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한 끼 - 아라비아의 디저트부터 산사의 국수까지, 맛과 믿음의 음식인문학
박경은 지음 / 서해문집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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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이지만 내 종교가 그렇게 내 식생활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순절(四旬節, Lent,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전까지의 40일. 기독교인들은 이 시기 동안 예수의 고난을 기억하기 위해 속죄와 경건의 시간을 보낸다.)에 금식도 잘 하지 않는 나일론 신자여서 그렇긴 하지만. 부활절에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삶은 달걀을 먹는 것 말고는 내 식생활과 내 종교가 관련될 일은 평소에 거의 없다. 하지만 육식을 할 수 없는 불교 승려들이나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는 무슬림들처럼 식생활에서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나와 다른 종교, 다른 문화권인 사람들은 종교 때문에 어떤 것을 먹을 수 있고 어떤 것을 먹을 수 없을까. 종교 덕분에 어떤 음식 문화를 가지게 되었을까. 이런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종교와 다양한 문화권의 음식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 있다. 중동 문화에 관심이 많고 이태원의 터키 제과점에서 파는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중동 이슬람 국가 사람들이 강한 단맛을 좋아하는 이유가 특히 흥미로웠다. 중동의 더위를 이겨내고 금식 기간인 라마단을 지낸 뒤 기력을 빨리 회복하는 데는 단 음식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중동의 디저트들은 단맛이 매우 강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중동의 무슬림들이 단맛을 좋아하는 데는 이런 실용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도 있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맛있는 식사 등 현세에서 즐기는 쾌락이 내세의 낙원에서 누리는 기쁨의 예시라고 여긴다. 화려하고 다양한 디저트는 낙원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확인해 주는 증거다. 디저트를 즐기는 것이 믿음의 증거라는 내용은 코란에도 나와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한 종교가 어떻게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음식 문화에 영향을 미쳤는지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즐거웠다. 지구 반대편 먼 곳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채워져 갔다.



또한 기독교인인 나도 기독교가 사람들의 식생활과 음식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독교와 관련된 음식 이야기 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종교개혁에 버터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15~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는 고기와 유제품이 성욕을 부추긴다고 여겨 성직자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까지 사순절과 기타 금식 기간에 버터를 먹지 못하게 했다. 문제는 1년 중 버터를 먹으면 안 되는 기간이 거의 반 년은 됐다는 것이다. 그나마 올리브가 많이 나는 이탈리아, 스페인 등 남부 유럽에서는 버터보다 올리브 오일을 즐겼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육류와 버터를 주된 식량으로 삼았던 프랑스, 독일 등 중북부 유럽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왕족들과 귀족들, 부자들은 돈을 주고 사순절과 금식 기간에도 버터를 섭취할 수 있는 권리를 샀고, 교회는 버터 섭취권을 판 돈으로 화려한 성당 건물을 지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금식 기간에 정해진 규정을 어겼다가 벌금을 내거나 채찍을 맞거나 투옥되기까지 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독일 지역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에서 금식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나라 중 대부분이 버터를 주된 식량으로 삼았던 북부, 중부 유럽 국가들이었다. 이렇게 버터는 종교 개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으며, 지금도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버터를 많이 먹는 지역에서는 개신교의 세가 강하다. 주 안에서는 다 같은 형제 자매라고 인간의 평등함을 주장하는 종교가, 기본적인 욕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평등에 일조했다는 것이 씁쓸하게 남는다. 그리고 종교만이 일방적으로 인간의 식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식생활 또한 종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 가득 실려 있는 선명하고 화려한 음식 사진들은 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텍스트가 그 음식에 얽힌 교리나 문화를 설명하고 그 음식의 맛을 설명하고 있으면, 이미지는 그 옆에서 실제로 그 음식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면서 낯선 문화의 낯선 음식들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와 닿게 한다.

낯섦을 설렘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경우 낯섦은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자신과 다른 종교, 문화를 가진 상대가 무엇을 먹는지 또는 먹지 않는지에 대해 조롱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이야기한다. 그 낯섦이 배척이 되고 혐오로 번지는 상황이 너무나 많기에 이 책이 서로의 낯섦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 속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음식 문화가 주는 낯섦이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가 아닌, 나를 넘어선 더 넓은 세상을 만나는 설렘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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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놀러 갑니다, 다른 행성으로 - 호기심 많은 행성 여행자를 위한 우주과학 상식
올리비아 코스키.야나 그르세비치 지음, 김소정 옮김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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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도서를 볼 나이는 10년도 더 전에 지났다이 책은 청소년 도서로 분류되어 있고이 책의 원서도 아마존에서 고등 교육 교과서(higher education textbooks)’로 분류되어 있다그런데도 이 책을 계속 읽게 된 건 태양계 여행을 위한 안내서라는 독특한 형식 때문이었다이 책은 기존의 우주과학 책들처럼 태양계 안의 각 행성들에 대한 정보를 그저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그 행성들을 여행한다고 가정하고 그 행성에 가는 방법과 그 행성에서 볼 만한 것할 만한 것 등을 설명한다아직까지 태양계 안에서 인간이 실제로 다녀온 천체는 달밖에 없지만태양계 여행을 하는 상상을 하며 태양계의 천체들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그런 기대감으로 책을 펼쳤다.

 

  지구 안에서의 여행도 준비가 필요한데 그저 가겠다고 마음먹고 다음날 훌쩍 우주여행을 떠날 수는 없을 터. ‘지구를 떠날 준비’ 부분을 읽다 시력은 반드시 양쪽 눈 모두 2.0이어야 한다는 구절에서 좌절했다라식 수술은 무서운데 우주로 떠나려면 꼭 받아야 하는 걸까거기에 14킬로그램짜리 완전 무장을 하고 물에 들어가는 생존 훈련, 25미터 길이 수영장을 쉬지 않고 세 번 왕복할 수 있는 수영 실력하루에 40번씩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는 중력 훈련까지지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주로 나가는데 이쯤은 당연히 준비해 둬야 한다고 치자하지만 본문에서 태양계 여행을 하다 죽거나 다시는 지구로 못 돌아올 수도 있다고 암시하는 구절들이 계속 나타나니저자들은 태양계 여행을 권하는 걸까말리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달 표면에서 바라본 지구. 저자는 "(달 표면에 도착했을 때) 휴가를 떠나기 전에 머물렀던 모든 장소(지구)를 사진 한 장에 담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진 출처: NASA/GSFC/Arizona State University


  하지만 본격적으로 책 속 여행이 시작되면서 태양계 여행은 때려치우고 그냥 지구에서 안전하게 살까 하는 마음은 사라졌다책을 읽으면서 펼쳐지는 태양계 행성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다태양이 수성의 하늘을 한 바퀴 도는 하루는 176일인데 수성이 태양을 공전하는 1년은 88일이니수성에서는 하루가 1년보다 길다는 이야기화성에는 에베레스트보다 3배는 높은 화산이 있어꼭대기까지 등반하려면 한 달은 걸린다는 이야기목성의 허리케인 대적점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 등등내가 옛날 사람이었다면 상상력이 풍부한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했을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화성의 위성 포보스는 중력이 매우 작은 곳이다. 저자들은 포보스에서는 한번 도약하는 것만으로 높이가 830미터나 되는 버즈 할리파 빌딩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며, 높이뛰기가 포보스의 주 종목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저자들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출처: Steve Thomas, Olivia Koski, Jana Grcevich, Penguin Books


  이런 태양계 행성들에 대한 사실에 SF적인 상상을 더해 저자들은 천연덕스럽게 태양계 여행에서 볼 만한 것할 만한 것들을 안내한다달에 있는 호텔에서는 지구가 보이는 방을 달라고 하자든가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갈릴레이 위성(갈릴레이가 1610년에 발견한 4개의 목성 위성들이오에우로파가니메데칼리스토가 갈릴레이 위성에 속한다.) 대신 한적한 레다 위성에서 목성을 관찰하자든가토성의 고리에 캔 얼음으로 우주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자든가수백 년 뒤에나 가능하거나수백 년 뒤에도 가능하지 않은 일들을 마치 지금의 관광객들이 하고 있는 양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데실제로 내가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 유쾌했다그런 상상조차 완전한 허구는 아니고 태양계 행성에 대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거나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상상 속 태양계 여행을 마치고 저자와 독자는 지구로 돌아온다모든 여행은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거니까저자들이 이 태양계 여행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구의 소중함이다태양계 다른 행성들에서 사람이 도무지 살 수 없는 극단적인 더위와 추위를 경험하고 아무런 생명도 없는 풍경을 본 사람이라면지구의 온화한 환경과 온갖 다양한 생물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더욱 더 감동적으로 다가올 것이다이 책 덕분에 우리는 상상의 태양계 여행을 하면서 우리의 시야를 넓힘과 동시에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된다.


P. S.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알지만, 본문 앞의 화보 부분만 컬러로 하고 본문 안의 우주 이미지와 일러스트들은 흑백으로 처리한 것이 아쉽다. 특히 목성의 오로라나 천왕성의 푸르른 표면처럼 그 색채를 직접 확인하고 싶은 이미지들이 흑백인 것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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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톰의 발라드
빅터 라발 지음, 이동현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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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존 소설의 캐릭터와 설정을 다른 작가가 그대로 가져와 만들어낸 2차 창작 소설은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하지만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니고 있고 작품성도 뛰어난 2차 창작 소설도 있다도미니카 출신 작가 진 리스는 『제인 에어』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캐릭터 버사 앙투아네트 메이슨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썼다원작에서 주인공 제인을 위협하는 미치광이로 나오던 버사에게 자기 목소리와 서사가 주어지면서그녀를 파멸로 몰아간 제국주의와 가부장주의의 추악함이 드러난다.

  『블랙 톰의 발라드』도 그런 2차 창작 소설 중 하나이다이 소설은 공포 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미국 소설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레드훅의 공포 」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레드훅의 공포 」는 1920년대한 괴짜 노인이 뉴욕의 레드훅 지역에 있는 집을 사들이고 그곳에 수상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한 형사가 그의 행적을 뒤쫓는 내용의 단편이다문제는 백인 작가인 러브크래프트가 이 작품에서 타 인종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이 소설에서 흑인동양인무슬림들혼혈 인종들은 빈민가 구석구석에 숨어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그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는 것으로 묘사된다.

  흑인 작가인 빅터 라발은 원작에서 어두운 밤 낡은 집의 창문 뒤에 숨어 수상쩍은 웃음을 흘리던 흑인 청년들 중 한 명에게 찰스 토머스 테스터라는 이름과 서사를 부여했다사람들에게 토미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는타 인종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에 시달렸던 러브크래프트의 시선을 걷어내고 보면 악당도 괴물도 아닌 평범한 청년이다그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번 돈으로 늙고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다토미는 딱히 머리가 좋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도 없지만 식비와 주거비가끔 도박을 할 용돈만 있으면 삶에 만족하는 순박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레드훅의 공포 」의 주인공 로버트 수댐이 그의 앞에 나타나면서그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수댐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토미를 발견하고그에게 자신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와서 노래와 연주를 해 주면 500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자신과 아버지의 몇 달치 생활비는 되는 거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토미는 매우 기뻐했지만, 1920년대 당시 흑인이 혼자 백인의 집에 찾아가는 것은 곰과 레슬링을 하러 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토미는 수댐의 집에 찾아가다가 자신을 뒤쫓는 백인 소년들에게 위협을 당한다러브크래프트의 타 인종에 대한 공포가 막연하고 근거 없는 것인 반면토미가 백인들에게서 느끼는 공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토미에게는 백인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그들 앞에서 착하고 순종적인 흑인인 척하는 것이 일상일 정도였다.

  토미가 수댐의 저택에 도착하자수댐은 책으로 가득 쌓인 서재로 그를 안내한다수댐은 토미에게 토미가 살고 있는 할렘이 어떤 지역인지 말한다. “경찰은 치안 유지와 갱생을 단념해 버렸고차라리 그 병든 지역으로부터 외부 세계를 보호하고자 방벽을 세우는 쪽을 택했어.” 그의 이 말은 「레드훅의 공포 」에서 그대로 가져온 구절이다러브크래프트와 수댐에게 할렘은 온갖 비백인과 혼혈 인종들이 들끓어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저지르는 병든 지역이었지만토미에게는 아버지와 따뜻한 집이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제가 여태껏 살던 곳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여기에서 작가가 러브크래프트의 인종 차별적인 시선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뭐 이런 미친 백인놈이 다 있나 생각하던 토미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분명히 뉴욕의 야경이 펼쳐져야 할 창밖으로 바닷속 풍경이 보이는 것이다수댐은 대양의 해저에 한 왕이 잠들어 있고그가 잠에서 깨어나 돌아오면 토미의 인종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비참함은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하지만 잠든 왕이 깨어나도록 도운 자신들에게는 큰 보상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하룻밤 동안 상상도 못할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할렘으로 돌아온 토미는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자신들이 추적하던 수댐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토미를 의심하고 추적하던 백인 사립탐정 하워드가토미의 집을 불시 검문하다 그의 아버지가 총을 들고 있는 것으로 잘못 보고 총을 쏜 것이다토미의 아버지는 그저 기타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노인에게 탄창이 다 빌 때까지 총을 쏴 놓고도하워드는 자신이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그는 토미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얼어붙어 버린 토미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는다며, 흑인들은 개미나 벌 같이 감정이 없는 존재라고 경멸한다하워드와 함께 수댐의 행적을 쫓던 백인 형사 말론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하워드의 악행을 방관하고토미에게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흑인 청년 한 명이 백인들의 폭력에 복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그랬기에 토미는 스스로 수댐의 부하가 되어 그가 외계 종족에서 받은 무시무시한 힘을 얻는다얼마 되지 않아 한 흑인이 피에 젖은 기타를 들고 다니며 수댐의 부관 노릇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뉴욕에 퍼진다순박한 청년 토미에서 무시무시한 범죄자 블랙 톰이 된 그는 수댐의 충성스러운 종 노릇을 하다결정적인 순간에 백인들에게 복수를 한다그를 자기 집에 붙잡아둬서 아버지를 지키지 못하게 한 수댐도죄 없는 아버지를 잔인하게 죽인 하워드도 그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한다모든 일을 방관하기만 했던 말론은 눈꺼풀이 도려내져다시는 자신이 외면했던 것들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게 된다그리고 토미는 신의 실패작인 인류 전체를 잠든 왕으로 불리는 외계 신과 그 일족에게 넘겨버린다.

  복수를 끝낸 토미에게 남은 것은 허무와 슬픔뿐이다복수를 마친 뒤 그는 절친한 친구 벅아이를 찾아간다온몸이 피로 물든 끔찍한 토미의 모습을 보고 무서운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면서도벅아이는 그를 여전히 예전의 토미로 대한다그러나 토미는 결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예전에 누렸던 평범한 행복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다토미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벅아이에게 말한 뒤 창문에서 뛰어내린다더 이상 평범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토미의 모습에서,「레드훅의 공포 」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약자의 입장에 서 본 사람만이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슬픔이다.

  「레드훅의 공포 」는 타 인종에 대한 편견과 혐오로 뒤범벅이 되어 있고서사와 대화도 빈약한 졸작이다빅터 라발은 원작에서 그저 배경으로 그려졌던 인물에게 그만의 이름과 서사를 부여하면서러브크래프트의 타 인종에 대한 공포가 환상에 불과하고 그 타 인종 또한 피와 살감정이 있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단순히 타 인종과 미지의 외계에 대한 공포만을 그린 원작과 달리『블랙 톰의 발라드』는 늘 폭력과 죽음의 공포에 노출되어 있었던 약자들의 슬픔을 담고 있다. 1920년대를 살아간 백인 러브크래프트는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슬픔이다이런 점에서 『블랙 톰의 발라드』는 원작을 넘어서서 원작이 담아내지 못했던 것들을 담아낸 훌륭한 재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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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
박찬효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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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니는 말괄량이>(1961) 스포일러 포함


  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남자 상사와 남자 아르바이트생들이 내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지금은 딱히 성차별이라는 게 없지 않나요오히려 여자들한테 더 유리한 세상이잖아요?” 나는 이렇게 되물었어야 했다면접 볼 때 결혼할 나이인데 앞으로 결혼할 계획 있나요?”라는 질문 받아본 적 있어요집 앞 골목에서 갑자기 모르는 남자한테 끌려가서 강간당할 뻔한 적 있어요글을 쓸 때 조금이라도 페미니즘 성향이 드러나면 악플을 받을까 두려워서 자기 자신을 검열해 본 적 있어요하지만 그때 나는 뜻하지 않은 질문에 당황해 논리적으로 답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몇 마디밖에 하지 못했다.

 

한국의 가족과 여성혐오, 1950~2020는 내가 정확히 답하지 못했던 그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한다표면적으로는 여권 신장이 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경쟁 상대가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미디어에서는 그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고그리고 2000년대 이후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가 사실은 이전 시기부터 지속되어 왔던 것이고각 시기마다 국가가 가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가족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져 왔다고 주장한다저자는 이 책에서 1950년대부터 2020년 현재까지 신문잡지영화드라마 등의 미디어에 이러한 여성혐오가 어떻게 반영되어 왔는지 추적한다.


  1950, 60년대의 한국 영화에도 자기주장이 강해 남성을 압도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하지만 그녀들은 실질적으로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여성상을 상상한 존재에 불과했기에그저 과장되고 희화화된 가상의 캐릭터로 남았다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해 실질적으로 가부장제 질서를 흔들 가능성이 있는 여대생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사치스러우며 정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1950, 60년대 미디어에 나타났다똑같이 고향을 떠나 먼 타지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공부하는데도남자 대학생들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반면 여대생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치정 사건에 휘말리는 부정적인 모습이 부각되었다기혼 여성은 사회 활동을 해도 가정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해야 했다부업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는 것은 여러 신문 기사들에서 장려되었지만기혼 여성이 자아실현을 위해 사회 활동을 해야 한다는 언급은 당시의 신문 기사들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가정의 번영이 곧 기혼 여성의 자아실현으로 여겨졌으며사회에서 명성을 드날릴 만한 재능을 갖고 있어도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활약하는 것보다는 주부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 더 중요시되었다.


  1980, 90년대에는 여성에게 불리했던 법들이 개정되는 등 표면상으로는 여권이 신장되는 듯했지만모든 사회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가부장 권위의 추락과 여권 신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경제력과 도덕성을 모두 갖추고 가족을 모범적으로 이끄는 가부장은 현실에서 존재하기 어려웠기에실제로 모범적인 가장이 되기보다는 가족 제도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는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가부장제라는 신화를 지키려고 했다사회에 진출해 남성들의 경쟁자가 될 여대생에게는 학업을 소홀히 하고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추구한다는 편견이 씌워졌고이혼녀는 과거의 여성들처럼 인내하지 않고 이기적인 이유로 이혼을 하고자녀들도 돌보지 않으며 성적으로 문란한 이미지로 미디어에서 그려졌다사회 활동을 하려는 여자들을 가정에 묶어두려는 전략도 나타났다. 1990년대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여주인공 박지은(하희라)은 대학원에 진학할 정도로 공부 욕심도 많고 당찬 여성이었지만남주인공와 사랑에 빠지면서 공부를 중단하고 모범적인 전업주부가 된다딸의 재능을 알고 딸이 사회 활동을 할 것을 기대했던 여주인공의 어머니(윤여정)가 결혼을 말리며 하는 말은 2020년인 지금에도 와 닿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절절하다.

 

제발 넌 공부해공부해서 엄마가 못 가진 또 하나의 널 확실하게 빛내면서 살란 말이야나처럼 결혼이란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져서 나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이렇게 되지 말고엄마 친구들 지금 사회적으로 한다 하는 친구들 더러 있다걔들 만나면 다르다빛이 나후광 같은 게 있단 말이야자신 있고 당당하고엄만 그런 친구들 만나면 참 비참해져아는 게 살림밖에 없으니까화제도 궁색하고자신도 없고엄마 죽고 싶어너 그렇게 되고 싶어?”

 

그러자 여주인공은 이렇게 대답한다.

 

사랑하는 사람 열심히 뒷수발해 주는 거 얼마나 아름다워사회활동이 반드시 더 가치가 있는 건 아니잖아내 가정 하나 잘 꾸리는 게 가장 근본적인 사회 기여국가 기여야혼신을 다해서 어른 모시고남편 비뚜로 안 나가게 내조하고아이들 문제 안 만들고그게 얼마나 가치 있고 아름다워?”

 

행복한 결혼이 여성에게 진정한 자아실현이며주부로서의 헌신이 무엇보다 위대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각각 약사와 모델이라는 직업을 통해 경제력을 갖추고 경력을 쌓아 나가던 다른 여성 캐릭터들도결혼 전에는 자기중심적인 철부지였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인격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이렇게 신세대에 속하며 학력이 높거나 경제력이 있는 여성들조차 가족 제도로 포섭하려는 모습이 당시 미디어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남성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알파걸따뜻한 모성과 사회적 능력을 모두 갖춘 워킹맘이 언론 보도에 자주 등장하며, 2010년대 이후로는 국가 차원에서 여성의 경력 단절 방지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언뜻 보면 국가가 여성의 활발한 사회활동을 지원하면서 성 평등을 실현하려는 것 같지만더 복잡한 맥락이 숨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지금까지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면서 아버지의 경제력만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려워져가족 제도를 지탱하는 데 여성의 경제력이 필요하게 되었다문제는 지금도 부부의 가사 분담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직장 일과 가정 일을 병행해야 하는 기혼 여성이 남성만큼 자아실현을 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공론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이 경쟁상대로 떠오르자 20대 남성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반페미니즘 정서를 갖게 되었다그러나 사실상 군대를 다녀온 학점 3.5점인 남자와 학점이 4.0인 여자 중 취업이 더 잘 되는 것은 남자이고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한 지위에 놓인다한국은 성별 임금 격차가 OECD 국가 중 가장 크고재력과 권력을 놓고 사회 최상층에서 싸우는 경쟁은 남성과 여성 사이가 아니라 주로 같은 남성들 사이에서 일어난다그런데도 미디어에서는 성공한 전문직 기혼 여성의 모습이 부각되고 여학생의 취업이 쉬운 것으로 왜곡되며전업주부가 남편의 경제력에 기생하는 존재로 그려져남성의 적이 여성이라고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저자는 더 나아가 여성 혐오가 남성과 여성 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여성 안에서의 갈등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그 어느 때보다 대학 진학취업에서의 경쟁이 심해지고 경제적 문제로 결혼과 육아가 힘들어진 지금가정을 지탱하고 더 나아가 자식들을 통해 더 나은 사회적 지위로 올라가려는 모성 경쟁이 심해질 것이다여성혐오의 최종 도착지는 여성 간의 갈등과 경쟁의 심화이며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가부장제 질서가 유지될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개인은 각 시대의 사회 질서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국가는 그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며 미디어는 그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이용되어 현실을 왜곡하곤 한다아버지어머니아내남편여대생전업주부취업주부 등 다양한 존재들이 각 시기의 상황에 따라 특정한 역할을 요구받아 왔다우리가 누구여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규정하는 사회 질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고신자유주의 시대인 지금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하지만 나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며나보다 우위에 서서 내 밥그릇을 빼앗는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분노와 혐오를 쏟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평등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그것이 저자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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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
하현 지음 / 빌리버튼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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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는 내게 외국어라기보다 생존 수단이다취업과 재취업을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있어야 되는데 토익토플텝스, G텔프 등 각종 영어 능력 시험들은 유효 기간이 2년밖에 되지 않는다싫어도 2년에 한 번씩은 영어 시험을 봐야 하는 나로서는 영어 공부가 의무였기에낯선 언어를 새롭게 배우는 설렘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런 설렘을 느끼게 해 준 언어는 프랑스어였다대학원 때 불문과 교수님의 조교로 일하게 되면서 프랑스어를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학부에서 진행되는 교양 프랑스어 수업을 청강했다막상 조교로 일하고 보니 프랑스어가 그렇게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예전부터 호기심과 호감을 느끼고 있던 언어였기 때문에청강을 마치고 나서도 독학을 했다문법 위주로 독학해 말하기와 듣기는 잘 못하지만 프랑스어 텍스트를 어느 정도 독해할 수는 있게 되었다그 덕분에 예전이라면 그냥 까만 건 글씨요하얀 건 종이였을 각종 프랑스어 텍스트들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기쁨이 생겼다내가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더 넓어졌다는 기쁨이었다.

 

  ‘낯선 언어를 배우면서 만난 의외의 기쁨을 담았다기에,어쩌다 보니 스페인어였습니다도 내가 느낀 것 같은 기쁨을 이야기하는 책인 줄 알았다읽어 보니 이런 기쁨이 나오기는 한다저자는 길에서 지나쳤던 작은 카페의 이름이 스페인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TV에 나오는 스페인어권 사람들의 말에서 아는 단어가 들릴 때배움의 결실을 확인하는 작은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궁금해 하고 기대했던 스페인어와 스페인어권 문화에 대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rr’은 그냥 ‘r’로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혀를 굴려서 ㄹㄹㄹㄹ로 발음해야 한다는 것스페인어에서 의무를 나타내는 표현에는 개인의 의무를 말하는 것과 공공의 의무를 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Mi amor(내 사랑)’ ‘Mi cielo(내 하늘)’, ‘Mi vida(내 생명)’, ‘Mi tesoro(내 보물)’ 같은 미사여구로 연인을 부른다는 점에서 스페인의 정열이 느껴지기도 했다스페인에서는 소울메이트를 ‘Media naranja(오렌지 반 쪽)’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직관적으로 와 닿는 사랑스러운 표현이라고 느꼈다.

 

  같은 라틴 계열 언어권이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프랑스어와 비슷한 점들이 많아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일반적인 것에 붙는 부정관사 ‘a/an’과 특정한 것에 붙는 정관사 ‘the’, 두 개의 관사만 알면 되는 영어와 달리스페인어와 프랑스어 모두 여성형과 남성형단수형과 복수형으로 관사가 나뉜다그리고 두 언어 모두 영어와 달리 반말과 존댓말이 있고반말과 존댓말에 해당하는 인칭과 동사 형태가 따로 있다또한 스페인어에도 프랑스어에도 그냥 나는 옷을 입는다/샤워한다/면도를 한다고 해도 될 텐데 직역하자면 나 자신이 입게 한다/샤워하게 한다/면도를 하게 한다는 재귀의 개념이 있다책을 읽으면서 스페인어를 제대로 공부한다면 프랑스어에서 공부한 문법 개념들이 꽤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 중 어떤 이야기를 해도 몇 발자국만 나아가고 만다는 것이다이 책에 실린 주제들은 더 깊이 파고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주제들이다스페인어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기본형은 남성 단수형인데왜 여성은 기본형이 될 수 없는가 하는 의문사용자가 수천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으로서 영어나 스페인어 같이 전 세계 수십 개 국가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쓰는 강한 나라의 말이 모국어인 사람들에게 느끼는 부러움. ‘존재와 상태를 나타내는 be 동사가 따로 있다는 것정말 흥미롭고 더 깊게 풀어낼 여지가 많은 주제들인데그에 대해 사유를 하기보다는 상념들을 늘어놓는 데 그친다. 좋은 에세이집은 책 한 권을 관통하는 주제에 집중하고, 책에 실려 있는 각 글마다 주제가 다르다면 에세이집이 아니라 잡문집이나 일기라고 한다. 이 책은 작가의 머릿속을 흘러가는 상념들을 풀어놔서인지 스페인어나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외에 너무 많은 것들을 쏟아 놓아 '스페인어' 또는 '스페인어를 배우는 나'에 대한 에세이집이라기보다는 잡문집이나 일기장에 가깝다. 

 


  이 책이 '스페인어'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작가가 스페인어에 대해 호기심은 있지만 열의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작가는 그저 배워 본 적이 없는 낯선 언어이고가까운 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언어가 스페인어여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기로 선택했다함께 학원을 다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스페인어권에 여행을 가기나 유학을 갈 생각도 없고스페인어를 아주 잘 하겠다는 생각도 없다그래서 복잡한 동사 변화나 시제 같은 스페인어의 어려운 부분을 공부하기 싫어한다학원에 가다 쓰러지기까지 해 자체 여름방학을 한 달간 가진다몸에 무리가 가서 쉰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방학 동안 스페인어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아 남들에게 뒤쳐져 의욕도 잃어가는 심정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게다가 딱히 아프거나 중요한 일이 있던 것도 아닌데 마지막 수업도 가지 않는다마지막 수업을 가지 않았다는 말 뒤에 역시 놀러가지 말고 학원에 갔어야 하는데...’라는 문장이 붙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어린 아들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마지막 외국어 수업에 참석하지 못한 한 영화 주인공을 생각하면 이런 태도가 무책임하게 느껴지기는 한다내가 스페인어라면 작가에게 너 나한테 관심이 있기는 해?”라고 물었을 것이다. 작가 본인도 이야기한다. 스페인어를 사랑하지 않고 약간의 흥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사랑은 노력 밖의 영역이라고. 

 

  물론 작가의 말대로 배움이 숭고할 필요는 없고외국어를 배우는 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지도 않다라틴어 전문가인 한동일 교수도 라틴어 수업에서 있어 보이려고 라틴어를 공부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했고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작가는 이 책에서 스페인어 자체보다는 스페인어를 공부하면서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고 궁금한 것은 마음껏 질문할 수 있게’ , ‘조금 더 뻔뻔해지고 자유로워진’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해서 성과를 얻어내려는 일에 지친 사람들은 별다른 열의 없이 일상에 작은 균열을 내려는 마음에 공감하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고 위로를 얻고꼭 스페인어가 아니더라도 사소한 것에 새롭게 도전할지도 모른다그렇게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는 것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ㅇㅇ해도 괜찮아’ 류의 에세이는 이미 충분히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아그저 일상을 좀 더 새롭게 만들면 돼그래도 어느 정도는 내게 남는 게 있을 거야이런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열정을 강요하는 꼰대도 아니다누구나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니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좋다하지만 글 쓰는 사람이라면 남들과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생각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내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을 놀랍도록 날카롭게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포착하는 글을 읽고 싶다. ‘내가 이래서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 읽는 사람이구나를 실감하게 하는 글을 만나고 싶다.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이 책으로 쓰기로 한 소재나 주제에 대해 호기심 이상의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자신이 정말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쓸 수 있는 소재를 골라야 했다. 애정이나 열정이 아니라 증오나 혐오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더라도 한 권의 책으로 만들 만큼 강렬한 감정과 집중력을 끌어내는 소재여야 했다. 자신에게 한 책을 관통하는 열정과 애정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소재를 골랐으니, 그 소재를 깊게 파고 드는 대신 자신이 일상에서 느끼는 상념들과 뒤섞인 잡문집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독자인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쉽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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