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촌 레이첼』에서 화자 필립은 이제 곧 스물 다섯번째 생일을 맞게 될 젊은 청년이다.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사랑했던 사촌 형 엠브로즈의 죽음 이후 그의 미망인에게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필립에게 깊이 동화되어 미움과 사랑의 롤러스터를 함께 하게 된다. 아직 『나의 사촌 레이첼』을 읽지 않은 행운의 독자들을 위해 더 이상의 설명은 피하겠지만, 정열적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그에게 나는 완전히 사로잡혔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희망과 절망을 이처럼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필립에게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 해답을 『자메이카 여인숙』의 <해설>에서 찾았다.
대프니는 평소 아들을 원하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아들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늘 남자 옷을 입었으며, 자신의 내면은 남자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10대 사춘기 시절에는 정체성 때문에 심한 정신적 방황을 겪기도 했다. (『자메이카 여인숙』, 440쪽)
남자가 되고 싶었던 혹은 남자가 아닌 자신에 대해 안타까워했던 대프니 듀 모리에의 혼란과 방황은 소설 속에서 ‘남자가 되어버림’으로 완성된다. 『나의 사촌 레이첼』에서 소년에 가까운 젊은 청년 필립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립과 같은 마음으로 독자는 필립처럼 레이첼을 사랑하게 되고, 필립처럼 그녀의 행동에 완벽하게 지배당하며, 결국에는 필립처럼 파국에 이르고 만다. 독자는 대프니 듀 모리에처럼, 필립이 되고야 만다.
『희생양』은 대프니 듀 모리에식 ‘왕자와 거지’이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를 읽어보지 않아 왕자보다 거지가 더 나은 인품의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희생양』에서는 왕자와 거지 중, ‘거지’의 성품이 더 훌륭하다. 프랑스 귀족 장 드게의 자리를 맡게 된 영국인 대학강사 존은 장 드게보다 좋은 사람이다. 존은 누워있는 어머니 라콩테스 부인에게 새로운 일을 찾아주고, 무심했던 아내 프랑수아즈를 다정하게 위로한다. 10년 이상 말을 나누지 않았던 누나 블랑슈와 화해하고, 형의 위세에 눌려 집안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동생 폴과 신뢰관계를 회복한다. 딸아이 마리노엘의 좋은 아빠가 되어주고, 가업인 유리 공장의 직원들과 마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결말은 아쉽다. 아쉽다는 말로는 좀 부족한 듯 하지만, 다른 결말에 대해 생각해보노라면 그것 역시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존의 정체를 알아챘던 사람과의 마지막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고, 그리고 당신을 닮은 장 드게를 사랑했어요. 장 드게를 사랑한 것처럼, 그를 닮은 당신을 사랑했어요.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해줘요.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준 단 한 사람에게 존이 약속한다. 편지를 쓰겠어요, 어디든 도착하게 되면 그 곳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쓸게요. 편지, 편지는 하트.
코로나 사태가 심상치 않아 걱정이 많다. 모두 같은 마음일 테다. 사랑제일교회의 ‘제일’은 예수님이 아니라 전광훈씨 인 것 같다. 치료받지 않겠다고 도망치는 범법자조차 쫓아가 치료해줘야 하는 이런 상황. 무질서, 무개념의 종말을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협조 사항은 외출 자제와 메뉴 개발 뿐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긴 터널. 자꾸 한숨이 나온다.
아침에는 다락방님 황금 레시피에 따라 카레를 만들어 보았다. 감자를 꺼냈는데, 감자가 하트다. 대학 후배가 오늘 생일이라 감자 사진을 단톡방에 올렸더니 선배님들, 후배, 친구들이 좋아한다. 축하 인사가 이어지는데, 언뜻 보면 이렇게 읽힌다. **야, 감자 축하해! 정말 하트 모양 생일이네!
오늘은 하트.
대프니에게 하트를. 필립에게 하트를. **에게 하트를. 카레에게 하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