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best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Laurie, Sarah, Jack, Oscar 이렇게 네 명이다. 이들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복잡할 게 없는 관계여서 너무 간단하다고 생각한 나는, 죄송하게도 보부아르를 떠올린다.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을 읽으면서 인물 관계를 정리한다는 게, 하다 보니 사랑의 화살표 대잔치가 되어 버렸다.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서. 로리의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로리는 이렇게 쓴다.
She came running, panic-stricken, as soon as I yelled, as if some sixth sense had alerted her to the fact that the love of her life was in trouble. (310p)
열다섯 살 때부터 함께 했던 두 사람은 이제 헤어진다. 한 사람은 다른 세계를 향해 떠났다. 인사도 없이, 아무런 준비 없이 그렇게 이별을 맞이한다. love of my life는 한 사람이어야 할까. 두 사람일 수 있을까. 아니, love of my life는 정말 가능할까. 가능한 일일까. 마리 루티는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랑을 지속성과 동일시하도록 훈련받는다. 어느 정도냐 하면, 우리는 지속되는 관계가 우리를 아무리 비참하게 만들지라도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우리는 지속되지 않는 관계는 아무리 즐겁다 해도 - 아무리 생기 있고, 활력이 넘치고, 자신을 탈바꿈시키는 경험이라 해도 – 실패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장기적인 안정과 결부시키는 성향은 우리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사람들은 감히 그 대안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250쪽)
우리가 아는 모든 이야기의 끝이 해피엔딩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을 장기적인 안정과 결부시키는 이런 성향은 우리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 박혀 있어, 드라마 종영이 가까워질 때 시청자들은 당당히 해피엔딩을 요구하고, 작가는 스토리를 수정해 주인공인 두 사람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함께 살게 한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모르는 채로 영원히 ‘남겨져’ 있다. 정확히는 숨겨져 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 가장 완벽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라 생각했다. 이루어지지 않은 혼자만의 사랑. 완성되지 않은 사랑. 짝사랑. 오직 그런 사랑만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산소가 없으니 부패할 수 없다고 믿었다. 섹스만이 그 절정이라고 단언하는 건 아니지만, 상승 곡선의 어느 지점에서 섹스라는 정점을 찍은 사랑에게 남은 건 ‘파국’ 뿐이라고 생각했다. 친애하는 알라딘 이웃이 <second best>라는 페이퍼에서 쓴 것과 같은 이유다.
만약 내가 그 날 나의 욕망에 굴복해 그랑 잔다면 그 날은 그와 나의 첫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거라고 나는 생각한거다. 나는 그렇게 한 번 자고 잊혀지는 여자가 되는게 너무 싫었다. 나는 계속 만나고 싶었다. 우리는 그 후에도 몇 번 더 만났고 번번이 그는 나에게 끌림을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야' 라고 말하면서도 함께 밤을 보내지 않은 건 나의 그런 마음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면 끝장이다, 그게 바로 관계의 끝이다. <second best, from 다락방님 서재>
소설 속에서 로리와 오스카는 결혼한다. 사랑의 결실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결국 결혼이라는 공인된 사회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사람은 이제 그녀의 남편이 되었고, 그녀는 이제 그의 아내가 되었다. 로리의 이름이 바뀌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산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두 사람은 각자에게 love of my life라고 할 수 있을까.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는 사랑이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억압적인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동거는 다른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내가 사랑하는 책 『The Love Hypothesis』에서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Sleeping in the same room meant seeing embarrassing pajamas, taking turns to use the bathroom, hearing the swish of someone trying to find a comfortable position under the sheets loud and clear in the dark. Sleeping in the same room meant – No, Nope. It was a terrible idea. (209)
특히 ‘taking turns to use the bathroom’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나는 이 대목의 한글 버전을 알고 있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이다.
근데 그 사랑하는 사람과 나흘 이상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비비고 똥 교대로 싸고 하면 이 몰아, 접신의 경지가 매우 훼손되는 것이다. 한계점은 3일 정도다. 생선도 손님도 사흘 지나면 냄새가 난다. (56쪽)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렇다. 사랑은 깨지기 너무 쉬운 상태이고,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언젠가, 반드시 변하기 마련이고, 그리고는 돌아보지 않은 채 그렇게 제 길로 간다. 변하지 않은 사랑이라는 게 가능한가. love of my life는 가능한가. 사랑은, 사랑은 정말 실재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