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모자의 비밀 동서 미스터리 북스 66
엘러리 퀸 지음, 강영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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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여흥에서 우리가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혐의 과잉과 사실 빈곤이라는 것입니다."

치우침이 없는 추리소설이자 흠잡을데 없는 데뷔작이다. 피살된 사람과 용의자들, 범인, 퀸 부자와 그 주변 인물들까지 캐릭터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전달되는 서술도 탁월하다. 이 작품으로부터 이어지는 퀸의 국명 시리즈는 트릭에 있어서는 데뷔작보다 발전했어도 인물에 대한 묘사는 생동감을 잃은 것 같아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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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집의 수수께끼 동서 미스터리 북스 65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이철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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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 책의 작가는 그 유명한 곰돌이 푸를 탄생시킨 바로 그 작가다. 사랑스럽고 씩씩하고 미소를 짓게 하는 푸. 이 소설도 그렇다. 사랑스럽고 씩씩하고 미소를 짓게 하는데 딱 거기까지다. 범인도 트릭도 너무 뻔하게 그것도 초반에 노출되어서... 차라리 아기자기한 작가의 매력을 십분 살려서 살인 말고 절도와 같은 소재를 가지고 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이 책의 말미에는 다른 작가의 작품도 하나 실려있다. 아더 모리슨이라는 작가의 랜턴관 도난사건이라는 단편인데 오히려 이 작품이 아기자기하고 기발한 맛이 있다. 동서미스터리북스가 작품들을 엮는 방식은 여러모로 불만이 있기는 한데 뭐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고... 아더 모리슨은 이 작품 말고도 탐정 머턴 휴이트 시리즈를 장편 1권과 단편집 4권을 썼다고 하는데 독립된 책으로 묶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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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 혐오 동서 미스터리 북스 64
에드 맥베인 지음, 석인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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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60

로저 하빌랜드는 형사이다.

동료들은 그를 황소 형사라고 불렀다. 그는 진짜 황소였다. 형사들은 짜브또는 황소라고 부르는 것과는 별도로 그는 짜브 황소라 불리고 있었다. 몸도 건장할 뿐만 아니라 식성도 그렇고, 힘도 그러했고, 코로 숨쉬는 것까지 거칠었다. 그가 사나운 황소라는 데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성질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직하고 성실한 황소 형사였다.

그가 좋은 형사였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그 자신마저도 잊고 있으니까. 언젠가 그는 잡아 온 사나이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입으로만 몇 시간이나 심문한 적도 있었다. 말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악담을 늘어놓지 않은 시절도 있었던 것이다. 그도 지난날에는 점잖은 경찰관일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번 세상에서 불운한 일을 만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분서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싸움을 말리려고 했었다. 그 무렵의 그는 자기의 직무를 하루 24시간 내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양심적인 경관이었다. 싸움은 흔히 있는 것이었다. 사실 친구끼리의 단순한 말다툼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권총 같은 게 얼굴을 내밀 만한 싸움은 아니었다.

그는 그 사이에 끼어들어 조용히 말리려고 했다. 그가 권총을 빼들고 싸우고 있는 무리들의 머리 위로 두세 발 공포를 쏘아올리자 무엇을 어떻게 착각했는지 싸움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이 그의 오른쪽 손목을 파이프 토막으로 내리쳤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떨어지면서 그에게 불행한 사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싸우고 있던 무리는, 그때까지 상대방의 머리를 때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가, 갑자기 경관의 머리를 때리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모두들 권총을 잃어 버린 그에게 달려들어 길바닥에 쓰러뜨리고는 잠깐 사이에 마구 짓이겨 놓고 말았다.

파이프를 들고 있던 자는 그의 팔을 네 군데나 꺾어 놓았다.

복합 골절이라는 것은 통증이 심하다. 상처가 쉽게 맞붙지 않아, 할 수 없이 의사는 뼈를 헤치고 처음부터 맞추어 나가야 했다. 이로 인한 고통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하빌랜드는 자기가 경관으로서의 임무를 계속해 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 위태롭다고 생각했다. 수사과의 일반형사가 된 바로 뒤여서 앞일이 그다지 희망적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동안 팔의 상처는 다 나았다. 대개 팔은 잘 낫는 편이다. 몸은 옛날과 같이 회복되었으나, 그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옛말에 심술쟁이 하나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라는 말이 있다.

그 파이프를 들고 있던 녀석은 시 전체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이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하빌랜드는 그 뒤로부터 황소같이 완고한 진짜 황소 형사가 되었다. 그 일이 그에게는 좋은 교훈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두 번 다시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 뒤 하빌랜드가 용의자를 잡는 데는 한 손으로도 충분했다. 겸손하게 나가지 않고 상대방을 납작하게 할 방법만 생각하면 곧 고압적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하빌랜드에게 붙잡힌 자로서, 그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료 경관까지도 그에게 호의를 갖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호의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 책 전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우직하지만 순수했던 한 경찰이 어떻게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바뀌어 가는지 묘사가 대단하다. 책을 죽 읽다 보면 경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진다. 홈즈나 루팡, 크리스티의 소설에서 대체로 사설탐정에 미치지 못하는 경찰을 묘사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책에는 경관 혐오, 한밤의 공허한 시간 두 편이 실려 있는데, 당연히 책의 제목으로 앞세운 경관 혐오가 일품이지만, 한밤의 공허한 시간도 인상적이다. 정말 재미있어서 내가 왜 이 작가를 그동안 몰랐나 싶어서 작가에 대해 조사해 보니, 소개된 이름만 8개이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필명을 써서 글을 썼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썼는지 궁금하다. 이건 나만의 추측인데, 한 이름을 써서 유명해지니까 취재를 하는 데에 제약이 있어서 다른 필명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묘사를 하는데 취재를 대충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의외의 이력은 바로 히치콕의 영화 새의 각본을 썼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에반 헌터라는 이름으로 올라가 있다. 개명을 하긴 했지만 이 이름이 본명이라고 한다. 개명 전 본명은 살바토레 앨버트 롬비노라고. 그 외에 이름으로는 커트 캐넌, 헌트 콜린스, 리처드 마스튼, 에즈라 해넌, 존 에벗 등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소설을 썼는데 범죄 소설은 물론이고 과학 소설과 동화, 극작가로도 활약했다.

얼마나 소설을 많이 썼으면 기관총 작가라고 불린다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87분서 시리즈’, 그리고 가장 알려진 그의 필명은 ‘87분서 시리즈를 쓴 에드 맥베인.’ 이 경관 혐오나 한밤의 공허한 시간도 그 시리즈 안에 들어간다. 후에 드라마화가 되었는데 그 드라마의 각본도 맡았고, 형사 콜롬보 시리즈의 각본도 맡았다고 한다. 가공의 도시 아이솔라에서 형사 캘레라가 있는 87분서 경찰들의 이야기는 후에 나온 거의 모든 경찰 소설과 경찰 드라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페르 발뢰와 마이 셰발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도 영향을 줬다고 하는데, 이전에 동서 미스터리 북스로 이미 읽었던 웃는 경관이 바로 이 시리즈이다. 그때는 읽으면서 독특하고 흥미롭다는 생각은 했지만 명성에 비하면 다 읽고 나서 기억에 계속 남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책은 확실히 더 재미있다. 마치 요즘 나오는 수사물, 특히 영미권의 경찰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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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노인 사건집 동서 미스터리 북스 63
에무스카 바로네스 오르치 지음, 이정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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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도 아닌 내가 점수를 주는 것은 어차피 철저히 주관에 불과하니까. 이 정도의 명작이 아니라는 의견도 많은 것은 안다. 그러나 어차피 미스터리 소설은 철저히 재미를 추구하는 장르 아닌가. 사실상 안락의자 탐정 타입의 효시가 되는 소설인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행동파 주인공들을 보다가 이 책을 읽으니 단정하면서도 독특한 재미에 끌리게 되었다. 저자는 Baroness Emma Magdolna Rozália Mária Jozefa Borbála "Emmuska" Orczy de Orczi 이라고 하는데, 검색해보면 바로네스 오르티, 바로네스 옥시, 에마 오르치, 엠마 오크시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왜 이렇게 다양하게 불리는지 알 수 있는데, 헝가리 귀족 출신이지만 농민 봉기 때문에 일가가 전부 영국으로 귀화하였고, 이후 영국 남자와 결혼하였다. 이러다 보니 이름이 길어진 것 같은데, 사실 구석의 노인 사건집보다는 스칼렛 핌퍼넬이라는 원조 히어로물로 더 유명하다고.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도 뮤지컬 공연이 있었다. 이 스칼렛 핌퍼넬은 빨강 별꽃이라는 제목으로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에도 있는 것 같다. 구석의 노인 단편은 훨씬 더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전부 번역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찾아보니 동서에서 선별한 이 작품들 이외의 작품은 다소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평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내 주관적인 인상은 훌륭했다는 것. 그리고 비록 실망하게 될 지라도 다른 단편도 읽어보고 싶다는 것.

 

The Fenchurch Street Mystery 펜처치 거리의 수수께끼

그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가게로 들어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그녀는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노인과의 사이에 있는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이미 그녀의 점심식사인 큰 컵에 든 커피(3펜스)와 버터를 곁들인 롤빵(2펜스), 그리고 소 혓바닥 요리 한 접시(6펜스)가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그 구석의 자리와 그 테이블 그리고 그녀자리에서 바라보는 멋진 대리석 홀(ABC . 효모를 쓰지 않는빵 제조회사의 노퍽 지점)의 전망은 폴리만의 것이었다. 폴리가 여기서 11펜스짜리 점심을 먹고 1펜스어치의 정보를 얻어가는 습관은, 그녀가 영국 언론계에서도 이름 높은 <이브닝 옵저버>--여기서는 그렇게 부르기로 한다--에 입사하게 된 잊지 못할 영광의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었다.

 

한순간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고 노인을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 버튼은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지닌 여성으로, 그것을 이 2년 동안 영국 신문계에서는 보기 드물게--그 뒤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간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노인의 풍모에는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은 뭔가가 있었다. 폴리는 마음속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창백하고, 이토록 바싹 여위고, 이다지도 우스운 엷은 빛깔의 머리털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당히 벗어져올라간 정수리에 엷은 빛깔의 머리털을 얌전히 빗어 붙이고, 무척 수줍고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손에 쥔 끈을 줄곧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기다랗고 뼈가 불거진 조금 떨리는 손가락은 그 끈을 묶었다풀었다하며, 사람의 눈길을 끌 만한 복잡한 매듭을 만들고 있었다.

노인의 그런 기묘한 특징을 찬찬히 바라보고 나자 폴리는 얼마쯤 기분이 좋아졌다.

 

The Mysterious Death of the Underground Railway 지하철 괴사건

구석의 노인은 문득 이야기를 멈추고 얼굴을 들었다.

"아니, 이거 너무 멜로드라마틱하게 되었나?"

노인은 조용하고 마음씨 착해 보이는 웃는 얼굴을 폴리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그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손가락은 조금 전부터 만지작거리고 있는 끈에 또 한 개의 매듭을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The Case of Miss Elliott 엘리어트 여의사 사건

나는 의학이라는 학문을 대단히 존경하고 있소. 솜씨 좋은 성공한 의사에게는 공통된 어떤 유쾌한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되오. 자기 실력과 업적에 대한 자신감, 그것이 가져다주는 수입에 뒷받침된 관록이라고 할까, 이것은 아주 독특하고 감탄할 만한 것이지요.

 

Tragedy in Dartmoor Terrace 다트무어 테라스의 비극

"신문에 날마다 재미있는 화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결코 법정이나 경찰재판소만이 아니오."

구석의 노인은 언제나처럼 치즈케익을 부지런히 입으로 나르고, 무표정하게 늙어빠진 수고양이처럼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아주 자랑스러운 듯한 말투였다.

 

The Murder of Miss Pebmarsh 페브마슈 살해

증언을 마치자 그녀는 무표정하게 증인석에서 물러났지요. 그 모습은 마치 태엽을 감은 납인형이 태엽이 다 풀려서 움직이지 않게 된 모습 같았소.

 

The Lisson Grove Mystery 리슨 글로브의 수수께끼

나는 그 사건에 대해서 아주 표면적인 것밖에 모른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 몇 년 사이 일어난 사건 가운데 가장 흥미 있는 것 가운데 하나지요." 그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난의 빛을 눈에 담고 말했다.

"그렇겠지요. 사실 신문에서 그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않은 것은 당신에게 직접 듣는 편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흐음, 그렇다면 당신은 그곳 여기자들보다 얼마쯤 분별이 있는 듯하군요."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비를 맞은 큰 새처럼 구석 자리에 고쳐 앉았다.

 

The Tremarn Case 트레먼 사건

"그렇기는 하지만,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요. 범죄는 항상 새로운 범죄를 낳기 마련이오. 살인이든 도둑질이든 사기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범죄가 일어나면 으레--그렇지,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그 수법을 흉내내는 녀석이 나오지요. 예를 들어 당신이 몹시 탄복하고 있는 이 사건 말인데……."

노인은 가져온 우유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았잖소? 파리에서 어느 사나이가 마차 안에서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 그 사건 말이오. 대단히 기묘한 죽음이었지요. 마치 이탈리아 단검처럼 날이 길고 예리한 칼로, 귀에서 그 아래에 걸쳐 한칼에 찔려 죽었으니. 영국에서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없었소. 사람들은 대부분 파리의 소란스러움과 프랑스 경찰의 무능함에 어깨를 움츠렸을 뿐이지요. 아무튼 프랑스 경찰은 범인--그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자취를 감추었소--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끝내 피해자의 신원조차 밝혀내지 못했으니까 말이오. 그러나 이 사건은 그것에 비하면 훨씬 쉽소."

 

The Fate of the Artemis 상선 아르테미스 호의 위난

"놀랍군! 나로서는 도저히……." 이것은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그 뉴스를 보고 내가 내지른, 지적이지 못한 탄성이었다.

"그렇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못할 거요."

구석에서 노인이 바로 공격해 들어왔다. 찜찜한 일이지만 이 노인은 내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다.

 

The Disappearance of Count Collini 콜리니 백작의 실종

그날 아침 그는 유난히 호전적이었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금방 반격해 오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우리 둘 다 상대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구석의 노인은 다시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되었든 불가능한 일이오. 문명 사회에서 누군가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는 것은." 노인은 힘주어 말했다. "그 사람에게 친구나 적이 있어서, 그 남자 또는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한은 말이오."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 막연한 말이 아닐까요?" 나는 대답했다.

"천만에! 그럴 리가 없소. 이 논쟁의 경우에는."

아주 단호한 말투였다. 그는 방금 뼈가 불거진 손가락이 만들어낸 큼직하고 복잡한 매듭을 아주 만족스러운 듯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역시 그런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아무 단서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에요."

"그럼, 어디 증명해 보오."

노인은 얇은 입술을 활처럼 오므렸다.

 

The Aysham Mystery 에어셤의 참극

살인 사건이란 수수께끼 같다고 생각되는 순간부터 신문을 읽는 대중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요.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관심거리를 찾아 눈을 접시처럼 크게 뜨고 있는 거요.

얼마 안 있어 런던과 근교의 일간지에는 뉴턴 영감과 그 딸의 과거에 대한 기사가 실리게 되어 에어셤 살인 사건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최대 화제가 되었소.

그 기사에 따르면 술주정뱅이 뉴턴 영감도 전엔 확실한 장사꾼으로 대단치는 않았지만 그 고장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모양이오. 에어셤은 철도역이 있는 곳으로서 미들랜드 선에서는 중요한 환승역이지만, 마을은 쓸쓸하고 자그마하지요.

 

The Tragedy of Barnsdale Manor 반즈데일 장원의 비극

"경찰은 그것을 수수께끼라고 부르지요. 세상 사람들도 그렇고. 그러나 모든 범죄에는 범인이 있고, 모든 수수께끼에는 해답이 있기 마련이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가장 단순한 대답이 언제나 정답인 거요."

 

The Regent's Park Murder 리젠트 파크의 살인

그리고 노인은 떠났다. 폴리는 그를 다시 불러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초라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은 이미 유리문 저쪽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의 주장에는 대체 어떤 증거와 사실이 있는 것일까? 결국 그것은 뜻 없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봐도 그녀는 노인이 이번에도 역시 대범죄 도시 런던에 숨어 있는 검은 수수께끼 하나를 보기 좋게 풀었다고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The Dublin Mystery 더블린 사건

"그러니까 제가 언제나 말씀드리지 않아요. 그 무능한 경찰에 당신의 지혜를 좀 빌려 주면 좋지 않느냐고요."

"알고 있어." 노인은 여전히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은 이상한 데에 친절하군. 나에게는 경찰을 도와 줄 아무 힘도 없어. 나는 아마추어야. 범죄도 역시 체스의 승부처럼 말을 움직이는 방법은 지극히 복잡하지만, 승부가 판가름날 듯한 최종 판국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 나는 그런 사건이 매우 좋아. 나는 경찰이 아무리 해도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문득 손을 대 보고 싶어지는 성품이어서 말야. 말하자면 더블린 사건이 그런거야. 그토록 위세를 자랑하던 경찰도 그 사건 때만은 완전히 손을 든 꼴이었지."

 

The Mysterious Death in Percy Street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

그러나 지금 폴리에게는 보다 확실한 설이 있었다. 그녀는 마음의 눈으로 그 손가락을 보았다. 자신의 무서운 행동으로 떨고 있는 손가락이 무의식 속에서 거의 기계적으로 창문을 고정시키기 위해 끈을 집어 드는 것을. 그리고는 습관의 힘을 빌려 여윈 손가락이 자동적으로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지고 복잡한 매듭을 그 끈 위에 만들어가고 있다…….

얼굴을 들어 노인이 앉아 있는 구석 쪽을 볼 용기가 없어 폴리는 눈을 내리뜬 채 말했다.

"나 같으면 쉴 새 없이 끈에 매듭을 만드는 그런 습관은 이제 그만두겠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폴리가 용기를 내어 얼굴을 들었을 때 그의 모습은 이미 구석자리에 없었다. 방금 그가 몇 개의 동전을 놓고 간 카운터 맞은편 유리문 저쪽에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그의 트위드 양복과 이상한 모자, 초라한 뒷모습이 흘끗 보였을 뿐이었다.

여기자 폴리 버튼--<이브닝 옵저버>지의--은 얼마 전 리처드 플로비셔--<런던 메일>지의--와 결혼했다. 그러나 구석 자리의 노인과는 그날 이후 오늘날까지 영영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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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살인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62
S.S. 반 다인 지음, 안동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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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인 작품 중 비숍, 그린, 카나리아 이 세 작품을 최고로 꼽는 것 같다. 이 순서대로 동서미스터리북스에 나와 있으며 책이 나온 순서는 정반대다. 아마 점점 상승세던 작가가 그린살인사건에서 피크를 찍은 것 같은데 카나리아 살인사건은 나름의 재미는 있었지만 앞의 두 권에 비하면 정교한 맛은 좀 떨어진다.
파이로 번스가 나오는 두번째 소설이다보니 탐정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진상을 밝히면 매컴은 그 유명한 범죄 사건들에서 대부분 조연 역할을 했을 따름이었다. 그 사건을 실제로 해결한 공적은 그 무렵 이름을 밝히기 싫어한 매컴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로 돌아가야 마땅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사교계의 젊은 귀족으로, 이름을 밝힐 수 없으므로 파이로 번스라고 부르기로 한다.
번스는 갖가지 놀라운 천분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규모가 작으나마 미술 수집가였으며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데다 미학과 심리학에 조예 깊은 학도였다. 미국사람이었지만 대부분의 교육을 유럽에서 받았으므로 그의 말투에는 영국적인 액센트와 억양이 얼마쯤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독립된 풍부한 수입이 있었으며, 집안 체면상 치러야 할 사교적인 의무를 위해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으나 게으름쟁이도 아니고 호사가도 아니었다.

그는 빈정거리는 듯한 초연한 태도를 지녔으므로 만나는 사람들은 그가 잘난 체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나처럼 번스를 잘 아는 사람은 겉으로 나타나는 태도 뒤에 숨은 그의 참된 인품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번스의 그런 태도는 잘난 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민감한 성격과 고독한 본성에서 본능적으로 생겨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번스는 35살로 차갑고 조각적인 용모가 훌륭하고 인상적이었다. 갸름한 얼굴은 표정이 풍부했으나 어쩐지 엄격하고 냉소적인 기색이 깃들어 있어 친구들 사이에 울타리를 치는 근원이 되었다. 그는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 감정은 주로 지적인 것이었다. 금욕적이라고 곧잘 비난받곤 했으나 나는 미학이나 심리학 문제에 이따금 그가 정열을 쏟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사와는 일체 멀리 떠나온 듯한 인상을 풍겼는데, 사실 정열도 없는 비인격적인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차거운 눈빛으로 인생을 내려다 보면서 모든 일들이 부질없음을 소리없이 비웃고 있었다. 한편 지식에 대해서는 욕심이 많아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인간 희극의 아무리 하찮은 점이라도 그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번스가 비공식적으로 매컴의 범죄수사에 적극 관계하게 된 것은 결국 이 지적 탐구심 때문이었다.

탐정에 대한 소개인데 읽다 보면 작가 스스로 규정한 자기 자신, 아니 남들에게 보여지고 싶은 스스로의 모습이 바로 파이로 번스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작가의 분신이자 화자가 반 다인이라고 대외적으로 해놓고, 실제로는 번스처럼 보이도록 연출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닌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헤이스팅스나 왓슨에 비해 극중 화자인 반다인이 공기화되는 것이 이해가 된다.

이 책은 시대상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사건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실소를 자아내는 부분이 나오는데,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그리고 여보게, 자네는 상대방의 두개골 특징을 좀더 주의해서 연구해야겠네. Vultus est index animi(용모는 영혼의 지표)니까. 자네는 그 신사의 넓은 장방형 앞 이마며 가지런하지 못한 눈썹. 야릇한 빛을 띤 눈, 귓밥이 뾰족하며 아래위의 끝이 엷고 터무니없이 큰 귀를 눈여겨보지 않았나?

이거 골상학 아닌가? 현재 시점에서 유사과학이라는 사실 자체도 그렇다고 치더라도 타인종이나 타민족에 대한 근거없는 작가의 우월감이 드러난 부분 아닌가? 원래 이 작가가 현학적으로 유명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남은 용의자들을 데리고 포커를 치면서 범인을 추리하는 대목은 안 좋은 쪽으로 압권이다. 일단 다들 번스와 매컴에게 말로 들이받을 정도로 수사에 비협조적으로 굴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이 순순히 협조하여 포커를 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포커판에서의 태도로 심리상태를 추리하여 범인에 접근하는 방식은 너무 나갔다 싶다.

"매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에 거는 포커 플레이어는 교묘하고 유능한 도박사로서의 이기적인 자신감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네.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가며 크나큰 위험을 무릅쓸 사람이 아니야. 심리학자가 열등감이라고 부르는 것을 얼마쯤 가지고 있고,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유리하게 만드는 기회라면 무엇이든지 붙잡지. 요컨대 선천적인 순수한 도박사가 못되는 걸세. 그런데 오델을 죽인 사람은 수레가 한 바퀴만 더 돌면 어떤 위험한 곳에 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것에 모든 것을 거는 으뜸가는 도박사였네. 그녀를 바로 그렇게 죽였으니까. 이기심만이 작용하고 절대로 확실한 것에 거는 일은 멸시하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가진 도박사만이 그런 범죄를 해치울 수 있지.

이런 추리 할 수도 있는데 사건 초기라면 모를까 결말에 가서야 이러고 있는 것도 여러모로 황당하다.

번스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러나 난처하게도 나는 그럴 수가 없네. 전지전능한 신께서 나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네. 그러나--부디 믿어주었으면 좋겠네만--나는 아주 훌륭하게 범인을 지적했다고 생각하네. 그 수법까지 설명하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잖은가."

결국 포커에서의 태도로 범인은 추리해내지만 범죄수법은 아직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델의 아파트에 다시 한 번 가보자는 번스의 제안을 내키지 않는 듯이 항의했을 뿐 결국 동의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아, 여기서의 오델은 카나리아라는 별명을 가진 살해당한 여배우다. 그러니까 이 대목 이후가 되어서야, 9부 능선을 넘어서야 다시 한번 피해자의 집을 확인하고나서 범죄의 실상을 깨닫게 되는데... 이쯤 되면 번스를 명탐정 반열에 올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소설 자체는 재미가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번스나 반다인의 이름을 고려하면 그저 그렇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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