 아들들과 연인들의 이야기는 1부와 2부로 나눠져 있지만 2부의 일부가 잘려서 1권에 붙어 있다. 큰 아들에 관한 이야기와 작은 아들에 관한 이야기로 보면 되겠다. 이 사이에 딸도 있지만 아들 둘에 비하면 비중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1권을 읽다 보면 초원의 빛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10대의 소년소녀가 학교를 졸업한 후 서로 어울리고 일하며 사랑을 느끼고 가정을 꾸리는 이야기인데, 물론 양 쪽에 등장하는 가족의 분위기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이상화했던 남자와의 결혼 후 현실을 아프게 깨닫고, 이어서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을 이상화하는 한 여인의 삶을 훑어가다 보면 200여 년 전의 영국의 이야기가 현대의 한국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에 답답하다. 광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가 어머니 사망 후 스승의 아내였던 연상의 여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소설은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포장해내었다는 생각도 들고, 자기 합리화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고, 일종의 현실 도피이자 회피처럼 보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이 소설이 그저 작가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소설 속 모렐 부인의 속마음은 작가가 추측해서 써낸 것이고 중간 중간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조차 작가는 애써 변호하며 슬프지만 아름답게 그려내려고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의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아이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자기만의 생활이 없었고 청소하고 요리하며 아이를 돌보고 바느질하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바빴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젖혀놓고 실상 아이들이라는 은행에 맡겨놓아야 했다. 그녀는 아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기대했으며 아이들이 자랐을 때 자신은 아이들의 뒤에서 밀어주는 원동력으로 남아 있으면서 아이들은 무엇을 하게 될까 환상에 잠겼다. 벌써 윌리엄은 그녀에게 연인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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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일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9
기 드 모파상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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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기구했던 세상을 살았던 여자의 일대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원제는 여자의 일생이 아닌 그냥 어느 일생이었다고 한다. 요즘 트렌드는 의역된 제목들의 원제를 찾아주는 것 같은데 아마 이 제목이 임팩트가 워낙 크기에 이 제목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일생이라는 제목만 보면 좋게 말해 중립적이고 나쁘게 말해 밍밍하게 느껴지는데 여자의 일생이라고 하는 순간 1800년대 프랑스가 아니라 마치 광복 이후나 한국 전쟁 이후의 대한민국, 혹은 응팔세대들의 청춘 시절의 대한민국으로 무대를 옮겨도 될 것 같은 친숙함이 있다. 샹송이 아니라 트로트 한 곡조가 저절로 뽑아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의 일생이라고 포털 사이트에 치면 모파상의 소설 뿐 아니라 이미자의 노래, 모파상과는 관련 없는 영화도 함께 뜬다. 요즘과는 안 맞는 제목일 수도 있지만, 그럴 때는 원제인 어느 일생을 떠올리며 읽으면 되겠다.

어느 일생... 그러니까 인생이란 정말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방향에 데려다 놓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의지나 노력은 전혀 의미가 없거나, 발휘되더라도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반영된다. 다정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무능하고 다소 허세가 있으며 결단력이 부족한 부모, 반대로 생활력 있고 결심은 빠르고 고집은 있으나 감정적으로 존중해주지 못하는 남편. 사실 양쪽의 장점만 잘 조합되었더라면 어떻게 시골 귀부인으로 무난하게 살 수도 있었을 수 있던 잔느의 인생이 잔인하리만큼 서서히 추락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괴롭다.

불행 중 다행으로 잔느의 인생을 수렁에서 건저 올리는 튼튼한 동앗줄과 바구니가 각각 하나씩 등장하는데, 그것은 예전에 남편과의 불륜으로 인한 사생아의 출산으로 잔느의 곁을 떠난 하녀 로잘리가 하나이고, 나머지 하나는 방탕하게 살던 아들 폴에게 남겨진 어미 없는 딸이다. 아이러니한 것이, 만약 남편이 로잘리와 외도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상당한 양의 재산을 로잘리에게 주어 집을 떠나게 하는 일이 없었다면, 말년의 잔느가 의탁할 곳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주인에게 받은 재산을 착실히 불려나가고, 또 주인 부부에 대한 죄책감이 있기에 로잘리는 잔느의 튼튼한 안식처가 된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 폴의 방탕함은 잔느의 추락을 가속화했지만, 그 방탕함 속에서 생긴 딸인 손녀를 보며 잔느는 다시 희망을 갖게 된다. 과연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좋은 것과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말년의 잔느가 로잘리의 보호 안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정신 차린 아들 폴과 손녀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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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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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나서 이방인까지 읽게 되었다.

삶의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일반인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살면서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으로부터 내가 소외당한다는 느낌, 온전하게 이방인이 되었다는 느낌을 한 번이라도 받은 적이 있다면 뫼르소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붙잡는 것이 느껴져도 살아갈 그 어떤 목적도 떠올리지 못하고, 나를 위해 변명하고 싶은 의욕도 생기지 않고, 그 어떤 행위에도 쾌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다면 이 소설을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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