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 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100
황유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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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수많은 시인의 수많은 시 중 한 작품만 꼽는다면...

 

파타 모르가나

 

정채원

 

여름에는 내 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뼛가루로 너를 만들었다

 

아니,

여름에는 얼음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모래로, 모래바람으로 너를

만들었다, 되도록 빨리 지워지는 너를

 

길 잃은 사막에서 쓰러지기 직전 나타나는

신기루 속의 신기루

달려가 잡으면 가시풀 한 줌으로 흩어지는

너를 알면서도

그런 줄 알기에 더 놓지 못했다

 

철창에 갇혀 온종일 커피 열매만 먹는 사향고양이는

오늘도 피똥 아니, 커피똥을 싼다

수도 없이 창자벽에 제 머리를 박으며

캄캄한 내장 속에서 발효된 내 편지는

차가운 혀를 사로잡을 만큼 중의적일까

 

하늘에 뜨는 태양과

바다에 뜨는 태양이 서로 마주보며

, 가짜지?

얼굴을 붉히는 동안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다

내장을 거칠 겨를도 없이

해가 지면 모든 게 지워지고

주름진 백지만 남게 되더라도

 

북극 얼음바다 위에 떠 있는 마법의 성을 향해

구절양장을 건너가는 우리에게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오늘은 얼음을 뚫고 뜨거운 커피가 솟구칠지도 모르지

 

 

* Fata Morgana : 마녀 모르간 또는 신기루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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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시인선 97
권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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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았던 시를 한편만 추천한다.

 

착불(着拂)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누가 지불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없어서

내가 나를 지불해야 한다

삶은 매양 가벼운 순간이 없어서

당나귀 등짐을 지고

번지 없는 주소를 찾아야 했다

저녁이면 느닷없이 배달 오는 적막들

골목에 잠복한 불안

우체국 도장 날인처럼 쿵쿵 찍혀오는

살도록 선고유예 받은 날들

물건을 기다리는 간이역의 쪽잠 같은 꿈이

담벼락에 구겨 앉아 있다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으로

이 세상에 온 대가를 지불하고

빗방울은 가문 그대 마음을 적시는 것으로

저의 몫을 다한다

생이여!

나는 얼마나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야

나를 지불할 수 있는가

얼마나 더 울어야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모든 날들은 착불로 온다

사랑도 죽음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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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조 씻기기 -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89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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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과

말린 과일에서 향기가 난다 책상 아래에 말린 과일이 있다 책상 아래에서 향기가 난다

나는 말린 과일을 주워 든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다 가볍군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다

말린 과일의 표면이 쪼글쪼글하다

말린 과일은 당도가 높고, 식재료나 간식으로 사용된다 나는 말린 과일로 차를 끓인다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도 말린 과일로 남는다
실내에서 향기가 난다


나의 한국어 선생님

나는 한국말 잘 모릅니다 나는 쉬운 말 필요합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왜 이 인분의 어둠이 따라붙습니까

연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문법이 어렵다고 너가 말했습니다

이 인분의 어둠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너는 문장을 완성시켜 말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매일 나는 작문 연습합니다

-나는 많은 말 필요합니다.
-나는 김치 불고기 좋습니다.
-나는 한국말 어렵습니다.

너는 붉은 색연필로 OX표시합니다 X표시투성이입니다 너 같은 애는 처음이다 너는 나를 질리게 만든다 너는 이제 끝이다 당장 사라져라 이것은 너가 한 말들입니다

한국말이란 무엇입니까 처음과 끝을 한꺼번에 말하는 말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마에 난 X 표시가 가렵기만 합니다

나는 돌아오는 길을 이 인분의 어둠과 함께 걸어갑니다 이 인분의 어둠이 말없이 걷습니다


의자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았다
병원 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인형은 나의
의사 선생님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아프다고 말했다
어디가 아프냐 물어도
아프다고만
선생님은 내게 의자에 앉으라 하셨다
의자는 생각하는
의자였다
앉아서 생각해 보라고, 잘 생각해 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울어 버렸다 무서워서
너무 무서워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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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지의 세계 민음의 시 214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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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은유를 쓰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싸늘한 겨울 주머니에 담뱃갑이 든 코트를 부여잡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혼자서 공원을 횡단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겨울나무가 얼마나 무심한 물건인지 추궁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무심코 도달한 거리에서 경탄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순진함을 진정성과 구분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어둑한 이 겨울에 집으로 떠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손이 얼어 가는 것을 무감하게 대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멀리 나는 새들의 이름을 외우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저기 굴러다니는 작은 사물들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컴컴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친근히 여기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어째서 이곳에 빛이 들지 않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겨울과 세계에 혼자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슬픔이 인생의 친척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눈 덮인 도로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따뜻한 불 가에 앉아 혼령이 부유하는 것을 알아채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한강의 겨울 오리들을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옛 연인의 얼굴을 망각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이 겨울의 길이 지독하게 고독하다는 사실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지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그믐 아래 야습을 도모하는 미지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내일의 불가능을 믿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여전히 너의 집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네가 서 있는 곳이 아직도 겨울밤의 공원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거기까지만 쓰고 다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너의 겨울 은유를 신용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밉다” 말하지 않는다 너는 이제 거의 시인처럼 보인다 너는 겨울을 보지 않는다


이것이 시라고 생각된다면

해 질 녘 복도를 홀로 걸어가던 어린 날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잠들기 전 올려다본 천장의 어둠 너머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자신들을 둘러싼 크고 작은 사물과 사건들, 부드럽고 따뜻한 대기 현상이 일으키는 여러 감정들에 대해 말하려 한다

다섯 살 난 조카가 다가와 인생의 비밀을 털어놓을 때는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만이 전해져 오고, 알겠다며 같이 놀라는 시늉을 해야만 한다

그 모든 것이 세계의 깊숙한 곳과 연결된 것처럼
혹은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처럼

어린 나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무작정 집을 나선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았는데 자꾸 어딘가에 당도하는 것이 너무 무섭고 이상하다


사랑이 끝나면 우리는 법 앞에 서 있다

오후가 끝나고 수업이 끝나고 교문 밖으로 나오던 중학생들이 끝났다 거리가 끝나고 어린 개 하나가 끝나고 다른 하나가 거길 떠나지 못하다 끝났다 가로수와 가로등이 끝나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끝나고 앰뷸런스의 사이렌이 끝났다 적막이 끝나고 소요가 끝나고 어둠이 끝났다 공포에 질린 측백나무가 끝나고 지루함이 끝나고 사물의 짧은 역사가 끝났다 그 어린 장난이 영영 끝났다

우리는 법 앞에 서 있었다
판결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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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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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시집은 정말 좋았다.

 

시는 소설과 다르게 이런 저런 해석이 불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구구절절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왜 좋고를 설명하게 되면 애초에 시라는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짧은 글로 세상을 담아내는 것이 시의 묘미인데, 그것을 길게 설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좋지만, 왜 좋은지 스스로 분석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가장 좋았던 시.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가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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