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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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위대한 개츠비를 언제 처음 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2013년에 개봉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책을 최소 2번 이상 읽은 것은 확실하다.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 영화도 봤는데 1970년대에 개봉한 영화이니 영화관에서 본 것은 아니고 DVD로 봤다. 그게 2009년인데 알라딘에 정보가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었다. 그때 쓴 리뷰에 보면 중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던 고전인데 그때는 주인공도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내용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리뷰를 쓸 당시에는 전부는 아니지만 약간은 이해가 된다고 썼다. 위대하다는 것은 반어적인 표현일지, 사랑 하나 밖에 몰랐던 순수했던 개츠비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는 표현일지 잘 모르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중학교 때에는 세계 명작이고 고전이라니까 읽었는데 당시에는 뭐 이런 내용이 있어?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어서는 최소한 그의 순정에는 마음 아파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감은 했던 것이다. 확실히 개츠비의 사랑에는 20대의 마음에 어느 정도 불을 지를만한(?) 부분이 있으니까. 올해가 2019년이니 정확히 이 로버트 레드포드의 개츠비를 접한 지 10년이 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 2013년에 개봉한 디카프리오의 개츠비도 보았고. 그러고 보니 중학교에서 대학교로 진학하는 그 사이에 고등학교 때에도 개츠비를 한 번 이상은 분명히 읽었을 테니 최소한 나에게 개츠비는 5년 주기로 접하는 존재이고 10년 주기로 개츠비를 대하는 내 생각이 크게 바뀌는 것 같다.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다, 그러니까 ‘위대한’은 반어적인 표현이다는 생각은 어쩌면 중고등학교 시절에 접했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동인의 ‘감자’에 나오는 ‘복녀’, 전영택의 ‘화수분’ 때문에 굳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왠지 그때는 그런 반어적인 표현이 멋있어 보이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20대가 되고 난 후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며 그녀를 위해 불법행위도, 살인죄를 뒤집어쓰는 것도 감수했던 개츠비가 위대해 보였다. 아무나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랑을 해냈으니까. 수단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 사랑 자체는 숭고하게 느껴졌다. 이 책의 주인공은 개츠비, 그는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받는 사람, 그 주변의 인물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설 속 세계에서는 개츠비가 중심이고 그 시절의 나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시절이니까. 물론 그 시절에 내가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지금의 내가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 나는 정말로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알았더라면 속을 끓이지 않아도 되었을 일에 지나치게 마음 아파했었다. 지금 개츠비를 읽으면 이제 다른 것들이 눈에 조금씩 들어온다. 자신의 한계 때문에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무능했던 닉의 탄식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가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것을 알고 나서 충격을 받은 톰이, 순간의 감정에 허우적대다가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리를 잡으려고 발버둥쳤을 데이지가 조금은 어른거리며 보이는 것 같다.
개츠비는 정말로 데이지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결혼 전 자신을 숭배했던 남자가 남편의 외도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와중에 크게 성공해서 돌아와 자신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순간이 있다. 데이지는 분명히 톰을 사랑했었던 게 맞고 내 생각에는 아마도 결혼 이후 데이지가 정말로 톰을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한때 개츠비를 사랑한 적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건 이미 지나간 추억일 뿐 아무런 힘이 없다. 그 당시 사랑이 진짜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톰과의 사이에서 결혼 생활을 하며 딸까지 낳아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쪽이 데이지에게는 더 선택하고 싶고 결정하고 싶은 사랑에 가까울까. 답은 비교적 명확하지 않은가.
데이지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개츠비를 뒤로 하고 안정적인 부를 누릴 수 있는 톰을 선택했다. 현재까지 결혼 생활은 안정적이었다. 톰의 외도 전까지는. 톰의 외도는 이 결혼 생활을 깰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부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사교계에서의 자신의 지위가 추락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불안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개츠비를 선택할 것도 고민했다. 개츠비는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하고, 또 어마어마한 부가 있으니까 지금의 위치를 그나마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와의 사랑은 톰의 외도만큼이나 자신의 결혼 생활을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데이지가 톰과 불륜 관계에 있던 머틀을 차로 치어죽이고, 개츠비가 그 죄를 뒤집어쓰고, 개츠비가 머틀과 불륜 관계였고 머틀을 죽인 당사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윌슨이 개츠비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각각의 불륜의 상대자와 불륜 대상자의 배우자까지 전부 죽어버린 상황이다. 데이지와 톰의 결혼에 균열을 가했던 망치질은 사라졌다. 이대로 시간이 흘렀다면 어쩌면 심각하게 지속되었을지도 모르는 수군거림과 추문이 나타날 가능성도 영영 땅에 묻혔다. 그러니까 톰과 데이지 사이에 이미 생긴 균열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은 더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모로 욕이 나오는 결말이다.
이 당시 미국은 대공황 직전 흥청망청하던 1920년대이다. 1920년대의 한복판에서 개츠비처럼 데이지처럼 사치를 즐겼던 작가는 후에 대공황이 올 것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가 살고 있는 현 시대에 대한 한 조각의 슬픔을 이야기했고, 소설의 결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래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리라는 전진에 대한 희망을 당연하게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그 시대의 걸작으로 남게 된 셈이다. 우리가 1920년대의 미국을 이야기할 때 아마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책은 바로 이 책일 것이다. 궁금해졌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기는 시간이 흐르면 결국 어떠했던 시간이라고 정의가 될 것인지. 개츠비의 몰락만큼이나,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만큼이나, 예상하지 못한 깜짝 놀랄 만한 일로 마무리가 되고 또 다음 세대로 넘어갈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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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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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이 책의 표지에는 헤밍웨이의 노년기의 사진이 있다. 보통 작가의 얼굴이 표지에 있는 경우에는 누가 찍어주었는지 잘 모를 때가 많은데 유서프 카쉬의 사진이라고 한다. 유서프 카쉬는 인물사진의 거장으로 그의 인물사진은 인물사진의 교과서라 불린다고 한다. 찾아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인사들의 대표적인 사진들이 그의 사진이었다. 영국의 정치가 처칠,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화가 살바도르 달리하면 떠오르는 사진들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 헤밍웨이는 젊었을 때 모습을 보면 영화배우라고 할 정도로 잘생겼고 세월의 흐름을 받지 않아 이 표지에 나온 노년기의 얼굴과는 차이가 많다. 흑백 사진에서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에 검버섯이 흩어져 있고 희끗희끗한 앞머리는 땀에 절은 듯 약간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수염은 코 밑부터 턱 밑에 이르기까지 무성하다. 그야말로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 그 자신의 모습이다. 사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헤밍웨이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한 왕년에 잘나가던 어부 노인이 큰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데 상어들이 고기를 전부 물어뜯어 살을 먹어버려 뼈만 남은 상태로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워낙에 유명한 소설이라 이 작품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개인주의와 허무주의를 넘어 인간과 자연을 긍정하고 진정한 연대의 가치를 역설한 수작’이 민음사의 뒤표지에 강조되어 있으며, 사실 이 큰 줄기에서 뻗어나가는 형태로 이 작품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흥미 있는 부분은 노인에게 투영된 헤밍웨이의 모습이다. 칼의 노래에서 충무공에게 작가 김훈의 모습이 투영되었듯이, 작가가 개인적으로 힘들고 인생이 허무하고 비관주의에 빠져 있을 때 삶을 긍정하고 계속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 작가에게는 소설 쓰기가 아니었나 싶다. 헤밍웨이의 삶을 보면 굉장히 모순되면서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느낌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불화가 있었고, 네 명의 여성과 결혼생활을 했다. 권총 자살을 한 아버지처럼 똑같이 권총 자살을 했으나, 의사였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술가였던 어머니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참석했으나 어머니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종군 기자로 평생을 돌아다녔고 미국인으로서 이탈리아, 캐나다, 프랑스, 쿠바에 거주하였으며, 중간 중간 스페인과 아프리카에도 들렀으나 결국 미국에서 사망했다. 세 번의 이혼과 자살로 삶을 마감했지만 그는 천주교 신자로 죽었다. 이 소설을 쓸 때만 하더라도 삶을 긍정할 수 있었으나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 수상 후 더 이상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한 것일까?
그에게는 어머니가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콤플렉스는 찔렸을 때 아픈 것이지만, 단순히 열등감이 아니라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일으킨다. 우리의 사고의 흐름을 훼방 놓고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하고 화를 내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찔러 목메게 하는 마음속의 어떤 것들의 군집이다. 무수히 많은 체험이 무수히 많은 콤플렉스를 만들어낸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 거부했을 정도로 심각했을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받은 상처, 수많은 여성편력을 통해 모성을 추구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을 이혼 경험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미국인으로서 가지지 못했으나 다른 어딘가에는 분명이 있을 것 같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평생 세계를 떠돌았으나 결국 미국에 와서야 스스로 죽기를 결심한 그는 죽을 때 천주교 신자로 죽었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놓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주기도문 보다는 성모송이 외우기 쉽다며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한다. 사투 끝에 고기를 잡을 때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났던 상처와 똑같은 부위에 상처를 입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처럼 돛대를 어깨에 메고 언덕을 오른다. 바다는 그에게 고기를 잡게 해 준 자애로운 어머니이자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만든 냉정하고 무자비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런 바다를 노인은 무조건 원망하거나 무턱대고 숭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콤플렉스란 이렇게 예술가에게는 창작의 근원이자 동기가 되기도 할 정도로 크고 강한 에너지를 가진다. 평생 자신을 헤매게 만든 가슴 꽉 막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소설을 쓰며 스스로 찾은 것일까? 그럼 그의 자살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생각이 뱅뱅 도는 느낌이었다. 그도 이렇게 머리가 돌 것 같이 아파오면 쿠바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단골 술집에 가서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언젠가는 쿠바로 여행을 가서 헤밍웨이가 자주 갔다는 단골 술집에 앉아도 보고 그가 바라봤을 바다도 질릴 정도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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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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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고전을 만화로 그린 전집이 있었다. 우리 집에 있었던 게 아니었는데 수많은 전집 중 첫번째 권이 제인 에어 두번째 권이 폭풍의 언덕 세번째 권이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니 아마 자주 놀러가던 친구 집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 전집 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가 바로 폭풍의 언덕이었다. 주인공 캐서린이 참 예쁘게 그려지기도 했고, 자손들이 나오는 뒷이야기가 상당부분 잘리고 마치 후일담처럼 편집되어 있다보니 이야기의 흐름은 두 남녀의 애절하고 소름끼치는 러브스토리에 집중되어 있어서 어린 소년소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는 딱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캐서린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나에게 미인의 고유명사처럼 여겨졌고, 나중에 캐서린 제타 존스라는 여배우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단 한번 읽었을 뿐인데도 히스클리프라는 이름도 완전히 기억에 남았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히스 꽃은 이 책의 무대인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인 것 같은데, 나중에 청소년기에 역시 청소년 문학을 읽으며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툭하면 히스 꽃이 나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이건 꼭 우리나라의 진달래나 제비꽃같은 꽃이로구나라고 생각했고, 그때마다 언덕에 핀 히스꽃과 같을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야생화와 같은 남주인공을 묘사하기 위한 이름이었구나. 척박한 곳에서도 싹을 틔우고 일부러 돌보지 않아도 꽃을 피우는 것처럼.
사실 이 소설은 이미지가 중요하다. 내용만 봐서는 대체 막장드라마와 다를게 뭐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는데, 사실 현대의 모든 막장드라마는 그리스로마시대의 비극부터 셰익스피어로 이어지는 문학의 플롯에 기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창조해내는 하나의 세계일텐데, 드러시크로스와 비교되는 워더링 하이츠, 딸인 캐서린과 대조되는 어머니 캐서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와의 애증의 관계를 죽어서야 끊어낼 수 있었던,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것 같은 히스클리프. 실제로 브론테 가족이 살았던 요크셔 지방을 배경으로 했기에 폭풍의 언덕이라는 한 세계가 고스란히 독자를 흔들어낼수 있는 것이다. 작중 화자인 록우드는 다소 김칫국을 마시는 듯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녀의 착한 유모의 소망대로 혹시 린튼 히스클리프 부인과 내가 어울리게 되어 런던의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함께 살게 되었더라면, 그녀에겐 동화 속 세계보다도 더욱 로맨틱한 꿈이 실현되었을지도 모르지!’

천만의 말씀이다. 캐서린이 원한 것은 시끄러운 헌던의 분위기도 아니었고 로맨틱한 동화도 아니었다. 작가도 그런 꿈을 꾸지 않았을테고. 사랑의 건강하고 밝고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부분은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싹 다 걷어내고 남은, 병적이고 어둡고 파괴적이고 잔인한 면을 극한까지 보여준다. 이 절절한 사랑에 록우드와 같은 소심쟁이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스스로를 아웃사이더처럼 묘사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의 온정 밖에서 잠시라도 머무는 것을 못견뎌하는 허세쟁이는 이러한 이야기 밖에서 머무는 것만이 허용될 뿐이다.

무덤을 찾아보았더니, 벌판에서 가까운 언덕배기 위로 비석 세 개가 이내 눈에 띄었다. 가운데 것은 회색이었고 히스에 반쯤 묻혀 있었다. 에드거 린튼의 것만 비석 밑의 잔디와 이끼 때문에 어울려 보였다. 히스클리프 것은 여전히 벌거벗고 있었다.
나는 포근한 하늘 아래 그 비석들 둘레를 어슬렁거렸다. 히스와 초롱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방들을 지켜보고, 풀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렇게 조용한 땅속에 잠든 사람들을 보고 어느 누가 편히 쉬지 못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캐서린도 히스클리프도 에드거도 모든 방황과 절망이 끝난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겨우 이야기에 끼어들 자격이 주어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캐서린도 히스클리프도 에드거도 전혀 관심이 없을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남의 시선도 당시의 윤리도 사회적 가치도 던지고 오로지 그들 자신에게 몰두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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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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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 사진을 처음 봤을 때에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일 포스티노의 한 장면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실제 이슬라 네그라 저택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파블로 네루다의 사진이라고 한다. 이 소설을 보기 전에 영화 일 포스티노를 먼저 보았는데, 물론 영화에서 소설을 각색하여 다르게 표현한 부분도 있지만 상당 부분은 그대로 원작 소설을 가지고 왔다. 특히 시인과 마리오과 서로 우정을 나누는 명장면 일부는 빠지지 않고 그대로 영화에 실렸다. 영화는 칠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이탈리아의 칼라 디소토로 장소를 바꾸었고, 그에 따라 시인과 교감하는 마을 사람들도 전부 이탈리아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등장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올 정도로 상당 부분의 설정은 그대로 두었다. 아마 바뀐 부분은, 장소가 칠레에서 이탈리아로 바뀌면서 그대로 둘 경우 어색해질 경우에 한해서만 제한적으로 바뀐 듯하다. 영화의 각본가이자 주연 배우는 이탈리아의 재능 있는 영화인으로, 아마도 이 책을 읽은 후 파블로 네루다와 교감한 청년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였을 것이다. 만약 이 시인이 내가 살고 있는 나라로 온다면 어떠할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덧붙이면서.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작가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와도 닮은 구석이 있겠다. 스카르메타도 네루다와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같은 나라에서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같은 아픔과 좌절과 눈물을 공유했으리라고 믿고 싶었을, 세계적인 시인이자 문학 선배를 흠모하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구상했을 테니까. 이 소설은 비교적 최근 소설이라서 내가 여태까지 읽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중에서는 작가가 드물게 살아 있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완벽하다거나 압도당한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운은 상당하다. 어쩌면 이 여운은 온전히 책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 소설과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영화 일 포스티노에 상당히 기대는 면이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 필립 느와레는 실제 네루다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 먼저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본 쪽이 더 나은 것 같다. 영화는 소설을 그대로 살려내었기에 양쪽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지만, 소설에는 없고 영화에만 있는 OST,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탈리아의 어촌 풍경을 생각한다면 영화 쪽 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다소 달랐던 결말 부분은... 개인적으로는 이 역시 영화에 한 표를 주고 싶다. 그러나 이 소설이 역시 개인적으로 끌렸던 이유는 서문 때문이었다. ‘작가가 되려던 나의 꿈은 그 축축한 편집국 사무실에서 매일 밤 사그라졌다. 새벽녘까지 남아 매번 소설을 새로 쓰기 시작했지만 스스로의 재능과 게으름에 실망하여 중도에서 그만두곤 하였다. 내 또래의 다른 작가들은 국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심지어 (중략) 유명한 외국 출판사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그때마다 질투심이 일어났다. 그러나 언젠가 나도 작품을 끝마쳐야지 하는 자극이 되기는커녕 차가운 물벼락을 뒤집어쓴 느낌만 들었다.’ 한동안 이 구절에서 떠나지 못하고 멈춰 있던 서문의 한 부분이다. 그러기에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소설을 읽고 나면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각자 분리되어 생생하게 떠오르게 된다. 소설이든, 영화든 엔딩 이후 먹먹해지는 느낌도 서로에게 상호작용을 하여 둔화되지 않고 각각 다른 느낌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뭐라고요?"
"메타포라고!"
"그게 뭐죠?"
시인은 마리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예를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루다는 시계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좋아.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
"참 쉽군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
"옳거니. 그게 메타포야."
"그렇게 쉬운 건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부르죠?"
"왜냐하면 이름은 사물의 단순함이나 복잡함과는 아무 상관 없거든. 자네의 이론대로라면 날아다니는 작은 것은 마리포사(스페인어로 나비)처럼 긴 이름을 가지면 안 되겠네. 엘레판테(코끼리)는 마리포사와 글자 수가 같은데 훨씬 더 크고 날지도 못하잖아."

"어때?"
"이상해요."
"'이상해요'라니. 이런 신랄한 비평가를 보았나."
"아닙니다. 시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시를 낭송하시는 동안 제가 이상해졌다는 거에요."
"친애하는 마리오, 좀 더 명확히 말할 수 없나. 자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침나절을 다 보낼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요. 시를 낭송하셨을 때 단어들이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바다처럼 말이지!"
"네, 그래요. 바다처럼 움직였어요."
"그게 운율이란 것일세."
"그리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너무 많이 움직여서 멀미가 났거든요."
"멀미가 났다고."
"그럼요! 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
시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바로 그래요."
"네가 뭘 만들었는지 아니, 마리오?"
"무엇을 만들었죠?"
"메타포."
"하지만 소용없어요. 순전히 우연히 튀어나왔을 뿐인걸요."
"우연이 아닌 이미지는 없어.“
마리오는 손을 가슴에 댔다. 혀까지 치고 올라와 이빨 사이로 폭발하려는 환장할 심장 박동을 조절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리오는 걸음을 멈추고 고귀한 수신인의 코앞에 불경스러운 손가락을 바짝 들이대며 말하였다.
“선생님은 온 세상이, 즉 바람, 바다, 나무, 산, 불 동물, 집, 사막, 비.......”
“......이제 그만 ‘기타 등등’이라고 해도 되네.”
“......기타 등등!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루다의 입은 턱이 빠질 듯이 떡 벌어졌다.
“제 질문이 어리석었나요?”
“아닐세, 아니야.”
“너무 이상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아니, 생각에 잠겼을 뿐이야.”

“선생님, 저 사랑에 빠졌습니다.”
시인은 전보를 부채 삼아 턱 앞에서 부쳐댔다.
“별 심각한 일은 아니군. 다 치료법이 있으니까.”
“치료법이라고요? 치료법이 있다 해도 차라리 아프고 말겠어요. 사랑에 푹 빠져버렸단 말이에요.”

"저를 버리시면 안 돼요. 과부에게 이야기해서 미쳐 날뛰지 말아달라고 해주세요."
"이봐. 나는 시인일 뿐이야. 딸 가진 어머니의 오장 육부를 녹이는 재주는 없다고."
"도와주셔야 해요. 선생님이 그렇게 쓰셨잖아요."

지붕없는 집도 유리창 없는 창도 싫네.
노동 없는 낮도 꿈이 없는 밤도 싫네.
여인 없는 남자도 남자 없는 여인도 싫네.
남녀가 얽혀 그때껏 꺼져 있던
키스의 불꽃을 불태웠으면 좋겠네.
나는야 유능한 뚜쟁이 시인.

"지금 와서 이 시가 부도 수표라고는 말씀 못하시겠죠."

"시인 동무, 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천만에! 시집 두어 권 선물했다고 내 시를 표절하라고 허락해 준 줄 알아. 게다가 자네는 내가 마틸데를 위해 쓴 시를 베아트리스에게 선사했어."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첫째,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바람 소리.(바람 소리가 일분쯤 계속된다.)
둘째, 제가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큰 종을 울리는 소리.(종소리가 일곱 번 울린다.)
셋째, 이슬라 네그라 바윗가의 파도 소리.(아마도 폭풍우가 치던 날에 녹음한 듯, 바위에 거세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편집한 것이다.)
넷째, 갈매기 울음소리.(이 분간 기묘한 스테레오 음이 난다. 녹음한 사람이, 앉아 있는 갈매기들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새들을 놀래 날려 보낸 듯하다. 그래서 새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절제미가 담긴 무수한 날갯짓 소리 역시 들을 수 있다. 중간에 사십오 초 지날 즈음에 마리오의 목소리가 들린다. "염병할, 울란 말이야."라고 소리 지른다.)
다섯째, 벌집.(거의 삼 분간 윙윙거리는 위험천만한 주음향이 들리고 배경음으로는 개 짖는 소리와 무슨 종류인지 모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녹음되었다.)
여섯째, 파도가 물러가는 소리.(녹음의 절정의 순간으로, 큰 파도가 요란하게 모래를 쓸어 가다가 새로운 파도와 뒤섞일 대까지의 소리를 마이크가 매우 가깝게 쫓은 듯하다. 마리오가 내리 쏟아지는 파도 옆을 달리다가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끼리 절묘하게 섞이는 것을 녹음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일곱째, (분명히 긴박함이 깃든 격앙된 음성이었고, 침묵이 뒤를 잇는다.) 파블로 네프탈리 히메네스 곤살레스 군.(갓 태어난 아기가 쩌렁쩌렁 우는 소리가 십 분쯤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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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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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7번째 책인 이 책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 소설이라고 한다. 아직 그 영화는 보지 못했으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책의 두께는 두껍지 않으나 처음 몇 장을 읽고 나니 만만치 않을 것 같아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으면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고편만 본 후 일단 책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의 표지는 화가 앙리 루소의 그림이다. 처녀림의 원숭이들이라는 그림인데 제목만 봐서는 이게 책과 무슨 관련이 있지?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영화 ‘지옥의 묵시록’ 예고편을 보면 알게 된다. 놀랍게도 영화에서 나오는 나무가 우거진 배경이 이 그림과 놀랍도록 닮았다.

제 1장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나는 늘 아프리카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두상(頭狀)의 측정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답니다.> 그가 말하더군. <그들이 귀국할 때도 그런 청을 하는가요>라고 내가 물었지. <오,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한답니다.> 그가 대답하더군. <더욱이 변화가 있다면 두상에서가 아니라 체내에서 일어나는 법이지오.>

책에 표기되어 있는 두상의 한자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타가 아니라면 내가 알고 있는 그 용어가 아닌 것일까? 어쨌든 다소 늘어지는 것 같은 앞부분을 읽다가 이 부분에 다다르며 정신이 바짝 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래저래 끌고 다니다가 갑자기 뚝 멈춰선 느낌이라고 할까.

제 2장
그 당시 백인들은 그 기선이 어디를 향해 기어간다고 여겼는지 지금까지도 나는 모르고 있네. 그들은 자기네가 무언가를 획득할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배가 오직 커츠를 향해서 기어가고 있었을 뿐이었네. 그러나 증기 파이프가 새기 시작하자 배의 속도는 크게 떨어지고 말았어. 잇달아 새로운 강기슭 풍경이 우리 앞에 전개되었다가 이내 등뒤로 사라지곤 했지. 그건 마치 밀림이 천천히 강을 가로건너 우리의 돌아갈 길을 막고 있는 듯한 풍경이었어. 우리는 암흑의 핵심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었던 거야.

2장에서는 말로가 커츠에 접근해 나아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썼기에 당시 시대를 생생하게 살렸겠지만, 2장에서는 사실 그런 역사적 지식이나 사실을 꼼꼼히 확인하는 것이 큰 의미는 없다고 적어도 나에게는 느껴졌다. 중요한 것은 배를 몰고 가면서 커츠에게 점점 다가가고 있는 말로의 마음과 마치 그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주변 풍경을 묘사한 부분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제 3장
어느 날 저녁 나는 촛불을 들고 들어오다가 커츠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죽음을 기다리며 여기 암흑 속에 누워 있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구. 촛불은 그의 눈에서 1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지. 나는 애써 <쓸데없는 소릴 하시는군요!>라고 말하면서, 마치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된 사람처럼 그를 굽어보고 있었어.
그때 그의 표정에 나타난 변화와 비슷한 것을 나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보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야. 오, 내가 그 변화에 감동했다고는 할 수 없고, 오직 매혹되었을 뿐이지. 마치 베일이 찢어지면서 어떤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 같았어. 그 상앗빛 얼굴에서 나는 음침한 오만, 무자비한 권세, 겁먹은 공포, 그리고 치열하고 기약 없는 절망의 표정이 감도는 것을 보았거든. 완벽한 앎이 이루어지는 그 지고(至高)한 순간에 그는 욕망, 유혹 및 굴종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을 세세하게 되살아보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는 어떤 이미지, 어떤 비전을 향해 속삭이듯 외치고 있었어. 겨우 숨결에 불과했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두 번 외치고 있었어.
<무서워라! 무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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