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스님의 마음설레는 레시피
대안 지음 / 김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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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요리하는것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또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즐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내가 한 요리를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혹은 맛있게 먹는 것을 바라만 봐도 정말 기분 좋을 때가 있고 남들이 내 요리중에 한가지 정도 잊지 않고 기억해 줄 때 정말 기분 좋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환경이 변해가면서 점점 '건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 '성인병'을 생각해야 하고 아이들을 생각하면 '영양'을 생각해야 하고 우리 입맛에 맞는다고 맛있다고 해 놓고도 아이들이 싫어하거나 먹지 않으면 요리를 한 보람도 없게 된다. 요리는 하면할수록 '창의성'과 '손맛'이란 것을 알겠다. 예전에는 요리하는 것 그리 즐겨 하지 않았지만 늘 엄마 곁에서 함께 해야만 했다.그러니 내가 싫어도 자연히 나도 모르는 사이 기억과 입맛에 그리고 머리에 메모리가 되었을 것이다. 어린시절에는 시골음식이라 싫다고 하던 엄마의 음식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꾸 향수처러 생각나고 나도 모르게 그 요리를 따라 가고 있는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엄마가 점점 나이가 들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지고 입맛이 변하면서 엄마의 손맛과 비법을 전수 받아야 하는데 생각을 해 보면서도 뭔가 다른 요리가 있으면 엄마에게 해 보았는지 혹은 아는지 여쭈어보기도 하는데 울엄마는 요리에 관심이 많은신지 색다른 것이 있으면 신세대 요리라도 꼭 해보고 싶어 하신다. 워낙에 뚝딱뚝딱 잘하시니 동네 큰잔치에도 불려 다니시고 하는데 아직 난 엄마를 따르기엔 너무 멀다.그래도 그 옛날 엄마의 맛을 기억하며 손맛을 물려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문득 문득 해보기도 한다.나이가드니 나 또한 요리에 대한 호기심에 자꾸 이끌리고 있는 자신을 볼 때,엄마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그리곤 늘 딸들에게 하는 말이 '엄마는 외할머니처럼 너희들에게 나중에 음식 같은거 안해줄거야.너희들이 다 해서 먹고 엄마한테 해서 가져와..' 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더 즐기면서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요리는 내가 즐거워야 더 맛있고 잘된다.그리고 잘하려고 하면 더 맛이 안난다.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마음이 시키고 손이 시키는 대로 하면 더 맛있다. 자로 재듯 하는 요리는 맛이 없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선재스님의 이야기로 버무린 사찰음식>이란 책을 정말 기분 좋게 읽었고 또한 지역에 선재스님의 강의가 있다고 하여 모든 것 뒤로 하고 가서 선재스님의 강의를 듣고 선재스님도 뵙고 왔다.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선재스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요리의 맥이 내가 하는 요리가 그런 요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며 '사찰음식'에 대하여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다. 남들 나이들어서 써먹는다고 한식이나 그외 자격증을 따기도 한다지만 난 그런것 보다 직접 몸으로 배워야 진짜 요리라고 생각을 하기에 다른 것보다 내 입맛에 맞고 내게 맞는 요리는 '사찰음식'이라 생각을 해서 정말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을 깊게 가졌다.그런데 대안스님의 책을 읽다보니 정말 빠져 들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요리도 그렇지만 요리를 올려 놓은 천에 수 놓은 꽃이나 자연이 너무 이쁜 것이다. 요리밑받침과 함께 올려 놓은 요리는 그야말로 '자연' 이 되어 상위에서 피어 났던 것이다. 무엇이든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이지 않은 것이 없고 요리 또한 재료의 채취부터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씀에 공감, 정성이 부족한 요리는 어딘가에서 표시가 날 듯한 날 선 행간을 보았다.




이 책은 솔직하게 출판사에서 올려 놓은 '감자국수' 사진에 마음을 빼앗겨 바로 구매를 하여 보게 되었다. 마음이 가는 책은 미루지 말고 얼른 읽어봐야 하고 봐야만 한다. 책을 받고 술술 넘겨가며 사진을 한번 죽 훑어보는데 정말 '마음이 설레인다' 라는 표현이 맞다. 먹고 싶어서 그 맛이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한그릇에 담긴 요리가 유혹을 하듯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한참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멋을 부리지 않아도 유리가 말을 한다,자신을 봐 달라고. 어떻게 시작하여 어떻게 담겨졌는지 그 과정이 모두 담겨 있듯이 어느 한 점 흐트러짐없이 꽃처럼 피어 난 음식, 그 맛과 향을 직접적으로 먹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것처럼 오감이 감동을 한다.정성없이 그리고 재료의 채취에서 정성을 기울이다보면 '생명존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음식들이 말을 하고 있다.


철모르는 시절에는 그저 선입견에 '편식'을 일삼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난 무척이나 편식이 심한 아이였고 그런 내 입맛을 맞추기 위하여 친정엄마는 고생을 하셨다. 그저 잘먹어주고 이것저것 챙겨서 하려는 지금은 엄마 말로 '용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재료 한가지 한가지 영양이 어떻게 되고 어디에 좋은지 한번쯤은 되새김질 하듯 익히고 시작을 한다.하다보면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 방식대로 하는데 사찰음식은 한가지 한가지 정성이 아닌 것이 없다. 언젠가 우연히 절에서 나 혼자만의 밥상을 받게 되었는데 밋밋하면서도 맛난 음식들이 잊혀지질 않았다. 모두가 푸른초원이었지만 정말 맛나게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속에는 온갖 정성이 들어간 조미료부터 하여 재료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정성 그 자체'였던 것이다.


정말 음식의 재료가 되는 것들을 주위에서 가꾸며 금방 금방 싱싱함을 담아 낸다면 더욱 맛있으리라.스님의 화분에서는 갖자기 채소들이 자라고 요리는 하는 모습 또한 정갈하면서도 늘 얼굴에 웃음과 행복이 충만해 있어서 먹는 사람도 무척이나 기쁘고 그 음식을 먹음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을까. 여행에서 남는 것은 '먹거리'즉 '음식'에 관한 기억이 오래간다. 사찰음식이 우리들에게도 건강식이고 계절식이지만 사찰음식을 접한 외국인들에게도 우리나라를 잊지 못하는 음식으로 오래도록 남겨 진다는 것이 정말 흥미롭다. 정말 우리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우리것이 세계로 나아가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좀더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가면 큰 몫을 할것만 같은 생각을 가져본다.


책은 먼저 '치유하는 밥상' 그리고 '지혜로운 밥상' '조화로운 밥상' '나눔의 밥상'으로 나뉘어 있다. 요즘은 모든 것이 '힐링'이지만 그중에서도 음식만큼 치유력이 뛰어난 것이 있을까.몸도 마음도 모든 것을 다 건강하게 해주는 '사찰음식' 이 좁은 곳을 벗어나 우리네 밥상까지 아니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지헤로운 밥상이 되어 조화롭게 그리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할 수 있으려면 사찰음식을 접할 수 있는 공간이나 시설이 많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선재스님도 그렇지만 대안스님의 말씀도 우선의 우리의 '장문화'가 다시 활성화 되어야 한다는 것,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장독대가 부활을 해야 한다는데 대안스님 역시나 음식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장' 이 맛을 좌지우지 한다니 좀더 장에 대한 그리고 음식의 재료에 대한 정성을 잊지 말아야 함을 각인시킨다. 음식을 탐하기 보다는 '비움' 이,넘쳐나기 보다는 모자람이 우리의 건강에는 좋다는 것을.그리고 스님의 사찰음식에서 동양화에 있는 '여백의 미'를 본다.대안스님의 레시피대로 하나 하나 요리를 해보고 맛을 느껴봐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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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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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유명한 그림 '절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 왜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집인 <킬리만자로의 눈>에 있는 단편들을 읽으며 뭉크의 '절규'를 떠올리게 되었을까.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일상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담겨 있는 그림 <절규>' 그렇다면 그 그림을 소설로 쓴 것은 어쩌면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뭉크는 어릴적 죽은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 대신에 따랐던 한 살 연상의 누이가 사춘기 나이에 죽음으로 인해 '불안' 에 쌓여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 주의에 감도는 '죽음'이라는 빛, 그 빛은 도망간다고 하여 도망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친구들과 산책중에 자신 혼자만 느낀 감정, 그것이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프랜시스 머콤버의...' 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듯 하다.

 

이 단편소설집을 읽기 전에 헤밍웨이의 다른 단편집을 읽었었다. <우리들의 시대에>라는 책으로 그 책에 실린 단편들에도 '닉 애덤스' 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연작으로 그린 이야기가 있다. 물론 '닉 애덤스'는 '헤밍웨이' 자신이며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그려 놓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집에서 '닉'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삶과 모습을 담아 놓은 이야기들,어쩌면 자전적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헤밍웨이'그를 기억하는 작품으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던가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있거라'라는 장편이다. 단편으로 기억하기엔 그의 장편의 힘이 컸다. 장편에 가려져 있던 단편들을 읽으며 그의 삶은 들여다보듯 그의 삶을 조망해 본다. 어느 날 문든 친구들과 산책을 하다가 자신 혼자서 느끼는 감정 '절규'를 경험하듯 모든 것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두려움'이나 '죽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킬리만자로의 눈에는 그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담겨 있다. 킬리만자로에 쌓인 눈을 눈이라 하지 않고 하얀 코끼리에 비유를 했다. 하지만 킬리만자로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얻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사냥여행을 떠난 '해리'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한순간에 그의 삶이 무너지고 말았다. 가볍게 여겼던 다리의 부상이 점점 그의 삶을 파고 들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오른쪽 다리에 괴저가 시작된 이후로 그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고,통증과 함께 공포도 사라졌다. 이제 그가 느끼는 것이라곤 이게 끝이라는 커다란 피로와 분노뿐이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이것에 그는 호기심이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이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이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써야 할 글이 많이 저장되 있었다. 그런데 하나도 꺼내보지 못하고 단순하게 여긴 상처로 인해 무릎을 끓어야만 한다. 죽음이란 가까이가면 갈수록 더욱 살고 싶다는 '절규'를 하게 만든다.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수가 없어서 공포와 맞써 싸우는 해리,하지만 어느 한수간 그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그는 모든것을 놓아 버리듯 킬리만자로의 눈이 덮힌 꼭대기를 향할 수 있었다. 받아 들이면 편안해지지만 그렇지 못하면 고통에 절규할 뿐이다.

 

해리가 써내려고 했던 머리 속에 담겨 있던 소설과 함께 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곳에 사냥여행을 오기 전까지는 그가 그렇게 '죽음'과 맞써 싸우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하는 순간에 그리고 무언가 깨닫는 순간에 '죽음'이 닥쳐 온다고 흔히들 이야기 한다. 평생 철이 들지 않아야 오래 산다고 한 이야기처럼 그가 고통과 분노를 놓아 버리는 순간 그에게 찾아 온 죽음이라는 또 다른 그림자, 삶을 희망으로 붙잡을 그 무엇이 없다고 생각한 해리에겐 그저 자신 안에서 아직 산고를 거치지 않은 소설을 쏟아 내는 것,죽기 전에 빛을 보게 만들고 싶은 이야기들이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쏟아 내야만 그가 이르려는 그 세계에 도달할 것만 같다. 뭉크가 산책중에 순간에 마주한 '절규'가 그려지는 장면이다. 모든 것으로부터,자신이 간단한 상처로 인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말을 귀를 닫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받아 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절규하면 절규할수록 통증은 더하고 냄새는 더욱 지독할 뿐이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해리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절규했다면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 머콤버는 순간 '두려움'과 맞써게 된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머콤비 아내와 사냥군 윌슨과 함께 사파리로 사자사냥을 간다. 하지만 그의 손은 달달 떨리고 있다. 왜 안그렇겠는가 지금까지 그에겐 그런 모습이 없었는데.하지만 사냥꾼 윌슨에게 지고 싶지 않고 자신의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머콤비는 사자를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그들 모두와 함게 사자사냥에 나서게 된다. 두려운자는 한 발의 총탄으로 저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발을 쏘게 되어 있다. 사냥꾼은 어느 부의를 맞추어야 단명하게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는 모른다.옆에서 알려 주어도 들어오지 않는다.그에게 두려움이 엄습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떻게 하여 사자를 맞추게 되고 어설피 맞은 총알에 사자는 숲으로 들어가 마지막 숨을 쉬고 있다가 자신을 찾아 나선 인간들에게 마지막 힘을 다하듯 달려든다. 그 순간에 '두려움'을 느낀 머콤버는 뒤로 도망치고 그런 모습을 차에서 지켜보는 아내, 사자는 결국에 윌슨에 총에 맞아 죽게 되고 머콤버는 두려움에 떨게 되고 밤에는 아내마져 그의 곁을 떠나 윌슨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어진 물소사냥에서 머콤버는 전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두려움을 극복한 듯 물소들의 죽음에 '행복과 희열'을 느끼는 그,그리고 달라진 그를 알아보는 아내. 세마리의 물소는 그들의 손에 죽는다.그런데 첫번째 정말 멋지고 큰 물소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사자처럼 총알을 몸에 박고 숲으로 도망쳐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 그 물소를 찾아 마지막 숨을 끊어 놓기 위하여 나섰던 그들,너무 분기탱천한 달여오는 물소에게 한방을 먹이려던 그를 물소가 그를 덮칠까봐 아내는 물소를 쏜다는 것이 그의 머리를 쏘고 만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순간에 그는 '죽음'에 이른 것이다.

'

머콤버의 삶에서는 사파리사냥을 통하여 '약육강식'의 세계도 보여준다. 사파리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사자사냥도 했다.그리고 물에서 힘이 센 '물소사냥'도 했다. 더이상 그에게 두려움이란 없다. 모든 부를 가졌고 이쁜 아내도 가졌으며 사파에서 최강자들을 사냥했다는 자만감,자신 위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했더니 남자라는 강위에 여자라는 강이 있다는 것을 그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가졌다고 생각한 순간,행복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에 아내가 쏜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머콤비'의 아이러니한 삶을 행복이라고 해야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한다. 정말 뭉크의 '절규'가 또 한번 그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남자들은 밖에서 늘 큰소리를 친가.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정말 그럴까? 자신들이 또한 안에서 '여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남자 위에는 분명히 여자가 존재한다. 그것이 누군가 동등한 저울에 올려 놓으면 둘의 관계는 동등해지겠지만 한쪽에서 기울게 한다면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난다.

 

'이제 머콤버는 마음에 들었다. 더럽게 이상한 친구야. 어쩌면 이제 오쟁이 지는 것도 끝나게 된 것인지 몰랐다.그래, 그건 더럽게 좋은 일이지. 더럽게 좋은 일이야. 이놈은 아마 평생 두려워하며 살았을 거야. 뭐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하지만 이제는 끝났어.'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에 죽음은 나의 것이 되었고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순간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삶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런가 하면 메뚜기를 미늘에 꿰어 송어를 낚아 올리듯 삶의 결과물은 어떤 것이 끌려 올지 모르는 것이다. 미끼만 꿰어 먹고 도망가려는지 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것이 올라올 수도 있고 작은 것일까 하는 순간에 끓어 올릴 수도 없이 큰 송어가 올라올 수도 있다.그렇다고 그모든 것을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은 노인처럼 청새치를 잡았지만 상어밥으로 모든 것을 주고 뼈만 앙상한 청새치의 흔적만,기억만 안고 살아갈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 삶의 정답일까.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채우기 보다는 '비우기'를 먼저 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여 짧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모든 것을 다 가질수는 없다. 내가 던진 낚시바늘에 무엇이 걸려들지 모르는 것이 삶이고 인생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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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5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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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가요? 어느 책에서 이런 귀절을 본 적이 있다.어느 누구에겐 24시간이 아닌 25시간처럼 값지게 사용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24시간이 무척 길고 별 가치없이 그냥 소모품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리기도 할 것이다. '시간' 그렇다면 난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25시간으로 사용은 못하지만 그래도 값지다고 생각할 수 있는 보물과 같은 시간이 존재할까?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생각해보면 잘게 잘게 썰어 놓은 무채처럼 시간 또한 그렇게 잘게 쪼개져 보이기도 하는 '하루'라는 시간이 우리 인생에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무언가에 얽매이어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 시간을 벗어나면 무엇이든 다 될 수 있고 다 할 수 있을것만 같은 것이 시간이다.하지만 막상 여유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그 시간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난이함을 보이기도 한다. 한참 '공부'와 '성적'에 얽매어 있는 사춘기 고딩들, 그들은 그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다. 빨리 시간이 가던가 아니면 그 시간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면 겉돌기를 한다. 종졸 그런 아이들은 '도벽' 생기기도 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도벽'으로 나타나는 친구의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하지만 '시간을 파는 상점'의 주인인 백온조의 아빠는 시간을 소중하게 다르는,정말 일분 일초가 생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나타내주는 직업인 소방대원이다. 위급상황에서 구조길에 나섰다가 엄마를 만났고 그렇게 둘은 결혼하여 서로 다른 길이지만 서로의 길에 최선을 다하며 살다가 먼저 가게 되었다. 아빠의 부재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열심히 일하며 딸 온조를 키우고 있는 엄마,그런 엄마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알바를 찾아 해보지만 지배인 부도덕함에 질려 그만두기도 하고 체력이 받쳐주질 않아 그만 둔 온조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가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여 은밀하게 움직여주는, '시간'을 되찾아 주거나 좀더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

 

드디어 첫 의로인의 부탁이 들어오고 같은 학교에서 누군가 훔친 PMP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은 일을 하게 된다. 그것을 훔치는 일도 힘들겠지만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은 일 또한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을 느끼는 온조,하지만 그것이 제자리로 돌아감으로 인해 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술렁이는 학교 술렁이는 아이들,전년도에 도벽이 있던 학생의 자살사건이 있었기에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할까 하여 온조는 자신이 그 죽음을 막았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것이 또 다른 문제를 불러 올 수도 있다는 찝찝함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의뢰, 자신의 할아버지를 만나 밥을 맛있게 먹어 달라는 일.그게 그렇게 힘든 일일까.그들 가족에겐 어떤 문제가 있었기에 그들은 서로 화해를 하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할아버지의 말 속에서 시간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하여 더 깊은 생각을 가지게 되는 온조,그렇다면 '시간'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제일 잘 현재를 보냈다고 할 수 있을까.가족을 이해 못하고 서로 몰아 세우듯 하여 흩어진 가조들,그들에게 시간을 되돌려 용서하고 화해할 시간은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그들이 다시 가족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언제일까. 시간은 미룬다면 더 큰 골만 만들 뿐이다.

 

저마다 살아가는 방법도 인생의 정답도 다르겠지만 '시간'이란 흘러가는 바람과 같다. 지금 불어 온 바람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잡으로 하지 말고 편승하면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산다면,어제 죽어간 이가 그도록 바라던 오늘을 좀더 값지게 산 것이라 할 수 있을까.현재의 우리에겐 오늘이 있지만 그것의 소중함을 제대로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곁을 떠나거나 부재한다면 비로소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절망의 벼랑 끝에 몰려봐야 비로소 희망이 보이기도 하고 소중한 것들도 느끼게 된다. 사춘기 소녀가 이끌어 가기엔 벅찬 '시간'이지만 참 재밌게 잘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이야기가 추리적으로 풀려 나가고 있어 더욱 재미를 준다. PMP를 훔쳤던 학생은 왜 그런 행동을 해야만 했을까?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일분 일초를 온 몸으로 아니 발걸음 하나 하나 내딛는 그 촉감으로 자신을 만나고 있는 친구, 그 친구는 그 시간 속에서 '바람'을 본다. 현재의 자신들의 모습을 친구들과 함께 느끼며 용서하고 화해하고 그리고 희망으로 나아간다.

 

어쩌면 백온조의 '시간을 파는 상점'을 힐링 카페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에게 '치유'의 존재가 되어 희망이라는 시간을 되찾아 주면서 자신 또한 치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빠를 잃은 슬픔에서 그리고 현재의 시간에서 엄마의 연애인 '불곰의 살구꽃 그녀'를 알게 되면서 아빠의 자리에 '불곰'을 존재를 받아 들이기도 하고 강토와 그들의 조각조각 깨진 가족의 파편들을 이어주기도 하는가 하면 친구 난주에게는 '이현'이라는 친구를 진짜 친구로 받아 들일 수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정말 여기저기 수호천사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자신 또한 치유의 존재가 되어가는 이야기. 자신의 몸을 학대하면서 희망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감동적인 일로 치유로 받는 사람들도 있다. 시간이란 절박한 이들에게는 '절망'이기도 하면서 끝이라 생각한 순간이 '시작'이듯이 '희망'이기도 한 시간의 양면성. 시간이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른 사용자에 따라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수도 있고 절망이기도 희망이기도 할 수 있는 정말 바람과 같은 것이다.

 

좀더 무겁게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했지만 청소년들이 감당하기엔 좀 애매하고 무거운 소재인 '시간'을 맛깔스럽게 잘 다듬어 버무려 놓아 맛있는 음식으로 거듭났다.무겁게 가라앉을 것 같으면서도 적절하게 유행하는 청소년들의 말들이 다시 가라앉지 않게 조절을 해주면서 자신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부분에 '강토 할아버지'의 삶이 그리고 난주엄마의 삶과 자신의 엄마의 삶인 어른들의 삶이 현재 자신들의 삶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 시간이라는 씨실과 날실이 조화를 이룬 듯 하다. '비로소 혼자 걸어가고 있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린 자신을 얼마나 보며 살아 가고 있을까? 온조의 말처럼 '나는 그냥 내가 나인게 좋을 뿐이야.' 우린 현재의 나로 살기 보다는 '누군가'의 나로 혹은 그런 '누군가'를 강요하며 상대의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남이 살아가는 시간을 보기 보다는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게 만드는,현재 오늘이라는 시간을 좀더 소중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우리의 온조가 하게 한다. 그대,뒤돌아 보아 후회하지 않을 '오늘'을 살고 있는가.다 지난 후에 후회하지 말고 현재의 오늘을 값지게 살지어다. 오늘이 희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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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아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63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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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왜 좋아할까? 나도 무척이나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그중에 '애거서 크리스티'전집은 한 권 한 권 구매를 하다보니 서른다섯권정도 모였고 그외 히가시노 게이고나 셜록 홈즈및 다른 추리소설들도 꽤 많은 편이고 조금 읽었다고 할 수 있어 소설을 읽는 것이 더욱 재밌었다.지금 이 세상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왜 아이들이 자살을 해야하고 왕따와 학교 폭력에 시달려야 할까? 정말 문제다. 나 또한 사춘기의 아이들이 있지만 한마디로 무섭다.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를 때가 있다. 요즘 아이들은 남이 하는 것은 모두 따라해야 하고 남이 가진 것은 나도 가져야 한다.그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줄 안다. 남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남과 똑같아 지려고 한다. 대량생산의 사회가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었고 획일적으로 승자만 추켜세우는 교육제도가 아이들 또한 그렇게 내몰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자신의 존재성을 좀더 찾아야 하는데 외모성형에 이어 내면까지 성형화되는 듯 하다.

 

'힘들어' 라고 하는 아이들에게 뭐라 해야할까 막막할 때가 있다.나 또한 딸들에게 이런 문자를 받거나 이런 말을 들을 때 정말 막막핟. 다시 뛰고 있는 딸은 친구들이 '힘내'라고 말하거나 문자를 보내줄 때가 가장 짜증이나고 힘들다고 한다. 나 또한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쓰고 있었는데 딸의 그런 말을 듣고나서부터는 그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 '열심히 뛰어보자' 뛰고 있는 아이에게 또 그런 말을 해서 상처를 받을까봐 노심초사,토닥토닥 따듯한 한마디로 건넨 말이 충격을 줄 수 있음을 늘 한번더 되새김질을 하게 만든다. 요즘 아이들은 성적에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승자'만 대접받기에 서로간의 '교감' 이 부족하다. 좀더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주고 그런 시간에 친구지만 적인 관계,적을 밟고 자신이 올라서야만 하기에 틈새를 노린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도 낯설고 친구라는 관계가 오래 지속된다는 것도 왠지 거래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다.

 

교감이 없는 아이들 사이에서 누군가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그것도 남보다 부유하고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특목고에 일류대를 들어간 엘리트라면 그 밑에 동생은 어떠할까? 그런 동생이 세계에서 '10개' 뿐인 '온리럭키'라는 행운의 열쇠를 손에 쥐게 되었다면 그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행운의 열쇠를 우연하게 손에 쥔 오유리라는 여중생은 그것을 손에 쥔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된다.그리고 그 불행은 그녀의 목숨까지 빼앗아 가게 만든다.자살일까 타살일까? 처음엔 집나간 고양이를 찾아 달라고 온 유리의 언니,하지만 다음엔 동생의 행운의 열쇠를 찾아 달라고 고명달 명탐정 사무소에 찾아 왔다. 나 고기왕은 집안 경제를 아빠를 대신하여 아프리카로 떠난 엄마도 없이 경제에 무딘 아빠와 함께 살면서 명탐정의 아들로 탐정일도 해야하고 주부로 아빠의 밥도 챙겨야 한다. 나에겐 바보같지만 단짝인 친구 몽키가 있다. 그래도 그는 친구다. 친구란 어떤 의미일까.인생에 정말 단 한명의 친구만 있어도 성공한 삶이라고 하는데 유리에겐 왜 친구가 없고 왕따가 되어 자살에 이르게 된 것일까.그것이 비단 '행운의 열쇠' 때문이었을까.

 

소설 속에는 유리의 죽음을 파헤치며 그에 얽힌 왕따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빵 셔틀을 시키는 남학생들만의 계급화된 학교의 일상을 보여주기도 하며 고기왕 또한 초등학교 때 친구의 시험부정을 목격 하면서 그로 인해 친구들에게 왕따가 되었지만 그래도 잘 적응하듯 살아가고 있고 사회부적응자처럼 회사 한번 안다니고 여러 적업을 전전하다 전셋집에 비디오점까지 말아먹고 이젠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탐정사무소를 차린 경제관념 제로인 아빠와 살고 있는 명탐정네의 삶이 씨실과 날실처럼 엉키고 엉켜있지만 명탐정 고명달이 좋아하는 추리소설처럼 답이 있다는 것,추리소설은 왜 좋아할까? 나를 대신한 멋진 탐정이나 누군가가 대신 명쾌하게 살인사건에 대한 범인도 잡고 트릭을 헤치고 들어가 답을 찾는다. 1+1은 2라는 것처럼 트릭과 반전이 있지만 꼭 범인이 존재하고 그를 잡아내는 탐정, 그 탐정들은 살인사건 속에 숨은 '인간의 내면'을 파고 들어간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알 수 없는 '인간의 내면' 몇 개의 얼굴이 숨겨져 있는 것인지.추리소설을 읽다보면 정말 죄가 미운 것이지 사람이 미운것이 아니라는,다 이유가 있는 죽음과 살인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 삶에도 답이 있을 것이다. 어느 죽음이든 삶이든 답이 없는 삶과 죽음은 없다. 그 답을 찾아 명탐정을 자처하고 나선 고명달과 어쩔 수 없이 명탐정의 아들이 된 고기왕이 아빠 명탐정보다 더 뛰어난 추리력으로 '오유리자살사건' 아니 '행운의 열쇠'를 찾는 사건에 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누구나 '행운'을 늘 바라고 원한다.하지만 무수히 많은 행복속에 단하나의 '행운' 이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린 늘 잊고 산다.네잎 클로버와 세잎클로버의 이야기가 그래서 늘 내 머리를 친다. 자신이 현재 행복하지만 행복을 우린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행운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그런데 그 행운을 모두 가졌다고 생각하는 유리가 가졌으니 아이들의 질투가 오죽했을까.더이상 그것은 행운이 아닌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벽'과 같은 마지막 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교감을 나누려고 해도 모두 그녀를 '거짓'으로 대하는 세상에서 그녀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 이었고 그녀의 죽음에 관련이 있던 없던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그저 지켜 보고만 있던 '방관자'였던 것이다. 막을 수도 있었지만 바라보고만 있었기에 그녀의 삶은 깨진 행운의 열쇠와 같았던 것,그 모든 것을 한편으로는 유쾌하게 현재의 자신을 받아 들이면서 문제를 풀어 나가는 고기왕,엄마도 없는 사춘기의 힘든 시간에 타인의 죽음을 면하게 되면서 한 뼘 성장하는 명탐정의 아들, '나는 밥을 한입에 욱여넣고 아빠 뒤를 쫒아 달렸다.아, 밥 먹다가 이게 무슨 짓이냐고.그런데 입이 벌어진다. 혹시 웃는 건가.그나저나 내가 왜 뛰어야 하냐고?' 삶은 그렇게 달련되는 것이다.무쇠가 수도 없이 많이 담금질을 하여 단단해지듯이 그렇게 삶의 파고를 한단계 넘어서면서 담금질이 되는 것이다.

 

토닥토닥 모든 아이들의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 소설이다.아니 정말 그렇게 하여 아이들이 기운을 내고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나 다시 뛸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다.난 아이들의 엉덩이를 잘 두드려준다. '기운내'하면서.그리고 가슴으로 안아준다. 내 따듯한 체온을 나누어 주어서 좀더 따듯한 세상을 품을 수 있다면 다 주고 싶다. 어디에 기댈 곳이 없는 아이들,내 어깨에 기대렴 어깨를 빌려 줄게. 잠시 그렇게 쉬면서 네 자신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나렴 하고 말해주고 싶다. 유리의 집안을 살짝 들여다보면 가족 역시나 '교감' 없다. 서로 살기 바빠 각자의 영역에서 허덕이고 있는 가족들,하지만 명탐정내 집은 항상 부딪히고 우왕좌왕 좌충우돌 하면서 아빠와 아들이 혹은 아빠와 엄마가 부딪혀가며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경제관념 제로이지만 비가 줄줄 세는 집에서도 그들이 가족으로 흐트러지지 않고 뭉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간에 교감이 있기에. 아들에게 반찬투정하는 아빠,사춘기 아들보다 더 챙겨 먹는 아빠,그런 아빠를 주부처럼 챙겨주는 아들의 투덕거림이 즐거운 비명처럼 소설을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게 한다. 내 주위 내 아이를 한번 더 돌아보고 아이들을 토닥여주게 만든다. '다시 뛰어보자.인생은 어딘가에 길이 있어,지금 포기하게엔 너무 이르다'라고 누군가 속삭이는 듯 하다. 지금 힘든 친구들,모두 카페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으로 모여라.

 

*오타수정

48p 내 말에 윤희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 내 말에 윤희 누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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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탄생 -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10인과의 인터뷰
카렌 호른 지음, 안기순.김미란.최다인 옮김, 안기정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길은 로마로 통한다'가 아니라 '로마로 통하는 길은 많다'로 시작하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10인들에게 들어보는 '경제학'아니 '경제학의 프레임을 바꾼 혁신적인 이론은 어디에서 왔는가?' 를 알아본다. 그들의 평균 나이는 67세,세계 대공항도 지나고 모든 일들을 겪은 그들이 본 경제 그리고 가정에서 경제학의 밑바탕이 이루어졌나를 들어본다. '경제'라는 것은 실상 늘 접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경제학'이라고 그리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하니 무척 어렵게 다가온다.거기에 책이 무척이나 두껍다. 10인의 인터뷰이니 얼마나 방대한 양의 이야기가 실려 있겠는가 제목만 봐도 어렵지만 왠지 모르게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하여 열심히 읽기는 했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가깝게 생각하거나 쉬운 이야기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자꾸만 손과 머리에서 겉돌기만 한다.

 

경제는 작게는 내 주머니 내 가정에서 시작하여 나라 그리고 세계로 나아간다. 요즘은 한 쪽에서 출렁이면 쓰나미처럼 그 파문이 모두에게 그 영향이 미치고 있으니 나 혼자 관리 잘하고 잘살려고 노력해도 왠지 너무 따라가기 급급한 것이 경제이기도 하다.첫 파트는 이 책의 집필 목적에 대하여라는 '질문'편과 위대한 학자들 폴 새뮤얼슨,케네스 애로,제임스 뷰캐넌,로버트 솔로,게리 베커,더글러스 노스,라인하르트 젤텐,조지 애컬로프,버넌 스미스,애드먼드 펠프스 이상 10인의 경제학상 수상자들과의 인터뷰와 함께 '경제학의 프레임을 바꾼 혁신적인 이론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라는 '해답'편으로 나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부터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인터뷰한 학자들의 학문적 여정에서 나타나는 차이점과 유사점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에 실린 10명의 인물만 놓고 경제학계의 대표 집단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 어떤 법칙 같은 것을 도출할 수 있다는 기대는 금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우리는 이들에게서 곰곰이 생각하고 고찰한 만한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 경제학가가 된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경제학이 갖고 있는 문제, 즉 세상을 발견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에 직접적으로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경제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지적 호기심에 의하여도 있겠지만 정말 단순하게 '우연' 에 의하여서인 경우도 많다. 자신이 살던 집과 가까이 있기에 선택한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었다든가,장학금을 받기 위하여든 타인에 의하여 경제학을 접하게 된 우연들이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을 뿐아니라 그들이 진나온 시간들 속에 커다란 세계적인 사건들이 그들에게 또 한번의 큰 문제로 작용하며 그것을 회피하기 보다는 수학적 경제학적으로 풀어 나가려고 했던 적극적인 자세가 오늘날의 그들을 만들었지만 '로마로 통하는 길은 무수히 많다' 아직도 '로마'를 찾은 것은 아니라는 끝맺음이 우리들에게 숙제를 남겨준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그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세계 경제학이나 그들이 경제학 이야기 보다는 한 인간의 인생행로를 여행하듯 그저 색다르게 읽었다. 쉽게 접하기 힘든 부분들이고 사람들이라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인생행로를 읽으며 '필연'에 의한 역사 보다는 '우연'과 '노력' 에 의한 역사가 크다는 것을 한번도 실감하며 경제학에 관심이 많거나 공부를 하는 이들,적성에 맞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유용한 책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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