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81호 - 2014.겨울 - 창간 20주년 기념호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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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자>

김훈이고, 김훈의 작품이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수 있겠는가. 내가 더한다고 해서 그의 완벽함이 더욱 빛나겠는가. 내가 뺀다고 해서 그의 완전함이 손상되겠는가.

나는 그냥 읽고, 읽으며, 또 읽을 뿐이다.

 

‘나’는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9급 준비생, 구준생이다. 흉어가 계속되자 4.5톤짜리 배를 팔아 수협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서울 이주비용을 대주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 덕분에 ‘나’는 구준생 나름으로는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영자’는 고시텔 집현전에서 일 년 반 동안 동거한 여자다. ‘나’는 거주하고 있던 방의 보증금이나 월세를 분담시키지는 않았고, 관리비만 내는 조건으로 그녀와 동거에 합의했다. 섹스 문제는 구체적으로 명기하지는 않았지만, 저절로 교감이 생기는 대로 이루어질 거라 예상했다.

저녁 여섯 시 무렵에는 시장한 구준생들이 컵밥을 파는 노점 앞에 줄을 섰다.

카레라이스, 제육덮밥, 김치볶음밥은 이천원이었고 그 위에 계란프라이를 얹은 크라운컵밥은 이천이백원, 계란프라이 위에 햄버거 한쪽을 더 올린 로열컵밥은 이천육백원이었다. 라면 스프를 푼 국물을 일회용 컵에 담아주었다. 노점마다 ‘국물 리필’이라는 팻말을 천막 끝에 매달았다. 인공조미료와 식용유를 끓이는 냄새가 퍼져서, 거리는 시장했다. (30쪽)

 

저녁 여섯 시 무렵에 시장한 구준생들이 컵밥을 파는 노점 앞에 줄을 선다. 거리에 가득찬 사람들, 내일을,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암담함. 늙으신 부모님, 주변의 기대 그리고 가벼운 주머니. ‘국물 리필’ 팻말 밑에 줄 선 사람들, 줄 선 청춘들.

'나'는 9급 지방 행정직 시험에 합격해서 경상북도 내륙 산골 마장면 면사무소로 내려왔다. 영자가 노량진에 아직 남아 있는지, 노량진을 떠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노량진을 떠날 때 영자에게

- 나, 간다. 잘해.

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응답이 없었다.

영자가 문자를 봤는지 안 봤는지를 나는 알 수 없었다. 노량진에서 뚝불이라도 함께 먹고 헤어질걸‧‧‧‧‧‧ 고속버스가 도청 소재지에 닿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데없이 떠오르는 그런 생각에 나는 당혹했다. (34쪽)

 

도청 소재지에 닿아서야, 그렇게 멀리 와서야 영자를 생각해낸 ‘나’가 너무 야속하다. ‘나’는 고시텔에서 영자와 일 년 반 동안 동거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동거했다 하더라도, 계약하에 이루어진 관계라 하더라도 말이다. 함께 지낸 시간들이 있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축하해주지도,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도 않는다. 한 사람은 붙고, 한 사람은 떨어졌다. 방을 뺄 날짜를 말해주고, 짐을 챙겨 나간다. 서로에게 인사하지 않는다. 같이 밥 먹지 않는다.

먹기를 마치고 카운터에서 사천오백원을 계산할 때 영자와 눈이 마주쳤다. 영자는 떡라면 냄비를 기울여서 국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나는 영자가 먹은 떡라면 값 이천오백원을 함께 계산했다. 내가 영자의 밥값을 내주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9급 시험이 가까워서 둘 중에 누가 붙고 떨어지건 간에 곧 동거를 끝내야 할 수도 있으리라는 예감이 그런 자선심을 발동시킨 모양이다. 영자는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 잘 먹었어. 고마워.

라고 영자는 말했다. (42쪽)

 

‘내’가 딱 한 번 영자의 식사비를 내주는데, 그 때도 두 사람은 같이 밥을 먹은 게 아니다. 배를 팔아 돈을 보낸 아버지가 있는 ‘나’는 사천오백원짜리 뚝불을 먹고, 마을버스 차부 옆에서 순댓국집을 하는 엄마가 있는 ‘영자’는 이천오백원짜리 떡라면을 먹는다.

두 사람은 같이 밥 먹지 않았다.

마장면에서, 단풍 든 숲을 바라보면서 나는 때때로 영자를 생각했는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40쪽)

 

이 단편의 결말과 상관없이, 나는 ‘나’가 영자와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영자를 찾아 노량진에 온 ‘나’는 이제 노량진을 영영 떠나려는 영자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재회하게 된다. 이제 ‘나’는 ‘내’가 영자를 만나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지만, 영자는 지금 자신이 왜 ‘나’와 다시 만나게 됐는지 알지 못 한다.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지나쳐가려는 영자에게 ‘나’는 말한다. 우리 밥이라도 한 번 먹자.

내켜하지 않는 영자를 끌고서 식당에 들어선 ‘나’. ‘나’는 영자에게 묻지도 않고 주문을 한다.

아주머니, 여기 ‘뚝불 2개’요.

 

 

 

<출처 : 네이버블로그 땅콩쿠키의 달달한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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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2-1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마지막 결말 참 멋지네요 뒷이야기를 듣는듯^~^

단발머리 2015-02-11 08:34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런가요? 저의 소망을 간절히 담은 결말인데요.
허접하기는 하지만 해피엔딩을 추구하는 저로서는 나름 마음에 드는 결말이예요.
김훈 작가님께는 비밀입니다~~
반가워요, 해피북님*^^*

라로 2015-02-1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뚝불 사진 오려주시는 줄 알았더니~~~.^^;;;;

단발머리 2015-02-11 08:40   좋아요 0 | URL
헤헤헤...
어떻게, 뜨뜻한 걸로다가 한 장 올려볼까요? :)

라로 2015-02-12 16:46   좋아요 0 | URL
ㅋㅎㅎㅎㅎ 올리셨네요!! 그러니 글이 더 잘 느껴집니다요!!!^^

단발머리 2015-02-13 10:02   좋아요 0 | URL
아롬님이 예쁘게 봐주시니 매우 기쁨니다요!!!^^

다락방 2015-02-1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이 책 사서 읽어봐야겠어요. 김훈의 소설 말입니다.

단발머리 2015-02-11 11:56   좋아요 0 | URL
네.... 네개 정도 읽었는데, 모두 다 좋더라구요.

김영하님 작품도 좋구요, 성석제님 작품도, 박현욱님 작품도 좋아요.
두껍다는 단점 빼고는, 완전 좋은 단편이 수두룩 빽빽합니다. *^^*

양철나무꾼 2015-02-1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계속 눈팅은 했었는데,
아무래도 댓글은 처음 남기지 싶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꾸벅 (__)

단발머리 2015-02-11 12:3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양철나무꾼님~~
처음 댓글 감사합니다*^^*

많이 부족한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저야말로 양철나무꾼님 서재에서 좋은 글 많이 읽고 있어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 꾸우벅 (__)

icaru 2015-02-1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렇게 해서, 김훈 단편 하나를 단발머리표 썸머리로~ 촵촵,,, 꿀꺽 소화~
시키지도 않은 작은 고백을 하자면,,, 저는 작가 김훈 님의 글은 십년전 교과서에 실린 자전거기행이 전부예요..
아아... 밥벌이의 괴로움도 있군요.. ㅎㅎ 근데 그건 김훈은 컴맹이고, 운전면허도 없다,, 라는 밖에 기억 나는게 없는거있지요. ㅠ,ㅜ)
밑천 드러나는 이런 고백~~ ㅎㅎ
아,,뚝불 참 맛나보인다~

단발머리 2015-02-14 09:19   좋아요 0 | URL
김훈님은 컴맹이고 운전면허도 없어야지요. 사람이 너무 가진게 많으면 안 됩니다.
조금 부족한 구석도 있고 그래야지요.ㅋㅎㅎ

저는 <자전거기행> 새로 나왔을때 준비시켜 놓았는데 아직 시작을 못했어요.
역시, icaru님은 십년 전에. 주로 icaru님은 십년전에... 진심 부러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