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2022년 상반기의 책되시겠다. 이 책을 대출해서 집에 가져온 게 3번 정도 되는 것 같고, 이번에도 대출한 책으로 읽고 있지만, 내 책으로 읽는 거 아니어서 많이 죄송하기는 하지만. 정말 대단한 책이다.

 

천재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천재가 사는 세상을 모르니 명시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책 속에서 그려지는 천재는 그렇다. 일반 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그래서 천재는 외롭다. 이해받기 어렵다. 여성이 천재일 때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가부장제를 내면화해 살아가는 사람들 틈바귀에서, 즉 그런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에서 생활할 때, 천재인 여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만 한다.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육체적으로 나약하고 지적으로 무력하고 결정적으로 순종적이어야 한다. 천재 여성이 그 금기를 넘어서려고 할 때, 그녀의 도전은 천재 남성이 겪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훨씬 거대하고 단단한 장애물이 그녀 앞에 높여 있다.

 



필리스 체슬러의 책은 그렇게 읽힌다. 성적으로 적극적이고, 지적으로 열정적인 여성이 겪어야만 하는 시간과 경험들. 그리고 그녀가 돕는 여성에게서 느끼는 분노와 실망의 순간들. 135쪽을 읽으면서 이 페이지의 모든 문장이 느낌표로 끝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째로 옮겨야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 순간이 계속 반복된다.

 


아래 문단은 137쪽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실수를 한다. 여성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찮게 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소홀히 대하면서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매일 매 순간 멈추지 않고 뛰는 심장이 자꾸, 쿵쿵거린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 중 하나가 내 남성 동료 교수 중 한 명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학생은 임신이 됐고 자궁 외 임신으로 거의 죽다 살아났다. 의지할 사람이 전무했던 그 학생에게 연민을 느낀 나는 병원으로 병문안을 가서 퇴원하면 내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 학생을 돌보아 주었다.


어느 날 그 학생이 회복되어 활기찬 모습으로 부엌에서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권력을 남용해 임신시킨 그 작자를 위해 저녁 식사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놨다. "그 사람은 병원이 무섭대요. 어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그때 한 번도 저를 찾아보지 못했던 거래요. 오늘밤 그가 저를 찾아온다니 너무 설레요."


나는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가슴이 아팠다. 그런 인간이 이 어린 여성의 어리석은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슬퍼지기도 했다. 학생은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고는 떠났던 그 남자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느라 행복해하면서도, 자신을 들여보내줬던 여성 스승에게 감사를 어떻게 표해야 할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마 꽃 한 다발로 내게 감사를 표하거나 하는 데까지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할 눈치였다. 이런 행동은 마치 어머니가 우리에게 날마다 뭘 해 주든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고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 역시 대역죄인이다.) (137-8)



















댓글(23)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1-14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4 15: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22-01-14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인용문도 단발머리 님 마음도요.
좀 다르기도 비슷하기도 한 예인데, 나이들고 병든 몸으로 역시 나이들고 병든 남자 수발하는 늙은 여자가 안타까운데 그런 말을 하니 어떤 중년여성은 거꾸로 남자가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더군요. 아 그말이 그말이 아닌데 말이죠. 여자의 적은 여자.

단발머리 2022-01-14 15:58   좋아요 2 | URL
남자가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근데 비교가 안 될 정도인데 그 분은 그렇게 생각하시네요.
저는 그런 경우도 들었어요. 늙으신 어머니의 병수발을 중년의 딸이 엄청 열심히 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힘들게 병 수발하는 딸에게 매일 짜증과 화를 내시고 와서 보지도 않는 아들을 무한걱정하십니다. 하아...
제 생각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기보다는 여자의 적은 온 세상 같아요. 남자, 여자, 온 세상이 여자의 적입니다 ㅠㅠㅠ

수이 2022-01-14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읽은 걸로 나오는데 왜 구구절절 떠오르지 않을까요. 2022년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리 말씀하시니 다시 얼른 읽어보고 싶어요. 이번에는 정독!

단발머리 2022-01-14 15:55   좋아요 1 | URL
저는 비타님이 이 책 이미 예전에 읽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ㅎㅎㅎ 비타님 페이퍼 보고 바로 대출해왔는데 밀리다가 이제야 읽네요. 다시 읽어도 좋을거 같아요, 이 책은.... 쉽게 생생하고... 아, 그렇습니다^^

수이 2022-01-14 16:52   좋아요 0 | URL
급히 읽지 않고 천천히 정독해서 단발님처럼 근사한 페이퍼를 써보겠습니다! 알라딘 꿈나무 비타 올림! 🏋️‍♀️

책읽는나무 2022-01-14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저 페이지가 아...
읽으면서 이런 내용이?? 있었어?? 읽다가 다 읽고 나니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아~~ 카페인이 다 떨어져서 인가요?ㅋㅋㅋ
근데 단발머리님은 책을 다 옮겨 적어 놓으시는 건가요??? 아무리 옮겨 놓는데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어떻게 인용문을 적재적소에 넣을 만큼 기억을 다 하시는지??
신통방통 아...단발머리님의 머리를 닮고 싶습니다^^
이번 달 책은 진짜 정독해야겠어요.
불끈!!!!👩‍🏫👩‍🏫

단발머리 2022-01-14 15:53   좋아요 2 | URL
저는 읽으면서는 북플의 밑줄긋기를 많이 이용하구요 ㅎㅎㅎ 사진 찍으면 문자로 전환해주는 시스템이라니 ㅋㅋㅋㅋㅋㅋ 너무 황홀합니다. 다 읽고 나서 리뷰 쓰려면 @@ 되는 경우가 많아서 생각이 떠오르면 읽다가 바로 짧게라도 쓰려고 해요. 지금은 140쪽 읽고 있어요. 그니까 지금 읽으면서 쓰고 있는 페이퍼입니다.

저는 책나무님 국수 사진 보고 반해서요. 책나무님 손을 닮고 싶습니다. 어떤 국수도 가능케 하는 마력의 황금손!

2022-01-14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4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2-01-14 16:51   좋아요 2 | URL
단발님 국수 드시러 갈 때 여기 동행 1인 손 🤚

단발머리 2022-01-14 17:07   좋아요 2 | URL
진짜 예매해야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ㅋㅋㅋㅋ 책나무님 어디 사시는지도 모르는데 일단 ktx 예매 ㅋㅋㅋㅋㅋㅋㅋㅋ

2022-01-14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2-01-19 13:51   좋아요 0 | URL
서울 아닐까요? 책나무님 비밀 댓글에 주소 써넣으신 거죠? 저만 안 보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1-19 14:38   좋아요 0 | URL
이런....이런....ㅋㅋㅋ
아....또 제가 바보짓을 했군요??
아...참!!!!

책읽는나무 2022-01-19 14:41   좋아요 0 | URL
아....아니군요???
아...또 헷갈렸네요ㅜㅜ
단발머리님 서재였네요..
전 비타님 댓글만 보고..비타님 서재인 줄 알고...내가 내글에 비댓을 단 줄 알고...지금 제가 오락가락 하고 있네요.
아....정신줄 잡아야 하는데...ㅜㅜ

수이 2022-01-19 15:0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죄송해요 오늘도 굿 데이 보내세요 나무님!

독서괭 2022-01-14 1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읽어보고싶어요!! <여성과 광기> 2/3쯤 읽었는데 나머지 열심히 읽어 끝내고 이책도 봐야겠습니다~

단발머리 2022-01-14 17:08   좋아요 2 | URL
이 책은 회고록 느낌이라 아주 쭉쭉 읽히는데 내용이 후덜덜합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거에요^^

공쟝쟝 2022-01-15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상반기 책 선택해버린 승질급한 단발머리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단발머리 2022-01-15 09:25   좋아요 1 | URL
오늘 아침에도 강렬한 밑줄 문단을 2개나 발견했다죠. 이 책 놀랍고 또 놀라워요!! 모르고 살았던 우리의 역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2-01-19 13:52   좋아요 0 | URL
상반기 책에 감히 별 네개밖에 안 준 독자는 얼른 재독하고 별 다섯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