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비가 내렸다. 월요일에는 강남 인근 지역의 집중 호우로 퇴근길이 재난 영화급이었는데, 우리 동네는 비가 많이 안 와서 그 정도인 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보고 듣는데, 비상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모른 척 할 수 없는 ‘서울 중심주의’. 다른 곳에서도 그 정도의 호우라면 큰 문제가 되었겠지만, 무엇보다 서울이어서, 정확히는 강남이어서. 게다가 정부의 대응이라는 게 참. 욕하면 입만 아프다. 말을 말아야지.
화요일 오전에도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도로 곳곳은 침수되었고, 국지성 집중 호우 예보가 있었는데. 바쁜 일이 없는 나는 굳이 준비를 하고 롱원피스를 입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도서관 말고 시내 나가야지. 멀리, 더 멀리 가야지.
아이들 낳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비수기 방학’에 내심 즐거웠는데, 이번 주부터 휴가 쓴다 하고, 다음 주에는 학교 안 가는 날도 있어서 ‘조용한’ 일상은 화요일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굳이, 비를 뚫고 나갔다. 책들을 구경하고 책들 배치가 바뀌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게 오늘이야? 그럼 오늘, 오시는 거야? 라는 말소리. 누가 오시나. 서점이니까 작가님이겠지. 유명한 사람이 오는 걸까, 하고 앞의 플랜카드를 쳐다본 순간. 『파친코』 출간 기념 이민진 작가 사인회. 2022년 8월 9일 화요일 오후 2시. 일부러 맞춰 온 건 아닌데, 시간과 장소를 맞춰 왔구나.
싸인은 그날 책을 구입한 사람 중 선착순일 테니 나는 작가님 얼굴이나 보고 가야지.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10분 전에 사인회 장소에 도착해 어슬렁거린다. 작가님은 저쪽에서 나오신다고.
30년. 자료조사하고 집필하는 데 30년이 걸렸다는 걸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다하지 못한 이야기, 한이 서린 이야기, 역사 속에서 사실로 존재했던 이야기들을 작가는 소설로 풀어냈다. 예일대 대학 강의실에서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듣게 된 재일 한국인 소년의 자살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어제 들은’ 것처럼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느낄 때. 하나의 이야기에 매여서 등장인물들을 창조하고, 사랑하게 하고, 헤어지게 하고, 죽게 만들었던 그 30년의 시간. 상상조차 쉽지 않다. 글자로 쓰인 것 중에는 시를 최고로 여긴다고 하지만, 현대인은 트위터 할 시간은 있어도 시를 읽을 시간은 없기에 시인은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르고. 그나마 이야기의 힘이 소설, 웹툰, 드라마, 영화, 게임을 지배하고 있다. 이야기의 힘, 소설의 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작가님을 마주 보고 책장 앞에 섰는데, 작가님이 이 정도 거리에 계셨다. 생각보다 아름다우시고 생각보다 젊으셔서 놀랐다.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시고 환히 웃어 주셨는데 눈웃음이 이효리급이어서 한 번 더 놀라고. 진짜 놀라운 건 그다음인데, 싸인을 받기 전에 이름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작가님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아… 이 사람들이 다 영어로. 그래, 작가님은 7살에 이민 가셨으니 당연히 영어가 편하시지요. 아, 그런데 원어민 앞에서 영어로 이야기하는 여러분은… 누구세요?
그렇게 잠깐 서 있는데, 작가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뭐라뭐라 이야기하자 작가님과 그 사람, 그리고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와하하’하고 다 같이 웃는다. 잠깐만요. 저는 못 들었단 말입니다. 잠깐만요. 뭐라고요? 그제야 내 주위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영어라는 걸 알아챈 나. 책을 들고 연일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작가님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젊은이들도 다 영어로 말하고 있다. 아, 여기는 미국인가. 한국인가. 그리고 여러분은 대체. 누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