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와 혐오의 정서가 작동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분법 벗어나자. 왜 두 가지 밖에 없나. 죄송해요, 지금 생각나는게 이거 두 개 밖에 없습니다) 문화의 저변에 굳건히 자리잡아 그것이 '혐오'이고, '배제'의 정서임을 철저히 감추는 방식. 그런 행동 양식이 '혐오'라고 지적했을 때, '아니, 그게 왜?', '그거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도록 강제하는 방식. 그런 방식의 가장 강력한 실례는 당연히 5천년 인류 문명의 결정판 여성 혐오다. 남녀 평등을 표면적으로 거절하는 사람은 없지만,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는, 훨씬 많다. 그렇다고 여성혐오가 작동될 때, 두 번째 방식이 사용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방식은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 배제와 혐오의 정서를 폭력적으로 과시하는 것이다. 최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서 일어났던 폭력 소요사태가 그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예가 될텐데, 먼저 일어났던 사건의 피의자가 영국 태생의 기독교인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짜 뉴스에 속은 사람들의 외침은 일관되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돌아가라, 너희 나라로! 이민자들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아무런 여과 없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대낮에 길거리를 막아서서 운전자의 얼굴색, 인종을 확인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정상성을 유지하는,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야만적 행동이다.
유대인에 대한 유럽인들의 행동 양식은 이 두 가지 방식 중 두 번째 방식에 해당한다.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능욕했는데, 이는 눈빛이나 태도등의 소극적 방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규제를 통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반유대주의 전설에 따르면, 빌라도에게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라고 외친 이래로 유대인은 치질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치질을 고치는 길은 그리스도의 보혈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이 그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치질에 효험이 있는 유월절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피를 얻으려고 매년 그리스도 대신 한 사람을 죽여야 했다는 이야기다. ... 이렇듯 한 사건에서 출발한 유대인에 대한 비난은 살인 의식에 대한 고발과 피의 비방(중세시대 유대인이 아이들을 유괴하고 죽여서 종교 의식에 쓸 피를 마련했다는 비방에서 유래한 용어로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대한 부당한 비방을 가리킨다-옮긴이)으로 뻗어나갔다. (『유대인의 역사』, 359쪽)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들을 사랑한다』를 읽고 페이퍼를 2개 썼지만, 사실 쓰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새롭게 알게 된 정보와 지식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그걸 풀어내는 유대인 작가의 서늘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대해 쓸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습격이 계속되는 요즈음, 나의 '반유대주의' 독서가 이렇게 계속되어도 되는지, 결국 이 읽기가 도착하고자 하는 궁극의 자리는 어디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집은 여전히 만차 상태, 남은 휴일은 내일 하루, 월요일부터 출근인 사람이 취할만한 적합한 태도는 아니지만, 일단은 도서관에 상호대차로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과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를 신청해 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데어라 혼의 책을 펼친다.
<11장 샤일록과 함께하는 통학길>. 저자는 자동차라는 닫힌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같이 듣게 된다. 그녀는 스스로도 그 작품을 다시는 읽고/보고 싶지 않았던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그 사람이 그 작품을 듣지 않게 하기 위해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의 열 살짜리 아들은 고집이 세고, 요구가 많고, 집착이 심하고, 무시무시하고, 종종 너무 똑똑해서 결국 그녀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작품을 듣는 과정에, 아들은 날카롭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그녀에게 퍼붓는다. 그녀는 계속해서 작품 속의 '복잡미묘한 결'에 대해 아들에게 설명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꺼버리자'는 저자의 말을 뒤로 하고 아들은 끝까지 들어보겠다고 한다. 마침내 극이 끝나고, 그녀의 아들이 말한다. "저거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아요." "분명히 다시 듣게 될 거야."
나는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여러 층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인물의 불명예스러운 흉물스러움은 심지어 열 살짜리 아이에게도 명백하며, 이 희곡이 얼마나 많은 층위를 포함하고 있든 간에 그런 흉물스러움도 분명 하나의 층위이다. 학대 당하는 아내가 다정한 남편이 왜 자신을 때렸는지 설명하는 것처럼, 내가 왜 이렇게 극도로 명백한 사실에 대해 변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껴야 하는지 궁금했다. 나 자신이 속한 민족에 대한 모욕을 단지 만화에 국한된 적이 없었고 너무도 많은 내 선조들의 존엄과 심지어는 목숨까지 앗아간 모욕을 정당화하는 이런 비뚤어진 역사적 심리 조종에 내가 왜 참여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315쪽)
나는, 인간이 언어의 동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언어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유일한 종이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아' 다르고 '어' 다르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그녀의 열 살짜리 아들이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를 미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해서 변명한다. 열 살짜리 남자 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명확한 혐오와 멸시의 감정을 감추기 위해 애쓴다.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베니스의 상인』 전반에 전시된 반유대주의에 대한 비판은 '수준 낮게 징징거리는 인간들'(300쪽)의 것이라 치부되고, 그 작품의 원래 의도, 즉 자본주의 비판과 '타자'에 대한 논평이 이 작품에 대한 '제대로된' 해석이라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게 현실이다. 열 살 남자 아이도 단번에 알아듣는 그 진실을, 사람들은 모른체 하고, '예술 작품' 속 다양한 층위를 설명하는 하나의 장치라 여긴다. 그렇다고 말한다. 열 살 남자 아이도 단번에 알아듣는 그 진실을. 모두 다, 모른 척 한다. 여전히 셰익스피어는 옳고, 틀리지 않은 상태가 계속 되고 있다.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공권력의 힘을 동원한 실제적인 억압으로, 문화의 탈을 쓴 교묘한 속임수로. 여성, 이민자, 장애인, 성소수자 이에 더해 이제는 어린이와 노인에 대한 혐오마저도 부끄러워 하는 기색도 없이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유대인은 핍박받는 피해자에서 가해자의 위치로 탈바꿈한 거의 유일한 집단이다. 그들은, 가자 지구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어린이들과 이를 구경하려 온 피난민들에게 폭탄을 투하하면서도, 자신들이 피해자라 생각할 것이다. 정체성의 정치에 매몰되어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라 믿으며, 피해의식의 경쟁에 올인할 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네타나휴의 이스라엘에는 희망이 없다.
하지만.
한반도의 상황은 다르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실질적, 군사적 압력으로 북한이 존재하는 작금의 분단 현실 속에서, 군사 전체주의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일본의 침략 야욕은 노골적이고 확고하다. 용서를 바라지 않는 가해자,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가해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윤석열 정권의 국영방송 KBS는 광복절 새벽 0시에 <나비부인>을 상영함으로써, 기미가요를 부르는 여배우를 비춰줌으로써 하나의 답을 제시했다. 화해와 협력, 그리고 공동 번영. 내 생각이 여전히 '정체성의 정치'에 함몰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다. 내 나라 보다 일본을 더 위하고, 내 나라보다 일본을 더 사랑하는 윤석열 정권 하에서, 나의 '정체성의 정치 공부'는 좀처럼 전진하지 못할 듯하다. 그런 예감이, 불길한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