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는 셰익스피어 40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한가한 고민 한 번 해 보자면, 비교적 최근 번역판인 민음사의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 중 몇 권을 골라 읽을까. 아니면 가장 최근판인 문학동네 번역본으로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는 거다.
[셰익스피어 전집 4 : 비극 1], [템페스트], [베니스의 상인]
간단한 워밍업으로 이 책을 집었는데, <들어가는 말>에서 이런 문장을 보게 된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의 원초적인 감정은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기쁨이나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은 시대를, 국경을 초월해 공감하게 되는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4백 년 전 셰익스피어의 세계는 오늘날 우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한 남편의 경우, 아내의 부정을 알고 미친 듯이 노한 상태였음이 드러나면 동정을 받을 것입니다.
학자로서의 성과나 저자가 가지고 있는 방대한 지식 혹은 작품에 대한 통찰을 넘어서,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의 책이라니.
부정한 아내에게는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말인가. 부정한 아내에게 가해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내의 부정을 알고 미친 듯이 노한 상태에서는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말인가. 폭력의 이유가 아내의 부정이라면 이해되고 동정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셰익스피어를 그렇게 오래 공부하고 연구한 사람이,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로 가득한 셰익스피어의 세계에 감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가. 정말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읽기는 한 것인가. 셰익스피어 입문용으로 쉽게 나왔다고 해서 읽어야지 하고 있는데, 내내 찜찜한 마음이다. 시작부터 마이너스다.
그래서, 다른 책을 펼친 것 아니겠나. 죽음에 대한 유쾌한 통찰, 용감하게 죽고 싶다는 사노 요코를 만나려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또 이런 문장.
“내가 남들한테 말 못한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친척이나 형제들한테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어서 아무도 모른다우.”
“여자 문제예요?”
“그건 빙산의 일각이라우. 폭력이 얼마나 심한지, 머리채를 질질 끌고 다녀서 뼈가 부러진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고. 뼈가 부러져도 의사한텐 넘어졌다고 했지. 얻어맞아서 멍이 들어도 옷장 모서리에 부딪쳤다고 둘러대야만 했고.”
(중략) “왜 안 헤어지셨어요?”
“시골은 도쿄랑 달라서 이혼이 가당치 않다우. 아들 혼삿길도 막힐 테고. 나만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틴 거지.”
“결혼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53년”
“우왓.” (155쪽)
진짜 우왓이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자식을 위해, 가정을 위해 53년을 참고 사는 아내. 마지막 순간에는 아내를 호스피스에 맡겨 놓고는 와 보지도 않는 남편. 그런 삶, 그런 인생. 아, 인생...
나는 우아하게 셰익스피어를 읽으려는 거다. 나도 인간 본성에 대해 탐구 좀 하고 싶은 거다. 그런데..
이렇다. 펼치는 책마다 가정 폭력, 남편에 의해 아내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미화되고, 이해되고, 동정되고, 서술된다. 나는 셰익스피어에게 가고 싶은데 화가 나서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다.
자꾸 왜 이러는지, 내가 읽는 책들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여보세요, 자꾸 왜 이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