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글자가 두 개로 보이거나 3D 입체로 보이는게 타미플루 때문인지 아닌지 끝까지 알아 내지 못 했다. 감기약만 먹을 때는 감기약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타미플루를 먹을 때는 타미플루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감기약과 타미플루를 먹지 않는데도 글자가 두 개로 보였다. 피곤하면 글자가 두 개로 보이던가. 그랬던가, 생각해봤다. 뿌연 글자와 글자를 헤치며 책을 읽다가, 이러면 더 눈이 나빠질지도 몰라, 하면서 책을 덮었다. 매일 아이가 학교에 가고, 매주 내가 있던 공간에 갈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그리웠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아팠다. 아이는 클 때 아프고, 어른은 늙을 때 아프다던데, 철이 안 든 어른은 어떻게 정산되는지… 그게 궁금하다. 아픈 시간 동안, 나는 컸을까 아니면 늙었을까.
1.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마틸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 책은 수연님이 올려준 페이퍼를 보고 더 읽고 싶었던 책이다. 바로 이 사진.
14살이 될 무렵, 칸트의 저서를 전부 섭렵하고, 답을 모르겠기에 칸트가 읽은 책들까지 모조리 읽어버렸다는 14살의 한나, 『마틸다』 속 마틸다와 비슷한 모습의 한나. 책더미 위 한나의 모습이 보인다. 한나 아렌트라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라는 책 제목 밖에 모르지만, 그래픽노블을 통해서라면 그녀를 좀 더 알 수 있게 되리라 기대가 컸다. 그녀의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이데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책에 적힌 것만으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린 나이의 천재 소녀가 스승이자 연인을 향해 느꼈을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마음에 그늘이 졌다,라는 문장 그대로다.
2. 잘돼가? 무엇이든
어느 분야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영화 관련 직업, 그 중에서도 영화 감독은 경쟁이 치열한 직업군이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거대 자본이 필요하고, 거대 자본은 흥행을 보증하는 작품에만 투자할 것이고, 흥행의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지금까지의 결과물을 토대로 점쳐지기 때문이다. <미스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의 글을 모은 책인데, 영화 제목은 들어본 적 있지만 보지 않은 영화들이고, 크게 흥행하지는 못 했지만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영화들인가 보다. 책 초반부에 백인 포비아의 그녀가 벽안의 남편과 만나게 된 이야기도 그렇고, 아래의 메모에서도 감지되는, 힘을 뺀 그녀의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3. 단단한 영어 공부, 내 삶을 위한 외국어 학습의 기본/한국인과 영어
이 책을 읽고는 적잖이 실망했는데, 실망의 이유를 곰곰이 따져보니 저자 때문은 아니다. 저자는 ‘삶을 위한 도구로서의 영어’, ‘즐겁고 신나며 소통의 지평을 넓히는 공부로서 영어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내가 기대했던 건 뭐랄까. 이 책을 읽고는 ‘더 열심히 영어를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이끌어 주길 기대했던 것 같다. 영어공부의 새로운 동력, 영어공부의 색다른 동기부여. 응용언어학자가 들려주는 ‘영어, 쉽게 마스터하는 법’, 그런 것들을 바랬던 것 같다. ‘진짜 네이티브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미국식 백인 발음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거나 ‘완벽한 바이링궐은 신화적 존재’라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그랬다. 실망의 첫번째 이유는 저자의 ‘순수한’ 주장이 내게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다는 데서 비롯됐다.
<Chapter 5. 어휘학습의 원칙들> 같은 경우도 그랬다. 단어를 외울 때 짝꿍단어와 함께 외우라거나, 기본의미와 확장의미를 함께 고려하라,는 주장들은 모두 옳은 이야기이고, 맞는 말씀들이다. 문제는 영어라는 크고도 먼 산을 ‘정복’ 내지 ‘마스터’ 해야만 하는 시간은 너무나 부족하고, 저자가 추천한 방법이 영어를 익히는데 좋은 방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말 ‘가능한’ 방법이냐고 물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강준만 교수는 『한국인과 영어』에서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이미 ‘내부 서열’을 확정하는 도구로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자”고 말했다. 이런 인식에 찬성한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 수 밖에 없어서 영어를 공부해야 함을 인정하는 편이 더 낫다. 영어공부는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필생의 과업이기에,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4. 성부와 성자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나는, 내가 읽는 책들을 다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해할 때도 있겠지만, 이해하지 못할 때가 더 많고, 잘못 이해할 때가 더 많을 거라는 생각도 자주한다. 이를 테면, 이 책의 이런 문장. 나는 이 문장들을 있는 그대로, 이 문장의 의미대로, 저자의 의도대로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 문단을 넘자마자 곧바로 고민하게 된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걸까, 나는 저자의 의도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나는 고병권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고병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의 소개로 만나기로 약속한 마르크스를, 그 마르크스를 만날 수 있을까. 어째서 이 문단은 계속 의문문일까. 마지막 문장까지 의문문이 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러니까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입니다. [김, 199; 강,233] ‘자본가’는 ‘자본’을 연기하는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탈을 쓴 자본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에서 자본가의 주관적 목적은 자본 운동의 객관적 내용과 같습니다. 너무 어렵게 말했나요. 어떤 자본가가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눈에 불을 켜는 것을 <자본>에서는 그 사람의 독특한 성격으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본의 끊임없는 가치증식 운동이 그를 통해 표현된 것뿐이죠. 마르크스의 표현을 쓰자면 자본가란 자본 운동의 ‘의식적 담지자’입니다. [김, 199; 강, 233] (62쪽)
며칠을 앓으며 여러가지를 느꼈다. 거의 7-8년을 감기몸살 등으로 이틀 이상 앓아 누운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7-8년 동안 먹을 감기약을 원없이 먹고 마셨다. 나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기침이 나고 가래가 끓고 머리가 아프니 세상 가장 우울한 사람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의 침공에 쉽게 마음까지 내주고 말았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제일 두려운 건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몸이 아플 때 우울해진다는 걸, 처음 배운 것처럼 다시 알게 됐다. 스스로에 대해, 내 몸에 대해 너무 자신하고 살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렇다고 이제부터 운동을 열심히 하겠다,거나 몸에 좋은 음식을 잘 챙겨 먹겠다,라는 건설적인 결심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야 조금 제정신으로 돌아와 알라딘에 올릴 문장을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하면서 다짐 아닌 다짐을 조그맣게 속삭여 본다. 살금살금 조심하자. 조심하면서 살자. 살금살금 조심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