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에 북파우치를 주문하면서 시집도 한 권 주문했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었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하신 ㅆ님이 추천해주셨다. 시집을 살 때면 다른 책을 살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든다. 보통 시집이 8,000원, 10% 할인하면 7,200원이다. 최대로 잡아 1권당 인세가 800원이라 하면, 2000부를 찍어 그 시집이 다 팔렸다 해도 160만원이다. 순수한 문학의 상징인 시집에다 이렇게 계산기를 두드려대는 게 수준 낮은 행동이라는 건 안다. 내가 1권, 2권, 아니 10권의 시집을 더 산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형편이 그렇게 많이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갖게 된 이 고마운 마음에 대해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다.
내가 당신의 시를 좋아합니다.
당신의 시를 읽는 게 행복합니다.
내 마음을 비쳐주는 이런 좋은 시를 써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집을 읽고, 또 시집을 산다.
언니들, 친구들에게 시집을 선물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은 다 읽어야 하고, 다 읽었다 하더라도 그 소설이 선물 받은 사람들에게 큰 감흥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시집이라면 다르다. 전체의 시 중에서 하나의 시, 마음에 와 닿는 단 하나의 시만 발견해도 그것만으로도 이미 본전 이상이다.
교회에 다녀와서 시집을 펼친다. 하필이면, 유부남. <유부남>이라는 시다.
유부남
류근
당신이 결혼 따위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으면 좋겠
어 우리 그냥 연애만 하자 사랑이 현실에 갇히는 건
끔찍해 결혼은 천민들의 보험일 뿐이야 진부해 그냥
연애만 하자 서로의 눈을 바라보자구 구속하는 일 따
위 구역질난다 서로의 사생활은 존중해야지
(중략) 당신은 내게
뭔가 요구하지 않을 사람 같아서 참 마음에 들어 상
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야 천박해 그러
니 우리 쿨하게 연애하자구 참, 내가 전화 받기 곤란
할 만큼 바쁜 사람이란 거 알지? 전화는 항상 내가
먼저 할게 사랑해 이런 느낌 처음인 것 같다 우리 좀
더 일찍 만날 걸 그랬지?
빨래가 다 됐다고 세탁기가 띵동거리며 노래를 한다. 집에 있는 유부남에게 빨래 좀 널어달라고 말한다. 나는 류근의 <유부남>이랑 이야기 좀 나눠야겠다. 사랑에 대해서, 연애에 대해서 그리고 구속에 대해서 말이다.
다음 시집 선물은 무조건 류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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