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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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일단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재미있다.

이성과 감성도 재미있었지만, 역시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이다. 마치 내가 책 속에 들어가 주인공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옮긴이의 작품 해설에 따르면 제인 오스틴은 언니와는 가까운 사이였고 어머니와는 성격이 맞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와 일치한다. 눈에 보여 움직이는 것과 같은 생생한 인물에 대한 묘사와 그 인물들이 혼자서 때로는 엉켜서 만들어내는 상황에 대한 탄탄한 서술은 어쩌면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사후에 출판된 것도 있고 작가가 완성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 놓은 작품이 후대에 출판된 것도 있어서 정리하기가 약간 복잡하기는 하다. 대체로 6편의 장편 소설이 이성과 감성-오만과 편견-맨스필드 파크-에마-노생거 사원-설득의 순서로 출판된 것 같다. 이것은 출판된 순서이지 실제로 완성된 순서와는 약간 차이가 있기도 한데, 이성과 감성은 엘리너와 메리앤이라는 제목으로 가장 먼저 창작하여 완성된 소설이자 가장 먼저 출판된 소설이고, 오만과 편견은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로 완성된 소설이자 두 번째로 출판된 소설이다. 노생거 사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수잔은 판권 문제로 사후에야 출판되었는데 완성된 기준만 놓고 보면 3번째 소설인 것 같다. 출판사에서 판권만 사 놓고 출판이 지연되었던 소설이라 어쩌면 이 소설이 그녀의 첫 번째로 출판된 소설일 수도 있었겠다. 개작된 이성과 감성, 오만과 편견은 출판되자마자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같은 해에 함께 매진되어 재판을 찍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2년 후에 출판된 오만과 편견이 이성과 감성의 인기까지 같이 끌어올린 것 같다. 이 무렵 맨스필드 파크가 완성되었고 바로 출판되었고, 그 이후 에마를 집필하여 완성 후 또 출판되었다. 인기 작가에 오른 제인 오스틴은 설득의 집필을 시작하였고, 아직도 출판이 되지 않고 있던 수잔의 판권을 사들여 노생거 사원으로 개작한다. 설득이 완성된 이듬해 새로운 소설 샌디턴 집필을 시작하던 중 병으로 사망하고, 그녀의 사후에 노생거 사원과 설득이 출판된다. 얼마 전 케이트 베켄세일 주연의 레이디 수잔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당시 제인 오스틴이 제일 먼저 쓴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는 소개가 있었다. 나는 이 레이디 수잔이 노생거 사원의 개작 전 수잔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레이디 수잔은 아마도 그녀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출판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 정말 아주 초기의, 습작 시절을 갓 벗어났을 무렵 썼던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완벽할 때까지 다듬어 스스로 만족했을 상태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레이디 수잔도, 샌디턴도 그녀가 사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에 출판된다.

이렇게 길게 적은 이유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름의 순서를 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창작 순서로 읽는다면 이성과 감성-오만과 편견-노생거 사원-맨스필드 파크-에마-설득 의 순서로 읽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원제인 수잔이라는 이름과 노생거 사원의 연관성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아마도 개작하는 과정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이 수잔에서 캐서린으로 바뀌었던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제인 오스틴이 여주인공의 이름 뿐 아니라 소설의 다른 부분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의 창작의 흐름을 따라가보고 싶다는 생각 하에 이성과 감성-오만과 편견-맨스필드 파크-에마-노생거 사원-설득의 순서로 읽기로 했다. 제인 오스틴의 습작 시절에 나온 작품이나 레이디 수잔, 샌디션과 같은 책들은 나중에 읽을 기회가 또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사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오만과 편견을 제외하면 읽어본 적이 없었다.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은 청소년기에는 꼭 읽을 세계문학이나 고전의 목록에서 빠지지 않기에 안 읽어 볼 수는 없었으나, 다른 작품에 대해서는 읽을 기회도 없었고 굳이 찾아서 읽을 동기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크게 흥미가 없었던 것 같다. 청소년기에는 이상하게도 다소 사악하고 어두운 면이 있는 인물에 끌렸었고, 누군가 죽거나 파멸하는 이야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었기에, 오만과 편견과 같은 소설은 작가의 말마따나 “너무 가볍고 밝고 반짝거려서 그늘이 필요한” 소설이었던 것 같다. 적어도 그 때의 나에게는 그렇다.

제인 오스틴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커진 것은 영화 비커밍 제인 때문이었다. 여주인공인 앤 해서웨이를 참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좋아하던 여배우가 주연을 맡은, 시대를 뛰어넘은 작가의 일대기에 그야말로 빠졌던 탓이다. 상대역으로 나왔던 제임스 맥어보이에게도 반했었고. 영국 태생의 배우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의 캐스팅에 대한 반대와 우려의 목소리를 잘 알고 있었던 해서웨이가 각고의 노력 끝에 영국 억양을 완벽히 소화해냈고, 너무 예쁘다는 이유로 어울리지 않다는 지적을 듣고 나서는 일부러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푸석푸석한 피부 톤을 연출하고 헤어나 메이크업도 최소화했다는 사실여부를 알 수 없는 후일담까지 접하면서 배우와 작품에 대한 애정도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와 이별하고 사랑할 수 없어서 조건이 좋은 남자의 청혼을 거절하는 일을 모두 겪고 난 제인은 처음보다는 성숙해진 눈으로 원고를 응시하며 열심히 펜을 움직인다. 그 소설은 후에 전 세계를 열광시킨 오만과 편견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시절 막연히 꿈꾸었던 낭만,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사랑, 자기파괴적인 애증 등등의 것들이 때로는 허황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현실을 딛고 서서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 가치 있는 일인지 알게 되면서부터 제인 오스틴의 소설의 남다른 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고 싶었다.

여러 번 읽은 오만과 편견은 매번 읽을 때마다 등장인물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특히 처음 읽었을 때 사리 분별이 뛰어나고 공명 정대한 것 같았던 아버지가 자녀에는 무관심하고 자기 자신의 내적 평화에만 관심이 있는 인물로 보이고, 눈치 없어 보이던 어머니야말로 자신과 딸들의 미래에 대해 현실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는 추진력이 강한 점이 있다고 이제야 생각이 되는 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까.

“그렇지만 그렇게 눈치 못 채게 하는 것이 불리할 수도 있어. 여자가 그런 기술로 자기감정을 상대에게까지 숨기면, 상대를 붙잡을 기회를 잃을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도 그 사람과 매한가지로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별 위안이 안 될걸. 대부분의 경우 애정이라는 감정에는 감사하는 마음이나 허영심이 상당 부분 끼어들어가기 때문에, 애정이 혼자 크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안전하지 못 해. 모두들 시작은 별 부담 없이 하지. ...... 약간의 호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러나 그 호감이 전혀 북돋워지지 않는데도 진정한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우리 가운데 별로 없을 거야. 열에 아홉은, 여자는 자기가 느끼는 감정 이상을 보여주는 게 나아. 빙리가 네 언니를 좋아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렇지만 그 사람이 계속 좋아하도록 언니 쪽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그저 좋아하기만 하고 말지도 몰라.”

“네 계획은 시집을 잘 가고 싶은 욕심밖에 없는 경우에는 좋겠지.” 하고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부자 남편을 잡아야겠다거나, 아니면 하여튼 시집은 꼭 가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나도 그런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만 언니의 감정은 그게 아니거든.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게 아니니까. 언니는 아직까지 자기가 어느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그게 얼마나 이치에 닿는지도 확신 못하고 있어. 그분을 안 지 보름밖에 안 돼. 언니는 메리턴에서 그분과 네 번 춤을 추었고, 그분 집에서 아침에 한 번 본 적이 있고, 그 후로 네 번 식사를 같이 했지. 그 정도 가지고 언니가 그분의 성격을 다 파악할 순 없지.”

“글쎄.” 샬럿이 말했다. “난 진심으로 제인이 성공하기를 바라거든. 그리고 제인이 내일 그분과 결혼해서 행복해질 확률이나 열두 달 동안 그분 성격을 연구한 뒤에 결혼해서 행복해질 확률이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결혼에서 행복이란 순전히 운에 달려 있어. 서로의 취향을 아주 잘 알거나, 혹은 서로 아주 비슷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둘의 행복이 더 커지는 건 결코 아니야. 취향이란 건 계속 변하게 마련이라 나중엔 누구든 짜증이 날 만큼 달라지게 마련이야.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의 결점은 될수록 적에 아는 것이 더 나아.”

콜린스의 현재 조건만으로도 물려받을 유산이 별로 없는 샬럿에게 대단히 훌륭한 신랑감이었으며, 거기에 장차 부자가 될 가능성까지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여동생들에게는 이 결혼 덕분에 한두 해 먼저 사교계에 나설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남동생들은 누나가 노처녀로 자기들에게 얹혀살다 죽으면 어쩌나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났다. 당사자인 샬럿은 비교적 침착했다. 목적을 달성한 터라, 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결과는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콜린스 씨는 똑똑한 사람도, 함께 있기에 즐거운 사람도 분명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루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도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남편을 갖게 될 것이었다. 남자나 혼인 관계 그 자체를 중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언제나 그녀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 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이제 마침내 그 예방책을 손에 넣은 것이니 스물일곱의 나이에 한 번도 예뻐본 적이 없는 여자로서는, 이번만큼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느꼈다.

“너도 알지만 난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야.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지.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안락한 가정이야. 그리고 콜린스 씨의 성격과 집안 배경,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볼 때, 내 생각엔 우리에게도 다른 어느 커플 못지않게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근데, 외숙모. 결혼에 있어서 돈만 밝히는 것과 신중한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신중함이 끝나는 지점은 어디고 탐욕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딘가요? 지난 크리스마스엔 그 사람과 제가 결혼하게 될까 봐 걱정하셨잖아요. 경솔한 일이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겨우 만 파운드의 재산을 가진 아가씨와 결혼하려 한다고 그가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시잖아요.”

엘리자베스의 견해가 모두 자기 가족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더라면, 그녀는 결혼의 행복이라거나 가정의 안락에 대해 그다지 즐거운 상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젊고 아름다운 데다 마음씨도 착해 보이는-젊고 아름다우면 마음씨도 착해 보이게 마련이니-한 여인에게 반해 결혼하게 되었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 머리도 나쁘고 마음도 꼭 막혀 있는지라 그녀에 대한 애정은 결혼 초기에 진작 끝나버렸다. 존경, 존중, 신뢰는 영원히 사라졌고, 가정의 행복에 대한 그의 생각들도 모두 깨져버렸다. 그러나 베넷 씨는 누구 탓도 아닌 자신의 경솔함으로 초래된 실망을 보상하기 위해서, 어리석거나 나쁜 짓을 한 결과 불행해진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찾는 도락 따위에 빠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전원과 책을 사랑했다. 그리고 주로 이런 취미에서 즐거움을 얻었다. 자기 아내에게서 덕을 본 것이라고는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그의 즐거움에 기여했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남편이 아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유의 행복은 아니지만, 달리 즐길 만한 거리가 없는 처지라면 주어진 여건에서 얻을 것을 얻는 것이 진정한 현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엘리자베스는 자기 아버지의 행동이 지아비로서 온당치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을 존경하고 자신에게 애정으로 대해 주는 것에 감사하면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했고, 결혼의 의무와 예절이 일상적으로 깨지고 있는 현실을 아예 생각에서 지워 없애려고 했다. 아내가 자식들에게 경멸을 당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처사가 심히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 자식들에게 끼치는 손해를 지금처럼 강렬하게 느낀 적도 없었고, 재능이 방향을 잘못 잡은 데에서 생기는 해악을 이토록 속속들이 느낀 적도 없었다. 재능을 올바로 쓰기만 했더라면 아내의 마음을 넓혀주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딸들만큼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키워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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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2
제인 오스틴 지음, 윤지관 옮김 / 민음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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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은 1834년에 그려진 토머스 설리의 엘렌과 메리 매클베인의 초상이라는 그림인데, 토머스 설리는 당시 초상화가로 유명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실제로 검색해보면 이 책의 표지에 나오는 그림은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닌 모양으로, 직접 작품의 이름을 쳐서 검색해야 작품이 나온다. 신기한 것은 어떻게 이 작품을 찾았는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엘리너와 메리앤이었다. 각각 이성을 대표하는 엘리너, 감성을 대표하는 메리앤 두 자매의 이야기이다. 엘렌과 메리라는 이름은 엘리너와 메리엔을 연상시킨다. 표지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다정하지만 침착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한 여성과, 그 여성의 어깨에 팔을 얹고 어딘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멀리를 응시하는 한 여성이 있다. 그야말로 여성의 이성적인 모습과 감성적인 모습을 분리해 내 보여주는 느낌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이 있다. 어떨 때는 이성적이 되고, 어떤 사람 앞에서는 감성적이 되고. 다만 작가는 한 사람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면모를 두 사람으로 분리해 내 보여 준 것 같다. 사랑이란 이성만으로도 감성만으로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렇기에 동일한 부모 밑에서 자란 비슷한 나이의 자매를 두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 같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던 자매가 마지막 순간에 합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늘 이성적으로 보이던 언니가 감성적으로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마냥 감성적이던 동생이 이성적으로 판단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사랑이나 연애뿐만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성장으로도 읽힌다. 사실 어린 시절에는 제인 오스틴의 책이 재미있기는 해도 그저 연애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제인 오스틴의 시절에 여자는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고 남자의 존재를 인생에서 지우게 되면 경제적으로 곤궁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에 어쩌면 연애나 결혼이 인생의 가장 큰 과업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알코트는 제인 오스틴보다 약 60년 뒤의 사람이다. 앤 셜리를 창조해 낸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루이자 메이 알코트보다 약 40년 뒤의 사람이다.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도, 앤 셜리도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이야기의 비중만 놓고 봤을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들의 연애였고 결혼이었다. 결혼 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후속편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서 나왔던 것도 같다. 그걸 감안하면 그보다 60년 전, 100년 전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여주인공이 얼마나 당시로서는 센세이션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연애와 결혼이 전부였던 그 시절, 그 선택 안에서도 이렇게 개성적인 여주인공을 그려냈던 작가가 만약 현재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여성의 일과 사랑과 취미에 대해 좀 더 확장된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메리앤은 다음 날 아침 생각보다 많이 잠을 자긴 했지만 잠자리에 들 때와 똑같이 비참한 심정으로 눈을 떴다.

엘리너는 동생에게 될 수 있는 대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해 보라고 부추겼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기 전에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엘리너 편에서는 역시 꾸준한 믿음을 가지고 다정한 충고를 했으며 메리앤 편에서는 역시 격렬한 감정을 엿보이고 생각이 오락가락하였다. 메리앤은 때로는 윌러비가 자신만큼 불운하고 결백하다고 믿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그가 면죄될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세상의 이목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것을 피해 숨어버리고 싶어 했고 또 다음 순간에는 힘을 내서 거기에 맞서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는데, 막상 떄가 되면 제닝스 부인이 있는 자리는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고 어쩔 수 없이 함께 있어야 한다면 입을 꾹 다무는 것이었다. 제닝스 부인이 연민에 가득 차서 자기의 슬픔에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을 굳게 닫아버렸다.

"아냐, 아냐, 아냐. 그럴 수가 없어." 그녀는 소리쳤다. "부인은 느낄 줄 몰라. 친절하다지만 공감은 아니고, 성품이 좋다지만 따뜻하진 않아. 원하는 건 가십거리가 전분데 지금은 내가 그걸 제공해 주니까 날 좋아하는 거지. 딴 게 없어."

꼭 이런 말이 아니더라도 엘리너는 동생이 다른 사람들을 종종 부당하게 평가하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워낙 과민할 정도로 고결한 성품을 가진 데다 강한 감수성에서 나오는 섬세함이라든가 세련된 매너의 우아함에 너무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똑똑하고 성격 좋은 사람이 반이 넘는다면, 메리앤도 거기 속하는 세상 사람 반처럼 뛰어난 능력과 성품을 겸비하고 있지만, 분별도 없고 공정성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자기와 똑같은 의견과 감정을 기대하였고, 그들의 행동이 자기에게 곧바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동기를 판단하였다. 그래서 두 자매가 아침 식사 후 자기네 방에 함께 있었을 때 메리앤이 제닝스 부인의 마음을 한참 평가절하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제닝스 부인은 순전히 선의로 한 행동인데 메리앤에게 워낙 이런 약점이 있다 보니 우연찮게도 새로운 고통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녀에게는 윌러비의 사랑을 상실해 버린 것보다도 그의 인격을 상실해 버린 것이 더 애통한 일로 느껴졌다. 그가 윌리엄스 양을 유혹하고 버린 것, 그 불쌍한 소녀의 비참한 처지, 그리고 한때 그녀 자신에 대한 그의 흉계가 어떠했으리라는 의심이 한꺼번에 닥쳐 정신을 심하게 갉아먹어서, 자기가 느낀 바를 엘리너에게조차 토로할 수가 없었다. 말없이 자신의 슬픔을 부둥켜안고 있는 바람에, 털어놓고 자주 하소연을 하던 때보다 언니로서는 더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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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6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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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9권으로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 유사란 잃어버린 이야기라는 뜻이라고.

권 제1
기이 제1

권 제2
기이 제2

권 제3
흥법 제3
탑상 제4

권 제4
의해 제5

권 제5
신주 제6
감통 제7
피은 제8
효선 제9

그러니까 총 5권이고, 9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기이(紀異)는 말 그대로 기이한 이야기이다.
제1은 고조선 이하 삼한·부여·고구려와 통일 삼국 이전의 신라의 유사
제2는 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 신라 시대를 비롯하여 백제·후백제 등에 관한 약간의 유사와 가락국에 관한 유사
그러니까 고조선부터 후삼국시대까지 이야기 중 너무 기이해서 삼국사기 등 정사에 실리지 않아 유실될 뻔한 이야기를 실었다라고 보면 되겠다.

흥법(興法)은 불교 전래의 유래 및 고승의 행적
탑상(塔像)은 사기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과 사탑의 유래에 관한 기록

의해(義解)는 고승들의 행적

신주(神呪)는 이승들의 전기
감통(感通)은 영험·감응의 영이한 기록
피은(避隱)은 은둔한 일승들의 기록
효선(孝善)은 효행·선행·미담의 기록

이다. 비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불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많다. 또 대놓고 기이한 이야기가 전체 분량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런 면에서 자세하게 찾아보지 않아도 대강은 어떠한 내용의 비판이 삼국유사에 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자세하게 찾아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삼국유사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제망매가는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야말로 영영 잃어버릴 뻔한 귀한 이야기가, 작품이, 생활상이 이 삼국유사에 들어 있는 것이다. 글쎄, 학문적인 논쟁은 너무 전문적인 분야이기에 빼놓는다고 하더라도, 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 정말 재미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이 자꾸 떠올라서 좋았다.

표지 그림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인데,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당연히 교과서에는 실려 있다. 어릴 때 사극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는데 삼국기였나? 아무튼 삼국시대를 다룬 사극의 오프닝에 종종 이런 그림이 나왔던 기억이 있다.

여기 실려 있는 내용은, 아주 불교적인 것만 제외하면 대부분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어릴 때 학습만화로 익힌 내용이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아마도 원본에 충실하려고 하다 보니 그랬을 테지만 본문에 나오는 지명이 현재 기준으로는 어디쯤인지 지도로 표시해준다거나 이야기 하나당 2~3줄 정도로 짧게 요약된 내용을 본문 시작 전 앞에 적어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의 지식이 깊지 못해서인지, 내용이 빨리빨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한때 조선왕조실록, 고려왕족실록, 삼국왕조실록이라는 책이 있었다.(지금도 나오려나?) 왠만한 집에서는 다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엄청난베스트셀러였는데 우리 집에도 있었다. 그 당시 기억으로도 삼국왕조실록은 고려나 조선에 비해 다소 기이한 이야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삼국의 시조 이야기라든가... 이런 부분들을 읽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황당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었는데, 요즘 나오는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이나,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떠오르기도 했다. 말도 안 된다고, 비과학적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도 서프라이즈 같은 TV 프로그램이 장수를 하며 인기를 끌고 있는데, 과학적으로는 특이하고 신기한 일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과 동경은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영원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부분에서는 몇몇 이야기들은 그냥 영원히 인간의 지식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으로 남아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도 있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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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희곡선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8
양승국 엮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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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이미 실린 작품이 많아서 비교적 친숙했던 1권에 비해 2권에는 비교적 새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이강백의 영월행 일기가 인상적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단종의 이야기를 소재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구나.
자유에 대한 의지와, 그것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하다가 빠르게 구겨져버리는 모습에서 진정한 자유란 얼마나 힘들고 속박이라는 것이 얼마나 습관적이며 벗어나기 힘든 것인지를 단종의 이야기에 빗대어 형상화한 순간, 수백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두려움에 질린 무표정
통제와 억압의 상태 인식에서 오는 슬픔
정신적 자유를 획득한 기쁨
으로 점점 변모해가는 단종과, 그것을 없애지 않고서는 안 되는 세종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현대의 누군가와 연결되는 순간은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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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희곡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7
양승국 엮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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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한국 희곡선은 2권으로 나뉜다. 아마도 시대순인 것 같다. 1권에 나와 있는 희곡들 중 상당수가 예전에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익숙했는데, 특히
유치진의 소
오영진의 살아있는이중생각하
차범석의 산불
이근삼의 국물있사옵니다
의 경우 일부만 실려있던 글을 전부 읽어봐서 좋았다.
우리나라의 급격하면서도 아픈 근현대사를 생각해보면 역시 시대상을 반영해서 좋은 부분도 분명하기는 하지만 이근삼의 원고지처럼 시대를 초월해도 의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라면 더 좋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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