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단식 - 머리를 쓰지 않고 발로 뛰지 않는 IT 중독을 벗어나라
엔도 이사오 & 야마모토 다카아키 지음, 김정환 옮김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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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식을 우리는 살이쪄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대부분 단식을 먼저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디지털에도 단식이 필요할까? 요즘은 어딜가나 디저털 하나 손에 소유하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너무 개인화 되었고 디지털,IT에 빠져서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 아닌 '기계와 기계의 소통' 이 되어가고 있다. 나 또한 일어나면 먼저 하는 일이 문자를 확인하고 컴퓨터를 켜면 메일을 먼저 확인하고 내 블로그에 있는 글들에 어떤 글들이 달려 있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글은 무엇인가 확인하다보면 꽤 시간을 잡아 먹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정작 내가 하고자 했던 일들이 뒤로 처지는 경우도 있고 해야 할 일을 메모를 해 놓고 표시를 해 가며 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메일을 보면 '스팸' 이 많다. 정작 내게 필요한 메일은 한 두개 정도인데 80~90%는 다 스팸이거나 불필요한 것들이다. 그렇다면 나도 혹시 불필요한 메일을 보내는 사람은 아닌가? 라고 생각해 볼 필요도 있고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너무 쉽게 메일을 보내 오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라 지우는데도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거나 그냥 놔두는 경우가 있어 메일함이야 말로 단식이 필요한 공간이기도 하다.요즘은 정말 '복사와 붙여넣기' 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정보가 많거나 내가 발품을 팔아서 혹은 우뇌를 자극하여 자료를 찾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의 정보를 간단하게 '복사와 붙여넣기' 로 하여 그야말로 '파워' 가 되는 경우도 많다. 빈수레가 요란하듯 정보가 많은 블로그에 가보면 자신의 것보다는 '남의 것'으로 가득 찬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난 두번다시 보고 싶지가 않다.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나 글을 보고 싶지 남의 것으로 도배를 한 것을,그런 정보는 간단하게 '클릭'만으로도 접할 수 있는데 다시금 자신의 것인양 올려 놓아 불필요한 클릭을 하게 하는 '낚시밥'에 걸려 들고 싶지가 않다.

 

'처음에 자연의 위협과 가혹함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하던 테크놀로지는 이윽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 싸우기 위한 목적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난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르거나 잘하지 못한다. 겨우 글을 쓰고 사진을 올리고 내가 늘 사용하는 부분만 이용하지 그외로는 이용을 하지 않는데 어떤 때는 정말 한시간 아니 하루라도 '테크놀로지'가 아닌 '아날로그' 속에서 살고 싶은 날이 있다.머리가 아프다. 메일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거나 이런저런 것들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남의 이야기까지 챙겨야 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빠져나와 아날로그적으로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분명 그런 시대에도 행복했는데 너무 갑자기 어느 순간에 'IT'가 아니면 말이 안통하고 소통이 안되는 그런 시대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개인 뿐만이 아니라 회사에서 또한 사람과 사람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기계가 소통을 하고 있으니 거짓인지 진실인지도 모르는 것에 매달려 있는 경우는 없는지. ICF(정보의 홍수)와 BLT(바보의 롱테일) 속에 자신을 가두며 살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든다. 사람과 사람의 소통보다 기계와 기계로 소통을 하다보면 거짓된 결과로 소통을 할 수도 있다는 예를 들어가는데 그런 속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다른 사람의 맛집 소개에 따라 갔다가 내가 먹었을 때에는 맛이 없을 수도 있는,믿을 수 없는 정보에 속아 넘어 갈 수도 있다.

 

'현장을 바꿀 수 있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사람이며, 상품 개발을 뒷받침하는 것도 사람이다. IT는 주역이 아니다. IT를 경영주체에서 제외하고 본래의 위치인 '도구'의 자리로 되돌려야 한다.' 정말 공감하는 부분이다. 모든 것의 주체는 '사람'이다. 사람이 주체인데 요즘은 IT 즉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길을 찾아 갈 때도 사람과 사람이 소통을 할 때도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SNS로 대화를 나누거나 소통을 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소통이 없어지고 그 공간을 IT가 대신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 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단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기업의 홍보도 그렇고 개인의 홍보도 그렇고 SNS를 하지 못하면 안되는 것처럼 개인이건 단체건 회사건 모두 SNS에 뛰어 든다. 나 또한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하고 있지만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며칠 들어가지 못하면 궁금하여 다시 궁금증에 다시 열어보게 된다. 점점 넘쳐나는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이시대라고 하지만 정작 사람과 사람의 소통은 없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많은 스팸메일 속에서 정작 내게 필요한 메일을 찾기란 정말 힘들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디지털 단식'의 필요성을 느낀다. 시간 낭비 정보 낭비,모두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일 수 있다. 넘쳐나는 정보속에 내 소중한 정보가 묻힐 수도 있음을 생각하고 사람과 사람간의 소통은 아날로그적인 것이 업무에 더 효울성을 가져올 수도 있고 더 돈둑하게 다질 수 있는 것이다. 나부터 이제 단식에 돌입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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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2 - 가난한 성자들 조드 2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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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조드라는 말을 몰랐다고 해야 하나,쓰나미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피해를 입히거나 현상을 티비에서 보기도 하고 이슈가 되기도 하여 알고 있었지만 육지에서 겪는 자연피해에 이런 이름이 있었다는 것은. 그 하나를 알게 해 준 것만으로 책은 큰 의미를 주는데 좀더 세세하게 '유목민' 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게 해 주는 간접적인 경험을 해주는 듯 하여 재밌게 읽었다.

 

테무진, 칭기즈칸 그가 칸이 되기 전 아버지 예수게이가 그와 함께 하던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고 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과 함께 쫒겨 다니면서 비루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 안에 간직한 강직한 '믿음'과 자연을 바라보는 '냉철함'을 누구보다더 더 진하게 간직하고 있었고 그런 매와 같은 눈으로 유목민의 지도자가 되어 추위와 먹거리의 피해인 '조드' 앞에서도 모든 이들의 하나로 이끌고 구해낼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십여년간 몽골에서 살면서 누구보다 더 몽골의 바람과 광활한 초원에서 유목민의 삶을 유목민이 아닌 유목민이 되어 직접적으로 바라보고 경험을 했기에 정말 실감나는 '유목민생활'의 글을 탄생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올해는 대선이 있는 해라 그런가 '지도자' 상으로 우리에게 크게 남겨진 인물들을 다른 소설들을 더 많이 만나는 듯 하다. '낡은 역사관을 대체할 그림이 있어야 새로운 역사관이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보다 바른 세계사 상'을 찾으려는 노력에 나도 동참하고 싶었다. 소재가 국경을 벗너난 점도, 시대적 배경이 먼 것도 개의치 않았다. 가톨릭과 비가톨릭 정신이 각축하는 성곽의 중세가 아닌, 이동문명과 정착문명, 농경민과 유목미느이 충돌을 야기한 광야의 중세를 그리려는 으지는 21세기 정신의 산물이다.' 이런 광활한 세계에 부합하는 인간형을 그는 '테무진'에서 찾아 본 것이다.

 

그들은 정착생활이 아니라 먹이와 초지와 물을 따라 이동을 한다. 여름과 겨울 생활이 다를터인데 그들에게는 늘 '조드' 가 따라 붙는 듯 하다. 정착생활이 아닌 자급자족하는 자연에서의 유목생활이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 가운데 광활한 대지에서 그들은 영역싸움을 하듯 한 곳으로 뭉치기도 하고 흝어지기도 하지만 모두가 자존을 위해서다. 살아 남기 위해서 조드를 이겨내고 살아 남거나 조드를 이겨내는 현명한 방법을 아는 자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테무진은 그런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역량을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그가 바라보고 살고 있는 '자연'에서 동물적 감각으로 습득해 나가고 그것을 또한 그가 살아남는 방법에 유용하게 활용을 할 줄 아는 매서운 눈을 가졌다. 그런가 하면 그를 돕거나 함께 조드를 이겨내고자 하는 무리로 많은 친구들이 함께 한다. 자무카와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어야 했던 테무진,그렇다고 그가 자무카를 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자무카에서 배울 점이 많았던 삶이라 할 수 있고 인생은 라이벌이 있다는 것으로 인해 자신을 더 갈고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 예수게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룬 테무진,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 하는 어머니와 그를 따르는 많은 이들과 자연에서 익히고 배운 상생의 방법으로 현명하게 조드를 이겨내는 지도자로의 역활을 충분히 하는 테무진과 그보다 초원의 지도자로 힘을 가지고 있던 자무카와 숙명의 싸움을 벌어야 했던 테무진은 비록 아직은 힘이 부족한 무리를 이끌고 있지만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지도자임을 증명해 내기도 한다. 흰 뼈아 검은 뼈를 구분하지 않고 능력이 있다면 상하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인재를 쓸 줄 알았던 인물 테무진,아버지 예수게이가 죽고 그가 적들에게 쫒겨가며 살아 남기 위하여 누구보다 더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터득했던 그이기에 어쩌면 더 포괄적인 지도자상이 마련된 것은 아닐까.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좀더 낯선 문화와 문명을 체험할 수 있어서일까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저자의 소망처럼 테무진이 '대칸' 이 되고 나서의 이야기도 이어진다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운운한 '광활한 세계에 부합하는 인간형' 은 어떤 인물일까. 리더쉽을 갖춘 인물로 혼자 뛰어나지 않고 모두 그러 안을 수 있는 인물, 타인의 말도 존중해 줄줄 알고 타인의 능력 또한 존중해 줄줄 알며 적재적소에 인재를 잘 쓸 줄도 알아야 한다. 독선과 독단이 아닌 모두와 함께 할 줄 아는 지도자인 테무진,그를 통해 척박한 몽골의 초원에서 유목민들이 그곳의 바람을 이겨내며 살아 남은 이야기를 읽어보는 시간은 참 흥미롭기도 하고 재밌었는가 하면 새로움이었다. 테무진의 인생 2막이라 할 수 있는 '대칸'의 이야기도 곧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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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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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라는 나이가 내가 그 나이에 접하지 않았을 때에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내 나이 마흔이 지나고나니 왠지 모르게 '마흔'에 관계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듯 하다.그만큼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살아야 하고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나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마흔 여섯의 이성계,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건국의 태조 이성계가 아니라 변방의 일개 무사로 그리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일개 시골무사에 불과했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 중대한 싸움인 왜적과의 '황산에서 만나게 되었다.'황산대첩' 그는 황산싸움에서 크게 승리를 하여 개혁도 혁명도 그리고 자신의 꿈도 이루게 된다.

 

황산이란 어떤 곳일까? 언젠가 피티에서 본 '황산'은 그곳이 큰 싸움이 벌어졌던 격전지라고는 생각 못할 정도로 야산과 벌판으로 이어진 곳이었다. 그때는 황산대첩에 관하여 별 감흥없이 보게 되었다. 하지만 다큐를 좇아 가면서 그런 곳에서 큰 싸움이있었다니 언젠가 한번 그 지역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14세기 후반에 왜구는 오백여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지금의 금강 어귀로 침입을 하여 삼남지역에 걸쳐 갖은 노략질을 일삼은 듯 하다. 그렇게 하여 이성계가 왜구 토벌에 나서게 되는데 왜구는 우리의 평범한 민초들을 납치하여 그들의 노예로 부리다 군사로 이끌고 오기도 하고 간자로 이용하기도 한 듯 하다. 이성계 또한 북방의 이민족들이 그와 함께 하면서 귀화를 하기도 하여 그와 힘을 합해 싸움에 임하기도 한 듯 한데 민족간 마찰이 있었음을,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박쥐처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이중적 인물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왜구를 토벌하려고 힘썼던 이성계,그의 곁에는 정도전과 정몽주가 함께 했다.

 

이성계,그가 좀더 조정에서 알아 주는 인물이었다면 체찰사나 그외 장수들과  별일 없이 수장으로 본분을 다하겠지만 체찰사와 함께 하며 갈등을 빚는 가운데도 그의 인간됨과 수장으로의 역할에 막힘없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뒤에서서 그를 지지했지만 그렇지 못한 아군도 적군도 아닌 사람들 또한 그에게는 적군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을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이 '승리'만이 존재하는 전쟁터인 싸움터에서 수장이 둘이라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까. 전장터에서 오래도록 경험과 노하우가 있어도 그의 승진에서 늘 물먹었던 그를 조정의 힘만으로 밀어부치려는 사람들과 어깨를 겨루며 당장 눈 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쥐기란 쉽지 않았을 듯 하다. 순간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그곳에서 말이다. '마흔 여섯 살,그도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렸다. 동북면 변방에서만 활을 쏘며 지내다가 인생을 거의 다 소진했다. 시골무장,물정 모르는 변방의 늙다리,화살 하나 들고 설치는 천둥벌거숭이...... 중앙군과 관리들은 그를 그렇게 멸시했다.' 지금까지 변방에서 천둥벌거숭이처럼 자신을 든든히 받쳐줄 힘 하나 없이 살았으니 전장에서 또한 그의 맑이 먹혀들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량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아직 그에게 운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면 왜구의 수장으로 온 '아지발도' 또한 뜻이 분명하다. '우리는 개경을 부수고 고려를 차지할 것이다. 몽골의 속국 고려를 우리가 해방시킨다. 고려는 우리 땅이다. 여기에서 수십 만 남조군을 만들어 오만한 북조군을 칠 것이다. 남북조의 통일,그것이 우리가 고려에 온 목적이다.' 자신들의 아내는 물론 어린 자식이며 가족을 모두 죽이고 배에 오른 왜구들 또한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북으로 알라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땅을 저희땅으로 착각하는 것은 똑같은 듯. 만삭의 조선인 아내를 죽이고 이 싸움에 오게 된 아지발도 그의 곁에는 그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슈겐부츠라는 인물이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다. 그도 또한 고려군 속에 간자를 넣어 염탐을 하기도 하고 간인을 넣어 자신들을 거짓된 정보를 흘리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 진실이 무엇인지 감추고 오로지 싸움에서 '승리'를 하면서 고려인들은 이 땅을 지키려 했고 왜구는 이 땅을 쳐서 자신들의 것으로 한 뒤 북으로 올라가려는 속셈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이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정복과 부흥'은 이성계가 품고 있는 '혁명과 개혁' 에 맞부딪혀 황산벌을 피로 물들인 것이다.

 

아지발도는 변방에서 굴러 다니던 늙다구리 이성계를 무시하듯 했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그의 진면목을 보게 되었다. '저자는 생각한 것보다도 더 노회하구나.어떻게 대로를 뚫고 그대로 밀고 올 생각을 했지? 요동벌을 쳤다는 것이 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적은 숫자인데도 군사를 정밀하게 집약시키는 능력이 놀라워. 저자가 비록 비루한 종2품 하급 벼슬아치라는데,아직까지 밑바닥에서 뒹굴고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군.' 왜구의 수에 비하면 이성계가 이끄는 수는 너무도 적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가족을 죽이면서 배수진을 치고 들어왔다면 우리 또한 우리땅을 지켜야 하고 모두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 하나된 이유가 있다. 우리 땅을 자신들의 앞마당인듯 쳐들어온 왜구를 그냥 놔둔다면 앞으로 더욱 이땅에서 날뛸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대체, 몇을 죽여야.형제들을 얼마나 죽어야 이따위 더러운 잔혹이 끝장이 날까.미안하구나 커르차,커르차......' 이성계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싸움에서 죽어 나가는 그의 형제와 같은 장수들과 민초들의 죽음에 침울해졌지만 이 싸움은 기필코 이겨야 한다.

 

'전쟁은 이유를 따지지 않는 법입니다. 살기 위해,자존을 위해,그도 아니면 명예를 위해 나서는 게 전쟁이올시다. 인간은 오로지 전쟁을 위해 살아갑니다.다만 크기가 크거나 작거나 할 따름이지요.'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쟁'이다.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남을 이겨야만 한다. 그렇다면 마흔 여섯의 이성계에게는 이 싸움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려는 기울기 시작하고 있고 그는 힘도 없는 변방의 비루한 벼슬아치일 뿐이다. 그는 명예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정말 비루한 민초들을 위해서라도,그들의 영혼을 달래 줄 '풍등'을 만들어서라도 이 싸움을 이겨야만 한다. 왜구의 발길에 무참히 죽어간 수 많은 민초들의 넋을 달래 줄 길은 '가자,세상은 우리가 구한다' 그랬다. 그가 왜구의 발에 밟혀 죽어가는 세상을 구해서는 그가 나서야만 했다. 조정의 힘을 등에 업은 관리가 아닌 변방에서 '싸움의 기술'을 익힌 그가 나서서 이 싸움을 종결지어야만 했다.

 

이성계, 그의 노련함에 젊음의 뜨겁고 폭발하는 듯한 힘을 가지고 있던 아지발도는 적수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무릇 승리는 그가 혼자서 일구어낼 수 없는 큰 영광이었지만 오합지졸과 같은 무리들을 잘 이끌어 낸 수장으로 그의 그릇이 그만큼 준비되기도 했을 터이다.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한 '전쟁'이 바쁘게 투잡을 하던 작가의 손에서 사실감 있게 그려질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이 소설을 내려 놓고 홀연히 세상을 등졌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작가 또한 마흔 여섯, 이성계는 다른 세상을 이룩하고 열었다면 작가 또한 작가로 확고한 입지를 굳힐 그런 미래가 코 앞이었을 터인데 아쉽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또한 선택하여 읽게 되었다. 나 또한 그 나이에 이르러 '인생이란 무얼까? 앞으로 어떤 생을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마흔 여섯이라는 전환점에 '황산대첩'을 마주하게 된 이성계와 작가 그리고 독자의 나,인생 또한 전장터이다. 자존을 위해서는 좋은 전략도 필요하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는 동지도 필요하고 그리고 '꿈'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낀다. 이성계는 건국을 꿈 꾸었다면 작가는 작가라는 꿈을 꾸어서 동분서주 했을 터이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그대는 지금 무슨 꿈을 꾸며 이 책을 읽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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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형만 있고 나는 없다 푸른숲 새싹 도서관 1
김향이 글, 이덕화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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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이나 첫째를 먼저 챙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먼저 세상에 나왔으니 옷을 사도 무엇을 해도 꼭 먼저 형을 챙기게 되는데 밑에 동생은 그렇지가 않다. 투덜투덜,자신은 엄마의 자식이 아니냐며 몇 번씩 물어 보기를 한다. 우리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집이나 첫째를 뺀 나머지 자식들의 공통된 불만사항이다. 그렇다고 부모가 첫째만 챙기고 밑에는 챙기지 않을까,물론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식들 모두 똑같이 한다고 해도 밑에 자식은 늘 자신에게는 모자라다고 생각을 한다. 우리집은 딸만 둘 예외일 수는 없다. 첫째를 챙기면 막내가 난리를 피우고 막내를 챙기면 큰놈이 막내만 챙긴다고 성화다. 도데체 엄마보고 어쩌란 말인지. 내리사랑이라는 것을 녀석들은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하니 '그래 그래 너도 자식 낳아봐라,엄마맘을 그래야 알지.' 한다.


수학학원에서도 단단히 깨져서 들어 온 둘째, 이가 아프다며 엄마에게 말했지만 엄마는 형이 오면 줄 맛있는 닭다리 요리를 하고 있다. 형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엄마는 형이 올시간에 맞추어 하고 계시고 민재가 이가 아프다고 해도 진통제가 어디 있는지 얼마나 아픈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심통이 난 민재는 생각한다. 약한 형을 때려 눕힐 수도 있는데... 그렇다 형은 약하여 민재가 더 힘이 세니 때려서라도 자신이 형이란 위치를 뺏을 수 있다면 하고 싶다. 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있는데 엄마는 늘 형만 챙기고 난 눈에 보이지도 않나보다,아프다고 하는데.


속이 상한 민재, 형이 오고 엄마가 맛있는 저녁상을 차렸지만 먹고 싶지가 않다. 아니 배가 고파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지만 참는다. 엄마가 한번만 더 부르면 달려가 먹을텐데 속상하고 치사하게 한번 물어보고 둘은 맛있게 저녁을 먹는다. 식탁에서는 맛있는 냄새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나니 더욱 배가 고프다. 그냥 나가서 먹을 수도 없고.그런데 엄마가 '민재야 죽 먹자' 하고는 맛있는 죽을 쑤어 들어 오셨다. 그리고 할머니와 통화를 하시는데 내 칭찬 일색이다. 엄마가 나를 너무 잘 알고 계신다. 엄마는 형만 챙기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다.그리고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치과에 가자고 하신다. 민재가 오버를 한 것일까?엄마의 통화와 말에 갑자기 환해진 세상,형만 있던 세상에 나도 있다.


이런 경우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정말 많다. 우린 연년생이라 이런 말을 더 많이 들은듯 하다. 아무리 엄마가 두녀석 똑같이 사랑하고 챙긴다고 해도 녀석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큰놈 앞에서는 큰놈 얘기만 하고 막내 앞에서는 막내 얘기를 해야 불화가 없을 그런 사춘기시절도 있었다. 녀석들 눈치를 보느라 내가 다 속이 상하여 녀석들에게 하소연을 하던 때,하지만 다 안다. 왜 녀석들 속에 언니가 없고 동생이 없을까. 좀더 관심을 더 받고 싶고 사랑을 더 받고 싶은 그런 것이다. 부모에게는 어느 한 녀석 콕 집어 이쁜 것이 아니라 모든 자식이 다 이쁜 것인데 녀석들은 '우선순위'를 정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에 우선순위가 어디 있을까마나 그런 속에서 형제애가 더 짙어지고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 아닐까 한다.


<의좋은 형제>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로가 서로를 챙기는. 하지만 요즘은 많이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 아니면 둘을 낳으니 서로 비교는 물론 남과도 비교를 무척 많이 한다. 결코 그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참 관심을 받고 사랑을 받고 있을 때는 모른다. 좀더 커봐야지 형은 동생을 더 잘 챙기고 동생은 형을 더 잘 챙기는,세상에 둘은 누구도 갈라 놓을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강압적이라기 보다는 그럴수록 보듬어 안아 품어 주듯이 한다면 느끼고 시간의 흐름속에서 자신 또한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투덕투덕 싸우다 정 들 듯이 그러면서 더욱 형제애도 깊어지고 가족간에도 정이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민재가 넘 귀엽고 사랑스럽다. 아이들 어린시절을 보는 듯 하다.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 수록된 동화라고 하니 한참 그런 것에 민감한 아이들에게 감동 한 줌 남겨 줄 듯 하다.

<이미지 저작권은 출판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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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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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린 역사를 승자들에 의해 기록된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역사는 어떠할까? 개인의 역사 또한 '승자들의 거짓말'일까. 세 명의 친구들 틈으로 '에이드리언'이라는 총명한 수재가 들어왔다. 들어 왔다가 보다는 그들이 그에게 의지하듯 다가갔다고 봐야 옳을 듯한 수업시간의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에이드리언은 정말 선생님도 놀라게 하는 '낭중지추' 이다. 철학적이면서 누구보다 명석한 그는 세 명의 친구들이 생각지도 못한 답으로 선생님은 물론 친구들까지 놀라게 한다. 그들의 잔잔한 일상에 '엄마 미안해'라는 유서를 남기고 롭슨이라는 친구가 자살을 했다. 에이드리언을 말을 빌리자면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 입니다.'라고 한다. 일전에 그는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했어'라고 했던 친구이다. 생각지도 못한 친구의 '자살'에 의문이 분분했고 그가 여자친구에게 임신을 시켜서 자살했다는 말에 에이드리언은 여러갈래의 의문을 제기하며 친구 롭슨의 자살을 '철학전 문제'로 끌고 간다.

 

그리고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적성에 맞는 학교에 가게 되면서 점점 만남이 뜸해지면서 '편지'를 주고 받게 되고 토니는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고 친구들에게 여자친구를 자랑할 겸 소개를 한다. 그 과정에서 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에게 과한 호감을 갖게 되고 그는 베로니카의 집에서 주말을 보내기도 하게 된다. 그녀의 집에서 그가 생각했던것과는 다른 식구 각자의 대접으로 점점 베로니카와는 흔들리게 되고 결국 그들은 헤어지게 되었다. 그런 순간에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과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되고 토니 뿐만이 아니라 점점 그들은 서로의 인생에서 조연이 되듯 멀어지면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연락이 끊어지게 된다.그런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에이드리언의 자살'소식이 전해지면서 왜,라는 생각은 가져보았지만 딱히 잘나가던 그가 자살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그들은 그들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롭슨의 자살을 철학적 문제로 생각했던 에이드리언은 22살에 왜 자살을 했을까.롭슨의 자살은 여자친구를 임신시켰다는 이유로,에이드리언은 아이가 롭슨의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었는데 자신은 왜 선택하게 되었을까.

 

그는 베로니카와 헤어진 후 마거릿이라는 여자와 만나 딸을 하나 두고 살다가 이혼을 하게 되고 딸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되지만 자신도 손주를 잘 돌볼 수 있는데도 마거릿과 딸은 그에게 손주를 돌볼 시간을 주지 않고 녀석이 크면 함께 하라고 한다. 그는 모든이들의 삶에서 멀어지듯 점점 평범한,정말 진부한 삶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인간의 인생을 보는 듯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그런데 사십여년이 흐른 후에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여사에게서 자신에게 돈과 함께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유품으로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어린시절 '첫랑'처럼 간직하고 있던,아픔이 묻어 있는 사랑과 사람을 꺼내보게 되고 그의 잔잔하던 인생이 흔들리게 된다. 왜, 베로니카도 아닌 그녀의 어머니가 그를 지목하여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남기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다시 베로니카를 만나야 하는데 그녀는 수면으로 떠오르려 하지 않다가 그를 만나러 나오기도 일기장이 아닌 복사본을 건내 주기도 하는데 모든 이야기를 속시원이 털어놓지 않는다.

 

그들의 이십대의 삶이 1부의 이야기라면 사십년이 흐르고 다시금 에이드리언이라는 인물의 과거를 들여다보게 된 이야기가 2부의 이야기다. 1부에서 그는 '역사는 승자의 거짓말'이라고 했지만 2부에서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 라고 한다. 지금의 이야기는 그들이 살아 남아서 과거를 기억하며 그 과거의 기억을 좇아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파헤쳐 들어가게 되는데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베로니카가 입을 다물고 있기도 하지만 다른 친구들과 연락도 되지 않고 베로니카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으로 그를 몰아간다. 그가 간직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이십대에 잠깐 사귀었던 그 때의 말과 자세들 뿐이다. 세월이 지나도 고스란히 그때의 말과 자세를 간직하고 있다고 그는 본다. 그리고 우연처럼 그를 데리고 가서 보여준 '사람들' 그 속에는 에이드리언을 닮은 남자가 있다. 어림짐작을 하면 에이드리언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나이와 그리고 DNA가 일치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아이를 낳았구나.그런데 왜 베로니카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그는 왜 자살을 했으며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유산을 남겼을까.

 

그가 생각하는 '예감'은 점점 알수가 없다. 아이를 낳았다면 자신처럼 결혼을 하면 될텐데 자살을 한 이유는,에이드리언식 자살을 한 그는 철학적 문제로 자신의 삶을 풀은 것인가. 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복사본과 젊은 시절 그가 에이드리언에게 남긴 편지를 전해준다. 자신이 썼다고 생각못하는 편지를. 베로니카가 자신을 떠나 에이드리언과 사귀면서 그는 말할 수 없는 참담함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시켰던 모양이다. 하지만 자신은 기억이 없는데 그 증거물을 그들은 가지고 있고 자신이 감정에 빠져서 퍼부은대로 친구는 자살로 이르게 되고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역사'처럼 흘러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그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남아 있어 의문의 남자를 우연히 마주치기 위하여 그를 만났던 곳에 자주 가게 되면서 그는 정말 '예감'하지 못한 '사실'과 만나게 된다. 결말을 알고 나니 지난 모든 것들이 풀린다. 그렇다면 역사는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승자의 거짓말이라 믿었던 이십대의 역사관과 지금은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회고'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적확하게 행간을 읽지 못하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까,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가 날까 말이다.

 

친구의 원인 불명의 자살을 놓고 볼 때 그 자신은 '원인'을 제공했다,분명히.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감정이 폭발한 편지를 보냈다는 증거물이 있고 자신은 아무 뜻 없이 보낸 편지의 내용대로 모든 일들이 진행되듯 그렇게 그들의 인생은 꼬여갔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승자는 누구이고 패자는 누구일까? 그들의 삶에서 승자는 누구이고 패자는 누구일까? 요절을 한 사람들은 늙지를 않고 그들이 죽음을 선택하던 그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하지만 살아 남은 자들은 나이를 먹은 현재로 기억된다. 미래가 없는 에이드리언이 남긴 '아들의 존재'와 이혼한 아내와 멀어진 딸 사이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삶을 비교해 볼 때 철학적이면서 역사적으로 '삶'을 잘 풀어나간 사람은 누구일까. 단순하고 평범한 한 남자의 인생이야기를 풀어 나가면서 그와 연관되었던 친구와 여자친구의 삶을 씨실과 날실로 엮다보니 그의 인생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자신이 친구와 여자친구의 미래를 '예감' 했지만 자신이 예감한 미래가 아닌 결코 다른 'X'가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이 역사이고 인생이다. 그래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던가.마지막을 읽으면 다시금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솔직히 처음 읽을 때는 그리 재미가 없는 평범한 이야기인데 '부커상'을 받았나 했는데 '마지막 반전' 이 가져다 주는 섬짓함에서는 '와우' 소리라도 지르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따져가며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말 한마디 감정하나 나 자신을 떠나 잘못 뱉어진 것은 없는지 자신을 뒤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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