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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목격자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ㅣ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3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평점 :
1. 크리스티는 상당수의 책에서 맨 앞장에 '~에게'라는 말을 꼭 붙인다. 때로는 절친한 지기일 때도 있고, 때로는 바로 그 소설에 영감을 준 사람일 때도 있다. 특이한 것이 이 소설의 첫 장에는
가장 충직한 친구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동반자.
다른 어떤 개와도 바꿀 수 없는 나의 피터에게
라는 글이 있다. 애완견에게 이 책을 바치다니? 하고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이 책의 제목을 생각하면 아, 하는 생각이 든다. 벙어리 목격자. 말 못하는 목격자라니.
2. 크리스티의 소설의 특징은, 당대 영국의 모습을 정말 자세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추리 소설의 특성상 인물이나 사건 정황에 대해 성실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되지 못하기 떄문이다. 다른 소설이라면, 문학적인 이유로 의도적인 누락이 가능했을 경우도 여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 섬세한 묘사는 필수적이며, 그것 때문에 소설 속 세계는 마치 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니 내가 소설 속에 현재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3. 특이한 몇몇 풍습이 있다. 이 당시에는 보수를 받고 귀부인의 친구가 되어주는 여자들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하녀나 가정부, 집사나 비서와 비슷해보이지만 조금 다른데, 이것저것 심부름을 하거나 약간의 봉사를 할 수는 있지만 핵심은 말벗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정식으로 존재하는 직업의 형태였다고 하니 신기하다.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 형태는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나일 강의 죽음>이었던 것 같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다소 불분명한 지위까지 포함한다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고. 분명하게 등장했던 부분은 젊고 가진 것 많은 여성이었고, 보수를 받는 그녀의 친구는 자신의 처지를 자조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히 어느 책에서 등장한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부자 고용주가 말벗에게 결혼을 권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벗이 누군가에게 청혼을 받았던 것 같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4. 이 소설 뿐 아니라 종종 크리스티 소설에서 등장하는 콩팥요리라는 게 있다. 대체 콩팥요리는 무엇일까? 소? 양? 돼지? 닭? 그 어떤 서술도 없이 달랑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당시 영국에서는 평상시에 자주 먹었던 것 같은데.
5. 여기에서는 푸아로의 왓슨, 헤이스팅스가 등장한다. 둘이 함께 등장하면 늘 재미있는 부분이 쏟아져 나온다. 푸아로의 심중을 알 길이 없는 헤이스팅스와, 그를 때로는 놀리고, 때로는 격려도 하면서 함께 활동을 하는 푸아로. 요즘 말로 하면 둘의 브로맨스는 그야말로 케미가 폭발이다. 예를 들면, 추리극에 푸아로를 데려가는 실수를 저지른 헤이스팅스가 군인을 전쟁물에, 스코틀랜드인을 스코틀랜드 연극에, 탐정을 추리극에, 배우라면 어떤 연극에도 데리고 가지 말라고 서술하는 대목이 그렇다.
6. 철저하게 심리에 집중하는 게임. 누군가가 죽어야만 입증이 가능한 이 사건은 마치 '커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강박관념에 싸여 있는 사람의 정신만이 가능한 것이라며 훔치거나 위조와 같은 연약한 상태의 범죄만 저질렀던 전과자를 제외시킨 점이나, 살인을 위한 계획을 수행할 만한 충분한 정신력은 있으나 자신의 욕망대로 맘껏 살아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 살인을 저지를 리 없다며 푸아로는 제외시킨다.
7. 그 외에도 크리스티가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섬세한 장치들이 눈에 띈다. 의상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으면서도 옷을 좋아하는 여성, 우아하게 차려 입은 여성을 보았을 때 나중에 그의 패션을 따라하기 위해 열심히 기억해 두려고 애쓰다 나중에는 어설픈 방식으로 모방하여 우스꽝스러운 차림이 되는 경우, 한때는 구하기 힘들었던 장신구로 소수의 패션 리더들만이 착용하다가 바로 그 다음해에 쏟아져 나와 지금은 흔해진 물건들 등 읽다 보면 아, 이런 섬세한 부분이 크리스티의 장점이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8.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 푸아로는 한 장소에 사건의 모든 관계자들을 모아 놓고 늘 그랬던 것처럼 헛기침을 하고 난 뒤 말을 시작한다. 헤이스팅스는 푸아로와 가까이 지내면서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품위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이 중 한 명의 가면을 벗겨 살인자임을 푸아로가 밝혀내는 과정.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이 마지막 장에 도달하게 되면 드디어 사건이 다 끝났구나, 하고 안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