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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2월
평점 :
소설을 읽고 소설가를 상상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정당하다. 소설은
어느 정도 소설가를 반영한다. 소설을 읽고 나도 모르게 소설가를 상상한다. 소설 속 매력적인 캐릭터는 소설가의 옆모습이다. 소설 속 비겁한
캐릭터는 소설가의 뒷모습이다. 어떤 소설이 좋다고 말할 때, 나는
소설 속 감추어진 소설가의 일면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주 짧은 단편 하나도 그 자체로서 완벽하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미지의 세계 속에서 소설가는 없다. 소설 속에서 내가 마주한 사람은 실존보다 더 실제적인 어떤
한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서 소설가의 모습을 찾으려는 사람은 어쩌면 바보다.
김살로메 소설집 『라요하네의 우산』을 읽으며 나는 소설가를 만나고 싶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냐고, 어떻게 이런 소재를 찾아내었냐고, 자꾸 묻고 싶었다. 소설가가 눈앞에 있다 해도 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질문인가. 얼마나
바보 같은가. 그 때마다, 질문과 물음이 한껏 차오를 때마다
책날개를 펴서는 한참이나 소설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여쁘고 고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고 나서는 다시 소설집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이 소설집을 읽었다. 더 알고 싶은 소설가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말을 걸고 싶은 등장인물들 사이를
헤매면서 말이다.
좌우가 비대칭이거나 짝이 맞지 않은 것을 보지 못하는 샌드리의 강박증은 술취한 아버지의 실수로 한쪽 다리를
잃은 어머니의 사고 때문에 생겨났다. 한쪽으로 늘어지는 티셔츠, 한쪽에만
하는 귀걸이, 한쪽이 들어오지 않는 스탠드 조명등을 샌드리는 참아내지 못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살아왔던 샌드리는 왼팔에 깁스를 하고 나타난 아버지를 보고는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다. 좌우 길이도 맞지 않고 균형도 맞지 않는 아버지의 팔. 반드시
저 팔을 바로 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샌드리는 아버지와 몸싸움을 벌인다. 샌드리의 소식을 전해들으며, 지미는 샌드리가 말했던 모모의 우산 아르튀르를 기억한다.
하지만 지미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미는
벌떡 일어나 책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쪽 바짓단이 펄럭이는 모모의 우산, 녹색 얼굴에 빵떡모자, 체크무늬 웃옷에 넓은 바지통, 흰 바탕에 푸른 줄무늬 농구화를 신은 외다리 아르튀르. 어지럽혀진
책꽂이 속에서도 자기 앞의 생은 금세 눈에 띄었다. 누구였을까, 모모의
낡은 우산을 찾으러 나선 이가. 마지막 장을 찾아 나선 지미의 손끝이 분주해졌다. (<라요하네의 우산>, 94쪽)
<강 건너 데이지>를 읽고는 듀란듀란의 <더
리플렉스>를 부러 찾아들었다. <더 리플렉스>를 들으며 길가에서 여자를 출산했다는 엄마의 이야기는 극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만나는 모든 남자에게 존 테일러를 붙여주었던 엄마는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엄마를 버리고 떠나려는 여자는 남자친구의 생일선물 데이지꽃을 보면서 모자를 쓴 개츠비와 사랑과 숭배의 대상이었던
데이지, 그리고 지옥 같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딸에 대한
저주와 엄마에 대한 증오, 개츠비와 데이지 때문에 이 단편은 힘들었다.
제일 인상 깊은 작품은 <알비노의 항아리>이다. 알비노,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독특한 느낌과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알비노들의 사진을 보았을 때 느꼈던 슬픔이 떠올랐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 시기와 혐오가 한없이 뒤섞이는 모습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더 미워졌다.
아버지의 오랜 지병보다 어머니의 욕정이 더 중병처럼 느껴졌다. 젊은 날 바람피우지 않고 – 아니면 몰래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 가정을 지킨 어머니가 신기할 정도였다. ...
“니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노? 오줌
그기 뭐가 그리 대단한 기라고. 내가 이 나이에 애먼 소리까지 들어야겠나? 영감 병 고치려다 화냥년 같단 소리나 듣고, 아이고 억울해라!” (<알비노의 항아리>, 30쪽)
특이한 외모의 아내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면서도 그녀의 신체를 ‘만병통치약’처럼 여겨 검증되지 않은
속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말과 말들이 무서웠고, 그런 말들이 설득력을 얻는 과정들이 한없이 서늘했다. 결혼을 현실적인 거래처럼 삶의 한 방편으로 받아들였던 ‘내’가 아내를 더 보듬어야겠다고 결심한 부분이 좋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세상을 향해 덤덤한 체념(20쪽)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아니면 그래서 더욱 더. 그녀에게는 이해와 위로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행복한 읽기 시간이었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웃고 함께 걸었다. 겨울 한나절의 소일거리라 하기에는 내가 받은 즐거움이 너무 크다. 책날개
속, 고운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