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어난 게 범죄 / Born a crime
이번이 두 번째다. 노아 트레버를 좋아한다. 저자의 경험 자체가 특별하다 보니 내용도 흥미진진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노아 트레버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이 발견될 경우 조사 끝에 온 가족이 범법자가 될 소지가 다분했기에 다정한 가족은 항상 불안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혼혈 가족의 모습이다.
노아의 어머니는 친척 아주머니 집에서 부모로부터 버려진(?)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자랐다. 닭 한 마리로 열 네명이 나눠 먹어야 했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 때는 돼지의 먹이를, 개의 먹이를 훔쳐 먹었다. 그랬는데도, 그랬음에도. 그녀에게는 ‘영어’가 있었다.
There she had a white pastor who taught her English. She didn’t have food or shoes or even a pair of underwear, but she had English. She could read and write. (65쪽)
그녀에게 영어는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도구이자 계급 상승을 위한 발판이 되어주었다. 영어는 더 나은 삶으로 가는 사다리가 되어 주었으되,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금빛 사다리가 되어 주었다. 다민족, 다언어 사회에서 지배자의 언어를 배운다는 건 그런 의미일 것이다. 동시에 그것이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언어, 그 영어라는 점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영어가 가지는 위상은 어마어마하고, 영어에 쏟아붓는 에너지, 돈, 시간, 열정, 관심은 가히 전 국가적이라 할 만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영어는 먼나라 이웃나라 딴 나라에 속해 있다. 무엇을 위해서 혹은 무엇 때문인지는 더 이상 묻지 말자. 더 이상 물을 힘도 없으니, 그냥 이 문장을 기억하기로 하자.
She didn’t have food or shoes or even a pair of underwear, but she had English.
2. 오만과 편견 / Pride and prejudice
중간중간 재미있는 대목만 읽었던 걸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걸로 이번이 세 번째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사랑이 제일 큰 관심사였다면, 두 번째 읽을 때는 다아시의 이모 캐서린 부인과 엘리자베스의 한판 대결이 아주 볼만했다. 이번에는 콜린 씨다. 베넷 가문의 넷째 딸 리디아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사기꾼 기질이 다분한 위컴과 함께 야반도주하고, 리디아가 상속받을 재산이 형편없기에 위컴에게 버림받고 불명예만 뒤집어쓴 채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 온 가족이 염려하고 있던 찰나. 베넷 가문의 친척이며, 법적으로는 베넷 가문의 상속자인 콜린 씨가 베넷 씨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 친애하는 베넷 씨, 저희 콜린스 부부는 베넷 씨 이하 모든 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베넷 씨가 지금 빠져 계신 절망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것으로 믿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고 해도 절망의 원인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베넷 씨와 베넷 부인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말씀드리자면, 저로서는 따님이 본디 악한 성격을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가급적 마음을 달래시고 못난 자식일랑 영원히 마음에서 내치시어 자기가 저지른 가증스러운 죄악의 열매를 스스로 거두게 하십시오. (389쪽)
소설 속에서는 콜린 씨를 거구로 그리지만 느낌으로는 영화 속 자그마한 콜린의 모습이 그의 말과 행동에 훨씬 잘 어울린다.
편지에서는 자신을 한껏 낮춘 듯하지만 구절구절 그의 허영과 위선, 그리고 오만함이 묻어난다. 무식함과 재채기, 그리고 사랑을 인생 사 감추기 어려운 3종 세트라 하지만, 원래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생각이라는 건 감출 수 없는 게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듯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거나, 칭찬하는 척하면서 은근 디스하는 말들은, 말하는 이의 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투명하게 비춰준다.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싶지만, 결국은 마음이다. 마음은 잘 감춰지지 않는다. 심보를 바르게 하자.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3.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
선생님의 책을 처음 읽었던 9년 전에도, 2021년의 지금도 선생님의 문체는 통통 튀고 발랄하다. ‘다이어트에도 영성이 필요하다?!’는 글에서 만난 문단이다.
동양의학의 양생술은 단연 최강급이다. 양생은 정, 기, 신의 순환이 핵심인데, 그러기 위해선 덜 먹고 잘 자야 한다. 특히 술과 고기, 기름진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 양생술의 대원칙이다. 그런 점에서 수양이나 양생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다이어트다. 특히 중요한 건 저녁에 소식하는 것이다. (89쪽)
인생의 의미, 공부의 즐거움, 고전이라는 바다, 함께 공부하는 벗에 대한 찬사를 넘어 이제 의역학과의 접합이 시작된다. 더, 더, 더 많이, 가 아니라, 일상의 리듬을 바꾸고 내용과 태도를 바꾸고 감각과 활동, 그리고 관계의 변화를 이루어가는 수행으로서의 다이어트를 추천한다. 소비와 유흥이 아닌 저녁이라. 그것이 진정한 휴식으로 가는 길이란 말이냐. 푸라닭 블랙알리오와의 정면승부는 영원히 미뤄져야 한단 말이냐.
4. 통증 연대기
성별, 인종, 계층은 통증 치료에 영향을 미친다. 카 박사의 환자 중상당수는 박사 말고는 진통제를 처방해줄 의사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실제로도 그랬다).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당수가 소수 민족, 여성, 기초생활 수급자, 산재연금 수급자, 정신질환자, 약물 남용 경험이 있는 환자다. (197쪽)
환자가 통증을 호소할 때 성별에 따라 치료가 달라진다는 주장은 종종 제기된 바 있다. 남성이 통증을 호소하면 마약성 진통제, 수술, 완벽한 검사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크지만, 여성이 통증을 호소하면 우울증과 불안을 치료하는 향정신성 의약품을 처방받는다. (한 조사에 따르면 같은 증상을 호소하고 같은 진단 결과가 나온 환자에 대해 여성은 항우울제를 처방 받을 확률이 남성보다 82퍼센트 높았으며 항불안제를 처방받을 확률은 37퍼센트 높았다.) 여성은 통증 치료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거니와, 적극적일 경우 히스테리로 치부되기 쉽다. (198쪽)
성별, 인종, 계층에 따라 다른 통증 치료법이 적용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을 법한 이야기임에도 충격적이다. 흑인이기 때문에, 여성이기 때문에, 가난하기 때문에 통증의 치료에 쓰일 진통제조차 제대로 처방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통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개인은 알아차리기 어렵다. 내가 만난 의사가 어떠한가에 따라 통증은 생각보다 쉽게 사라질 수도, 영원히 함께할 수도 있다. 성별, 인종, 계급의 편견 속에 통증은, 여전히 그만 아는 그 무엇이 되어 그를 구속한다. 통증에서의 해방은 정녕 불가능한 일인가. 현재시간 오후 11시 29분. 이 날이 다 가기 전에 조금 더 읽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