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세계 여성의 날이라 해서 아침 일찍 포스트 하나 올리고 싶었는데, 아… 확진이 추측되는 사람을 35시간 돌보다 보니, 이건 뭐, 내가 더 피곤하다. 나는 저질 체력이다. 이미 고등학교 때 체력을 키워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보다 에너지 소모를 줄여 체력을 비축하는 방법이 내게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아챘는데, 이정도 강도에도 체력이 소진되어 말 그대로 드러누웠다. 정신 차리고 보니 동거인 양성이 확인되었고 부랴부랴 아이들과 검사소로 향했는데, 오후 검진 시작 전부터 저 멀리 멀리멀리 길게 늘어선 줄. 우리나라 사람들 참 착하다.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를 텐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 안 주려고 굳이 나와서 이렇게 착하게 줄을 선다. 날이 따뜻해서 다행이었다. 간만에 다정한 남매 모드에 몰입한 2인은 행복한 대화를 주고받고 나는 아직도 마치지 못한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를 가열차게 읽어 나간다. (할 일은 미리미리 해두자, 는 소중한 교훈) 드디어 검사소 입장.
아침에는 ‘여성의 날 특별기고’ 정희진쌤의 글을 읽었다. 한 문장, 한 문장 가슴에 사무치는데 제일 아픈 건, 이걸 사람들이, 남자들이, 이대남들이, 2번남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남성의 이해를 침해하는 집단은 여성이 아니다.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부자들이다. 남성 문화가 생각하는 ‘피해자 코스프레 기득권 여성’은 극소수이다. 그들도 나이 든다. 같은 계급에서도, 여성의 나이듦은 남성의 나이듦과 그 원리가 크게 다르다. 가부장제 사회의 성 ‘역할’ 규범에서, 여성은 외모와 나이로 남성은 계급과 지식으로 평가된다. 이를 깨달은 젊은 여성들은 나이 들어 자신의 인격과 시민권이 ‘몸’으로 환원되지 않고자 경제적 자립을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남성의 밥그릇을 뺏는 일인가. 남성 실업은 여성의 취업이 아니라 플랫폼-글로벌-유통 자본주의 때문이다. 기계가 사람의 노동을 대신하는 현상은 자본주의 초기부터 있었다. <‘여성을 덜 모욕하는 사회에 투표하자>, 2022. 3. 8., 한겨레>
여성은 역사 이래로 ‘타자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공연한 ‘혐오’의 대상이었다. 가부장제하에서 여성에 대한 혐오는 공기와 같아서 여성조차도 그 해악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여성의 적을 여성으로 만드는 힘이 여성이 아니라 사회에 있음을 여성조차 알지 못한다. 어떻게 남성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후의 인기 기사는 역시 윤석열의 여성 관련 단문 공약이다. 여성의 날에도 이렇게 공언할 수 있는 그런 무식함, 단호함, 결기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여성에 대한 구조적 성차별’을 언급했던 이재명 후보나 ‘성평등 대한민국의 미래를 뚫어내겠다’고 밝힌 심상정 후보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여성주의 도서 신간을 정리하고 싶은데 근래 무슨 책이 나오는지 잘 몰라서 단발머리 선정, ‘두 번 읽어도 좋은 페미니즘 도서’로 갈음한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고, 누구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