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사람들 - 1866, 애절한 죽음의 기록
이수광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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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라는 것을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하고 그리고 내고향 윗마을에는 그 시대쯤에 숨어 들어와 옹기를 구우며 산 사람들의 마을이기에 친구들의 부모님세대나 그 윗시대의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전해 듣기도 했지만 '설마' 하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을까 했는데 '해미읍성' 아이들이 어릴 때 함께 갔다가 문화해설을 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소름이 돋았는지.해미읍성 바로 앞에는 커다란 돌이 뉘어져 있다. 그곳에 사람을 곡물을 타작하듯이 내려쳐서 죽였다는 것이다.그런가하면 산 사람들을 논 가운데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들어가게 하고는 생매장을 했다는 둠벙이야기를 할 때는...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움찍하면서 우리의 역사가 그렇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다.그 뿐일까 정말 말로 하지 못할 이름없는 민초들의 죽음이,단지 천주교를 믿는다는,야소쟁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은 참혹한 죽음으로 스러져 가야했다.

 

천주교 박해라는 역사중에서 제일 많이 알고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정약용 형제들' 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많은 이야기로 다루어 지기도 했지만 많이 알려지기도 하고 우리가 쉽게 그리고 제일 잘 알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정약용 형제들과 천주교 그리고 정조, 역사라는 것이 아이러니해서 만약에 정약용과 정약전이 강진과 흑산도도 천주교 때문에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자산어보> 며 정약용의 그 많은 책들을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고 '실학'이란 것이 발전하게 되었을까? 한편으로는 그들이 천주교라는 것으로 피해를 보았으면서도 역사적인 측면에서는 그런 큰 수확물을 남겼으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런 굵직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 있지만 그런 큰 인물들의 이야기보다는 정말 너무도 참혹하고 무참하게 죽어간 '민초'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조선의 천주교는 '자생적'으로 퍼져나갔고 발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단다. 지금처럼 종교의 자유가 있었다면 그들이 목숨을 내놓고 죽어가지 않아도 되었을터이지만 정치적으로 그리고 그 시대는 천주교를 용납할 수 없었다. 조상을 모시지 않고 '야소'를 믿었던 그들은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서학을 한다는 이유로 순교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죽음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어쩌면 죽음이 그들 믿음을 더욱 굳고 단단하게 해 준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내가 천주교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는 느낌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믿음이 없다고 해도 믿음의 이유로 그렇게 민초들을 무참하게 죽였다는 것이 정말 끔찍하다. 어떻게 지금은 생각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사형을 하고 우리 백성 뿐만이 아니라 외국인 신부들까지 그랬다는 것이 정말 믿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한 단면이기에 지금이라도 외면하기 보다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눈과 귀를 가지기 위하여 더 관심을 기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측면에서 읽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 주변의 이야기들이 많다. 그렇다고 천주교 성지를 가본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은 성지가 아닌 다른 이유로 가보게 되었는데 그들의 죽음에 난 무관한듯 야생화 구경을 하고 자연을 구경했는데 신자분들은 정말 그 마음이 다른 얼굴로 와서 성지를 오셨다.괜히 무안한 생각,하지만 비록 역사는 그들을 버렸다고,죽음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내쳤지만 후세는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젠 그들의 애절한 죽음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시대과 도래했다는 것을.시대가 바뀌었음을 본다. 역사란 늘 '만약에..' 라는 문구를 앞에 두고 보게 된다. 만약에 그 시대에 천주교 박해를 하지 않고 흥선대원군이 받아 들였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읽는내내 정말 이유도 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라는 믿음의 이름으로 너무 가혹하게 죽어가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가져보며 정말 슬프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1866년 9월에 이르기까지 이미 2천 명의 교우가 박해자의 칼날에 쓰러졌다. 1870년대에 이르러서는 죽임의 괴로움을 당한 교우가 8천여 명이라 하는데 이중에는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은 교우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해의 피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스러져갔을까. 강산을 물들인 피의 바람이 더 큰 화를 불러오기도 했던 1866,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들의 믿음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번 느끼며 언제 기회가 되면 천주교 성지를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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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정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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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을 살고 있는 난,전생은 무엇이었고 미래에는 어떤 생을 살아갈까? 삶과 죽음을 너머 그 다음 세계를 우린 환생이라 한다. 과연 '환생'이라는 세상은 있을까? 존재할까.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어떤 생이라 할 수 있을까. 난 딱히 정해진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기독교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 밑바닥엔 불교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고 있는 자신을 본다. 다른 어느 곳보다 다른 종교보다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곳은 절이고 불교이다. 그렇다고 불교에 대하여 무척 깊게 빠져 든다거나 불자라고 할 수는 없는 그저 옆에서 구경하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신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고 조금씩 섭렵하는 그런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종교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환생'에 대하여,자신의 전생을 보았다는 죽음 직전의 이브라힘을 객관적 사실을 다루는 기자인 케이가 그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자신을 다섯 살 때 버렸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두 이야기는 하나의 실로 꼬여 나간다. 이브라힘은 그를 보자마자 알아본다. 전생에서 케이가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병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다른 사람의 환생 속에서 내가 나왔다.그렇게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된다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십자군 전쟁과 예수의 부활에 이르기 까지 이야기들이 전개되면서 신의 존재와 환생 그렇다면 현생의 나는 어떤 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답을 하듯 그는 자신의 생모이며 무당인 '어머니'의 생과 만나면서 풀어 나간다.

 

객관적 사실을 좇는 기자인 그가 전생의 이야기와 환생에 대한 이야기를 믿어야 할까. 이브라힘이 말하는 전생과 환생의 이야기는 그가 죽음직전에 경험한 꿈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그가 본 전생일까.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 무당인 어머니의 존재와 무용을 하던 어머니가 신을 모시게 된 사연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가 병원복도에서 이브라힘을 알 칸디 병원에서 만나던 순간은 '내 안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흘러들어오고 있을 때였지요.' 그가 이브라힘을 만나던 그 순간은 전생과 현생의 수많은 생명들이 이브라힘에게 접신한다고 할까 그런 순간이었다는 것이다.그러니 그가 전생에서 이브라힘을 죽였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그들은 환생하여 현생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것이다. 그들이 만나게 된 것은 '예수' 때문이었다. '젊은 목수였습니다. 초라한 여인의 아들이었고,남루한 유랑자였습니다.' 예수 또한 삶의 유랑자였던 것이다. 그가 전생을 삶을 마감하고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 존재로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라고 이브라힘은 말한다. 하지만 그 역시나 삶의 유랑자였고 우리의 삶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연결되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말이다.

 

우리의 삶은 죽음이 끝일까? 라는 물음을 갖게 만든다. 죽음이 정말 끝일까? 자신을 버려야했던 생모는 왜 무당이 되었고 다시 죽음의 그 시간속으로 간 어머니는 그럼 생이 끝이 난 것일까? 한국전쟁으로 인한 과거 때문에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신을 받아 들여야 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를 버려야 했지만 기필코 그를 버리지 않았음을,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는 이브라힘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전생과 환생을 오가던 그 시간 속에서 어머니를 이해하고 받아 들이게 된다. 어머니를 이해하는 데에는 '강희'라는 아픔을 간직한 신딸이 존재한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 가시고 굿을 하면서 어머니의 말을 그에게 전한다. 어머니도 아니고 그녀도 아닌 굿을 하는 순간의 말들,나 또한 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뜻하지 않게 길닦이를 하자는 친정엄마의 말씀에 어쩔 수 없이 그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 순간을 나 또한 생생이 느껴서일까,섬득함이 느껴질 정도로 그때가 또렷하게 기억났다. 아버지가 아니면서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무녀,그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 순간 비로소 난 아버지가 이승을 떠나 아버지의 세상으로 돌아가셨다고 믿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환생이라고 해야할까.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리우어져요. 시간과 공간은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쌍생아지요. 인간의 수명에는 한계가 있어요.길어야 백년이죠.조금씩 늘어나긴 하겠지만, 그러니까 인간은 시간에 갇혀 있는 존재예요. 그 말은,공간에 갇혀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그러니까 죽음 이후에 이무것도 없다면 인간은 영원히 갇힌 존재가 되는 거예요. 여기에서 염원이 생기는 거예요.  닫힌 곳에서 나가고 싶어하는.' 염원,누구를 위한 염원일까? 현생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위한 염원일까 아님 현생을 떠나 환생의 길을 가고 있는 영혼을 위한 염원일까. '나의 기도는 당신을 용서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동시에 내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씻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자신안에 있는 상처를 씻기 위한 것일까.삶과 죽음은 연장선상에 있지만 우리는 죽음이라고 하면 생의 끝으로 아는데 정말 전생과 현생 그리고 환생이라는 생의 중첩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죽음을 앞에 두면 수많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그것이 타인의 죽음이라고 해도. 흔히 죽음은 추억만 님긴다고 한다. 사람의 빈자리는 사람이 채우듯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무언가의 '줄'에 연결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환생을 믿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염원'이라는 기도를 통하여 누군가 어떤 존재에게 무수히 빌고는 한다. 무엇을 위해 빌까. 은연중에 모든 생을 다 받아 들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내 앞에 갑자기 다가온다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받아 들이질 못한다. 케이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그랬다. 하지만 전생을 보았다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수많은 죽음을 직면하게 되고 '씻김굿' 및 샤머니즘과 당면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보듬어 안게 되면서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현생인 삶을 사랑하게 되는 유랑자가 된다. 삶이란 것도 생각해보면 힘들지만 죽음이란 뒤돌아보면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온다.현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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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1 - 가난한 성자들 조드 1
김형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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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드', 그 뜻이 무얼까 했는데 대충 생각했던 뜻이 맞았다는 것을 책의 앞부분에서 읽게 되었다.'괴팍한 날씨 때문에 초지가 피폐해져서 가축들이 지쳐 주는 걸 조드라 한다. 조드는 근본적으로 고원에서 물이 없어서 생기는 것인데 피해의 양상은 크게 네 가지로 드러난다. 하나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두번째는 초지가 말라서...세번째는 극심한 눈보라 때문에...네번째는 일찍 내린 눈이 따듯해지는 바람에 철철 녹아서 흐라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강추위에 아주 두꺼운 얼음이 되는 것, 그래서 눈에 번히 보이는 풀뿌리에 입도 대지 못한 채 굶어 죽는 것이 거울조드이다.' 조드가 아닌 계절이 없다. 광활한 몽골 평원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타내 주는 듯 하다. 그러니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생존경쟁이 얼마나 치열하겠는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아니 내가 알고 있었던 '칭기즈칸'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척박한 몽골 평원에서 모진 바람과 그리고 수컷들의 싸움에서 이겨내는 그야말로 생존경쟁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척박한 그 땅에서 바람과 먹이와의 싸움에서 누가 어떻게 살아 남느냐 하는 유목민의 삶을 세세히 보여준 소설이지 않나싶다. 몽골민의 삶을 다룬 영화 '투야의 결혼'이나 그외 많은 다큐에서 만난 유목민의 삶이 그대로 잘 드러나 있어 현실감 있고 사실감 있어 몽골의 자연과 바람을 바로 눈 앞에서 겪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아버지 예수게이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이복형제들과 함께 숨어 다니듯 하며 사는 테무진,그가 자무카를 만나는 장면은 정말 드라마틱하다. 늑대들 속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그들의 야성을 알고 있던 테무진은 그야말로 지휘자라도 된 듯 말과 자무카 일행을 구해낸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 본다고 자무카 또한 테무진이 인물임을 알아 보았고 테무진 역시나 그를 훗날 다시 만나게 됨을 알게 된다. 광활한 평원에서 유목민으로 물과 바람과 먹이와 그리고 서로간에 영역다툼을 하듯 흰 뼈와 검은 뼈로 살아가는 사람들,하지만 테무진은 그에게 피와 살이 되는 지혜를 주는 이는 아래가 되어도 존대를 해주는 남과 다른 마음과 눈을 가지고 있다. '모두에게는 없는 눈이 테무진에게는 있으니, 다들 그 마음의 눈이 곧 길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적들에게 쫒기면서 궁핍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는 자신과 모두에게 진실했고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과 사람을 잃지 않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넓은 마음과 남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점점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그를 찾는 사람들, 무엇보다 안정을 찾기 위하여는 아내를 얻는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시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말이 오가던 집안의 여인을 다시 찾아가 결혼을 하게 되지만 아내를 인질로 빼앗기듯 싸움의 계기가 되게 만든 결혼. 하지만 그 싸움으로 인해 그는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그가 칸으로 나아가는 방향 제시가 되지 않았나 한다.

 

척박한 유목민의 삶에서는 남자들 또한 그 삶을 지탱하기 위하여서는 자연은 물론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는 용맹함이 있어야 하지만 여자들 삶 또한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예수게이 죽음 이후 이복자식과 함께 살아가는 후엘룬의 삶이나 테무진과 결혼하여 겨우 신혼의 재미를 보다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 갖은 모욕을 당하며 살아야 했던 버르테의 삶은 다른 듯 하면서도 닮아 있기도 하며 남자 못지 않은 지혜와 용맹을 지녔다. 이야기는 전설과 같은 '늑대 서사'와 '고운님 사랑'인 알랑 고아의 이야기를 먼저 풀어내서일까 신비하면서도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서사'적이면서 전설적인 느낌을 주면서 몽골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소설을 써서일까 무척이나 현실적이며 사실감을 준다. 유목민의 삶을 다큐를 보듯 현장감이 있으면서 테무진이 여러 인물들과 어울러 비로소 움직이게 되었으니 2권은 더 흥미진진할 듯 하다.

 

'삶이란 그렇게 몽롱한 것이다. 아름답고 참혹하다. 먹이사슬의 꼭대기로 갈수록 생존경쟁은 더욱 사납고 무섭고 치열했으니, 사방이 터진 벌판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울타리는 동료의 육신밖에는 없었다.' 처음 시작이 늑대와 말과 사람의 싸움을 그려서일까 이야기가 펼쳐질 평원이 늘 평화로운 곳이 아닌 정말 생존경쟁이 얼마나 치열한 곳인가를, 그곳에서 살아 남는다는 것은 참혹한 일이며 '죽으면 죽고 살면 살리라'라는 말처럼 죽음 아니면 삶을 선택해야만 하는 척박한 곳임을 말해준다.하나의 조드를 이겨내면 또 다른 조드가 바람처럼 달려오고 그 조드를 이겨내면 또 다른 조드가 그리고 퇴로를 준비해 놓지 않은 적의 공격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싸움이 이어지는 평원에서의 유목민의 삶이란 그야말로 척박함 그 자체임을 먼지 바람이 일 듯 생생함을 담아 내어 더 빠져들게 한다. '테무진은 한동안 '세상'을 인내의 실험장으로 알았다.' 테무진이 인내의 시간을 감내했다면 보르칸에서 이제 세상은 테무진에게 어떤 세상이 되어 그에게 돌아올까,2권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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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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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부터 죽음까지 이어지는 정말 짧고도 강한 '제이' 삶 속에서 그가 들려주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십대 엄마의 몸에서 그것도 대형마트의 화장실에서 태어나야 했던 운명,죽음에 이르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엄마가 바뀐,아니 그는 엄마를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소설 속에서 제이의 엄마는 그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를 낳았다는 그 자체로,그가 울음을 터뜨리며 살았다는 증거의 소리를 내 지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떨며 그녀 또한 아기와 함께 소리를 지르던 엄마,엄마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혼자살면서 작은 토스트가게를 하던 여자의 손에 의해 그리고 손맛이 좋은 그녀가 룸살롱의 주방에서 음식을 하면서 그는 어린시절 생의 무대가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미리 학습하듯 너무 일찍 조숙해지는 그런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양엄마가 그가 세들어 살던 집에 또 한명의 '나' 라고 불리는 동규는 스스로 말을 잃어버리듯 입을 닫아 버린 아이였지만 그에게 전부는 제이이듯 둘은 서로의 말과 마음을 읽어가며 그렇게 자랐고 동규가 말을 찾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제이가 하는 말이 자신의 말처럼 여기게 되었지만 나 역시나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닌, 아버지와 엄마의 이혼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부모들의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그야말로 흔들리는 가정이었기에 양엄마가 떠난 재개발의 빈집에서 혹은 거리에서 홀로 살아가는 제이의 삶을 은근히 동경하듯 하던 나,급기야 제이의 삶처럼 물들어 가는 십대, 집을 나와 거리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 그들 스스로 어른이 된 것처럼 무언가 어른의 행세하도 하며 살게 되고 싶은 것처럼 어른의 하는 모든 것들을 따라하듯 방탕하고 문란한,그야말로 난장과 같은 원조교제및 섹스 그리고 술과 폭주족이 되어 살아가는 어른도 아니면서 어른처럼 되고자하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인 그들의 삶을 제의 삶을 통해 조명해 보고 있다.

 

가정이 무너지면 그만큼 비행 청소년이 더 많이 생겨나는 듯 하다. 동규도 제이도 목란도 그렇고 다른 소년과 소녀들의 가정을 들여다보면 온전한 가정이 없다. 어른들의 삶이 무너지고 그 밑에서 함께 사는 청소년들의 삶이 자연히 무너져 내린다.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인데 그들이 보고 배우고 자라야 하는 환경이 그야말로 '시궁창' 같다. 그런 속에서 그들이 배울 수 있는 '미래'라는 것은 존재할까. 결코 화장실에서 태어났다고 그런 거리의 노숙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리라고,그런 삶이 운명처럼 정해졌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양엄마가 술만 마시면 해주던 자신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누군가의 소리를 듣듯 자신의 과거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점점 거리를 누비며 살아가는 도둑고양이처럼 주위를 살피고 관찰하며 남보다 뛰어난 '무언가 소리'에 저 집중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다.

 

십대란 한참 자신이 '포장'되는 것을 좋아한다. 비록 자신의 뿌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남의 둥지에 탁란을 하는 뻐꾸기보다 못한 그런 비루한 과거를 가지게 되었지만 이제부터 하나 하나 자신이 만들고 정복하고 쓰레기 같은 삶을 정리해 나가 우두머리가 된다면,아니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다' 라는 말처럼 자신에게는 그런 삶과 길이 예견되어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 믿게 된다.십대들의 방탕과 난장과 같은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그 또한 그런 삶에 물들어 빠져 나올 수 없는, 그 세계에서 중심이 되어 가는 '제이' 의 삶. 스스로 택한 대장이 아니었지만 어쩌면 자신의 탄생부터 자신의 현재의 모습은 미리 길이 놓여져 있던 것 같다. '요요를 가지고 노는 것하고 비슷해.길이 스쿠터의 영혼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는 거야. 우리는 길 '위'를 달리는 게 아니라 길을 감아들였다 다시 놓아주는 거라고 할 수 있어. 길은 우리 밖이 아니라 내부에 있어.' '뛰지마.네가 이 우주의 중심이야.'

 

제이는 어쩌면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생을 마감한 그런 아이지만 그의 삶은 짧으면서도 모두에게 강한 흔적을 남겨 놓고 갔다. 나라는 시선에서 바라 본 '제이' 라는 인물과 진샘이 바라 본 그리고 목란이 보고 박경위가 본 제이의 삶, 그 십대의 소리를 저자는 들려주려고 노력한 듯 보인다. 그들이 왜 거리로 나가야만 했는지,그들이 왜 어른행세를 하며 어른의 어두운 삶 일부분을 따라하며 그들이 폭주족이 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묻고 있는 듯 하다. 그들을 길 위로 집 밖으로 내 몬것은 어쩌면 모두가 '어른'들의 탓일지 모른다. 가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한 생명의 탄생부터 소중하게 지켰어야 하는데 생명의 소중함은 커녕 자신의 유희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의 세상을 꼬집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제이가 늘 듣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누구의 소리를 들어가며 행동하고 생활하고 그리고 죽어간 것일까? 그를 태어나게 한 것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모두 '우리'의 책임이다. 좀더 그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데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내버려 둔다. 튜닝된 오토바이로 밤거리를 누비는 폭주족들,그들은 아이들과 같다고 어리다고 표현했다. 그들의 속은 '악' 이 자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선설을 바탕으로 하듯 그들의 본바탕은 선하고 어리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어둠의 세계로 빠져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쩌면 제이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겐 아직 '김영하'라는 작가는 낯설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라는 작품에서도 낯설었지만 이번 작품도 낯설다,좀더 작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듯 하여 다른 작품들을 섭렵해 봐야겠다. 그리고 좀더 십대들에게 따듯한 시선을 가져야겠다는,사춘기 울집 딸들부터 따듯한 시선으로 따듯한 마음으로 안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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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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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절없는 인생이,슬픔없는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 슬픈 일도 남에게 닥치면 별거 아니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나의 일이 되면 무척 크게 다가오고 '왜 나에게만..' 이라고 하게 된다. 그만큼 남의 일일 때는 무엇이든 작게 느껴지지만 내게는 계속적으로 밀려오는 너울성 쓰나미처럼 모든 것들이 크게 와서 부딪히고 부서지게 마련이다.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별은 혼자서 있는 것보다 함께 있으므로 인해 더욱 빛나고 아름답다. 별이 많다고 그 무한한 빛이 환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왜 일까? 무수히 많은 별들 무수히 많은 사람들, 그중에 나와 끈이 연결된 사람은 '아빠'라는 단한사람 이었는데 그 아빠가 내 곁을 떠나서 죽음이라는 먼 세계로의 여행을 떠날 때, 나는 아빠에게 '죽지마'라는 말도 아니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왜 무엇 때문에.그리고 아빠가 죽음이라는 세계로 떠나던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소년에게는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그의 슬픔까지 떠안을 수 있을까?

 

인디안 속담에 친구란 남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갈 단한사람조차 없다. 모두가 자신의 슬픔만으로도 벅찬 세상이고 그런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밤하늘에 별들 만큼이나.그렇다면 나의 슬픔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나는 어떻게 하여 태어난 것일까? 아니 나의 엄마는 누구이며 어떤 분인가.아버지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였지만 달아나던 간첩이 타고 있던 차와 사고가 났다는 이유로 의로운 죽음으로 사고로 둔갑을 하게 되고 소년 또한 그런 죽음에서 살아 남았다는 이유로 유명해진다. 아니 소년의 죽음에서의 회생은 누군가에게 만들어지듯 그들 부자의 희생을 이용한 권대령,그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받은 보상금을 가로챘어도 그것을 탓하며 찾고 싶지는 않다. 소년이 오로지 찾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의 일기장, 아버지의 과거의 기록에서 '엄마의 단서'를 찾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뿌리를,슬픔의 뿌리를 찾고 싶어 한다.

 

지구의 수 많은 사람들중에 자신이 연결되어 있던 오로지 한사람인 아버지가 죽음으로 인해 다른 이들의 슬픔이나 마음을 읽게 된 소년,슬픔은 자신만 지니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애인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성을 버리고 남장을 하듯 하고 다니는 강토 형이나 화염병을 제일 잘 던진다는 선재형이나 재진아저씨 모두들 자신만의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시대 1980년대는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넘쳐났는지도 모른다. 시대가 슬픔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게 역사와 개인의 죽음이 조작되기도 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선량한 민간인의 죽음은 위로운 죽음처럼 둔갑하기도 하는 그런 세상이었다. 아무려나 다 괜찮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아니 자신의 엄마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단서를 찾아내어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엄마의 끈을 발견하는 소년, '세상의 모든 비밀들은 그렇게 거꾸로 거슬러올라가야지 밝혀낼 수 있는 거야'라는 말처럼 아버지의 과거속을 거꾸로 올라가 엄마라는 인물의 편지를 손에 넣게 되고 그 속에서 자신의 탄생에 대하여,자신의 뿌리에 대하여 알게 된다. 무수히 많은 별들 중에 왜 자신이 빛나야 했는지 이제서야 비로소 알게 된 소년,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읽게 됐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젠 타인의 슬픔도 자신의 슬픔도 가슴 뜨겁게 껴안고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중국의 오래된 이야기에 아이를 잃은 엄마 이야기가 생각났다. 선각자를 찾아가 자신의 슬픔이 무척 큰 것처럼 이야기 하자 '슬픔이 없는 집의 오얏씨를 가져오면 슬픔이 낫는다'는 말에 이 집 저 집 돌아다녀 보았지만 슬픔이 한가지라도 없는 집이 없었다. 자신의 슬픔도 모든 이들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슬픔 중에 한가지였던 것이다. 곡절이 없는 삶이란 없는 인생이라 할 수 없듯이 모두가 그런 슬픔을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고아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가? 웃으면 이제 세상이 군과 함께 웃겠지만,울면 군 혼자 울 것이다. 군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 세상과 더불어 웃든지,아니면 혼자 울든지.' 그랬다. 그는 고아였다. 하지만 자신만 슬픔을 간직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모두가 슬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나 살아가는 한 가지 길이라는 것을 소년을 깨닫게 된다. 소년의 성장과 더불어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도 타인의 슬픔을 들여다 봄으로해서 자신의 슬픔을 삯일줄도 알게 된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은 내겐 늘 낯설다. <밤은 노래한다> 또한 읽는 동안 낯설면서도 참 어려운 작가구나 생각하며 읽었는데 이 작품 또한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가 아직 젊다는 이유일까?

 

나 또한 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난 후부터 남의 슬픔에 대하여 좀더 관대해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가시기 전에는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슬픔이 아버지를 암이라는 이유로 보내들려야 할 때,왜 내게만 이런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한번 겪고나니 타인의 슬픔에 내 경험이 실리면서 담담하게 조언을 해 주게 되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객관적인 생각이 더욱 밀려들게 되었다. 존재의 유,무를 떠난 슬픔의 경험이란 내가 겪고나면 반으로 줄어드는,하나의 파도를 넘고 나면 다시 오는 파도를 좀더 쉽게 바라보고 겪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아무리 그가 타인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라고 해도 모두의 감정과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과거나 감정까지도 다 알지 못하던 소년의 성장은 별들의 성장과 마찬가지로 성장과정에서 점점 다른 것들과 슬픔이 희석이 되어 좀더 연해져가고 언제까지나 그 안에서 안주할 수 없음을, 더 큰 너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처럼 그도 그 별들중에 하나가 되어가는, 점점히 박혀 있지만 그 빛은 혼자만 두드러지게 밝은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그는 하나의 별이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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