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여성은 서로에게 심리적·사회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서로에게 너무 많이 바라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하찮은 실수, 가장 사소한 실망은 종종 확대되어 분개로 이어진다. (『여성과 광기』, 35쪽)
『여성과 광기』에서 위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그녀가 말하는 바를 바로 알았다. 그녀의 이 문장이 놀라웠던 이유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진실을 내가 모르던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이처럼 ‘명시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 책을 이만큼(혹은 요만큼) 읽어왔던 내가, 그 진실을 책 속의 ‘문장’으로 대하는 것이 처음이어서, 나는 적잖이 당황하고 적잖이 놀랐다.
가부장제는 여성이 태생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인간 남성을 기준점으로 상정하고, 여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그에 부족한’ 상태의 인간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부장제다.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은 노력을 통해 ‘남성’에 도달할 수 없다.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생물학적 차이’이기 때문이고, 자연적인 인간 여성이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성의 운명이란 ‘자신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또한,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모성을 비롯한 ‘여성성’을 강요함으로써,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정서’의 극한을 요구한다. (어머니인 여성이 자신의 안위와 자식의 생존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남성보다 ‘부족한’ 여성에게 남성을 ‘초월한’ 감정적 기대를 요구하는 것이 가부장제다. 따라서, 가부장제를 살아가는 남성과 여성은 모두 여성에게 ‘엄격’할 수밖에 없는데, 여성은 남성보다 불리한 위치에서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남성에 가까워진 ‘인간상’으로 구현될 수 있다. 여성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를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한편으로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그때의 위대한 페미니스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일반 여성뿐 아니라, 저명한 페미니스트들조차 가족으로부터 학대당하고, 무시당하며, 억압받았던 개인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어머니’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를 떠나지 않고서는, 어머니로 상징되는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탈출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새로운 이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 가장 큰 사랑을 원하는 어머니에게 가장 큰 실망을 안겨주고, 가장 큰 조력자가 되어야 할 사람이 가장 강력한 억압의 주체가 될 때, 그들은 어머니를 떠나고, 부모를 떠나고, 가정을 떠나고, 함께 살던 남자에게서 떠났다.
페미니즘의 기본을 아주 쉽게, 동시에 아주 선명한 언어로 밝혀주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에는 이런 문단이 나온다.
아무튼 페미니즘이 비아프리카적이라고 하니까, 나는 이제 스스로를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친한 친구 하나가 나더러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일컫는 것은 남자를 미워한다는 뜻이라고 말해주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제 스스로를 ‘남자를 미워하지 않는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더 나중에는 ‘남자를 미워하지 않으며 남자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해서 립글로스를 바르고 하이힐을 즐겨 신는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14쪽)
이 문단을 특히 좋아했던 건,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와 함께 살며, 아들을 둔 어머니이며, 미니스커트와 롱원피스를 입고, 핫핑크 립스틱을 즐겨 바르는 페미니스트인데, 나의 이런 선택 혹은 성향이 페미니즘의 중요한 가치들과 충돌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이 문단이 단번에 날려 주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볼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 역시 페미니즘을 말하는 중요한 정의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 나름의 한계를 한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나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이런 제안이 충분히 의미 있다고 보았다.
재능 있는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기량이 뛰어나고 표현에 능통한 여성들 - 유명하고, 기명 기사를 쓰고, 출간 계약을 하고, 그야말로 어떤 것이든 능력있는 여성들 - 은 혁명에 대한 반역자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는 내게도, 케이트 밀릿에게도, 나오미 웨이스타인에게도 일어났던 일이다. (110쪽)
위대한 선배 페미니스트들은 달랐다. 그들의 상황은 지금처럼 녹록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마녀', '창녀’였고, ‘정신병자’였으며, ‘사회 부적응자’였다. 그들은 다른 그 무엇보다 ‘미친 년’ 이었다. 새로운 세대를 열어가는 그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 곁에는 오직 ‘자매들’ 뿐이었다. 이 세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미친’ 생각을 공유하는 그들은 서로에게 아버지였고, 어머니였으며, 언니였고, 동생이었다. 남편이었고, 애인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매였다. 피를 나눈 자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연결 고리로, 그들은 서로에게 ‘묶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 간에 이견이 발생할 때, 그것을 의견의 ‘차이’로 해석할 만한 여유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다른 생각, 다른 의견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서로 간에 ‘평등’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들 사이에 공고했기에, 책을 내거나 명성을 쌓은 여성들은 ‘배신자’라는 비난을 견뎌내야 할 뿐만 아니라, 친구 어쩌면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을 수도 있었다. 천재, 천재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베티는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자주 썼다. 우리가 전부 눈을 아래로 깔거나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당황하거나 기분이 더러워진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베티는 본인 모습 그대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었다. 역사를 바꾼 수많은 남자들이 그랬듯, 베티 역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성미가 고약하고 난폭하며 거칠고 말도 안 되게 집요했다. 그리고 통제 불능의 술꾼이었다. (220쪽)
천재란 어떤 사람들일까. 천재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는 못하는 그 무언가를 ‘먼저’ 이해하고, ‘먼저’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천재의 특성이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특별히 동시대 사람들은 천재의 ‘천재적인 면’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천재의 생각 중 극히 일부를 대중이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했을 때, 사람들은 그 천재에게 열광하고, 그에게 합당한 찬사와 명예를 그에게 돌려줄 것이다. 제2세대 페미니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올 때, 많은 천재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했다. 각성의 결과로, 그들은 억압받았던 여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볼 수 있었다. 나름의 설명과 해법을 가지고, 지구상 가장 큰 소수집단인 여성의 해방과 성차별 해소를 위해 그들은 힘을 합쳤다.
하지만, 그들은 천재였다. 그래서 그들은 천재들이 할 법한 기이하고 이해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부정적인 언행의 상당 부분을 자매들에게 쏟아부었다. 자매애에 대한 기대와 천재 페미니스트들의 행동은 여성 간의 연대와 성장에 커다란 해악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없지만, 어찌하면 좋겠나. 그들도 똑같았다. 그들도 남성 천재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기적이고 독단적이고 고집불통이었다. 자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 대중적 관심이 옮겨져 가는 것을 참지 못했고, 억울해했고, 그리고 싸웠다. 의견이 다른 것을 이유로, 지지를 표명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은 계속 싸웠다. 안타깝고 또 아쉬운 대목이라 하겠다.
이 부분은 꼭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 적는다. 지금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저명인사이지만, 『여성과 광기』가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체슬러는 그냥 평범한 정신의학자였다. 그녀와 그녀의 저작을 주의해서 보는 사람도, 매체도 없을 때였다. 그때 에이드리언 리치가 서평을 쓴다.
한 달쯤 지날 무렵, 《여성과 광기》에 대한 에이드리언 리치의 극찬이 담긴 긴 서평이 《뉴욕 타임스 북 리뷰》 표지에 실렸다. 내 세대에 그토록 화려한 칭찬을 받은 페미니즘 작품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판매 부수가 급증했고 담당 편집자는 승리의 냄새를 맡았다. 그렇다. 신문 하나가 그 정도의 결정권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에이드리언에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에이드리언, 당신이 어디에 있든, 나는 당신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삶이 변화된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그렇듯이요. 당신이 쓴 서평 때문에 그들은 내 책을 읽게 됐을 테니까요. (163쪽)
필리스 체슬러는 20년 뒤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지면에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대표 작품 『트라우마』를 소개하며 마음의 빚을 갚았다고 말했다. 체슬러는 또한 페미니즘의 전설 앤드리아 드워킨의 책을 수시로 소개하며 그의 책이 널리 읽히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에이드리언 리치와 필리스 체슬러, 그리고 앤드리아 드워킨의 연결이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마치 픽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서로간의 질시와 반목이 만연하던 시대, 서로를 미칠 듯 사랑하면서도 죽일 듯 미워하던 시대에, 이들이 보여준 연대와 지지, 사랑과 헌신이 너무 아름다웠다. 환상처럼 느껴졌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훌륭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부러워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라 인덱스를 다 떼고 반납해야 한다. 바로 한 번 더 읽으려고 똑같은 책을 주문했고, 원서도 주문했다. 바다 건너, 지금 내게 오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