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감상을 이제야 쓴다.
토요일. 자식들은 이제 다 커서, 한 명은 놀러 가고 다른 한 명은 스터디카페에 간다. 급한 일도 바쁜 일도 중요한 일도 없는 2인은 설거지를 하고 수건을 개고 빨래를 널고. 다시 설거지를 하고 수건을 개다가, 운동화 맡긴 거 잊어버리면 안 된다고 집을 나선다. 간단히 샌드위치를 먹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상호대차 신청한 테리 이글턴의 <비극>을 대출하기 위해.
이 책의 존재는 정희진 쌤의 팟빵 8월호(어떤 에피소드인지 기억이 안 난다. 아시는 분, 알려주세요^^)를 통해 알게 됐다. 오랜 시간 준비되어 좋은 번역으로 나온 책을 설명하시다가 알려주신 책이다. 번역가 정영목 님이 번역하신 책 목록은 어마 무시하지만, 내게는 언제나 ‘필립 로스’ 번역의 정영목 님이시오며. 테리 이글턴의 책을 펼치고 작가 소개를 읽는다.
테리 이글턴 Terry Eagleton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 비평가이자 문학 평론가로, 1943년 영국 샐퍼드에서 태어났다. 영국 문화 연구의 창시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영향을 받았고,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
영국 문화 연구의 창시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영향을 받았고… 에서 멈춘다. 그러니까 저도 영국 문화 연구의 창시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영향을 받았다면 받았다고 할 수 있거든요.
꿀꿀하고 막막한 4학년 2학기였다. 재빠른 친구들과 잘 준비된 친구들과 능력이 출중한 친구들이 하나 둘 취업했다며 수업에 빠지는 4학년 2학기에, 착실하지도 않으면서 착실하게 학교를 지키는 한 학생이 있었다. 그 때 그 교재가 왜 제본된 책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교수님이 일러주신 학교 앞 인쇄 전문(?) 가게에서 교수님이 미리 준비해 두셨던 책을 가져와 수업에 들어갔다. 문화 연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수업이었다. 수업의 내용이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데, 가끔 그 수업 시간이 생각나는 건, 그 수업의, 정확히는 수업 내용의 어떤 부분이 나를 위로해 주었던 기억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의미가 만들어지는 방식, 공동체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의미가 공유되고 재생산되는 과정. 책을 읽는다는 건 이 사회에 어떤 의미인가, 에 대한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주장과 이론을 읽는 시간이, 그 고요하고 평범한 시간이 좋았다. IMF의 여파로 더욱더 추워진 겨울이 예정되어 있었고, 문과 중에서는 그래도 써먹기 좋아 취업이 잘 된다는 우리 과에 대한 평판과 상관없이, 읽고 쓰는 일에 대한 ‘쓸모 없음’을 고민하던 문과생으로서는, 그 평범한 전공 수업이 단비 같았고, 생수 같았다. 그 수업 시간의 주제와 닿아있는 책들을 나는 기억해 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빨간 책. 알라딘 원서 읽기 부흥의 중심축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독서의 즐거움>의 이런 문단이고.
하지만 우리는 일로만 평가받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유, 즉 성찰, 계몽, 이해가 똑같이 가치 있다고 고집해야 합니다. 고전을 스스로의 힘으로 읽어 나가는 프로젝트, 즉 하루에 일정 시간 동안 앉아서 책 한 권을 읽는 행위는 생산물과 축적물로만 우리의 가치를 재는 세상에 맞서는 저항의 행위입니다. 뭔가 ‘생산적’인 다른 일 대신에 아침에 혼자서 책을 읽는 행위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면 구체적인 뭔가를 생산해야 한다는 명령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독서의 즐거움>, 한국의 독자들에게, 5-6쪽)
아니면, <문맹>의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이런 문장들.
“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매일 읽기만 해.”
“쟤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
“저건 소일거리 중에서도 가장 나태한 소일거리야.”
“저건 게으른 거지.”
그리고 특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쟤는 ……을 하는 대신에 읽기만 해.”
무엇을 하는 대신에? “더 실용적인 것은 아주 많잖아. 그렇지 않아?”
여전히 지금도, 매일 아침, 집이 비고, 모든 이웃들이 일하러 나가면 나는 다른 것을, 그러니까 청소를 하거나 어제 저녁 식사의 설거지를 하거나, 장을 보거나, 빨래를 하고 세탁물을 다리거나, 쨈이나 케이크를 만드는 대신 식탁에 앉아 몇 시간 신문을 읽는 것에 가책을 조금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쓰는 대신에. (<문맹>, 13쪽)
아니면, 나의 길티 플레저 필립 로스의 이런 말.
예술은 인생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독도 인생이고, 명상도 인생이고, 허세도 인생이고, 불평도 인생이고, 사색도 인생이고, 언어도 인생이지요. 문장을 더 낫게 고치는 일을 하는 것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보다 못한 인생인가요? 『등대로』를 읽는 것은 소젖을 짜거나 수류탄을 던지는 것보다 못한 인생인가요? 문학적 소명에 따른 고립 - 단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 방에 혼자 앉아 있는다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고립 - 은 밖에 나가 야단법석 속에서 감각을 축적하거나 다국적 기업을 다니는 것만큼이나 인생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왜 쓰는가>, 231쪽)
읽고 쓰는 즐거움만큼이나 분명한, 읽고 쓸 때의 가책. 무엇보다 이것이 너무나 즐겁고 좋은 일이라서 나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 나 자신의 쾌락만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추구해도 괜찮을까 의심이 생길 때, 나는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생각한다. 테리 이글턴의 스승 레이먼드 윌리엄스를 생각한다. 위로가 되었던 4학년 2학기의 그 전공수업을 생각한다.
테리 이글턴의 <비극>을 20여 쪽 읽어보니 내가 왜 그의 다른 책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을 완독하지 못했는지 알겠다. 어렵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전제하고 작품에 대한 해석을 풀어가다 보니, 1을 모르는데 4, 5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느낌이다. 첫번째 챕터 <비극은 죽었는가>을 읽다가 서둘러(?) 두번째 챕터 <근친상간>으로 넘어갔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분석에서, 자기동일성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모든 개인은 필연적으로 자기동일성이 없다는 것, 완전히 자기동일성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의 한 속성이 된다는 지적이 눈에 띈다.
우리는 어떤 것이 그 자체이면서 동시에 다른 어떤 것이라는 사실-예를 들어 한 여자가 동시에 어머니, 사촌, 아주머니, 딸이라는 사실-이 상징적 질서를 구성하는 특징이라는 것을 보았다. (59쪽)
영어를 잘하는 나였다면, 원서를 찾아봐도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잊지 말자. 이 책의 번역자는 정영목 님이시다. 더 좋은 번역이란 불가능하다, 한국어로는.
쓰고 싶은 글들이 밀려 있는데, 계속 소소하게 바쁘다. 청소는 청소기가 하고, 빨래는 세탁기, 건조기가 하는데. 무슨 일인가. 다음 글은 럭키박스 vs 폭탄박스에 대한 이야기고, 그 다음은 <감시와 처벌> 완독기이며, 그 다음은 정보라와 우주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리고 또 그 다음은…… 에…… 예고했으니 쓰겠지. 그러겠지? (사실, 예고하고 안 쓰는 경우도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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