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숭배와 혐오

솔직히 말하자면(솔직하지 않으면 어쩔까 싶다), 이 책을 같이 구매해야 ‘어린왕자 책 베개’를 사은품으로 선택할 수 있다 해서 구매했다. ‘어린왕자 책 베개’가 아니었다면 도서관에서 대출해 한참뒤에야 읽었을 책인데, 덕분에 좋은 책을 읽었다. 




내 주장의 핵심은 그러한 실패가 재앙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며 실패 역시 어머니에게 맡겨진 임무의 일부라는 점이다. 어머니는 우리가 세상에 들어서는 입구이기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사회적 퇴보를 막는 신성한 임무를 짊어지게 된다. (41쪽)




<옮긴이의 말>이 특히 마음에 드는데, “로즈의 해박한 지식과 마에스트로처럼 작품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연주해내는 그의 솜씨(278쪽)”에 대한 찬사에 백퍼센트 동감한다. 옮긴이에 따르면 ‘어머니’는 페미니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홀대받는 영역이라고 한다. 나 역시 좀 미뤄두고 싶은 주제였는데,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에이드리엔 리치의 책을 이어서 읽어봐도 좋겠다. 







































2.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불과 단. 그녀들의 용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는다. 20대 초반의 젊은 그들이 어쩜 이렇게 싸울 수 있었는지. 무자비하고 견고한 악에 맞서 싸울 수 있었는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혼잣말 하며 읽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우리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여겨진다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거라는 침울한 생각이 자주 든다면, 이 책을 사자. 그리고 같이 읽자. 


읽기만으로 연대할 수 있다.(정희진) 읽기만으로 연대할 수 있다,고 나도 믿는다. 























3. The Story Of More  



호프 자런의 책을 읽는다. 통계가 중요한 책인데, 큰 숫자는 잘 모르겠어서 사이사이 상상하면서 읽는다. 고기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어느 책에서 읽더라도 충격적이다. 고기를 줄여나가는 구체적인 방법까지도 제시하고 있어 실천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If the entire OECD adopted the habit of just one meatless day per week, an extra 120 million tons of grain would be available to feed the hungry this very year. (50)



『The Giver』를 텍스트로 해서, 영어 고수님이 가르쳐주신 ‘원서-번역본’ 공부법을 시도해보려 하는데, 아직 조너스가 유토피아에서 탈출을 못 했다. 탈출에만 성공하면 곧 다시 조너스에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영어공부, 영어공부를 해야 해,를 입에 달고 사는 친구 때문에 밤 9시 즈음이 되면, 나 오늘 영어 아무거나 좀 읽었나? 하고 하루를 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 드넓은 우주에 나의 영어를 걱정해주는 친구가 있다. 밤낮으로 나의 영어를 걱정해 주는 친구가 있다. 요즘 그런 친구, 모두 한 명쯤은 있지 않나요?  : )

























4. 검은 피부, 하얀 가면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본능에 가깝다. ‘다름’이란 무엇일까. ‘다름’ 중에 가장 확연한 건 무엇일까. 페미니즘에 대해 읽기 전에는 ‘다름’의 결정판은 ‘피부색’일거라 추측했다. ‘인종’이 차별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이라 생각했다. 프란츠 파농은 ‘유대인 차별’과 ‘흑인 차별’을 비교하면서 흑인 차별의 ‘피할 수 없는 근본적 다름’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자신의 유대인성 안에서 남모르게 지낼 수 있다. 그가 무엇인지와 그 자신이 완전히 하나가 아니다. 사람들은 기대하고, 기다린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은 그의 행위, 그의 처신이다. 그는 백인이고, 논쟁의 여지가 많은 몇몇 특징들을 제외하면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지 않게끔 되었다. 그는 식인 풍습이라고는 아는 바 없던 이들의 인종에 속한다. 자기 아버지를 먹다니 생각만 해도 얼마나 끔찍한가! 잘됐어, 검둥이가 아니면 되니까. 물론 유대인들은 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추격당했고, 절멸당했고, 불가마 속에 던져졌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가족사이다. 유대인은 발각되고 나서야 푸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매사가 처음 보는 모습이다. 어떤 기회도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외부에서부터 중층결정되었다. 나는 타인들이 나에 대해 가진 ‘관념’의 노예가 아니라 내 외관의 노예이다.(113쪽) 




프란츠 파농은 프랑스령인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났다. 정신과 의사였고, 청년 때부터 철학과 정신분석학, 마르크스 사상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신은 백인일거라는 추측, 백인에 대해 흑인이 갖는 선망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프랑스인으로 교육받아 프랑스인으로 살았던 자신들(앙티유인)이 아프리카 세네갈의 흑인과 같은 ‘흑인’으로 취급받는데 대한 분노의 감정 역시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 이면에는 흑인이 아닌 백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뜨겁게 불타오른다.  




내 영혼의 가장 검은 부분으로부터 [흑백] 줄무늬 지대를 가로질러 단번에 백인이 되려는 저 욕망이 솟아오른다. 

나는 흑인으로 인정받고 싶지 않다. 백인으로 인정받고 싶다. 

그런데-그리고 이 점이 헤겔이 기술하지 않았던 인정 형태인데-백인 여성이 아니라면 다른 누가 그렇게 해주겠는가? 그 여성은 나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백인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준다. 나는 백인 남성으로서 사랑받는다. 

나는 백인 남성이다. (63쪽) 



한 번 밖에 읽지 않았으니 내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는 없지만, 흑인과 결혼하지 않으려는 물라토(백인과 흑인간의 혼혈) 여성에 대한 적의와 백인 여성의 사랑을 쟁취해 백인 남성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이 한 명의 흑인 남성 안에 혼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종 차별이라는 폭력 앞에서 백인 여성에 대한 숭배와 흑인 여성에 대한 멸시가 교차하고 있다. 더 하얘지기 위해 백인이 필요하고, 더 검어지지 않기 위해 흑인을 피하고 싶은 건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두 번 버림당한, 혹은 버림 당할 운명의 흑인 여성이 떠오른다. 




월요일에는 한살림에 갔다가 줄이 너무 길어서 동네 마트에서 부추, 파인애플, 오양맛살, 단무지를 사고, 오후에는 남편과 재래시장에서 과일과 홍어회, 팥 도너츠, 핫바를 샀다. 화요일 오전에는 백화점에 가서 불고기와 프티첼, 그리고 시어머니가 주문하신 옛날식 샐러드 사라다에 넣을 마카다미아와 건무화과 그리고 건포도를 샀다. 한바탕 소비 대행진을 벌인 후, 다음 외출을 기다리며 이 책을 읽었다. 연휴나 주말에는 꼭 소설을 찾아 읽는 게 습관인데, 이 책은 소설처럼 재미있었다. 하는 건 없지만 마음만은 세계 최고로 초조한 한국의 큰며느리로서는 멀리 떨어진 세계의 말이었다.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의 앙티유인 정신과 의사 파농이 말하는 흑인의 운명. 백인이 되기 원하는 흑인의 갈망. 흑인 구애자에 대한 물라토 여성의 반응. 백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신. 신과 같은 백인. 그리고 백인 여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흑인. 그 마음을 가늠하며 읽었다. 



카리브해까지 날아가 앙티유인의 고민을 같이 헤아리다 보니, 추석 걱정은 잠시 사라진 것 같았다. 책읽기가 선사하는 즐거움 중 탈출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선택은 아주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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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략적 본질주의(Strategic Essentialism)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4-01-29 10:54 
    <파농>을 읽는다. 해설서를 읽는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 단점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저자가 안내해 주는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데, <꿈의 해석을 읽다>는 양자오가 이해한 범위 안에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우치다 다쓰루, <현대사상입문>은 지바 마사야가 안내하고 설명한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그런 경우, 당연히 저자에 대한 신뢰가 독
 
 
다락방 2020-10-06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나 알찬 독서목록이네요! 오늘 왜이렇게 다들 여기저기서 멋짐 뿜뿜하시는지 ㅜㅜ 멋진 친구들 덕에 멋진밤 마무리 합니다. 아아.. 다들 열심히 읽고 공부하면서 살고 있어. 흑흑 ㅠㅠ

단발머리 2020-10-07 14:04   좋아요 0 | URL
연휴가 그냥 다 지나갔다고 아쉬워했는데 돌아보니 이런 책들이 남았네요 ㅎㅎ 언제든 읽기가 위로가 된다는데에 더욱 신나는 시간들입니다.

2020-10-06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10-07 14:05   좋아요 0 | URL
네에~ 오늘의 영어걱정은 모두 판매종료되었습니다. 내일 다시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0-10-16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농씨의 분열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마음 살짝. 솔직하게 잘 쓴 글은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 마음을 움직인다죠. 퇴근 길에 밀린 단발님 페이퍼 읽기 좋당😣

단발머리 2020-10-18 16:58   좋아요 0 | URL
뒤에 읽다보니까요. 애 낳고 헤어진 전여친과 결혼한 사람 모두 백인이었더라구요.
파농은 위의 인용문 그대로..... 살았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