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연의 책 『서서비행』을 읽고 나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던 문장은 이렇다. “나는 아직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대답은 너무 뻔하다.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것.” 난 『서서비행』이라는 책 제목과 함께 금정연이라는 이름도 기억해뒀다.
서평가, 다른 이들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우스꽝스러운 직업(10쪽)을 가진 사람의 책 이야기는 너무나 즐겁다. 예를 들면, 아직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지 못한 독자들을 향한 이 달콤한 위로의 말들이라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는
이런 대화가 나온단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때?” 갑자기
교양을 시험당한 아오마메는 되묻는다. “당신은 읽었어요?” 그러자
다마루가 담담하게 말한다. “아니. 나는 교도소에도 간 적이
없고, 어딘가에 오래 은신할 일도 없었어. 그런 기회라도
갖지 않는 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더군.” 이어지는 대화는 점입가경이다. “주위에 누군가
다 읽은 사람이 있었어요?” “교도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이 내 주위에 없는 건 아닌데, 다들 프루스트에 흥미를 가질 만한 타입이 아니었어.” (40쪽)
금정연의 다정한 속삭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바로 그 속삭임 때문에, 나는 반드시, 반드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을 완독하리라 다짐한다. 책장 맨 윗 칸에서 우아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을 당장 뽑아 책표지를 과감하게 벗겨 내서는, 자주빛 새
책을, 식탁 옆 책탑 맨 위에 척 하니 올려둔다. 반드시
읽고 말리라. 금정연이 끝까지 못 읽은 이 책을, 나는 읽고야
말리라. 반드시 읽어내리라. 읽어 내고야 말리라. 다짐과 결심, 그리고 화이팅.
글을 써서 먹고 산다는 것,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낭만적인 생각들은 금정연의 솔직함 앞에서 일순 부끄러워진다. 마감에 쫓겨 글을 쓴다는 것, 쓸 내용이 없는데 쓴다는 것, 쓰기 싫은데 쓴다는 것, 잘 안 써지는 데 쓴다는 것. 그런 것들은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가. 얼마나 큰 좌절감을 안겨 주는가. 멋져 보인다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글을 쓴다는 건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그런데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니.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지만, 왜 하필 이 나라에서. 이 나라의 말로.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5천만. 하지만, 사람들은 거의 책을 읽지 않아, 한 달에 책 한 권 읽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알라딘 마을 제외^^) 글을 써서, 책을 써서 먹고 산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읽고 원고를 납품하는 와중에도 원고 수입은 적고, 생계는 빠듯해 생각에
자주 빠지게 된 어느 즈음, 몸이 아파 찾은 병원에서는 금정연에게 내시경 검사를 하자고, 그리고 혈액 검사도 해야한다고 했다. 비용은 대략 30만원. 그 다음 페이지 전체는 가히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는데, 아무리 줄이려고 해도 줄일 수 없는 명문장들 뿐이다. 상황이 그렇고, 표현이 그렇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 번도 원고를 기고한 적 없는 잡지의 청탁 전화였다. 원고료는
30만 원이라고 했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대가로 내가 의사에게
지불했던 바로 그 금액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지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후 혈액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는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10만원. 그러자 이틀 후, 역시 한 번도 원고를 기고한 적 없는 잡지에서
그만큼의 원고료를 주겠다는 청탁 전화가 걸려왔다.
우스운 우연이었다. 나는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기로
했다. 재정 상황을 점검한(그건 정말 간단한 산수였다) 나는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와 내 통장에게 약간의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는 돈이었다. 나는 ‘얼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생각했으며, 생각했다. 밤이 새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자 정말 그 돈이 당장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친구의 전화였다. 그는 내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고, 보수로
바로 그 ‘얼마’만큼의 금액을 제시했다. 정확히 같은 금액을. 그때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씨발’이라는 감탄사는 아마 이런 뜻이었으리라 : “론다 번과 이지성이 옳았단 말인가!”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생을 ‘시크릿’ 가득한 ‘꿈꾸는 다락방’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래서 나는 거절했다. 거짓말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234쪽)
나는 론다 번과 이지성의 주장이 다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게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론다 번과 이지성이 완전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그들의 이야기 속에 일말의 진심 혹은 진실을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이 믿는 원리 혹은
신념을 다른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강요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는 간절함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르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절하게, 더
간절하게 혹은 열심히 더 열심히,는 간절함과 열심을 마음 속 깊이 다짐하는 사람에게 고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간절함과 열심이 이룬 결과에 대한 책임이 노력하고 애쓴 사람에게만 강제된다는 것 역시
문제다. 사회 속 부조리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리는 건 비겁한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지지 않는다는 말>,
204쪽)는 말이 우리네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제법 많지만, “어쩌면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 현실이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일지도 모른다”(<소설가의 일>, 251쪽)는 말 역시 긍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에 대한 글, <우리 삶의 노정 중간에서>는 빨간 책방에서 이동진 작가가 일부 낭독해줬었는데, 바로 이
문장 때문에, 바로 이 문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습니다. “
권태와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도, 새로운 삶의 장 역시도 글쓰기일 수 밖에
없다는(102쪽), 바르트의 말은 그의 다른 말도 궁금하게
만든다. 금정연을 읽고, 금정연이 밑줄 친 문장을 읽고, 프루스트를, 롤랑 바르트를 다시 보게 됐으니, 금정연은 성공한 셈이다. 나는 금정연 덕분에 줍게 된 이 문장을
들고, 롤랑 바르트에게로 간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발을 뗀다.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