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의 요새』를 구입했던 건 2022년 12월이다. 구입하고 바로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지 못하고 멈춤 상태였다. 이번에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의 9월 도서라 처음부터 다시 읽는데 비비언 고닉이 언급된 부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작년에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은 일』에서 이 부분이 특히 좋아서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서 여러 번 읽었다.
엘리자베스 스탠던의 국회 연설은 평생을 여성 운동을 위해 헌신한 활동가의, 거의 마지막 공식 연설이었다. 그 중요하고 뜻깊은 자리에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스탠턴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스탠턴은 고독을 말한다. 인생에서 고독이란 필연적인 것이다. 외로움은 우리 삶의 평시 상태다. 비비언 고닉은 이 부분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외로움은 규준이고, 연결은 이상理想이라는 것. 연결은 인간 조건의 규범이 아닌 예외였다. 그는 여성 인권에 오래도록 두루 몸 바쳐온 삶에서 비범한 통찰을 숱하게 얻었지만, 그 무엇도 이보다 더 강력하고 시사적일 순 없었다. "여자들이 아무리 기대고 보호받고 지지받는 쪽을 선호하더라도, 남자들이 아무리 간절하게 그렇게 해주고 싶어하더라도, 결국 생의 여정은 혼자 떠나야 합니다." (『끝나지 않은 일』, 144쪽)
외로움은 규준이고, 연결은 이상이라는, 이 이상한 말을 정희진의 ‘인간론’에 대해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의 불가능성이 인생의 기본값이다. 이해란 곧 오해를 의미한다. 번역이란 곧 반역이라는 말이 가르쳐 주듯이.
마사 C. 누스바움은 스탠턴의 연설에서 그려진 고독의 양상, 귀중한 내면세계에 대한 스탠턴의 통찰이 미국 프로테스탄트 전통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개별적인 양심과 판단의 권리” 및 “생득적 자기 통치권”에 대한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구원을 통한(위한) 모든 개인의 여정은 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포함하고 있다.
개별화된 존재로서의 '개인'에 대한 개념이 충분히 정교화된 현대 사회에서 이는 당연시되는 생각이지만, '개인의 구원이 혈통이나 집안, 계급이 아니라, 개인 그 자신과 연관된 문제'라는 이런 인식은 출현 당시에는 무척 혁명적이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의 지위는 부모의 계급에 따라 결정되었다. 물론 부의 양극화와 교육 격차의 심화로 현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하기는 했지만, 고대, 중세 그리고 근대 초반까지도 부모로부터 이어지는 부의 세습, 계급의 세습은 불문율이었고, 훨씬 더 명시적이었다.
스탠턴은 고독이라는 개념을 개인이라는 개념과 연결지어 여성들이 선택이라는 능력을 함양하고, 교육을 통해 내면세계를 더욱 깊이 만드는 일에서 뎌 이상 여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교만의 요새』, 35쪽)
스탠턴은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정치적 권리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임을 주창한다. 신 앞에서의 평등. 고닉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간다.
인간의 고독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인식이 근원적 이유를 사유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우리 사이에서 득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린 우리가 이 연결성을 파악한 최초의 페미니스트는 아니란 사실도 금세 깨닫게 된다. (『끝나지 않은 일』, 142쪽)
고독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 마음이 강한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인식.
외로움이 규준이라는 고닉의 말을 순순히,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고독이 인간 실존의 기본값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외로움을 덜 느낄 수도 있겠다. 사람은, 모두 다 외롭다. 온 세계에 나 혼자 던져진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고, 결국 나는 혼자일 거라는 생각에 사무칠 때가 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은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생각이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로 작동할 수 있다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짝짓기에 대한 강한 열망. 혹은 이성애. 혹은 사랑이라 부르는 그 무엇.
잘 알려졌다시피 엘리자베스 스탠턴은 그녀가 참여했던 여러 사회 운동 중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여성주의 역사에서 '참정권 운동'에 대한 평가에는 아쉬움이 많이 엿보이는데, 여성 운동의 에너지, 대부분의 에너지가 참정권 운동에 집중되면서, 오랜 기간의 투쟁과 분투 끝에 원하던 바가 실현되었을 때, 활동가들과 일반 대중들이 여성 운동의 동력을 잃어버린 듯한, 약간 힘이 빠진 듯한 '상실의 모먼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페미니즘 운동 방식(나는 최근엔 그 운동과 활동에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꼭 붙이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하기는 하는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젠다가 각각 다르다고 본다. 성폭력 근절이 중요한 문제인 것만큼, 소비 저항 운동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탈코르셋이 중요한 아젠다인 것만큼 대형 축산산업에 대한 저항으로 육식 자제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운동이 일렬로 나란히 갈 수 있는 건 아니고, 어느 시기에는 특정 사안에 힘과 지혜를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가장 큰 저항을 불러일으킬 주제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여성의 '성 해방'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가부장제 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성'을 혐오하지만, 도덕적인 잣대를 거부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면서 혐오한다. 가장 자유로운 여성이 가장 큰 비난을 받는다. 사람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고, 그 일에는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많이 필요할 테고 그 시간은 길고 지루하겠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천천히'라도 결국에는 변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여자가 첫 손님이면 재수 없다는 이유로 승차거부하는 택시기사들이 실제로 있었지만, 카카오택시로 예약하는 손님의 성별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러니까 스탠턴과 고닉의 문장을 읽고 다시 읽으며, 내가 이해한 것이 맞을까 고민했던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재의 아젠다는... 남자를 덜 사랑하는 것이다. 이혼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사랑받겠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겠다는 것이다. 남자보다 여자의 생각을 더 소중히 여기겠다는 뜻이고, 남자의 조언보다 여자의 충고를 더 귀히 여기겠다는 뜻이다. 여자를 비난하는 데 조금 더 늦게 참여하겠다는 뜻이고, 남자를 가르치는데 망설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이고 싶고, 다 듣고난 뒤에는 '하지만...' 이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다. 로맨스를 좋아하는, 한때 좋아했던 나로서는 갈 길이 참 멀다고 하겠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여성 중의 한 명.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애정하고, 존경하는 그 분의 목소리를, 여러 번 들을 수 있다는게 참 감사하다. 그 웃음소리를 들을 때 덜 외롭다고 느낀다. 행복한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