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기반 폭력은 이 선언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서 성폭력, 성적 착취, 강요된 성매매, 인신매매처럼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가해지는 폭력적 행위와 가정 폭력, 할례, 지참금 살인, 명예살인 등 여성의 신체를 해치는 폭력, 그리고 전쟁 무기로서의 강간 등 조직적이고 집단적 성폭력으로 구분될 수 있다(이미경, 2018). 젠더 기반 폭력은 전 세계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이지만, 특히 한국에서 불법 촬영 가해자의 97%가 남성이라는 점에서, 또한 남성에게 성관계 불법 촬영물 유포는 큰 해가 되지 않고 젠더 기득권 측면에서 오히려 여러 가지 의도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김현아, 2017b) 사이버 성폭력 또한 젠더 기반 폭력이다.(306쪽)
어느 챕터가 쉬울까 마는 한희정 님의 <사이버 성폭력에 맞서 싸우기: 불법 촬영물을 중심으로>는 특히나 읽기 어렵다. 이 연구물은 젠더 기반 폭력으로서의 사이버 성폭력의 실태와 대응 상황을 살펴보고, 사이버 성폭력의 피해 구제를 위해 노력하는 현장 활동가들, 정부 관계자들의 심층 인터뷰와 다큐멘터리 <얼굴, 그 맞은 편>(이선희 감독, 2018)의 인터뷰 내용을 재인용했다. 인터뷰 대상자 목록은 다음과 같다.
불법 촬영물은 개인 간의 합의에 촬영한 영상일지라도 피해자의 동의 없이 유포된 ‘리벤지 포르노’와 협박과 겁박에 의해 촬영된 ‘성 착취물’, 그리고 ‘화장실 불법 촬영물’ 등이 있다.
2022년 9월 13일에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추적단 불꽃의 ‘단’의 인터뷰가 방송되었다. ‘단’은 음성으로 출연했는데, 미성년 성 착취 ‘n번방’이 다른 형태로 횡행하는 모습을 고발하고, 인터넷상에서 모은 자료를 경찰에 제공해 수사가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경위를 설명했다. 더 악랄해진 운영자들은 SNS를 미끼로 피해자들에게 접근했는데, 대부분 어린 피해자들이라고 한다. 심지어 추적단 ‘불꽃’을 사칭하는 운영자들도 존재한다고 한다.
페미니즘과 액티비즘과는 상관없이 살고 있던, 한국의 20대~30대 여성들은 피해자의 얼굴 그 맞은편에서 성폭력 영상을 소비하고 있는 이들을 밝혀내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며 밤을 지새워 피해자 영상을 검색하여 증거를 모으고 경찰에 신고한다. 또한 사이버상에 무한대로 퍼날라지는 피해자들의 영상을 지워주며 그들의 삶이 회복될 수 있도록 돕는다. (314쪽)
이 책의 314쪽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불꽃 추적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새워 피해자 영상을 검색하고 증거를 모아 경찰에 신고해서 ‘n번방’ 지옥을 우리 앞에 보여준 이 용감한 여성들, '불'과 '단'을 생각했다.
대통령 욕이 흔해진 요즘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우리나라 어쩌냐. 대통령 어쩜 좋아’ 그렇게 물어서 ‘말해 뭐하니. 입이 아프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런 자유 아닌 자유를 우리가 누리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었던 건 광주의 피와 6.10 항쟁의 눈물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로 대한민국을 꼽을 때, 우리가 모두 기억하다시피 이건 우리들만의 성과가 아니다. 대의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담을 넘고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수감되고 고문당한 사람들의 땀과 피와 눈물 덕분에, 우리는 적어도 우리 손으로 이 나라의 최고 결정권자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촛불 집회와 탄핵으로 이어진 정권 교체를, 이 평화롭고 강렬하며 감동적인 ‘주권 재민’의 역사를, 우리는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386, 486 운동권 세력들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평가는 상반될 수 있다. 과거의 치적만을 자랑으로 삼아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정치는 누군가를 ‘위한’ 일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했던’ 사람, 다른 사람의 ‘해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경험이 없는 사람을, 우리의 ‘대표자’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박지현 전 위원장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걸 안다. 난 뼛속까지 민주당 지지자이고, 그리고 앞으로도 이 나라의 미래는 국민의 힘의 어떠함이 아니라, 민주당의 어떠함에 의해 결정될 거라고 믿는 사람이다. 다 같이 망하자, 는 게 아니라면, 적어도 덜, 조금이라도 늦게 ‘망할’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게, 어른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민주당에 희망이 있다고, 그래도, 희망의 싹은 민주당에 있다고 생각한다.
박지현 전 위원장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의 유세장에서 마스크를 내렸을 때, 그 화면을 보고 있을 때의 내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민주당이 박지현 위원장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는지 너무 걱정스러웠다. 미안했고, 걱정되었다. 박지현 위원장이 정의당이나 여성의당, 녹색당에 입당하지 않고 민주당을 선택한 마음에, 그 선택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건 한편으로 적확한 판단이라고 여겨지는데, ‘정치적 옳음’에 대한 웅변이나 절규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박지현 위원장이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난 추측했다.
박지현 위원장은 누적 접속자가 26만명인(만명이라는 주장도 있음) 이 거대한 성 착취물의 제국에 온몸으로 맞선 사람이다. 자신의 모든 삶을 걸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갈아버린 사람이다. 박지현 위원장은 그에 걸맞는 존중과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다. 그 정도의 희생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모욕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박지현 위원장을 그렇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
물론 정치인 박지현에게는 또 다른 시대적 요구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치적에 매이지 않고 새로운 소명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박지현 위원장의 몇몇 발언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지현 위원장이 자기 삶을 다 걸고 보여준 용기와 희생에 대해서는 반드시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정치인 박지현으로서 살아남으면 될 일이다. 싸우고 욕하고 맞설 뿐만 아니라,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그래서 결국 자신이 ‘옳다고 하는바’를 실현시켜야 할 것이다.
제일 중요한 건, 불법 촬영물의 나라 이 대한민국에서 박지현 위원장에 대한 2030 여성들의 심정을 읽는 일이라고 본다. 정치는 반드시 ‘사람’으로 구현된다. 2030 여성들의 절망과 무력감, 슬픔과 분노가 이 한 사람에게로 모아졌다는걸, 이미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걸 민주당에서는 잊으면 안 된다. 잊으면 안 된다, 민주당.
ASMR, 웹툰, 맘스타그램, 중산층 전업 주부, 집약적 모성 실천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쓰고 싶었는데, 다 쓰지 못했다. 이 세계의 발전(?)과 안녕을 위해 각자가 자신이 가진 것으로 애쓰고 노력할 테지만, 하나의 주제로 여러 연구자가 모여, ‘배운 것’을 ‘남’에게 ‘나눠 주는’ 현장이 뜨겁고, 감사했다. 지식을 나누고, 감정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장, 이런 공간이 있음에도 감사하다. 남을 괴롭히는 것으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사회, 남을 도와준 것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속히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