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닥터 슬립 - 전2권 닥터 슬립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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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작품들은 지금까지 33개 언어로 번역되어 3억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3억부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되기는 하지만, 정말 엄청난 것만은 확실하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최근에는 그의 문학성을 새롭게 평가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어서, 2003년에는 전미 도서상에서 수여한 평생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러니까 이런 호러문학도 문학의 일부로 볼 수 있냐는 비판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이제 스티븐 킹의 문학적 업적에 대해 일부나마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작품 중 하나이다. 작법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뭐, 이런 아들 둘을 어떻게 키웠나, 싶어 스티븐 킹 어머니가 대단하다,고 감탄하게 된다.

스티븐 킹은 작품수가 많다. 다작하는 이유를 본인이 밝혔다.

 

 

 

예전에 인터뷰 기자들에게 나는 크리스마스와 독립기념일과 내 생일만 빼고 날마다 글을 쓴다고 말하곤 했다. 거짓말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일단 인터뷰에 동의한 이상 반드시 ‘뭔가’ 말해줘야 하기 때문이었고, 기왕이면 좀 그럴싸한 말이 낫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간이 같은 일벌레로 보이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일벌레라면 또 모를까).

사실 나는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남들이 얼간이 같은 일벌레라고 부르든 말든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쓴다. 크리스마스와 독립기념일과 내 생일도 예외일 수 없다. (어차피 내 나이쯤 되면 그 지긋지긋한 생일 따위는 싹 무시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일하지 않을 때는 아예 아무것도 안 쓴다. 다만 그렇게 완전히 손놓고 있는 동안에는 늘 안절부절못하고 잠도 잘 오지 않아서 탈이다. 나에게는 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중노동이다. 오히려 글을 쓸 때가 놀이터에서 노는 기분이다. 글을 쓰면서 보냈던 시간 중에서 내 평생 가장 힘들었던 세 시간도 나름대로 꽤 재미있었다. (유혹하는 글쓰기, 186-187쪽)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스티븐 킹다운 대답이다. 어떤 매체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떤 인터뷰에서 ‘어쩌면 그렇게 많이 쓸 수 있나요?’라는 기자의 물음에, ‘그러게요. 나도 그게 궁금합니다. 다른 작가들은 그 시간에 다들 뭐 하나요?’하고 되물었다는 이야기가 세트로 유명하다. 그냥 킹이 되는게 아닌가 보다. 스티븐이 킹이다.

[닥터 슬립]은 그의 대표작 [샤이닝]의 후속작으로, 2013 브람 스토커 상 최고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그리고 인간은 변한다. [닥터 슬립]을 쓴 사람은 [샤이닝]을 썼던 그 사람 좋은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다. 강렬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한다는 관심사는 같지만, 대니 토런스를 다시 발견하고 그의 모험담을 추척하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다. 꾸준한 팬들이 그래 준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저자 후기, 2권, 409쪽)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솜씨 좋은 스티븐 킹에 의해 대니 토런스의 삶이 다시 펼쳐진다. 이쯤에서, 아.... 나는 고백해야겠다.

나는 이 책을 민음사 서평 이벤트를 통해 제공받았다. 나는 스티븐 킹의 작품을 하나도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는데, 첫째는 무서웠기 때문이고, 둘째는 무서웠기 때문이며, 셋째는, 아,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11/22/63]을 두꺼운 페이퍼백으로 구입한 것도,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일말의 공포를 피해보려는 노력 때문이었으나, 결국은 영어와 공포 내지는 공포와 영어가 합작을 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작품 소개를 읽으면서 나는,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미루어 짐작했다. 내 예상은 틀렸다.

문제의 단락들은 대략 이렇다.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칙칙한 얼룩이 변기 커버에도 있고 샤워 커튼에도 있었다. 처음에는 대변인가 싶었는데 똥이 누르스름한 자주색일 리 없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살점과 썩은 살가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매트에도 발자국 모양으로 그런 얼룩이 남아 있었다. 남자의 발자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너무 앙증 맞았다.

"맙소사." 그녀는 속삭였다.

그녀도 결국에는 싱크대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1권, 19쪽)

그 후로 여덟살때부터 자신을 성폭행한 아버지를 죽이는 앤드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건 패스해야겠다. 그 이후로도 어마무시 무서운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온다.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 했다. 이유는 상기와 같다. 하지만, 스티븐 킹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특히 [샤이닝]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이 책은 무더운 여름밤의 즐거운 동행자가 되어 줄 거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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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5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8-05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슬비 2014-08-06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이닝을 좋아하고, 스티븐 킹을 좋아해서 저도 오늘부터 이 책 읽어보려고요. ㅎㅎ
그런데 이 책은 원서 표지가 더 멋진것 같아요. ^^

단발머리 2014-08-07 19:16   좋아요 0 | URL
저는 무서워서, 끝까지 못 읽었어요. .... 무섭고, 끔찍하고... 으하하..

저 위에 댓글 다신 분이 저에게....
스티븐 킹, 하면 보슬비님 떠오른다고 하시더라구요~~~
저도, 맞아요!! 그랬거든요.
누굴까요~~~~~~~~~~~~~~~~~~~*^^*

보슬비 2014-08-08 20:15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무서움을 많이 타시는군요.^^
전 어릴때부터 무서운 이야기, 공포 영화를 좋아해서 스티븐 킹을 좋아했어요. 크면서 그가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이 썼다는것을 알고 좋아하지만, 그래도 스티븐 킹하면 공포인것 같아요.

단발머리님께서 말씀하신분...
누구신지 알것 같아요. ㅎㅎ

단발머리 2014-08-08 22:58   좋아요 0 | URL
전 어렸을 때부터 무서운 거를 못 보고, 못 읽고 했는데요.
지금도 그래요. 아직, 철이 안 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오호호... 누군지 아시겠어요?^^
 
한글 논어 - 시대를 초월한 삶의 교과서를 한글로 만나다 한글 사서 시리즈
신창호 지음 / 판미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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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은 읽는 것이다.

 

이 글은 지금까지 내가 독해했던 [논어]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위한 시도이다. 한글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논어]를 읽고 생각해 보려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풍찬노숙과 산전수전을 통해, 진흙에 뿌리박았으나 수면 위에서 화사하게 피어오른 연꽃 같은 그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8쪽)

 

고전을 대하는 자세는 대부분 비슷비슷하다. 읽어야하되, 읽지 못 한다. 마음은 있되, 실행이 안 된다. [논어]라면 한 마디 더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한문을 잘 알지 못한다.’이다. 읽어야하는 당위와 읽고 싶다는 바람을 넘어서서, 바야흐로 [논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 [한글 논어]를 통해서이다.

 

 

 

 

2. 공자

 

공자는 노나라 평창향 추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숙양흘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 안씨 가문의 딸인 10대 중반의 안징재와 야합의 형태로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기원전 551년, 노나라 양공 22년의 일이다.(17-8쪽) 공자의 나이 세 살 전후에 아버지 숙량흘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공자가 10대 후반의 청년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난다.

 

부모를 잃은 공자는 가난하고 비천한 삶을 이어가다가 계씨 가문의 ‘위리’가 된다. ‘위리’란 말단 공무원 수준의 직책으로 주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나누어 주는 자리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세상이 사람답게 살기 힘들게 되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 진나라, 송나라, 정나라, 채나라, 초나라를 떠돈다.

 

공자가 사랑하는 제자 자공에게 남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말은 이러하다.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야 할 삶의 기준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구나! 내가 그것을 세상에 전하려 했건만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구나! 나를 높이는 이도 없고...... ” (71쪽)

 

3.

 

 

바쁜 하루의 삶을 돌아보며, 세 가지의 물음 중에 한 가지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날 하루는 훌륭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4. 

 

 

공자가 평소에 즐겨하지 않는 행동 네 가지는, 실천에 옮기기 쉽지 않다. 그 중에 제일은 첫 번째 것. 자기 뜻만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누구를 대하든, 어떤 주장을 대하든, 나의 뜻만을 주장하지 말자.

 

5.

 

 

    

공자로부터 사랑받았다는 자공도 공자 앞에서 사람을 서로 비교하고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그럴 겨를이 없다고 했다. 여러 사람, 특히나 여자, 특히나 아줌마들이 만난 자리에서는 자신의 자식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을 서로 비교하고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기가 쉬운데, 아무쪼록 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으면 한다.

 

6. 그럼에도 이러쿵저러쿵 평가를 해 보면...

 

책의 부록으로 논어 원문을 실은 것이 참 좋았다. 실제로 읽어가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관심이 가는 몇 구절은 직접 원문을 살펴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쉬운 점은 편집인데, 책표지는 깔끔하고 산뜻한데, 본문의 편집은 너무 무난한 감이 있다. 공자 사진 한 장 더 넣었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약간의 변화라도 준다면, 나름 두꺼운 책을 읽어나가는데 시원한 바람처럼 느껴질 것이다.

 

* 이 리뷰는 민음사 판미동 출판사의 책을 제공받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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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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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읽는 책들을 전공으로 읽어놓고도

그애(세실리아)는 집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들이나 읽으면서 케임브리지에서 삼 년을 허송세월하고 돌아왔다. 오스틴이나 디킨스, 콘래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모두 서재에, 그것도 전집으로 있는데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읽는 책들을 전공으로 읽어놓고도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219쪽)

‘할 수 없다’에 500원. ‘하면 안 된다’에 1000원.

다른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중고등학교 때, 늦어도 대학에 다니면서 읽었던 책들을 나는 대학 다니는 내내 읽지 못 했고, 그에 더하여 읽지 않았다. (‘바빴다’고 말하고 싶으나,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터, 나는 ‘바빴다’는 수동적 표현보다는 ‘읽지 않았다’는 적극적인 표현을 선택하겠다.) 움베르트 에코의 계산에 의하면 죽을 때까지, 정확히는 나흘에 한 권꼴로 ‘고전’을 섭렵한다 해도 사람들이 말하는 고전, 이름난 고전들을 죽기 전까지 다 읽지 못할 확률이 높다.

이에 나는 지금이라도, ‘전공’을 대하는 자세로 열심히 오스틴, 디킨스, 콘래드를 읽어볼까 하면서도, 생각해보니 그 ‘전공’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게 생각난다. 그래서, 다시 ‘심심풀이’로 읽어볼까 생각해보면, 마르셀 프루스트, 버지니아 울프, 루이스 보르헤스가 어디 ‘심심풀이’로 읽히던가, 하는데 생각이 미친다. 이도저도 할 수 없다.

책상 위, [속죄]부터 시작한다.

2.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521쪽)

속죄의 ‘장본인’이라 할 만한 브리오니는 자신이 보았던 모든 장면,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자신의 느낌을 어떻게 소설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소설 속 인물을 좌지우지하는 작가적 위치에 익숙했던 브리오니는 현실에서도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한다. 범인에 대한 확신이 없었음에도, 유일한 비판적 목격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에 확신을 얹는다.

소설가에게는 속죄가 있을 수 없다는 작가의 말은 조금 이해되지만, 글쎄, 브리오니에게도 속죄가 필요하지 않을까.

브리오니, 그녀에게 속죄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3. 브리오니

13살. 늦둥이 귀여운 막내. 소설가를 꿈꾸는 문학 소녀. 오빠 앞에서 멋진 연극을 선보이고자 사촌 동생들을 닦달하는 그녀. 아직 아이지만 스스로 어른이라 생각하는 그녀. 브리오니.

연극의 ‘o'도 모르는 철없는 쌍둥이 동생들을 데리고 연극 연습에 몰두중인 브리오니에게 쌍둥이와 친척 언니 롤라 얼굴의 주근깨는 그야말로 ’치명적‘ 난관이다.

분명한 것은 브리오니처럼 머리칼이 검은색인 아라벨라가 주근깨가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나거나 주근깨가 있는 외국 백작과 함께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일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근깨가 있는 여관 주인에게 다락방을 빌리지도, 주근깨가 있는 왕자님에게 마음을 빼앗기지도, 주근깨가 있는 신자들 앞에서 주근깨가 있는 사제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릴 것 같지도 않았다. (23쪽)

'주근깨 emergency'를 간신히 극복한 브리오니는 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그건 브리오니가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이 연극의 여주인공 자리를 롤라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브리오니는 ‘자신’ 아닌 그 어느 누구도, ‘아라벨라’로 상상하지 않았건만, 노련한 롤라의 말솜씨에 넘어가 여주인공 자리를 롤라에게 빼앗기게 된다. 브리오니는 크게 상심한다.

(엄마의) 드레스가 롤라의 몸에 잘 맞는 것을 상상하면서, 그리고 엄마가 무정하게도 그런 롤라의 모습을 보며 미소짓는 것을 상상하면서 브리오니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집을 뛰쳐나가 산울타리 아래에서 나무 열매를 먹고 살면서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겨울날 새벽 커다란 참나무 둥치 옆에서 맨발로, 아니면 분홍색 리본 끈이 달린 발레화를 신은 채 아름답게 죽어 있는 모습으로 턱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나무꾼에게 발견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30쪽)

여주인공 자리를 빼앗겨 버린 억울함과 고통. 돌이킬 수 없는 상황. 꿈꾸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브리오니는 집을 뛰쳐나가, 맨발 혹은 분홍색 리본 끈이 달린 발레화를 신은 채로 턱수염 덥수룩 나무꾼에게 발견되는 제 모습을 상상한다. 희비극이 엇갈리고, 시공간을 초월한다.

이랬던 브리오니가.

13살 어린이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범죄 현장을 목도하게 되고, 계속되는 오해 속에서 또 다른 범죄 현장의 증인이 되어, 위험하고 음산한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가 된다.

브리오니의 유아적 상상력, 모든 사건에서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욕망, 로비에 대한 풋사랑. 이 모든 것이 소설 속 비극의 원인 중 한 가지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비극의 가장 원초적 이유는 브리오니의 이런 마음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보아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보며 브리오니는 지금보다 언니를 더 사랑한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265쪽)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는 언니. 바로 이 순간, 이 세상 가장 큰 비극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언니.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 수 밖에 없는 언니. 그런 언니를 바라보며 브리오니는 ‘지금보다 언니를 더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즉, 언니의 불행이 그녀의 사랑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브리오니는 불행에 빠진 언니를 보며 더 큰 사랑을 느끼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불행에 빠진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행에 빠진 사람에게 연민을 느끼는 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에 무각각한 것,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감각한 것이야말로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세실리아는 왜 불행해졌는가. 왜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가. 그건 브리오니 때문이다. 브리오니 때문에 그녀가 사랑했던 세실리아는 불행해졌다. 하지만, 불행해진 언니를 보고, 브리오니는 더 큰 사랑을 느낀다. 언니의 불행은 자신의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언니의 불행은 브리오니의 사랑을 증폭시킨다.

브리오니가 생각하는 사랑, 그녀가 세실리아에게 느끼는 사랑,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4. 로비

부유한 가정의 세실리아, 브리오니와 남매처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로비. 그도 이제는 옥스퍼드대 장학생으로서, 의대 지망생으로서 멋지게 성장했다. 하지만, 더 성숙해지고, 더 당당해진 로비는 괴롭다.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 그는 괴롭다. 그는 고통 속에 있다.

물론 세실리아는 그와 말을 나누려고도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침대에 누워 신음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을 원했다. 그것을 가져야 했다. 설사 더 고통스러워진다 해도. (119쪽)

세실리아와 만나는 것을 상상하며, 그녀의 차가운 반응을 예상하며, 그녀와 말을 나눌 수도 없다는 걸 생각하며, 로비는 고통스럽다. 로비는 고통스러워하는데, 나는 이 문장이 너무 좋았다. 미안하다, 로비.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을 원했다. 그것을 가져야 했다. 설사 더 고통스러워진다해도. (119쪽)

로비의 얼굴을 대면한 세실리아는 그를 문밖으로 내쫓지 않는다. 그녀는 서재로 들어간다.

그녀는 램프 옆을 떠나 서재의 책꽂이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도 방 안으로 더 걸어들어갔다. 그녀를 따라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191쪽)

더 큰 고통을 맞닥뜨리기 위해 세실리아를 찾아간 로비는 이제, 서재 안으로 더 걸어 들어간다. ‘그녀를 따라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는 멀어지는 그녀에게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그녀 옆에 있을 뿐이다. 그는 고통 속에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5. 세실리아

로비와 세실리아의 서재 장면은 정말 ‘두고 두고 회자될만한 명장면‘이라는 [빨간책방] 이동진씨의 말에 김중혁 작가는 입을 맞춘 듯, 정말 그렇다고 연신 동의했다. ’나도 이 장면이 좋았어요.‘라고 말해도 되나, 내심 부끄러워 하면서도,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아이패드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도 그 장면이 좋았어요."

그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한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두 사이에 놓여 있던 미묘한 무언가가 사라지려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어린 시절을 함께한 오랜 친구사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장벽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예전의 자기들 모습이 신경 쓰였다. 최근 몇 년 동안 둘 사이가 어색해지고 심지어 불편해지기까지 했지만, 어린 시절 친구라는 사실은 오랜 습관처럼 늘 따라다녔기에, 그 장벽을 부수고 연인이 되기 위해서는 뚜렷한 목표의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194쪽)

남매같이 지내던 두 사람이 서로를 불편하게 여긴다.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불편한 감정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했던 두 사람. 친구에서 이제 막 연인이 되려는 로비와 세실리아. 자신들의 감정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괴로운지 알지 못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네가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잖아. 무슨 일인가 일어났어, 그렇지 않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야. 바로 코앞에 뭔지 모를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야. 그게 무엇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내 앞에 있다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어.”

“넌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 거야. 그렇다고 말해줘.” (193쪽)

이런 두 사람의 관계에서 결정적 한 방은 세실리아의 것이다. 세실리아에게 키스한 것은 로비이지만, 로비로 하여금 그녀에게 키스하게 한 것은 세실리아다. 결정적 한 걸음은 세실리아의 발걸음이다. 그녀는 용감하다.

묘하게 비슷한 장면이 생각난다. [목사의 딸들]에서 루이자와 알프레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내가 가길 원하세요?” 그녀는 반복했다.

“왜요?” 그도 다시 물었다.

“난 당신과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요.” 허파가 불로 가득 차 숨이 막힌 듯한 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그는 혼돈의 고통 속에 자기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괴로워하면서, 마치 허공에서 멈춘 듯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이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 그들의 영혼이 잠시 동안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129쪽)

이 장면에서도 결정적 한 방은 루이자의 몫이다. 물론 사회적 신분 차이에 의한 알프레드의 상황을 고려해야겠지만,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솔직했다는 점에서 역시 그녀의 한 걸음이 결정적이다. 그녀는 용감하다.

6. 추천과 강제 사이

예전에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었다. 프로그램에 소개된 책은 거의 실시간으로 베스트셀러가 되곤 했는데, 프로그램에 나와서 ‘책을 읽자’고 침튀기며 이야기하는 교수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매체의 글을 통해 ‘책은 그렇게 읽혀서는 안 된다. 어떤 식으로든 강제하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나도 ‘강제하는 책읽기’에는 반대하지만, 실제 딸롱이에게 여러 책들을 추천하기는 한다. 추천과 강제 사이는 참 미묘한데, “한 번 읽어봐~“하고 말했을 때는, ”싫어, 재미없을 것 같아.“라는 답변이 나올 가능성이 50% 이상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2번, 3번 정도 추천할 수는 있지만, 억지로 읽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책 제목’이라도 익숙하게 해서, 다른 통로, 이를테면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그 책을 추천했을 때, ”어, 나 저 책 본 것 같은데...“하며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책과 책의 제목, 그리고 책표지를 ‘노출’시키는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나는 [빨간책방]을 좋아하고, 남자들의 수다를 좋아하지만, 추천한 책 전부를 읽지는 않는다. 재미가 없어보이면 방송만 듣고 읽은 걸로 퉁친다. 그런데, 이 책은 워낙 칭찬과 명성이 자자해 도저히 안 읽을 수가 없었다. 알라딘에서 발빠르게 50% 세일할 때까지만 해도 읽을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계속해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50% 세일할 때 구입하지 않은 것이, 내내 아쉬웠다.

그래서, 저번주의 추천책 [다섯째아이]는 50% 세일을 시작하자마자 과감하게 결제버튼을 눌렀다. 이번의 추천도 즐거운 책읽기로 이어질지...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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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5 12: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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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5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4-06-2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고통을 원했다. 그것을 가져야 했다. 설사 더 고통스러워진다해도. (119쪽)
이 문장 정말 좋네요!
여기저기서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슬쩍 보긴 했는데
제대로 정독한건 이번 리뷰가 처음입니다.^^

단발머리 2014-06-26 09:46   좋아요 0 | URL
아하... 아무개님의 숱하게 많은 '처음' 중에 제가 하나의 '처음'이 될 수 있다니, 너무 기쁩니다.*^^*

사실, 이 소설이 다 연애얘기는 아닌데요, 전쟁터에서 팔, 다리 날아가고, 간호사가 된 브리오니가 변기 청소하고 이런 이야기들은 너무 무섭고, 더럽고, 크고, 대단해서 제가 리뷰로 정리를 잘 못했어요.
제 리뷰는 협소한 리뷰입니다~~ 참고해 주세영~~~
 
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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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듣는 편이다. 팔랑팔랑 팔랑귀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대체로 그 이야기를 쉽게 믿는다. 그렇대~ 하면, 에이, 설마?가 아니라, 대부분 아, 그래~~ 하고 말한다.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셰익스피어, 누가 셰익스피어를 모르나.

4대 비극, 다 읽지는 않았어도 알기는 알지. (제목만 아는 것도 아는 걸로 친다.)

오셀로, 그래, 그 이야기.

나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오셀로]를 읽지 않았었는데, 네이버 앱에 올라온 [오셀로]에 대한 글 한 꼭지를 읽게 되었다. 음, 맞아, 그래 그렇구나. 근데 글을 참 잘 썼네. 누구지? 맨 밑에 이렇게 쓰여 있다. 김/연/수.

아, 김연수가 쓴 글이구나.

누가 셰익스피어를 모르나. 4대 비극을, 오셀로를. 하지만, 김연수가 이렇게 격찬한 작품이라니. 나도 읽/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 말을 진짜, 잘 듣는 편이다.

 

브라반시오    절대로 대담하지 않았고

                   너무나 잠잠하고 조용하여 조금만 움직여도

                   얼굴을 붉히던 처녀였어. 그런데 그 애가

                   본성과 연령과 나라의 차이와

                    평판과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겁나서 쳐다보도 않던 것과 사랑에 빠져? (44쪽, 97-102행)

 

 

데스데모나의 아버지 브라반시오는 딸의 정신이 가출해버려 무어인과 결혼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본성과 연령과 나라의 차이를 극복한 사랑의 힘. 브라반시오는 그러한 사랑의 힘을 믿지 않는다. 노골적인 무시와 참기 어려운 모욕 앞에서도 오셀로는 자기는 데스데모나를 거짓으로 유혹한 게 아님을, 두 사람은 진심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을 밝힌다.

오셀로           그녀는 제게 고마워했고 이르기를

                   그녀를 사랑하는 제 친구가 있다면

                   제 얘기를 하도록 가르쳐주는 것만으로

                   그녀에게 구애가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 귀띔 받고 나서 제가 말을 꺼냈지요.

                   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 때문에 절 사랑했고

                   전 그녀가 그 위험을 동정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쓴 유일한 마법입니다. (47쪽, 174-181행)

 

 

 

이 때, 자신과 데스데모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오셀로는 얼마나 침착한지, 얼마나 당당한지, 얼마나 의연한지. 눈으로 보이는, 확연히 구별되는 그의 외모 이면에 단단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오셀로의 내면을 확인하게 된다. 데스데모나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함이, 실로 마땅하다. 그는 존경과 사랑을 받을만큼 멋진 사람이다.

오셀로가 왜 그렇게도 쉽사리 또는 어렵사리 이야고의 유혹에 넘어갈까, 라는 문제는 비평가들의 관심거리였다. 오셀로의 본성은 질투와는 거리가 멀다고 보는 브래들리Bradley는 사태 진전의 주원인을 오셀로 밖에서, 즉 이야고의 탁월한 계략에서 찾고, 리비스Leavis는 반대로 오셀로 안에서, 그의 무지와 자기 자신과 데스데모나에 대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만족감에서 찾는다. 그 밖에도 고다드Goddard는 그 이유를 그가 애초부터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꿈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호니그맨Honigman은 그것을 오셀로의 <아주 특별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불안감>으로, 그리고 맥앨린든McAlindon은 그것을 <오셀로의 예외적인 성품과 상황뿐만 아니라 좀 더 의미심장하게는 보편적인 인간성 안에 있는 세력들 사이의 불균형>이라고 설명했다. (작품해설, 오셀로의 사랑과 이분법의 비극, 214쪽)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오셀로』에 더해야 할 말이 뭐 있겠냐마는, (하면서 끝내 한 마디 더하고 마는) 내가 보기에 오셀로가 이야고의 유혹에 넘어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마는 것은, 완벽하게 존재해야하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강박 때문인 것 같다.

본성과 연령, 나라의 차이와, 평판을 뒤로 하고, 맺어진 자신의 사랑. 충실한 아내, 자신에게 존경과 사랑을 끊임없이 보내는 아내에게, 그는 완벽한 사랑, 완벽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데스데모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완벽하다고 믿는 오셀로는 자신에 대한 데스데모나의 사랑 또한 완벽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고에 의해 일말의 의심이 그의 마음에 심겨졌을 때, 물을 주고, 햇볕이 비추도록 그 불화의 씨앗을 돌보는 이는 이야고가 아니라, 오셀로 자신이다. 파멸의 원인이 오셀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파멸의 과정에서 오셀로가 자신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행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완벽함에 대한 강박이 사랑을 의심으로, 연정을 질투로 바꾸어 버린 것은 차치하더라도,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처단하기 위해 서두르는 모습은 특히 더 아쉽다. 복수, 처단, 응징을 위해 뛰쳐나가는 오셀로가, 두 눈이 벌개져 이야고의 속임에, “그래, 그래.”하는 오셀로가 너무 불쌍하다.

오셀로, 왜 그렇게 서두르나요?

왜 그렇게 서두르나요, 오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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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영어 - 한국인은 왜 영어를 숭배하는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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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어.

라고 하면 정말 할 말이 많다. 5장 정도는 거뜬히 채울 수 있을 만큼 숱하게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려니, 영어 전문가도 아니고. 괜히 머쓱하다.

초등학교에서 정규 영어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 특별 활동 시간을 통해 영어 알파벳을 익혔던 초등시절부터 시작해서, 문법 작렬 중학교 영어,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느닷없이 만나게 된 수능영어. 듣기 평가 대비 수업과 독해 아닌 지문빨리읽기 및 정답 골라내기 연습 시간들. 대학. 영어. 대학영어. 취업. 영어. 취업영어. 그리고, 상표법. 영어. 상표법 영어. 외국 클라이언트. 영어. 서신 영어. 그렇게 초등 4학년 때 만난 영어는 취업 후에도 여전히 생활의 일부였다. 이런 시가 생각난다.

언제나...

영어는

나의 꿈,

나의 이상,

나의 소망,

나의 연적,

나의 원수,

나의 숙제이다.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겠다. 내가 지은 시다. 영어에 대한 내 애증은 끝이 없다. 한이 없다.

[지적생활의 방법]의 저자 와타나베 쇼이치는, 학교 영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교양 있는 영어 교사’의 요건으로 ‘자유 시간에 영어 원서 읽는 것’을 꼽았다. 그렇다. 나는 훌륭한 영어 교사가 되지 못했고, 앞으로도 되기 어렵겠지만, 나는 ‘자유 시간에 원서를 읽는 사람’이었다. 그걸로, 만족하고 싶었다. 그정도면 족했다. 회사에 다닐 때도 그리고 퇴사 후에도 자유 시간에 원서를 읽는 것,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그 소설이 아주 어려운 책이 아니라면), 소설가가 쓴 언어 그 자체로 읽을 수 있는 것을 기꺼워하며, 그렇게 소박하게(?) 살고 싶었다. 그렇게 살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더 큰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름부터 어마무시한 유아 영어.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하고, 뛰어난 영어 실력이 필요하다고들 했다. 당장, 아이를 가르쳐야 했다. 아이는 아직 한국어도 어색한, 18개월이었다.

내가 영어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어떻게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나. 답을 찾지 못한 나는, 영어 교육서와 관련 육아서를 주구장창 읽어가기 시작했다. 동화책 영어, 놀이 영어, 미술 영어, 끝이 없는 정보의 바다 속에서 내가 찾은 결론은 이 책이었다.

 

영어 학원을 보내지 않고도, 영화 보기와 원서 읽기만으로 원어민에 가까운 영어 실력을 쌓을 수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은 이미 10년 이상 많은 어린이들과 그의 부모들에 의해 그 효과가 입증된 터였다.

그래, 우리도 이렇게 해보자. 시작은 있었으나, 제대로 되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대로, 책대로 실행하는 건, 정말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전 세계 유일무이 한국의 열성적 엄마와 엄친아, 엄친딸의 환상 조합이라면 가능하다고 본다. 현재, 우리집은 잠수네 흉내내기로 근근히, 지내오고 있다.

18개월이었던 아이가 지금은 5학년, 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다. 내가 보기에는 읽기도 듣기도 곧잘 하는 것 같은데, 아이는 계속 자기가 영어를 못한다고, 반 친구들에 비해 한참 못한다고 말한다. 그저께 밤에는 원어민 선생님이 게임을 설명할 때 이해를 못 하겠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늘어간다.

이 책은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책이 아니라, ‘한국인은 왜 이렇게 영어에 집착하는가’에 대한 책이다.

1816년 최초의 영어 교육부터 시작해서, 영어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인식되어 왔다. ‘영어의 달인’으로 불리웠던 이승만은 출세 도구로서 영어를 십분 활용했다. 해방정국에는 영어가 가히 공용어의 위치를 점했고(60쪽), 이른바 ‘통역정치’가 열리게 된다.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해방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는 단연코 영어였다.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해외 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에는 친일파, 해방 후에는 친미파 노선을 걸었다. (61-2쪽)

 

1960년 4·19 혁명 이후 등장한 정치 지도자들 역시 영어에 능통한 사람들(79쪽)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하에서 수출 전쟁을 치루기 위해 영어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었다. 각 회사마다 자체 영어 교육을 실시하는 건 물론 사설 영어 학원들이 학생과 직장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지만, 초등학교 대상 영어 교육에 대해서는 강한 국민적 반대 정서가 있었다. (86쪽)

하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 1986학년도 대학 입학 학력고사부터 영어가 선택에서 필수로 바뀌면서 일반인들에게도 영어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인식되었으며, 1988년 서울 올릭픽이 이러한 추세의 전환점이 되었다. (95쪽)

지금은 바야흐로 세계화시대. 영어 광풍이 세차게 불고 있다. 토익, 토플 시험에 쏟아 붓는 막대한 비용, 조기 유학, 초중학생 대상 캠프형 고액 과외, 영어 마을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올인, 영어에 올인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학년 때는 놀아야 돼!“를 외치던 용감한(?) 엄마들도 2학년 학기 초부터는 바쁘게 영어 학원 정보를 교환한다. 어디는 파닉스가 강하더라, 어디는 회화가 강하더라. 어디는 영어유치원을 2년 이상 다닌 아이들이라야 적응할 수 있다더라. 학원 이름도 모르는 나는 그냥 웃지요~ 하고 만다.

마지막에는 이런 영어 광풍이 ‘호러’로 선회한다.

<동아일보> 2002년 2월 5일자에 따르면, “혀와 혀 밑바닥을 연결하는 막(설소대)를 절개하면 혀가 길어져 R과 L 발음을 잘할 수 있다고 믿는 학부모도 있어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Y 병원에는 하루 5건의 수술 신청이 접수되고 있고 실제로 하루 1,2건씩 수술이 이뤄진다는 것”. (149쪽)

 

영어 광풍의 ‘광’은 ‘미칠 광(狂)’이 분명하다.

‘영어 망국론’

“한국에선 영어가 ‘종교’나 다름없죠”

‘복지 예산 깎아 영어 교육’

“영어가 입에 붙은 ‘아륀지’ 정권”

제목만 읽어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 그의 결론을 나름 정리해본다.

1. 근본적 개선 방안은 있을 수 없다!

영어 문제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이고 총체적인 문제의 반영일 뿐이다. (225쪽)

근본적 개선 방안은 있을 수 없다! 그걸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다시 문제는 내부의 치열한 경쟁이다. 영어는 그런 경쟁의 변별 도구로 동원된 것일 뿐이다. (227쪽)

영어는 한국 사회의 기본 작동 방식의 문제다. (230쪽)  

 

사회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고밀집 한국 사회에서, ‘이웃과의 비교’가 삶의 주된 행동 양식이 되는 한국사회에서, 강한 타인 지향적 인정 욕구를 갖고 있는 한국인 사회(228-9쪽)에서 영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2. 영어 광풍에 너그러워지자

영어 전쟁과 입시 전쟁은 동전의 양면관계, 아니 한 몸이다. 영어 전쟁은 입시 전쟁과 직결되어 있는 ‘서열 정하기 게임’이며, 그래서 영어 전쟁은 우리의 숙명인 셈이다. 오늘도 영어 전쟁을 비판하고, 개탄과 한숨을 쏟아놓더라도 내 자식만큼은 영어 공부 열심히 시키는 게 대안 아닌 대안으로 만인의 공인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어 광풍에 너그러워지자는 것은 영어 광풍이 바꾸기 어려운 한국인의 정체성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자는 뜻이기도 하다. (232쪽)

 

영어 광풍을 비판하는 진보 쪽에서도 ‘대안’이 없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먼저 진보파도 이러한 영어 광풍에 너그러워져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야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할 자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234쪽)

3. SKY를 소수 정예화하자

영어 문제를 대학 입시 문제와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강준만 교수는 ‘SKY 소수 정예화’를 주장한다. 물론 그에 대한 사회 각 계의 반발은 실로, 대단하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는가. 대안은 없는 것 같다. 강준만 교수의 ‘대안’만을 ‘대안’ 없이 비판하고 있다.

강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죽어도 SKY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은 어차피 극소수다. 그들의 자율 결정은 존중해주자. SKY에 들어가기 위해 재수, 삼수, 아니 사수를 하더라도 장한 일이라고 격려해주자. 중요한 건 절대 다수의 학생들이 취하는 태도다. SKY의 독과점 파워가 약해지면서 대학 서열의 유동화가 일어나면 대학에 들어가서도 다시 한 번 경쟁해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미칠 수 있는 영향에 주목해 보는 게 옳지 않을까? (240쪽)

 

그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 또 내가 그의 주장을 조금 거칠게 이어붙인 면도 없지 않다.

다만 내가 그의 주장에 찬성하는 이유는, 어차피 언론과 정치를 포함한 각계의 사회 지도층이 SKY 출신에 의해 독식되고 있다면, SKY의 독과점 파워를 약화시켜, 즉, 그들의 몫 자체를 작게 만들어, 타대학의 사람들도 사회 지도층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19살 결심이, 19살 머리가, 19살 성적이 남은 미래 전부를 결정해버리고 마는 작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하고도 비교적 실현가능한 방법이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영어 광풍에 너그러워지자~~

하... 책을 다 읽고 보니, 대한민국은 영어 광풍에 몸서리치는데, 나는 너무 안일했던 것 같다. 아무리 그리하더라도, 아직까지도 학교 다녀와서 레고 캐릭터를 가지고 상상놀이하고 있는 아롱이와 파닉스를 할 테냐. 그렇다고, 5학년 딸롱이와 문법책을 팔테냐. 에라, 나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마지막?) 가히 다산 정약용에 필적할 만한 놀라운 저술량과 저술 속도로 한국 사회를 거의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계시는 강준만 교수님께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부디 오래 오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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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6-1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SKY의 독과점 파워를 어떻게 하면 약화시킬수 있을까요?

2.대안이 없으면 닥치라는 이야기는 틀렸다고 '김규항'씨가 그러던데. 맞는말 같아요.
대안이 없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더 나빠진다는 뭐...그런..

3.영어는 제겐 제 뱃살과도 같죠.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면서 항상 제게 붙어 저를 무겁게 만드는 아흑......

단발머리 2014-06-17 08:55   좋아요 0 | URL
1. 글쎄요, 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SKY 독과점 파워를 약화시켜야한다고는 하지만, 일단 그 쪽 사람들은 그럴 의지가 별로 없을테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딱히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 같지는 않구요.
결국엔 입시 문제인데, 이게 우리 나라에서 제일 풀기 어려운 문제 아닐까 하네요.

2. 저는 강준만 교수님께 하트 뿅뿅이라서요, 한국의 현실을 이렇게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러한 악조건하에서 그래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강준만 교수님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안 없이 비판하는 사람들이 조금 얄밉기는 하지만요. 김규항씨 말도 맞는 것 같아요. 그래도, 말해야죠. 그 대안도 별로다~~~^^

3. 저번주부터 운동을 시작했거든요. 뱃살 공략 하기 스트레칭인데요.
워낙 운동을 안 해서, 2번 했는데, 몸이 막 쑤시고 아픈거 있죠.
영어는 뱃살보다 더 무서워요.
방법이...... 없어서..... 아응...

아무개님~~ 그 고양이 잘 치료받고 있지요~~

icaru 2014-06-18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어! 내 영어가 아니라, 자식 영어 ㅠㅠ)
정말,,, 밤새워 침튀겨 이야기해도 해법이 안 나오는 ㅠㅠ)

다른 건 몰라도,,, 주변에서 지켜보고 제가 겪은 것들을 버무려 낸 작은 결론은,
어릴 적 그러니까 유아와 초등 저학년의 영어 교육은 기회 비용 측면이 있어서, 영어에 시간 투자하거나 참여시킬수록 그림자 부분의 댓가를 치뤄야 하는 거 같아요. 그것 때문에 놓치는 부분이 생기는 거죠~
그 시기에 잘 놀아야 하는 지점, 재미있는 한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 그밖에 다른 것들...

단발머리 2014-06-19 08:56   좋아요 0 | URL
ㅋㅎㅎ 밤새워 침튀겨 얘기해도 답이 없지요~~

그런데, icaru님 기회 비용과 그림자 부분 이야기는 저도 완전동감이예요.
영어 공부를 안 시킨 것에 대한 변명이 아니구요^^
주위에서 영어 잘 하는데, 한국어 약한 아이들 이야기가 들리더라구요.
영어를 잘 하면 좋겠지만, 한국어를 더 잘해야한다는... ㅋㅎㅎ

순오기 2014-06-19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에 할 말 별로 없어요.
하고 싶은 놈은 하고 하기 싫은 놈은 하지 말자.
영어 아니어도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찾자.
아쉬울 땐 잘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서 해결하자. 등등
이런 정도가 내 수준이니까요.ㅋㅋ

단발머리 2014-06-19 11:05   좋아요 0 | URL
ㅋㅎㅎ
하고 싶은 놈은 하고 하기 싫은 놈은 하지 말자.
영어 아니어도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을 찾자.
아쉬울 땐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서 해결하자.

하나같이 구슬같이 빛나고, 실제생활에 유용한 말씀들이예요.
등등에 있는 것도 다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