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는 7살때부터 유치원에 다녔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집 앞 어린이집에 오전에만 다니다가 내내 집에서 놀았는데, 7살이 되니 어쩔 수 없이 유치원에 보냈다. 큰아이가 유치원에 가면 작은 아이와 도서관에 갔다. 매일은 아니었고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집 앞 ㅅㅅ도서관에 갔다. 3층 어린이실의 선생님이 아롱이를 너무 예뻐해주셔서, 그 땐 아롱이가 (남달리) 귀여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시는 분이셨다. 언젠가는 아롱이의 손을 잡고 흔드시며 말씀하시기를, 딸만 셋을 낳아 요만한 남자 아이들을 보면 너무 귀엽다고 하셨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신발을 벗고 자리에 앉아 아롱이가 골라오는 책을 읽어줬다. 글씨를 모르는 아이, 그림만으로만 세상을 상상하는 아이에게 소리를 내어 책 위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줬다. 가끔 아롱이처럼 엄마랑 도서관에 온 아이들이 어린이실에 들어오면 아롱이는 그 아이들을 쫓아다니느라 나를 내몰라라 했다. 나는 나대로 육아 관련서를 읽거나 소설을 읽었다. 아무도 없는 날이면 내내 아롱이와 둘이 앉아 책을 읽다가 큰애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쯤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오면서는 자동판매기에서 600원짜리 제크 코코아를 사줬다.


 

사람들이 나처럼 책을 안 산다면 한국의 출판 문화가 많이 걱정되기는 하는데, 아무튼 나는 책을 많이 사지 않는 편이다.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이 많기도 하고, 더 이상 쌓을 곳이 없기도 하지만, 제일 주요한 이유는 도서관이 가깝게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책은 검색을 하고, 대출을 하고, 먼 곳 도서관 책은 상호대차를 신청하고, 신간은 이달의 희망도서로 신청을 한다. 새 책에 대한 열망만은 나도 남부럽지 않은데, 새 책이, 새 책들이, 엄청나게 많은 새 책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은 항상 나를 들뜨게 한다.

 


내게 도서관은 해방의 공간이다. 조용한 도서관 열람실에서 혼자 가만히 책장을 넘길 때, 걱정과 염려, 분노와 불안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답을 찾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 곳이라는 확신은 갖게 됐다. 도서관은 내게 그런 장소였다. 아이들을 통해 만나게 되어, 아이들 독서모임에서 시작해 이제는 우리만의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 언니들과의 카톡 중에, J언니가 말했다. (코로나 때문에) 힘들기도 하고 답답한 거 다른 거는 그냥 참을 만한데, 도서관 못 가는게 제일 그래. 그치? 우리 모두 다 같은 마음인데, 이 언니들도 도서관을 제집 드나들 듯 하는 분들로서, 이번 코로나로 인한 변화 중 도서관 휴관을 가장 힘들어하셨다.

 


3주 전쯤에 이사 온 동네에 도서관이 대출업무를 다시 시작했다고 해, 온 가족이 출동했다. 간격을 유지해 줄을 서고, 카드를 스캔하고, 체온을 재고, 손소독을 한 후에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자리에는 앉을 수 없고 대출만 가능하다고 했다. 작년 12월에 개관했다고 하는데, 3개월 정도 운영하고 나서 코로나 사태가 벌어져 내내 닫혀 있다가 이제야 문을 다시 연 것이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제일 먼저 나를 맞아주었고, 나름 신경 쓴 듯한 내부가 눈에 띄었다. 작은 화분 아래가 페미니즘 자리다. 『2의 성』,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여자 전쟁』 등이 눈에 띈다. 『당신 엄마 맞아?』를 발견한 곳도 바로 여기다. 1인당 5, 모두 20권을 대출해서는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건만, 수도권 확진자 증가세로 도서관은 다시 휴관에 들어갔다.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 이제는 무색해졌다.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불안한 예감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코로나 19가 지나가면 코로나 19와 다른, 혹은 코로나 19보다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인류를 위협할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고 있고,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이제는 평범했던 이 모든 일들을 다른 각도로 바라봐야 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적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예전의 경험은 이제 추억으로서 혹은 과거로서만 존재할는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낸 뒤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자리에 앉아 목차를 펼칠 때의 고요하고 아늑한 느낌 같은 것들.




유럽에 있는 제 지인들은 코로나19를 흑사병과 비교를 많이 합니다. 물론 사상자 숫자는 비교가 안 되죠. 14세기에는 인구의 거의 절반이 죽었으니까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이 이번에 워낙 큰 충격과 비극을 느끼면서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사건이란 점에서 같다고 보는 겁니다. 코로나19 이후에 문명 전체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바뀌지 않겠느냐,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지구적 자본주의 문명을 떠받치던 구조들이 모두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조는 네 가지인데요. 지구화, 도시화, 금융화, 생태 위기입니다. _포스트 코로나[4] 새로운 체제_ 홍기빈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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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0-06-07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서관을 좋아해요. 가까운 시립 도서관은 버스로 5정거장인데 잠시 열었다가 다시 닫았어요. 전 어린이실에서 혼자 평일 낮에 동화랑 그림책 읽기 좋아하는데 그 즐거움을 다시 갖기는 어려워 보여요. 그 편안한 혼자의 시간.... 은 멀리 있었고요, 요즘은 아이들과 지지고 볶고 밥하고 치우고 책은 조금씩 멀어져 가는 ... 아아아 쓰다 보니 이런 디스토피아 종말이라니!!!! 아니에요, 저 책 계속 사고 읽고 있어요. 암요, 희망을 버리진 않겠어요.

단발머리 2020-06-07 21:16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이 언제쯤이나 가능할까요. 전.... 일단 올해는 마음을 좀 내려놓은 상태입니다. 혹시(혹시ㅠ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해도 그 일상이 예전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않구요.
저도 사실 요 몇달간 책을 좀 사기는 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릴 수 없어서 급한(?) 책들 위주로 좀 구입을 했더랬죠.
구입한 책들은 대출한 책들에 밀리고, 대출한 책들은 그 전에 빌렸던 책들에게 밀리는 이 신기한 현상....
그래요, 유부만두님. 우리 희망을 버리지 말아요~~~ 엉엉!

다락방 2020-06-0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방금전에 예스이십사에서 컬러퍼플 주문했어요. 주말상품권까지 3천원 혜택을 주기 때문에... ㅎㅎ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같이 읽은 사람들에게 컾러 퍼플은 통과의례인가요!!

저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는데 빌려오고나서 다시 휴관이 되더라고요. 저는 세 권만 빌렸다가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다섯권 빌릴 걸 그랬다, 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저는 사두고 안읽은 책이 많으니까요.

저는 4월의 여행도 8월의 여행도 취소하고 9월 여행은 아직 취소전인데, 그걸 취소해야 될까봐 너무 속상해요. 저 너무 가고싶거든요. 제 경우엔 책은 거의 사서 읽는 편이니 도서관에 대한 아쉬움은 크지 않았지만, 여행을 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너무 커요. 공항 리무진과 공항 라운지 비행기, 호텔이 다 너무너무 그리워요. 너무 그리워서 미치겠어요. ㅠㅠ

단발머리 2020-06-08 09:13   좋아요 0 | URL
방금 전 주문 축하드립니다, 다락방님. 아주 적절한 소비였어요. 전 이번에 컬러 퍼플 빌리기만 하고 읽기를 못 했는데, 앨리스 워커 책이라 꼭 다시 도전해보려 합니다!

여행 취소 이야기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다락방님 여행기 읽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다락방님이 여행을 못 가시니 여행 페이퍼도 읽을 수 없고..... ㅠㅠ 다락방님 속상한 마음에는 비기지 못하겠지만 저도 안타깝네요. 위에 링크한 책 <코로나 사피엔스>에서 홍기빈 칼폴라니 소장이 여행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요. 코로나 이후 여행, 특히 세계 여행에 대해서요. 자세히 이야기하다보면, 안타까움이 배가될 것이라는 예고만 해드립니다. 결론은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건데, 그건 어차피 진단이고요.
현 상황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 뿐이에요. 휴우~~

syo 2020-06-07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가보고 싶다... 여유롭게 서가를 기웃거려 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요.

단발머리 2020-06-07 22:38   좋아요 0 | URL
전 syo님이 <도서관 무림의 고수> 그런 페이퍼 썼던 거 기억나네요. 저도 여유롭게 서가를 기웃거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이 놈의 코로나 ㅠㅠ

감은빛 2020-06-0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로나19로 인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 일상이 얼마나 더 달라질지 쉽게 예상하기 어렵죠.

도서관과 관련해 먹고 사는 분들이 주변에 많아요. 비록 도서관은 오래 문을 닫고 있지만, 일하는 분들은 계속 거기서 일하고 계시더라구요.

다시 도서관을 맘껏 돌아다니고, 책도 빌려볼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단발머리 2020-06-08 07:58   좋아요 0 | URL
저희 동네는 신청자에 한해 책을 대출해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더라구요. 전 아직 한 번도 안 해보기는 했는데, 오전에 책이름, 청구기호 등 기입하면 선착순으로 책을 대출해주더라구요. 책은 사물함에 보관하고 비밀번호 문자로 보내주고요. 책을 완전히 찾아주는 서비스죠^^

확진자 증가세가 워낙 뚜렷해서 한동안 수도권은 좀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얼른 도서관 맘 편히 가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psyche 2020-06-09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어릴 때 동네 도서관 뿐 아니라 이웃 동네 도서관들 돌아가면서 다니곤 했었는데 (저희 동네 도서관이 넘 후져서요 ㅎㅎ) 옛날 생각나네요. 아이들이 크고나서는 나 혼자 오가며 들리던 도서관. 언제쯤 그 곳에서 갈 수 있으려나요 ㅜㅜ

단발머리 2020-06-11 13:14   좋아요 0 | URL
얼마전 미국 친구가 밴드에 사진이랑 근황 올렸는데요. 온 가족 집에만 옹기종기.. 막내가 누나들 돌아와서 너무 좋아한다고 해요. 철모르는 막내만 좋아하는 슬픈 세상 ㅠㅠ
언제쯤 도서관에 갈 수 있을지 그건 모르겠어요. 다행히 여기는 지하철 무인기를 이용한 대출이 가능해서요. 어제도 아롱이 책을 하나 빌리기는 했는데, 참 아쉽고 그렇습니다.
프시케님도 온 가족 모두 건강하게 이 어려운 시기 잘 보내시기 바래요~~~~~~~ 좋은 날 오겠지요, 흑흑.

다락방 2020-06-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님, 내일 이 책에 대한 땡투 들어올겁니다. 제가 드리는겁니다. 으하하핫.

단발머리 2020-06-10 14:43   좋아요 0 | URL
이야호! 감사해요, 다락방님!
으랏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차!

다락방 2020-06-11 08:17   좋아요 0 | URL
부자되세요! 으르렁-

단발머리 2020-06-11 08:41   좋아요 0 | URL
태산은 티끌 모아 가능한데, 땡투는 티끌 중에서도 우량주죠. 반드시 부자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으르렁!! 😤

노련한초보 2020-06-13 16: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집근처에 도서관이 두 군데나 있던데 살다가 도서관 불모지로 이사온지 일년이 다되어 갑니다. 그 일년 가까이의 절반은 코로나 시대이구요. 도서관이 없어서 5월부터 2주에 한번 이동도서관이 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한번 오고서 다시 중단되었답니다. 일상의 소중함은 떠나보내고서야 와닿기 시작하나봐요. 아이들 등교후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던게 사치일 줄이야.. 새삼 그리워지는 일상이지만 잘 읽지 않던 소설책을 하나씩 사서 읽으며 그리움을 달래봅니다.

단발머리 2020-06-14 18: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노련한 초보님^^ 도서관을 많이 이용하시던 분들은 도서관 이용하기 어려워질 때 많이 힘들어하시죠. 저도 이사하면서 도서관이 좀 멀어져서 그 때 생각이 자주 납니다. 아이들 등교 후 도서관 서가에서의 시간은, 뭐랄까여. 최고의 시간이죠. 돈으로도 값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로 귀한 시간이죠. 코로나 덕분에(?) 저도 책을 좀 구입했습니다. 휴관이 생각보다 길어질 분위기에요. 에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