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발머리가 아니다. 나는 곱슬머리다. 그냥 곱슬머리가 아니라, 숱이 많고 머리카락이 굵고 두꺼운 초강력 곱슬머리다. 내 머리카락 만지다가 놀라는 미용사들을 한 두 번 본 게 아니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이 세상에 ‘매직 스트레이트 펌’(일명 매직)이라는 게 등장했다. 아, 매직이란 얼마나 놀라운 단어인가. 나는 학교 미용실에서 그 신기하다는 매직을 했는데, 내려가는 길에 만난 친구, 대학생활 4년 동안 수업과 점심을 함께했던 친구가 나를 못 알아보고 지나쳤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는 놀란 눈으로 내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진심을 다해 중얼거렸다. “너, 취직, 되겠다.”
나는 워낙 초강력 악성 곱슬이어서 원하는 스타일이라는 게 없다. 안 되는 스타일이 너무 많고, 불가능에 가까운 스타일이 더 많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매일 매일 머리를 감은 후에 송혜교가 광고했던 분홍색 드라이어를 사용해 만져주면 되는데, 그건 너무 비싸고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못 할 일이다. ‘단발머리’라는 닉네임을 쓰면서 실제로 내가 찰랑찰랑한 단발, 상큼한 단발, 예쁜 단발, 고준희 단발을 할 수 없는 이유다.
현재의 스타일은 나름 내 머리카락에 최적화된 형태인데, 먼저는 머리카락을 매직으로 직모처럼(보통의 머리카락처럼) 보이도록 쭉쭉 펴고, 아래부분에 굵은 웨이브를 넣어주는 거다. 일년에 두 번 미용실에 간다. 보통은 4월, 10월 이렇게 가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6월에 미용실에 다녀왔고, 그리고 화요일에 미용실에 갔다.
꺼내 주신 가운을 입고 가방에서 핸드폰과 『책, 이게 뭐라고』를 꺼냈는데, 원장님이 갑자기 물으신다. 혹시, 무슨 책 놓고 가지 않았어요? 책이요? 아니요. (저는 책 잃어버리고 그런 사람 아닙니다. 헤헤) 아니, 누가 책을 놓고 갔는데. 근데, 찾아가지를 않아요? 응, 그러니까 좀 됐는데. 그냥 책도 아니고 대여책이야. 대여책이요? 혹시 책 제목이 뭘까요? 무슨 무슨 충동? 뭐더라? 잠깐만요. 여기에, 아니 여기 있다. 뜨아아아아아아악!!! 어머, 이건!!!
내 책이다. 이 책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도서관에서 대출한 후 잃어버려 집을 홀딱 뒤집고, 도서관 3층을 샅샅이(내가) 찾아보았으나, 결국 찾지 못해 도서관에 변상한 그 책이었다. 근데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책 잃어버리고 어디서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정신 없는 이는 바로 나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미용실에 와서 책 꺼내는 사람은 좀처럼 없는데, 책 꺼내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말씀하셨다고. 그 책을 읽고 페이퍼를 썼던 게 2년 전이다. 일년에 두 번 미용실에 오니까 3회의 미용실 방문을 스쳐 지나고, 이제야 비로소 이 책은 내게로 돌아왔다.
파마약을 바르시면서 원장님이 물으신다. 근데, 그게 무슨 내용이에요? 읽어보지도 않았네. 책이 있어도 읽지를 않아, 하하하. 아, 네. 그 책은 그러니까, 푸른 수염 이야기 현대판인데요. 돈 많고 능력 있는 남자가 가난한 여자랑 결혼해서, 잘해 주는 척 하면서 결국에는 여자를 억압한다는 이야기에요. (‘죽인다’는 이야기는 뺐다) 어, 푸른 수염 이야기는 뭐야? 아, 그러니까, 푸른 수염 이야기는 동화 같은 건데요…
“참 예쁜 목이야.” 진정으로 생각에 잠긴 듯 부드럽게 들리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어린 식물의 줄기 같은 목.”
그가 내 뒷목에 키스할 때 그의 부드러운 수염이 스치는 것과 축축한 입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걸친 의상 중에서 목걸이만 남겨야 했다. 그 날카로운 칼날이 내 드레스를 두 조각냈고 옷은 땅에 떨어졌다. 참수대의 틈새에서 자라는 작은 초록 이끼가 내가 온 세상에서 바라보는 마지막 광경이 될 터였다.
그 무거운 칼이 휙 하는 소리. (66쪽)
원장님께 더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해야하나. 아무튼 2년 만에 재회한 책을 꼭 끌어안고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10센티 넘게 머리카락을 잘랐지만 스타일이 똑같으니 몇 개월 전의 나로 돌아온 듯한 기분인데, 오전 내내 엄마를 기다린 온클 장인 아롱이는 푸들 아니냐며 격하게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