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광기
필리스 체슬러 지음, 임옥희 옮김 / 위고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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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리치는 이 책을 정신의학적 사고와 실천을 여성화하는 데 공헌한 선구자적인 책이라고 평했다. 맞다. 이 책은 정신의학이 여성과 여성의 삶을 어떻게 왜곡시켰는지 보여주고,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주며, 여성과 광기의 그 가느다란 연결 지점을 해체하는 데 일조한다. 하지만, 내게 울림을 줬던 문장들은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서로에게 심리적·사회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서로에게 너무 많이 바라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하찮은 실수, 가장 사소한 실망은 종종 확대되어 분개로 이어진다. (35)  

 


남자들은 또한 그다지 상냥할 필요가 없다는 보편적인 통념에 의해 어느 정도 보호받는다. (501)

 


전통적으로 남성뿐 아니라 여성은 남성의 희생이나 협력보다는 다른 여성의 도움이나 희생을 보다 쉽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기대가 비교적 안전하고 성공 확률이 높다. (501)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동지를 찾기 어렵다. 가장 가까운 여성인 어머니가 가부장제의 신념을 내면화한 경우 여성은 아버지, 오빠 같은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인 어머니에게도 억압의 대상이 된다. 어머니를 통해 전해지는 가부장제 신념을 내면화한 여성은 결혼을 통해 어머니가 되어 (어머니처럼) 가부장제의 일원이 된다. 아들을 빼앗긴(?) 시어머니는 말해 무엇하랴. 여적여의 신화를 신봉하는 게 남자만은 아니다. 여자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

 


499쪽에서, 저자는 페미니즘이 어머니들(motherhood)’딸들(daughterhood)’이라는 단어보다 자매들(sisterhood)’라는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여성들 사이의 위계 질서화된 장벽의 해체를 시도하고 그들 관계에 내제된 고통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자매애는 페미니즘 운동의 실천을 위해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다. 단일한 계급으로 통합되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자신만의 역사를 갖지 못한 여성들에게 자매애는 점진적이든 혹은 혁명적이든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매애가 그들 사이의 공고한 결합과 연대를 방해할 수 있다. 어떻게?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함으로. 남성보다 더 친절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도움이나 희생을 더 많이 기대함으로써, 완벽함을 요청함으로써.

 

남성에게 요구하지 않는 친절, 도움, 희생을 남성이 여성에게 요구할 뿐만 아니라, 여성이 여성에게 요구한다는 그녀의 지적이 너무 새로웠다. 무례하게 행동해도 상관없는 남성과 항상 미소 짓고 있어야 하는 여성. 도움 요청을 가차 없이 거절해도 괜찮은 남성과 도와야 한다고 강요당하는 여성.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남성과 희생해야만 하는 여성.

 


남성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여성이 여성에게 요구한다는 그 지점이, 새롭게 놀라웠다. 나는 도덕적 우월성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 좋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에서 봐도 착한 사람이 좋다. 좋은 사람 곁에 있고 싶고, 나 역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잘 안 되지만 노력하고 싶고, 내 곁의 좋은 사람들의 좋은 점들을 배우려고 나름대로 노력한다(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사람이 착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여성이 여성에게 더 많이 친절과 도움, 그리고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그 지점이,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더 크게 실망하고 분개한다는 그 지적이 놀라웠다.

 


여성들은 적어도 자신을 희생하는 데 관심이 없는 여성을 불신하고 남성들은 그런 여성을 파괴한다. … 달리 표현하자면 아직까지도 대다수 여성에게는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희생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중단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503)

 


희생하겠다는 말을, 양보하겠다는 말을, 본성이 아닌 학습과 문화에 의해 강요된 말을 중단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말해야 한다. 가끔은 거절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여성에게 남성보다 더 많이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자매애를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자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해를, 친절을, 도움을 그리고 희생을,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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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2-31 10:20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급하신 부분 인상깊게 읽었는데요, 최근에 읽었던 소설 <무엇이든 가능하다> 생각도 났어요. <무엇이든 가능하다> 혹시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그 단편중 하나에 자신의 집에 머무는 여성손님들을 불법촬영하고 그걸 보는 남편이 나오고, 그걸 묵인하면서 그 집에서 함께 사는 아내가 나와요. 근데 이 부부의 딸이 그 사실을 알고는 끔찍하다고 집을 나가면서 ˝엄마가 더 나빠!˝ 라고 하거든요. 저는 이 부분이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물론 그 사실을 그냥 넘기고 피해자들을 계속 만들어내는 아내 공범이고 나쁘지만 그런데 ‘더‘ 나쁘다니.. 실제 그런 일을 저지르고자 해서 실행에 옮긴 사람은 아빠인데, 그런데 왜 엄마가 더 나쁘다고 할까. 실제 원 가해자보다 왜 가해자 옆의 공범이 ‘더‘나쁜가. 만약 그 공범이 남자였다면 딸이 ‘더‘ 나쁘다고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면서 저 역시도 그런데 강간피해자에게 2차가해를 하는 여자들한테 더 실망하거든요. 이 ‘더‘는 왜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를 읽고 느낌표 천 개 된겁니다. 여전히 잘 안될것 같지만 제가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도덕적이고 더 연대하기를 당연히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게 잘못된거라는 생각은 사실 들지 않는데, 그러나 더 요구한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아요. 이건 계속 더 생각해보려고 해요.

단발머리 2021-12-31 13:34   좋아요 3 | URL
저는 어제 오후쯤에 이 글을 쓰고요. 저녁 늦게 기사 하나를 봤어요.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국민의힘 신지예‘ 놓고 격론> 이런 제목이었는데요.

신지예에 대해서라면 모두 다 할말이 있을 것 같고 저도 뭐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어제 저녁 이 글을 써놓고 위의 기사 읽는데 참 맘이 묘하더라구요. 그날 아침까지도 같이 했던 동지들에게 말 한마디 없이 조직을 떠나간 신지예에게, 그의 결정의 어떠함과는 별개로....그래도 여태 고마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복잡하더라구요. 더 큰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페미니즘이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그게 정말 가능한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저는, 또 혼자 생각만 했더랬습니다.

이제 올 해가 몇 시간 안 남았어요, 다락방님. 시간이 가고 있다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1-12-31 14:08   좋아요 0 | URL
저는 이 말로 대신합니다 ㅋㅋ 신지예 화이팅 (ㅋㅋㅋ)

수이 2021-12-31 10:3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여성이 여성에게 더 요구하는 그 마음을 잠깐 더듬어보았어요. 뭘까요, 대체. 여성들을 마주할 때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여성들을 싫어하게 될때 지난 날들도 잠깐 헤아려보았어요. 확실한 건 저 역시 말씀하신 것처럼 더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속으로만 그러고 더 요구했던 거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가 애매하네요. 저도 더 생각해봐야 할 숙제를 안고 돌아갑니다. 확실한 건 여성주의 책을 읽을수록 여성들이 더 좋아지고 있어요. 오픈되어가는 과정이지만 그 과정을 조금씩 즐길 수 있겠다 장기적으로, 그런 생각도 더불어 합니다. 마지막 문단, 콕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해피 뉴 이어!

단발머리 2021-12-31 13:22   좋아요 2 | URL
비타님 댓글 읽으면서 떠올랐던 부분 가져와봤어요.

여러 연구와 상식에 의하면 우리 문화에서 개인적인 ‘이타주의‘는 자유나 자기애보다는 죄의식, 두려움,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다. (488쪽)

이 문장과 비타님의 댓글을 연결해보면서 제가 얻은 결론은... 좀 거칠지만 말이에요.
여자들은 좀 더 이기적이어야 한다는 거에요. 우리 좀 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자구요, 비타님.
내일부터 새해라 결심하기도 딱 좋네요. 내년부터 시작이에요!!

수이 2021-12-31 13:53   좋아요 2 | URL
전 너무 이기적이라...... 여기에서 더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버리면 친구들에게도 가족에게도 버림받을 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언제나 감사합니다 그대는 조금 많이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도 여전히 좋을 거 같아요. 조금 더 많이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봅시다 아니 되어요 그대 곁에는 이미 이기주의자인 비타가 서있도록 하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12-31 13:57   좋아요 1 | URL
아이고, 역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군요. 비타님은 이기심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이타주의 좀 버리시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새해에는 이기주의 좀 장착하세요!!!
제가 옆에서 종종 알려드릴께요. 이타주의 버리고 이기주의 챙기세요, 하면서요. 내년에도 그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쭈욱!!!

(이기주의, 이기주의... 하니까 막 누가 생각나고 그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이 2021-12-31 15:07   좋아요 1 | URL
외제차 타고 드넓은 평수 사시는 그 베스트셀러 작가님 맞으시죠? 하아 부럽군요, 분발합시다 ㅋㅋㅋㅋㅋ

mini74 2021-12-31 11: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분들 정말 볼때마다 대단!하십니다. 전 내년에 도착한다기에 실눈뜨고 봤습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 단발머리님 즐거운 새해 보내세요 ~~~

단발머리 2021-12-31 12:27   좋아요 3 | URL
미니님 대단! 댓글 감사합니다 ㅎㅎㅎㅎ 응원도 감사하구요.
오늘 남은 시간도 잘 마무리하시고, 즐겁고 복된 새해 되시길 바래요!!

건수하 2021-12-31 11:0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여성에게 많이 요구해서는 안된다…

저는 여성이 여성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단발머리님 덕분에 이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맞아요, 너무 여성들끼리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문제는 밖에 있는데…

단발머리 2021-12-31 12:26   좋아요 4 | URL
친절하지 않을 때, 공감해주지 않을 때, 도와주지 않을 때, 실망을 넘어 분개한다... 이 대목에서 저는 콱 숨이 막히더라구요.
맞아, 그랬어. 그랬었지.... 하면서요.... 문제는 밖에 있지요. 수하님 말씀이 맞아요.

책읽는나무 2021-12-31 12: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이성적으로 읽어야 하는 건데...역시 단발머리님은 이렇게 리뷰를 써주실 줄 알았어요^^
책을 읽고 나서는..몇 몇 분들의 리뷰를 읽어야 뭔가 해소되는 것 같고, 두뇌의 회로를 똑바로 설치하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요?
리뷰도 한 권의 책을 읽는 기분입니다.
500페이지 대에서도 밑줄 긋고 생각해야 할 대목들이 많았어요!!!

단발머리 2021-12-31 13:26   좋아요 3 | URL
저의 리뷰를 예상하셨다니, 감동적입니다. ㅎㅎㅎ 부족한데도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하구요.
같은 책을 읽으면서 같은 부분의 밑줄에 환호하고, 다른 부분의 밑줄과 해석을 같이 생각해볼 수 있어서 <같이 읽기>가 좋은 것 같아요.
저도 이 책 <개정판을 펴내며>부터 맨 끝까지 좋았어요. 좋은 읽기였습니다^^

공쟝쟝 2021-12-31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웅.. 그래서 나 부둥부둥하기 싫었다...? 부둥부둥하기싫어...부둥부둥안하고싶어...
그런데 그거는 뭐,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한테도 부둥부둥하고 관대해져야지~~로 노선을 좀 틀었구요.. (헤헤)
저도 태어나기를 희생당하는 포지션으로 태어나 (아시나요 장녀라고?) 그것이 사랑인줄 알고 살아왔는 데, 가장 좋아했던 남자 후배에게서 제가 페미니스트가 되고 난 후 들은 말은 ˝누나 왜 이렇게 이기적으로 변했어?˝ 였어요. 그 말이 너무 더럽고 역겨워서 존나 더 이기적이어야지 싶어졌다. 는 것과는 별개로 ㅋㅋㅋ 여자들에게 더 바라지 말자...더 많이 요구하지 말자... 는 진짜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남은 생애에서.
저도 35페이지에 밑줄 좍좍 그어놨거든요. !!! 음........
굳이 위악을 떨 필요는 없지만, 제가 가진 친절과 호의 이면에 어떤 기대가 있는 지는 점검해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_< (나도 읽어야하는데..)

단발머리 2022-01-04 16:27   좋아요 1 | URL
‘이기적‘이라는 말이 남자들에게는 ‘목표지향적‘으로 해석되고 여자들에게는 ‘이기적‘이라고 해석되는 환경 속에서, 우리가 살죠.
희생과 양보를 강요받으면서요. 전, 이 책에서 그 지점을 보고 좀 놀라기도 하고, 아, 맞아 하고 감탄하기도 했어요.
남자에게 관용적이고 여자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회,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 여기에서 밑줄은 여자들에게 있죠.
제가 생각한 걸 잘 풀어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쟝쟝님은 찰떡같이 잘 알아들으시네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