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 굵은 잘생긴 남자가 날 쳐다본다. 영화화된 <마틴 에덴>에서 주인공 마틴 역을 맡았던 루카 마리넬리다. 잘생긴 그 남자를 한 번 더 쳐다보고(쳐다보는 거 무료임), 잭 런던의 자전 소설 <마틴 에덴>을 읽는다.
<야성의 부름>의 작가가 잭 런던이었다는데 일단 한 번 놀란다. 나의 유일한 독서클럽, 아이들 여섯 명과 언니 두 명,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아홉이 함께했던 독서 모임이 있었다. 큰아이 유치원 다닐 때 시작해 중학교 때까지 계속했던 모임이다. 정해진 책을 함께 읽기도 하고, 각자 원하는 책을 읽기도 했다. 독서감상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말로 감상을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어린이 사자소학>을 함께 읽었고, <The Giver>도, 해리포터 1권도 같이 읽었다. 독서 모임 시간에 엄마들이 읽고 있는 책을 소개하는 시간은 없었지만. 없었지만! 우리들은 부지런히 ‘읽는’ 책을 가지고 다녔다. 표지가 잘 보이도록 책상 위에 책을 올려 두었고, 나는 자주 아이들 시간을 ‘침범’해 내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차분하고 얌전한 D양이 항상 내가 가져간 책에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독서력 만랩인 H언니가 들고 다니셔서 표지가 익숙한 책이 바로 <야성의 부름>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이미 10년 전에 알았다는 것이고, 표지가 보여주는 일정 정도의 야성미에 나도 모르게 관심이 갔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책을 빌려서 읽을 정도로 흥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고. 그래서 <마틴 에덴>을 읽으려 ‘작가 조사’ 들어갔을 때 <야성의 부름>을 보고서는 조금 놀랐다. 10년을 앞서가신 언니, 나는 진작에 언니 뒤를 부지런히 따랐어야 했어요.
잭 런던의 다른 책 중에는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가 눈길을 끈다. 다정한 친구가 알려줬는데 아직 도전 전이다. <잭 런던의 조선 사람 엿보기>도 흥미로워 보인다. 1904년 러일전쟁 특파원으로 일본군을 따라 조선을 방문했던 잭 런던이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고 한다. 일본과 중국에 대한 호감과 조선 및 조선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고 하니, 읽을 생각은 없지만. 나 역시 작가에 대한 호감을 반 정도 덜어놓고 읽기를 시작했다. 그랬으나, 그리하였으나.
역시 사람은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이 멋진 법이다. 자기 일에 진심인 사람. 자기 일에 최선인 사람. 그리고, 그냥 일을 잘하는 사람. 잭 런던은 조선의 후예인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나 역시 그의 호감을 얻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아, 그는 글을 잘 쓴다. 잘 쓰는 작가다. 독자인 나는 항복. 백기투항하고야 만다.
<마틴 에덴>의 평가 중 가장 도드라진 부분은 로맨스에 계급의 문제를 연결시켰다는 데 있다, 고들 한다. 맞다. 마틴과 루스의 사랑에는 계급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사랑 지상주의자’인 나로서는 사랑과 계급 차이에 따른 고통의 문제에서, 계급보다는 사랑의 문제가 더 무겁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본다.
루스에 대한 마틴의 추앙은 신앙과 같다. 그녀는 그가 알고 왔던 모든 여자와 다르다. 그녀는 하얗고, 그녀의 손은 보드랍고, 그녀의 목소리는 아름다우며, 그녀의 피아노 연주는 완벽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한 그의 추앙이 계급 너머에 존재하는 사랑이어서 라기보다는, 사랑 그 자체가 가진 속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그가 먹는 음식, 주거 공간, 청결 상태, 수입, 그리고 직업적 전망은 모두 그녀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녀가 가진 모든 것들은 그가 가진 것보다 새것이고, 깨끗하고, 튼튼하고, 아름답다. 그는 엉망으로 말하고, 제대로 된 에티켓, 예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녀 앞에서 그는, 말 그대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건 바로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일어나는 일이지 않은가.
이를테면, 루스의 동생 아서가 마틴 계급의 여성, 공장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고 해보자. 그녀는 자기 손으로 일해야 하고, 좀처럼 휴식 시간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그녀에게서는 남자의 다음 행동에 대한 기대, 느긋한 기다림이 사치가 될 것이다. 그녀는 두려움 없이, 망설임 없이 아서를 바로 쳐다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랑에 빠진 아서는 그가 비록 넉넉한 재산을 소유한 상위 계급의 신사라 할지라도 마틴과 같은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는 그녀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되지도 않는 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그녀의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공장 앞에서 어슬렁거릴 것이고, 집에 돌아가서는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붙일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물론 아서의 도전은 마틴의 도전보다 쉬울 것이다. 마틴의 도전은 아서의 도전보다 훨씬 더 무거울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 누군가에게 사로잡혔을 때, 그 사람은 연인의 노예가 된다. 거기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고, 그 일이 쉬운 사람도 없다. 다만 마틴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한 가지의 노력이 더 필요했는데, 그건 루스에게 다다르기 위한 ‘사다리’였다. 그의 잠과 피와 살과 눈물로 만들어진, 계급 상승을 가능케 할 사다리. 올라가기 위한.
마틴은 죄를 깨달았다. (47쪽)
이 책이 70쪽 정도 남았는데, 나는 이 문장을 이 책의 ‘그 문장’으로 꼽고 싶다. 마틴은 죄를 깨달았다. 자신의 죄를 몰랐던 마틴, 자신이 죄인이라는 걸 몰랐던 마틴이 죄를 깨달았다. 그 죄란 무엇일까. 루스 안에서 발견한 불멸의 영혼에 닿고 싶어 하는 열망이 바로 그 죄다. 그녀 안에 깃든 영혼이 불러오는 연민과 상냥함에, 그 순수함에 그는 사로잡혔다. 그녀에게 물을 떠다 주기에도 모자란 인간인 자신이 감히 그녀를 소유할 미래를 꿈꾸고 있으니 말이다. 마틴은 죄를 깨달았다.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자신의 열망, 자신의 꿈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꿈꾸고 있는 자신의 부족함. 그는 희망했고 그리고 동시에 절망했다.
마틴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는 2권에서 살펴보자. 나는 잭 런던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