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의 창조 - 세번째
나는 여기서 결정론을 주장하거나 의식적으로 조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건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며, 그것은 남성들도 여성들도 의도하지 않았던 특정한 결과를 가져왔다. 산업사회라는 대담한 신세계를 출범시킨 현대남성들이 오염이나 생태계에 대한 영향과 관련된 결과들을 알지 못했던 것만큼이나,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도 그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인식이 발달할 수 있었던 시점이 되었을 때는 이미 그 과정을 멈추기에 너무 늦었다. 적어도 여성들에게는. (90쪽)
저자의 위 문단은 1장과 2장 전체에서 주목했던 단어 ‘편리한’과 연결된다.
여성들이 선택했던 가장 초기의 성별분업노동은 편리하였으며(functional), 그래서 남성들과 여성들이 다같이 받아들일 만했다는 것이다. (78쪽)
영어로는 functional이라고 표현되는데, 문맥상 ‘functional’은 ‘편리한’ 보다는 ‘실용적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난 남성들을 옹호하기 위해 쓰는 게 아니다. 하지만 거다 러너의 분석을 따라 읽을 때, 당시의 여성들이 생물학적 차이에 의한 성별분업노동에 동의했으며, 이런 실천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여성의 종속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특권이 주는 편안함을 알게 된 이상, 설사 그것이 파트너의 고통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 해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제2의 성』, <운명>편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처럼 암컷은 종의 먹이로서 생존하며, 곤충을 비롯해 모든 동물에게서 기관을 가지고 ‘찌르는 것’은 수컷이다. 여성 종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남성이 자신이 가진 ‘찌르는 것’을 통해 ‘강간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수잔 브라운 밀러의 주장(83쪽)은 그래서 더욱 뼈아프다.
또 한편으로는 남녀 간 성별 분업을 효과적으로 가동시켰던 부족이 강한 부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부장제의 전 세계적 우세가 가능해졌다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친애하는 알라딘 이웃 바람돌이님의 글/댓글의 주장과도 관련이 있다.
다른 모든 역사가 그렇듯 여성 억압의 역사가 일률적이지 않으며, 북방 유목의 영향을 받았던 발해와 평지 농경 문화가 우세했던 백제를 비교하면서, 자연환경이나 인문적 환경 등으로 가부장제의 적용이 달라졌던 현상을 지적해 주셨는데, 혼자 읽으며 무릎을 ‘탁’ 쳤던 기억이 난다. 바람돌이님의 통찰은 55쪽의 다음 내용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모계 혈통적 원예사회는 어떤 특정한 생태학적 조건 - 가축화된 동물무리가 없는 곳인 숲의 경계 근처 - 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런 주거지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모계혈통적 사회는 거의 멸종된 상태다. (55쪽)
즉 채집을 통한 식량 조달이 중요했던 초기 사회에서 동물의 가축화와 농경 정착 생활이 시작될 즈음, 성별 분업에 적극적인 부계 혈통적 사회의 우세가 확실시되면서 가부장제가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발 하라리는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각기 다른 사회가 채택한 상상의 질서는 서로 다르다. 인종은 현대 미국인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중세 무슬림에게는 상대적으로 중요치 않았다. 중세 인도에서 카스트는 생과 사의 문제였지만 현대 유럽에서 계급제도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최고로 중요한 위계질서가 하나 존재한다. 바로 성별이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은 차지했다.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로는 그랬다. (『사피엔스』, 212쪽)
요즘은 아이를 하나 혹은 둘 (혹은 셋) 정도 낳으니까, 게다가 저출산 시대다 보니 모든 아이가 참 귀하고 또 귀하다. 아들딸 구별한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출산 현장에서는 들리지 않은 지 오래다. 아이들 학원에 보내면 아들은 50만 원, 딸은 30만 원, 이런 학원은 없다. 딸이든 아들이든 똑같이 정성과 에너지, 그리고 돈이 든다. 여성성에 대한 강요가 만연한 세상이다 보니 오히려 여자아이에게 소소하게 들어가는 돈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 내 경우는 그렇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내 딸이 취업과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고, 여성에게 강요되는 모성, 돌봄에 대한 요구로 힘들어할 때, 아빠라면, 제대로 된 남성이라면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아내의 헌신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하는 남성도 그럴 것이다.
오만 년 전쯤, 직장 생활을 할 때 일이다. 옆자리의 00씨는 나랑 결혼 동기, 임신 동기였는데, 다른 부서의 ** 언니가 결혼 동기의 학교 선배였다. 언니가 출산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셔서 우리 두 사람 밥을 사주신다고 하셔서 언니랑 밥을 먹는데, 언니가 그러시는 거다. 우리 아빠(사업체 운영)가 출산 휴가 두 달 쓰는 직원한테 뭐라 하고 그러셨거든. 애 낳았는데 무슨 두 달이나 쉬냐고. 근데 내가 출산 휴가 석 달 쓰고 이제 출근한다고 하니까, 네가 애를 낳았는데 3개월 만에 출근한다니 이게 웬일이냐. 내가 몰랐다. 예전에는 몰랐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방식으로 사고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아끼는 사람의 고통이, 보이고 느껴진다. 설사 그게 구조적인 관계 속에서 무엇 때문이라고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게 보이고 만져진다. 가부장제는 그러한 감정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그런 아픔을 느끼지 못하도록 인간을 ‘역할’과 ‘기능’에 묶어 둔다. 또한 그런 구조에서 얻는 작은 이득과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가부장제 역시 역사적 산물이라면 이를 대체할만한 새로운 개념이 등장할 것이고, 이는 정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인데. 눈앞의 이익에 함몰되어 권력 나눔에 혈안이 된 자들은 관심이 없다. 우리가 바라는 미래, 우리가 바라는 사회에 대한 더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저번주 도서관 풍경이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어갔는데 오후라서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고, 내가 주로 앉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믿고,
내가 믿는 일을 위해 노력하면 그것은 어느 순간 내 것이 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중
헤르만 헤세의 명언이 아주 잘 보이는 자리. 다른 건 뭐, 크게 바라는 건 없고, 그냥 이 책만 제 것이 되게 해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앞자리 사람이 화장실 간 틈에 얼른 찍었다. 오늘은 6월 21일. 한 해의 반이 지나갔다고 한다. 이런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