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를 읽는다. 예전에 사두었는데 드라마가 인기라고 해서 덩달아 읽는다. 화면 전체가 이민호로 가득 채워질 때,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한국의 애달픈 역사가 이렇게 아름다울 일인가 싶다. 윤여정은 두말할 것도 없고 젊은 선자역의 김민하도 매력적인데, 애플 티비를 신청할 건 아니어서 영상을 몇 개 보고 책을 읽는다.
내용을 전혀 모르고 시작한 읽기라 흔히 소개되듯 ‘일본의 수탈과정에서 겪는 한국인의 고통’, 특별히 일본 이민 1세대와 2세대의 이야기라 예상했다. 그런 이야기는 맞는데 이런 부분이 가슴에 울린다.
남편이 투옥된 선자는 경희(형님)와 같이 만든 홈메이드 김치를 시장에 내다 판다. 슬슬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시내의 커다란 레스토랑 사장은 경희와 선자에게 식당에 취업할 것을 권한다.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드는 월급, 각종 편의를 무조건 다 봐주겠다는 사장의 제안에 경희와 선자는 ‘허락’을 받고 오겠다고 말한다. 남편의 허락, 시숙의 허락.
Seeing that Kyunghee looked more agitated than pleased at this job offer, which would change everything, Sunja said, “We have to ask. For permission –“ (190)
시숙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평범한 조선 남자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을 책임지고 싶어 하고 그것이 그 남자가 품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동시에 그는 식민주의 시대 피지배 계급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왕국 내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한다. 집이 온통 김치공장으로 변해버려 종일 양념 냄새가 진동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예쁘고 다정한 아내를 레스토랑의 식당에 들여보내는 일을 ‘허락’ 할 수 없다. 하지만, 선자에게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선자에게는 투옥된 남편이 있고, 고기를 먹여야 하고, 깨끗한 옷을 입혀야 하는 아들이 둘이나 있다. 경희와 선자는 식당에서 일하게 된다.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을 때, 한국 황제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은 이완용과 일본 황제의 전권 위원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협정은 바로 그 시간부터 강제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한반도 전체와 인근 지역에서 생활하는 모든 한국인의 삶을 규정했다. 선자의 모든 불행이 나라를 잃은 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선자의 불행 중 일부분은 나라를 잃음으로써 선명해졌다. 일본 땅, 오사카에서 사는 조선인의 삶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 개인의 삶이 전체 사회 구조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주조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인의 불행은 개인만의 잘못이 아니듯, 한 사람의 행복 역시 노력의 결과만은 아니다. 하지만 매일 일상의 삶을 사는 우리로서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자신의 삶을 조명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한 걸음 떨어져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 걸음 내디딜 만큼의 물리적 기반이 필요한데, 그것 역시 경제적 요건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오늘을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삶 속에서 거대한 구조의 음모와 비밀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레이디 크레딧』 읽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이 책의 추적과 연구와 결론이 ‘그래서’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매매에 대한 도덕적 판단, 성매매 업소를 즐겨 찾는 남성 심리에 대한 성토, 성매매 업소 내의 외모를 통한 등급화’가 성매매업소에서 오랜 기간 일해왔던 여성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결국은, 그들이 성매매업소를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자활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여성학 지식 생산에 있어 인식과 실천은 변증법적 관계다. 실천을 통해 갱신된 인식은 변화를 저지하는 세력을 밝혀냄으로써 대안적 지식 생산에 기여하며, 이는 다시금 과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관철하는 실천이 된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인식론은 노동자계급의 입장과 자본주의 비판의 자원이 실천적인 행동 속에서 비로소 발견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에 의거한다.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질문은 이렇게 분리될 수 없는 여성주의 인식과 실천의 과정에서 도출되었다. 여기서는 성매매 문제를 새롭게 보기 위해 왜 경제적 요인에 주목하고자 하는지 문제의식이 발전된 과정을 밝히고자 한다. (69쪽)
오랜 시간 활동가로 일해오면서 성매매업소의 여성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을 돕고, 같이 생활하기도 했던 저자가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 여자아이 혹은 젊은 여성이 성매매업소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다시는 그 업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거대한 구조와 산업, 그리고 자본의 움직임을 고발하고자 하는 저자의 진심이 이 챕터 전체를 통해 전해진다.
당장의 작은 도움, 지금 당장의 현실적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겠지만,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쓰다 버려지는 성매매업 종사자 여성들의 삶을 보고하는 것 역시 꼭 필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그들의 불행과 고충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검은 자본의 흐름을 밝혀내는 것, 불법과 탈법의 현장을 고발하는 것. 이것이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다. 용감하고, 위대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