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 책을 읽을 때는 ‘반성 모드’ 속에서 읽었다. 지금도 반성할 일이 많고, 반성은 앞으로도 계속될 터이지만, 그때와 좀 다르게 읽히기는 하다.
이 책에 대한 비판 중 본질주의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 눈길을 끈다.
나는 위에서 열거한 이 모든 죄를 짓고 있다고 고백한다. 여성이 주변의 자연과 갖는 관계를 이야기하고 이런 관계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여성의 몸으로 '존재'해 온 경험,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 내려오면서 형성되고 변화되어 온 지식을 배우고 습득해 온 경험을 통해 역사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보면서, 인류와 인류를 둘러싼 세계 사이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 본질주의라면, 나는 본질주의자이다. 이는 여성이 남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다'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은 자연의 일부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좋을 것이다. '남성'을 만물의 영장, 자연의 가부장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가부장적 프로젝트의 일부이다. (34쪽, <개정판 서문>)
나는 여성을 하나의 계급으로 이해한 필리스 체슬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가부장제 문화와 의식이 수백 년에 걸쳐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형성해 왔는가를 자료로 입증해 나갔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여성은 생산 수단과 재생산 수단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꾸준히, 성적으로 또는 다른 측면에서 치욕을 당했다. (<여성과 광기>, 25쪽)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 학대, 억압은 전 세계적인 공통 현상이며, 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 포괄적으로 이루어진다. 8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여성 혐오’로 인한 것이었음을 아직도, 아직도! ‘설명’해야 한다. 여성 혐오는 공기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여성은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받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체성의 정치’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현대 사회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하나의 단일한 ‘계급’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여성 사이의 차이가 남녀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넓게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모든 사건의 답이 ‘여자이기 때문에’ 혹은 ‘남자이기 때문에’가 될 수 없음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
자신이 가진 여성성을 총동원하여 대통령의 부인 자리에까지 도달한 현재의 영부인과 자립을 꿈꾸며 일상의 많은 시간을 아르바이트로 채우고 있는 20세의 젊은 여성의 위치는 판이하다. 개인차로 출퇴근하며 몸이 피곤하면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한국의 어떤 여성은 화장실에 가는 시간마저 제지받으며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제3세계의 여성 청소년의 위치와 완전히 다르다.
여성의 ‘몸’으로 전해지는 오천 년 가부장제의 경험은 자본주의와의 공조를 통해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백인 비장애인 유럽 남성을 제외한 사람들) 대부분의 삶을 억압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이 ‘미친 질주’를 가속화시켰다. 저자는 ‘좋은 삶’에 대한 규정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소비자 불매운동 등의 차별화된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제안한다. 또한 성장에 대한 맹신을 넘어서서 ‘자급적 삶’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최근의 강연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다시 강조하셨던 대로, 신자유주의는 오천 년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가부장제를 ‘이겨버렸다’. 신자유주의라는 환경 아래에서, 여성과 남성은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노동자로서 비로소 ‘평등’해졌고, ‘여전히 성차별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책임은 여성에게만 주어진다.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55쪽)
텀블러를 사용하고 육식을 줄이거나 배달 음식을 줄이는 정도의 의식과 실천으로 이 지구의 몰락과 멸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지금, 국제적인 규모의 연대와 협력이,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산업계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지금, 필요한 것은 역시 정치적인 힘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정치 묻히지 말라는 친구의 외침이 저 멀리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다.
답을 찾아보자. 해결책을 찾아보자. 더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